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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 6장 36절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의 특징 24-자비를 베푸는 삶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은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을 구원하시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3절에서도 보면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자비는 국어 사전에서의 의미는 크게 사랑하고 가엽게 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 사전에서의 자비는 '깊이 사랑하다, 긍휼히 여기다, 자비심을 갖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경에서 자비로움을 잘 나타내는 예화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길은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 곳곳에 강도의 출몰이 잦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위험을 무릎쓰고 꼭 가야하는 때가 있습니다. 강도를 만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인생이 사람의 뜻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이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길에 강도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무자비한 강도는 이 사람을 심하게 두드려 패서 거의 죽을 정도로 만들어 놓고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지고 가버렸습니다. 그가 고통중에서 제사장의 복장을 입은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기를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가워하면서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그를 보더니 멀찍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하며,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를 그대로 버려두고 갔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저 사람은 도와주겠지 하면서 있는 힘을 다해 도와달라고 부를짖습니다. 그의 처절한 부르짖음을 들은 레위인은 그냥 지나쳐 지나갔습니다. 크게 실망한 이 사람은 살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크게 낙심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자신도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이나 개돼지처럼 혐오스럽게 쳐다보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자기의 목숨이 꺼져가는 상황에서 용기를 내어 도와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가까이 다가와 나귀에서 내려 상처를 살피더니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소독하고는 자기의 나귀에 태워 숙박을 하는 여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의사를 불러 치료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떠날 때 여관주인에게 하는 말을 강도 만났던 사람은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치료비와 숙박비와 앞으로 이 사람에게 들어갈 비용이 여기 있으니 받으시고 혹시 모자란다면 후에 다시 돌아왔을 때 계산해주겠소”
강도를 만났던 이 사람은 이제까지 자기의 이웃은 자기 민족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중에 자기가 존경스럽게 생각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특별히 더 귀한 이웃중의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위태할 때에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귀하게 생각했고 이웃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람들은 자기가 위태할 때 이웃이 될만한 자비가 없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이웃은 자기가 혐오하고 욕하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에게 자비로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것은 전적인 자비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강도만난 사람을 돕지 않을 여러 가지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날 그 시간에 처음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모르는 사이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은 쉽지 않은 행동입니다. 두 번째는 강도만난 사람이 평소에 자기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고소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 민족을 원수같이 생각하고 또 개돼지 취급을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자기 민족을 어떻게 생각했든지 간에 상관없이 자비를 베풀며 도와주었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이 도움을 준 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가능성도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두하고 그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강도만난 사람의 입장이 되어 자비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기는 여행중이었습니다. 이런 일에 끼어드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자기의 여행을 망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섯 번째는 자신이 이렇게 자비를 베풀며 도움을 준다할 지라도 감사인사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고, 또한 이 강도만난 사람이 진정으로 고마워할지 여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자비를 베풀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만난 자에게 베푼 자비는 일회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우선 자기가 가지고 있던 포도주와 기름을 상처에 발라 소독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귀에 그를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여관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치료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와서 내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비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여러분의 자비는 여러분 안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며,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강도만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국가나 다른 어떤 특정한 사람들로부터 불이익을 받거나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들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억압받고 있으며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은혜와 진리가 그 속에서 역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의 열기를 내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우리 교회에 나오시던 강선홍집사님이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이 옆집에서 떨어진 소나무 잎사귀를 쓸다가 갑자기 쓰러지셨는데 쓰러지면서 허벅지 위쪽의 뼈가 그대로 부러졌습니다. 그 고통 중에서 자기를 도와줄 사람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박금자 성도님의 며느리가 보여서 도와달라고 불렀지만 듣지 못하고 차 운전석에 탔고, 조금 후에 뒤따라 나온 박금자 성도님도 보여서 큰 소리를 도와달라고 불렀지만 그 역시 듣지 못하고 며느리의 차를 타고 내려가는 데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고 가버렸습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차 안에서 차 소리 때문에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랐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래도 저에게 연락을 하기 위해 그 부러진 다리를 끌고 앉은 상태로 몸을 끌고 집 앞까지 가셨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엉덩이의 피부가 더 벗겨졌습니다. 첫 번째 병원에서는 그것을 발견도 못했습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고통스러워서 어떻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병원인 대학병원에서는 딸이 그것을 보고 간호사에게 이야기를 했는데 알았다고 해놓고는 자기 스케줄을 따라 병원을 다 돌고는 그 들은 말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로인해 그 상처가 곪았는데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야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매우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박금자성도님이 며느리의 차를 타고 지나가고 나서 집 앞으로 다친 몸을 끌고 갔을 때 옆집 한상봉선생님의 아내가 집 앞으로 나와서 볼일을 보기 위에 왔다갔다하는 것을 본 강선홍집사님은 있는 힘을 다해 그 아주머니를 불렀습니다. 그 두 집 사이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사이가 안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강선홍집사님에게로 가서 무슨 일인가를 물었고, 강선홍집사님의 말을 들은 아주머니는 저에게 한 걸음에 달려와서 이야기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님 댁으로 가서 119 소방대에 연락을 했습니다. 그래서 구급차가 와서 집사님을 신제일 병원 응급실로 모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집사님의 딸들에게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병원인 신제일 병원에서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그 다음주 화요일이나 되어야 수술을 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도 자세한 것은 전문의가 보고 진단한 후에 결정을 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전문의가 본 후에 다음주 화요일에 수술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날이 8월 31일인 목요일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다음날이 금요일이고 그 다음날은 토요일과 주일에는 수술을 하지 않을 것같아서 빨리 수술을 해야할 것같았습니다. 