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 좀 떨어도 될까요
서범석
어김없이 찾아온 봄비를 업고 산에서 막 내려와 볼펜으로 오랜만에 손편지에 뿌립니다, 손편지.
누구는 비 오는 산에 가지 말라고 처방하겠지만, 땅은 촉촉이 젖어 부드럽고 공기는 덥지 않아 상쾌한 기분이었어요. 오가는 사람도 아주 없어 기분 아주 좋은 산책이었습니다.
화장실 조명등 이야기예요. 당신이 떠나간 후에 알전구가 나가서 엘리디로 새로 사서 바꿨어요. 유리 덮개 안에는 쌍소켓이었어요. 하나는 비워두고 왼쪽에만 끼웠는데요, 이상했어요.
스위치를 내려도 전구가 아주 작은 불빛으로 반짝반짝하는 거예요. 혼자 있는 어둠이 무서워서 그러나, 잃어버린 오른쪽이 그리워서 흐르는 눈물 여닫는 건가, 밤이 새도록 오늘도 내일도 불 꺼진 공간을 연약한 빛으로 지키면서 우는가 떠는가, 하 기다리는가.
나도 참 어지간히 둔한 사람이에요. 귀신이 곡할 불빛의 외침을 그냥 두고 보기를 열여덟 달. 오늘은 결단코 고치리라, 관리실에 전화를 했고 결근한 전기기사 대신 온 아저씨는 요렇게 조렇게 시도하다가 오른쪽 구멍에 다른 전구를 가져다 끼우니까 글쎄 그 불치병이 멀쩡하게 나았어요, 순식간에.
선무당이 사람 잡았어요. 짝을 맞추지 않고 외짝으로 두면 어느 한쪽만으로는 제 구실을 할 수 없다는 걸 가르쳐 주었어요, 언제 오실 거예요.
시현실 2023.여름저자예맥 편집부출판예맥발매2023.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