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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묵상글 (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마음의 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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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마음의 귀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셔서 바오로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해주셨다고 얘기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을까요?
그럴 리 없지 않겠습니까?
여러 여자들이 같이 듣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리디아의 마음만 열어주셨겠냐는 말입니다.
여기서 생각나는 것이 바로 묵시록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문 앞까지 오셔서 문을 두드린다는 말씀 말입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문만 두드리시지 문을 여는 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하시는 말씀으로서
여기서 주님은 신자들이 뜨겁지도 차지도 않다고 나무라시며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라는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마음의 귀는 있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무시하고 억지로 여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기는 하시는데 그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귀 또는 영적인 마음의 귀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귀와 마음의 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육신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귀이고,
마음의 귀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귀는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말에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의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느냐 그 말입니다.
저는 마음의 귀, 관심을 잠자는 귀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지금 우리의 귀는 잠자고 있다는 말입니다.
잠자고 있는 마음의 귀에 성령께서는 계속 속삭이십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계속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겁니다.
실바람 소리로도 빗소리로도 청천벽력같은 소리로도.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처음에는 전혀 듣지 못하다가
또 두드리시면 어렴풋이 듣다가 계속 두드리시면
차츰 마음의 귀가 열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잠이 얼마나 깊이 들었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이나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작은 소리에도 그리고 살짝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발딱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깊이 잠든 사람의 귀를 깨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두드림과 더 강한 두드림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깊이 잠들어있는 사람인지,
나는 얼마나 정신이 바짝 들어있는 사람인지,
프란치스코의 말대로라면 기도와 헌신의 영이 있는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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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적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러한 때가 오면 내가 한 말을 기억하라고 너희에게 이렇게 미리 말해 두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참으로 무력해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보내신 성령께서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가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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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정치를 하려면, '1.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한다. 2. 얼굴에 철판 깔고 쇼를 잘해야 한다. 3. 소신이 없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정치인이 바른길을 걷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한 남성이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의무와 신앙 사이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하면 더 단단하게 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리스도인은 정치의 세계에서 공동선을 위해 일해야 할 의무가 있다.” 면서 “부패로 얼룩진 정치의 한가운데서 손과 마음을 더럽히지 않기란 힘들다.” 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죄를 짓지 않게 해달라고 청하고, 만일 손이 더러워졌다면 용서를 빌면 된다.” 면서 낙심하지 말고 계속해서 정치에 참여하기를 당부했습니다. 이어 “가톨릭 신자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공동선을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뛰어난 형태의 자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온갖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현실에 공감한 교황은 “매일 공동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일종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정치인이 많아지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약육강식’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진리를 추구합니다. 몸이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끊임없이 선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결정적으로 선과 진리에 어긋나는 것에는, 반대를 분명히 합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에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어떻게든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은 믿음의 수련기관이고, 그동안 단순히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아픔 또한 겪어 내야 합니다. 이 시간 동안 우리는 홀로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을 처형한 세상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먼저 시련과 박해의 시간에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시련과 고통이 생기면 마음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을 아시기에 당신의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강화시켜 주시고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리스도를 증언할 힘을 주셨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 주시고 견고하게 해 주시며 우리의 마음을 지켜주실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모든 사람이 성령의 손길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과 그리스도의 평화를 간직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흔들림 없는 참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이들은 그분을 추구합니다. 그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당신 입김으로 그들에게 생기를 주시고 도움을 주십니다”(성 바실리오).
사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시련과 고통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습니다”(아빌라의 성 요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이 벌이 아니고 오히려 은총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이겨 내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이 시간 위로의 성령을 통해 우리의 삶이 쇄신되고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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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음식은 아마도 ‘라면’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많은 이가 좋아하는 이 라면을 끓일 때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는 라면을 먹을 수 있을까요?
1) 면을 먼저 넣는다.
2) 스프를 먼저 넣는다.