수술을 오늘이나 내일 해야할 것같은데 다음주 화요일에 해야한다고 하니까 안되겠다 싶어 딸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딸들끼리 서로 전화를 하고 나서 대전으로 모시겠다고 결정을 하고 딸들의 전화를 받고 온 배다른 남동생에게 해야할 일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신제일병원에서는 부러진 다리를 우선 기구를 써서 바로 맞추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선홍집사님은 대전으로 가서 수술을 받으셨지만 다른 부분들이 악화되면서 돌아가시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평소에 사이가 안좋았던 옆집이 그 순간에 도움을 주었고, 평소에 신경도 안썼던 서자가 병원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처리했던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비록 집사님이 정확히 3개월 만에 돌아가셨고 제가 집사님을 심방한지 정확히 한달만에 돌아가시기는 했지만 옆집 아주머니와 서자가 행했던 일들은 조그만 자비의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지 않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분들이 가장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게 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들은 여러분들이 어떤 위기에 처했을 때 자비를 베풀까요? 반대로 다른 사람의 가장 위기의 순간을 만났을 때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아 거듭난 사람, 그리고 항상 은혜와 진리 속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어떤 행동을 할지 알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위기를 만난 사람들을 보았을 때 여러분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에게서는 자비로운 행동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도 되시는데 그분의 자비로운 성품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있다면 말입니다. 성령은 여러분들을 자비를 베풀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로 하여금 기꺼이 고난 당하고 고통 당하는 자들을 돕게 하십니다.
성경은 자비에 대하여 다양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창세기 19장 16절을 보면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가 너무나 타락해서 그 성들을 멸하려고 하시는데 문제는 소돔 성에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롯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소돔성을 일부러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롯과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나오려고 하시니까 이제까지 일평생 고생하면서 모았던 모든 재산들이 있는 소돔성을 떠나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롯과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시간은 급한데 뭐하나라도 가져가려고 머뭇거리는 롯의 가정을 본 천사들은 즉시 손을 내밀어 롯의 가족들을 잡아 성밖으로 이끌어 냈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롯에게 자비를 더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의 시간에는 아무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는 이미 늦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밖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구원할 자들에게 강하게 임합니다. 여러분들이 수많은 간증들을 들어보셨겠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자비가 그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간증하지 않습니까?
조금 전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에 대하여 들으셨지만 구약 성경 출애굽기 22장 25-27절을 보면 거기서도 이웃에 대한 자비를 베푸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가난한 사람이 이웃에게 옷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렸습니다. 그 돈을 빌린 사람은 너무나 가난해서 담보로 맡길 물건이 없어서 그나마 값이 나가는 자기의 겉옷을 담보물건으로 내걸고 돈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밤과 낮의 기온차가 심하게 납니다. 낮에 옷을 벗어 놓고 돈을 빌려갔으니 밤에 추위를 견뎌내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하나님은 이때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그 사람의 옷을 다시 돌려보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알몸으로 밤을 보내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들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설사 그 가난한 사람이 돈을 값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의 생명은 빌려준 돈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자비를 베풀어 옷을 해가 지기 전에 가져다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더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의 생명이 귀하다고 여겨진다면 다른 사람의 생명 역시 귀하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알 때에야 진정으로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움을 당하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온전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비는 십자가에서 잘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고통중 가장 큰 고통을 천천히 죽어가면서 겪으셨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예수님은 자신의 자비로움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을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라시기 전에 수많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이 예수님께 고침을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영접하셨으며, 고쳐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원리를 따라 로마서 12장 1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너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기 때문에 그 자비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되어 자비를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신명기 4장 3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로우심으로 인하여 여러분들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멸하지 아니하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들에게 대하여 성경에 약속하신 그 약속들을 잊지 않고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이사야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54장 8절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고 이방인들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시고 또 보내시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듣기를 거부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들의 배만 채웠으며, 도와야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그들의 조금 남은 것들을 빼앗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심하게 박해하거나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화가 나셨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진노로 “너희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하시면서 자신의 얼굴을 이스라엘에게서 잠시 가리셨습니다. 그러자 이방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이닥쳐서 잔인한 강도처럼 죽이고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자 그들이 그렇게도 추구했던 부귀영화가 단 한순간에 날라가 버렸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행한 것처럼 하나님은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 탈취를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부짖으면서 회개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않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셨지만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렸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죄는 용서하시지만 내리기로 하신 벌을 거두지 않으시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자비로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복은 바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비로우신 하니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왜 여러분들에게 복이 되는 지 알게 됩니다. 바로 그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세상을 떠돌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대하여 잠깐 진노하시지만 자비는 영원히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비를 받은 여러분들을 향해 “이제는 네가 세상에 나의 자비로움을 알려야할 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누가복음 6장 36절에서 하신 말씀처럼 아버지가 자비로우심과 같이 여러분 역시 동일하게 자비로워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자비로웠던 것처럼 말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자비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당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발을 씻어주고 있습니다.