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모두 2번 스프를 먼저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스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 점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데, 스프를 미리 넣으면 100도 이상에서 끓게 됩니다. 더 높은 온도에서 면이 익으니 더 쫄깃해진다고 주장합니다. 충분히 일리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라면 봉지를 보면 조리법이 나옵니다. 그 조리법과 분명히 다릅니다. 조리법에는 ‘끓는 물에 면과 스프를 넣는다.’라거나 ‘면을 넣고 스프를 넣는다.’입니다.
이 라면을 만든 사람은 이 라면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라면 전문가가 적은 조리법이 최고로 맛있게 먹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런데도 전문가의 말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솔직히 그 차이점을 잘 모르겠습니다. 미식가가 아닌 다음에야 그 맛의 차이점을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익숙한 조리법이 최고인 것처럼 각자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가장 맛있게 먹을 때는 ‘배고플 때’가 아닐까요? 간절할 때가 늘 최고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느낄 때는 언제였을까요?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이루게 되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렵고 힘든 간절함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주님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으며,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이 오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반응을 미리 이야기해주십니다. 세상은 주님 따르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제자들을 박해하는 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행동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이라며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박해의 순간은 정말로 고통스럽고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에게 오신 보호자, 진리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과 함께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할 때, 세상의 박해 안에서도 주님과 함께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간절함이 필요한 지금이 아닐까요? 세상의 편하고 쉬운 것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간절하게 찾고 또 함께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지만 참 행복의 길로 인도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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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m 라틴어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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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적선지가면 필유여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베풀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통행료를 내는데 앞사람이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 주었습니다. 뒷사람은 자신의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 주었습니다. 그렇게 200대가 넘는 차량은 뒷사람의 통행료를 내 주었습니다. 어차피 통행료를 내야 했는데 자신이 받은 호의를 뒷사람에게 전해 주면서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모두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리를 건널 수 있었습니다. 어두운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별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부활전례에 함께 했던 복사들에게 피자를 사주었습니다. 시간이 지났습니다. 아침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자매님이 봉투를 주었습니다. 조카가 복사인데 신부님께서 피자를 사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고모는 기쁜 마음으로 제게 피자를 사준 금액보다 넉넉하게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습니다. 비가 온 뒤에 맑게 게인 하늘처럼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 기일을 맞이해서 교우들과 함께 연도를 하였습니다. 연도에 함께한 분들을 위해서 김밥을 마련했습니다. 김밥을 준비한 분들에게 점심을 사드렸습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다 한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지난번 부활절에 못 드렸다고 하면서 카드를 주셨습니다. 카드에는 점심 사드린 금액이 있었습니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은 나눌수록 가벼워진다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하느님을 섬기었던 리디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리디아는 온 집안이 함께 세례를 받으면서 사도들을 집으로 초대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받은 은총을 사도들에게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천국과 지옥에 대한 만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지옥은 긴 수저를 가지고 밥을 먹는데 자기 입에만 넣으려고 하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였습니다. 천국은 같은 긴 수저를 가지고 밥을 먹지만 다른 사람의 입에 밥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매주 가톨릭평화신문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병고에 시달리는 많은 분들의 사연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후원금을 보내 주십니다. 한 번도 보지 않았고,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온정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온정은 사랑으로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아픈 사람은 수술을 받고 퇴원하였습니다. 비행기 표를 마련해서 고향을 갈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 머물 수 있는 집을 마련하였습니다.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의 오지에 우물이 생겼습니다. 가난한 산골 마을에 컴퓨터가 생겼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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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의 도움으로 담대히 증거하라♣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사람들은 선을 추구하고 행복을 바라지만 결국은 자기 앞을 가리기에 급급한다. 나아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이면 적당히 하느님께 기도하고 매달리다가도 참지 못하고 인간적인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 때이면 신앙이나 복음적 가치와는 무관하게 처신하곤 한다. 그런 나약함 가운데 박해를 겪어내야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함께하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담대히 복음을 선포하라고 권고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련이 올 때에 당신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시며, 제자들이 당할 박해를 미리 말씀하신다. 성령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선포하게 하신다. 이 선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세상의 폐쇄성을 드러나게 하고, 제자들은 세상의 박해를 더 심하게 받는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호자이신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거듭 약속하시면서 박해를 받을 때 무슨 말로 자기 자신을 변호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성령이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은 제자들을 통해서 증언하고(15,26) 제자들은 성령의 도움으로 증언한다. 이 구절에서만 언급되는 ‘보호자’로부터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증언 행위는 증오하고 박해하는 ‘세상’을 상대로 이루어진다. 복음선포는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15,27) 예수님의 ‘말씀들’을 듣고 그분의 ‘일들’(업적)을 본 증인인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복음선포의 ‘원천’을 직접 받아들이고 체험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제자들의 복음선포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을 선포하려면 반드시 성령께 의탁해야만 한다. 복음선포는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을 가르치고 상기시키는 성령과 함께 현실화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보호하여 믿음을 상실하지 않고(16,1) 구원을 얻도록 미리 말씀해주신다. 곧 그분은 제자들을 세상의 박해 그 자체보다는 박해로 인해서 흔들릴 수 있는 믿음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16,2) ‘회당 추방’은 사형에 처하는 박해까지 수반되는 파문이었는데, 유다인들은 90년경 이후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하였다. ‘때가 온다’란 말은 그런 광신적인 박해가 다시 올 것임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유다인들을 논박하고 그들의 동기가 맹신적인 열광이라는 것을 폭로하신다(16,3).
오늘의 시대는 “감춰진 유혹, 드러난 유혹, 갑작스러운 유혹이나 끈질긴 유혹”(성 프란치스코의 ‘주님의 기도’ 묵상, 9절)이 집요하게 우리를 뒤흔드며, 구조적이고 집단적인 박해, 거짓 이단과 영성의 흐름에 의한 혼돈의 시대이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자신의 생각이나 선생인척하고 대단한 경지에 오른 듯 외쳐대는 거짓 예언자들에 휘둘리지 말고, 현세적 박해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진리의 영’ 안에 머물러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담대히 신앙을 증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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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리디아와 강완숙 골롬바
그리스도인들은 새 인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육신과 세속의 차원을 넘어서는 삶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소멸시키고 성령의 사기지은에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새로운 인류입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서 나타난 성령의 사기지은을 고루 입었으므로 성령의 강림으로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공동생활 양식을 이룩함으로써 새로운 세상의 신기원을 실현시켰습니다. 여기서 죄와 악의 공격을 받아도 영향을 받지 않고 여전히 선의 기운이 상하지 않는 은총은 새로운 존재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류투성이의 현실 속에서도 진리를 알아보는 빛남의 은총은 새로운 존재들이 우뚝 서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또한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빠름의 은총으로는 통공의 에너지를 발휘하여 믿는 이들이 연대하는 새로운 인류의 단위가 되는 공동체를 이루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믿는 이들인 이 공동체가 세상 속에서 진리를 실천함에 있어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받쳐주는 사무침의 은총이 있는데, 이 은총이 앞선 은총 세 가지를 모두 종합시켜서 부활의 은총을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등장하는 리디아의 삶과 활동은 그 좋은 사례입니다.
바오로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는 그 이후 선교 여행을 마칠 때까지 성령의 그림자처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습니다. 바오로가 필리피에 들어갔을 때 유다인들이 모이는 기도처로 가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는데, 여기서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리디아가 그의 인품과 신앙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을 필리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선교처로 내어놓았는데, 바오로는 리디아의 집을 거점으로 필리피에 복음을 전해서 나름 의미있는 성과를 얻었고 이를 발판으로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을 수행하였습니다. 소아시아의 척박한 도시 티아디라 출신인 리디아가 필리피까지 진출해 있었던 이유도 자색 고급 옷감을 국제적으로 교역하려던 것이라고 짐작되는데, 그녀의 국제적인 사업수완과 안목이 바오로의 국제적인 선교 활동을 뒷받침해 주는 뒷배가 되었습니다.