최근에 그리스도인 연예인인 김혜자씨 이야기가 기사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22년 전 후원했던 방글라데시 아동이 김혜자의 백상예술대상 대상 수상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월드비전 측으로 보냈다고 5월3일 밝혔습니다.
방글라데시에 거주하는 33세인 제임스 라나 바이다야(James Rana Baidaya, 33세)는 1997년 월드비전을 통해 배우 김혜자와 연결되어 약 4년간 후원 받았습니다. 당시 12살 소년이었던 제임스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만 겨우 마쳤지만, 김혜자의 후원으로 중등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방글라데시 국립 쿨나(Khulna) 대학, 한국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국제NGO 티어펀드(TearFund) 방글라데시 사무소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임스는 지난 5월1일 열린 제55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자신의 후원자인 김혜자가 TV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축하 영상을 찍어 월드비전 측에 전달했습니다.
영상 속에서 제임스는 “후원자님이 상을 받는 장면을 봤는데, 후원자님의 연설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후원자님을 화면으로 보겠지만, 저는 후원자님이 어떤 동기로 가난한 사람을 돕는지 잘 알고 있다”며 “후원자님 덕분에 제 삶은 완전히 바뀌었고, 현재는 저 또한 다른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며 김혜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 사람의 축하 메시지를 영상으로 확인한 김혜자는 “그간 봉사를 하며 제가 베푼 것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많은 위안을 받았는데, 이렇게 직접 축하 인사까지 보내주어 너무 고맙다”며 “앞으로도 이 아이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겠다”고 전했습니다. 한 아이를 향해 베푼 사랑의 자비가 그 아이로 하여금 많은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와 진리를 안에서 여러분들의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사랑으로 섬겨야할 때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각박해지고 자기만 알며 돈을 벌고 자기만을 위해 쓰기에 바빠도 그리스도인인 여러분들이 할 일은 진정으로 여러분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할 때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빛이 여러분에게서 그들에게도 들어가 그들의 마음을 비추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찾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춣애굽기 34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이렇게 표현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가 하나님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호와라고 하셨고 자비롭다고 하셨고 은혜로우며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비로우심 때문에 죄악 가운데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여러분들을 위하여 아들을 대신 십자가에 달리게 하시고 여러분들의 죄를 아들이 담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을 행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입니다.
여러분 자비는 자기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서 자비를 베풀수는 없습니다. 분명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기 위해서는 주머니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구제는 하나님의 자비를 그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구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이 자비로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보이고 싶어 하십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세밀히 살피고 불쌍히 여기면서 구제를 해야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무조건 나누면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방식대로 도움을 줘놓고는 상대방의 반응이 고마워하지 않는 것같으면 속상해 하거나 화를 내기도 합니다. 물론 상대방 앞에서는 그것을 표현하지는 않지만 자기 마음은 “아니 내가 그렇게 도와주었으면 고마워해야지 전혀 고마워할 줄도 몰라”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비로운 마음의 구제는 이웃을 알고 이웃의 필요를 압니다. 다시 말하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서 자비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구제는 자비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자비의 뜻을 말씀드린 것처럼 '깊이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자비심을 갖고’ 구체를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자비를 여러분들을 통해서 행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은혜와 진리 안에서의 삶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여러분들이 은혜와 진리로 인해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갈 때 진정한 자비가 여러분들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또 이웃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돕는 그런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실 수 있을 것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참 자녀들임을 드러낼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