요한 묵시록에 의하면 티아티라에는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신자들을 잘못 가르치고 속여서 불륜을 저지르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게 하는 이제벨”(묵시 2,20)이라는 여자를 용인하고 있어서 큰 책망거리가 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티아티라에 있던 유다인 상인들이 조직한 조합이 트림나스 신전의 후원조직에게 곗돈의 일부를 바치면서 은밀한 관계를 맺고 곗날이 되면 트림나스 신전에 모여 제사를 지내고, 술을 마시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고 신전 사제들과 음행을 저지르는 사악한 우상숭배 풍습에 물들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겨운 풍습을 익히 보아온 리디아로서는 바오로를 처음 마주쳤을 때, 그가 전하는 복음선포 활동을 보고 나서 그에게 사심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교우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전혀 주지 않기 위해 몸소 천막 만드는 노동까지 하며 좋은 표양까지 보여주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건전한 것은 기본이고 영적으로도 훨씬 더 고귀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첫 눈에 알아보고 자기 집을 내놓는 호의를 베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후 리디아는 바오로 일행이 필리피에서 맞게 된 박해를 계기로 남부 아카이아 지방으로 선교를 가도록 조언하기도 했을 것이고, 다시 소아시아의 큰 도시인 에페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2년 반 동안이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라도 귀한 양피지에 편지를 써서 이미 공동체를 세워 놓은 여러 곳에 보내서 연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습니다.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리디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인물은 강완숙 골롬바입니다. 그녀는 1794년 말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했을 때 자신의 집에 주문모 신부를 편히 모시고 사람들과 포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신자들이 주 신부에게서 성사를 받도록 도왔습니다. 한편 여성들에게 교리를 가르쳐서 입교시키고 그 여성 신자들과 함께 활발하게 한양을 중심으로 지방에까지 선교활동을 벌였는데, 궁중의 왕족 여인들과 궁녀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의지할 데 없는 불행한 여인들을 거두어 자기 집에서 살게 하면서 교리를 배우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부들과 처녀들을 모아 함께 생활하는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최초의 동정부부로 살다가 순교한 이순이 누갈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 이벽을 계승하여 활약하던 열명의 평신도 지도자들도 세례성사를 베푸는 일은 강완숙 골롬바에 모시고 있던 주 신부에게 맡겼겠지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명도회 회장으로 임명된 정약종과 함께 열심히 수행했기에 비약적인 신자 증가를 이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이루어져서, 당시 4천여 명이던 신자를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 만여 명으로 늘릴 수 있도록 맹활약했던 명도회 여성 회장이 강완숙 골롬바였습니다.
이렇듯, 리디아와 강완숙은 보편교회의 초대교회에서와 한국교회의 초대교회에서 새 하늘과 땅의 새 역사를 보여준 새 인류의 전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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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3.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교활동의 본질적 요소
-성령과 환대-
참 아름답고 겸손하고 매력적입니다. 끊임없는 위로와 힘을 주니 참 감사합니다. 숨겨져 있으며 할 일을 다합니다. 바로 보호자 성령과 환대의 사람이 그러합니다. 선교활동의 본질적 두 요소가 성령과 환대입니다. 참으로 향기롭고 겸손한 성령이요 환대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
바람처럼 왔다가
향기만 남기고 떠나신 분
몇 년만에 고백성사차 방문하셔서
잠시 겨우 한 시간 머무는 동안도
민첩한 손놀림으로
빨간실로 행주 둥글게 뜨개질 하여
선물로 남기고 가신 분
은은한 향기
꽃처럼 남기고 조용히 떠나신 분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2007.5.
15년전 써놨던 시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지금도 향기로 남아있는 정말 아름답고 겸손한 분입니다. 어제 세상에 숨겨져 살다가 5월이 되자 나타난 옛 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당시는 13살이었는데 이제는 환갑에 육박한 58세 노년에 접어든 순수한 제자들 몇이 스승의 날은 지났지만 선물 가득 안고 찾아와 동심童心 가득한 빛나는 얼굴로 동요童謠들을 불러 줬습니다. 성령의 선물같은 제자들은 떠났어도 지금도 은은한 향기로 남아있습니다.
“지나가다 멈추었다
향기맡고 뒤돌아 발견한 꽃
하늘 향기
아카시아꽃 그윽한 향기
당신 겸손의 향기
당신 존재의 향기
당신 추억의 향기
당신 사랑의 향기로 삽니다”-1998.5
아까시아꽃이, 자귀꽃이, 장미꽃이, 찔레꽃이 바로 그러합니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고 발견하는, 이런 꽃같은 주님을 닮은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 환대의 사람입니다. 그러니 성령에 감사하고 성령을 사랑하십시오. 환대에 감사하고 환대를 사랑하십시오. 성령이 얼마나 고마운지는 성령에 관한 많은 성가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은 보호자 성령이, 제1독서 사도행전은 환대의 사람, 리디아가 주인공입니다. 선교활동의 본질적 두 요소가 보호자 성령이요 환대의 사람임을 입증합니다. 온갖 시련과 고난을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이겨내고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는 분이 숨어계시며 활동하시는 성령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예수님이 바로 성령입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런 증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순전히 성령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을 회당에서 내쫓김의 박해를 당해도 건재할 수 있음도 성령의 은총입니다. 마음의 고질병인 무지無知에 대한 답도 진리의 영, 성령뿐입니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나도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아버지도 예수님도 성령도, 즉 삼위일체 하느님을 모르기에 이런 무지한 폭력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에 닫혀 있는 무지의 사람들이 예나 이제나 문제입니다. 광야 여정중 급기야 이념에 중독된 극단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잔인하고 사나운 괴물이, 폐인이, 광인이 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선교활동에 본질적인, 한결같은 도움을 주는 성령입니다. 제가 이렇게 평생, 매일 흐르는 “강”처럼 강론을 써서 마침내 강론의 “바다”를 이룬 것도 순전히 성령의 힘이자 은총입니다. 가톨릭 교리서의 성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느님을 계시해 주시는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살아 계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알려 주시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진리의 성령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신다’. 참으로 하느님다운 ‘숨김’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그분을 아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교리서687항)
참 겸손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령입니다. 참으로 ‘성령의 사람’이 이러합니다. 어제 갑자기 눈에 띈 참으로 하찮은 개망초꽃들이 참 예뻤고 다음같은 시를 썼는데 성령의 은총이라 믿습니다.
“꽃은
다 예쁘다
사람도
다 예쁘다”
제1독서 환대의 사람, 티아티라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하느님을 섬기는 리디아 역시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지요!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시니 바로 성령의 은총이요, 이어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으니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의 은총은,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말하는 리디아의 바오로 일행에 대한 자발적 기쁨의 환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이어 영문 주석도 소개합니다.
‘리디아의 환대와 보호자 성령은 공통적인 어떤 점을 지닌다. 교회의 삶과 일에서 그들 각자의 역할은 본질적이나, 배후에 숨겨져 있을뿐 “표면에 나서지 않음”으로 특징지어 진다. 그러니 성령과 환대, 그들은 결코 교회의 정신과 기억에서 결코 사라져선 안된다.’
‘표면에 나서지 않음(self-effacement)’이란 말마디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느님다운 겸손의 표현입니다. 바로 성령과 환대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겸손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겸손하고 향기로운 성령의 사람, 환대의 사람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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