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 처| 유관지 목사
건강해 보이는데 안에는 여러 가지 질병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또 행복해 보이는데 안을 잘 보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는 가정들도 있
습니다.
이런 경우, 안의 질병이나 문제를 다스리지 않으면 건강이 쉽게 무너집니다.
행복이 어이없게 파괴됩니다.
오늘 세계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풍요와 과학문명의 혜택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안을 보면 염려스러운 일들을 많이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제일 심각한 문제는 전쟁의 위협입니다.
전쟁의 문제들 가운데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 지금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싸움에 대해서 우리는 깊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거기는 늘 싸우는 곳이야!' '이번에도 좀 싸우다가 가라앉을 것이야!'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나라는 6·25 이전에도 북한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자주 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6·25가 일어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또 쳐들어왔구먼!' '그런 충돌들 가운데 하나이겠지!' 했습니다. 6·25 때 저는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바에 나가서 놀다가 들어오니까 어머니와 할머니가 마루에 앉아서 무엇을 하시면서 "빨갱이들이 또 쳐들어 왔대요!" 이런 말씀을 나누고 계셨는데 별로 걱정하시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사흘 뒤에 서울을 점령당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싸움은 먼저 강대국들의 이해가 얽혀있다는 점에서 세상을 긴장시킵니다. 그 다음에 그곳이 성지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지금은 아주 중요한 성지 가운데 하나인 베들레헴, 그 가운데에서도 예수 탄생기념 교회가 분쟁의 핵심이 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분쟁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6장16절에는 아마겟돈에서 인류의 마지막 큰 싸움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아마겟돈이라는 곳이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있습니다. 지금 이름은 므깃도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이것이 므깃도의 싸움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한 번씩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늘 전쟁의 위협 속에 시달려 왔습니다. 우리 나라는 특별히 그러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날이 얼마나 되었나 계산을 해 보았는데 의외로 적은 것을 알고 놀랐다고 합니다 (전쟁이 없는 날들을 모아보니 3년이었다고 하던가요?).
그런 우리들에게 이사야서 2장 4절은 너무나도 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미가서 4장3절에 조금 확대된 형태로 다시 한 번 실려 있습니다.
이사야서 2장4절의 말씀을 제가 「표준 새번역 개정판」으로 읽어 드립니다.
“주님께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뭇 백성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실 것이니,그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주님께서 아랍 민족과 유대 민족 사이의 분쟁을 속히 판결하시고, 남한과 북한 사이의 갈등을 오늘, 해결해 주시기를 다시 한 번 간구하게 됩니다.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천문학적 비용들이 기아를 극복하고 복지를 위해 쓰이는 날이 속히 오게 되기를 다시 한 번 간구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차세대 전투기를 F15K로 할 것이냐, 라팔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거의 결정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만 제일 좋은 것은 F15K도 필요 없고 라팔도 필요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좋은 말씀들, 지혜로운 말씀들이 많이 있어서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 말씀을 자주 인용하고 또 참고합니다.
공직에 있는 장로님 한 분이 북한 대표들과 만나 식량지원에 대한 일을 의논하는데 양쪽의 이해가 어긋나서 쉽게 합의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북한 대표가 "이것 참, 이 문제를 솔로몬처럼 지혜롭게 판결할 사람이 없나!" 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서 "아니 솔로몬의 판결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했다고 합니다. 북한 대표는 "아, 우리는 기독교를 믿지 않지만 성경에 있는 유명한 말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지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 장로님은 '이것 참 좋은 기회이다.' 싶어서 "그러면 성경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말씀이 있는 것도 아십니까?" 했다고 합니다. 북한 대표는 신이 나서 "알지요. 그거 예수가 시험을 물리칠 때 쓴 말이 아닙니까?" 했다고 합니다. 장로님은 "그렇다면 떡만 달라고 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도 받아들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했더니 북한 대표가 가만히 있더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는 평화를 바라는 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이 으뜸이고 평화에 대해서는 이 말씀이 으뜸입니다.
어떻게 하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날이 오게 할 수 있을까요?
세계 평화를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날이 이 땅에 오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를 간절한 마음으로 늘 드려야합니다.
평화의 꿈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은 싸우게 되어 있는 곳이야! 옛날부터 평화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전쟁은 늘 일어났지 않아? 평화를 위한 기도는 무익해!'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평화를 위한 기도는 형식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기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십니다.
통일 문제도 그렇습니다. 통일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속으로는 '통일은 어려워!'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에 온전한 평화가 이뤄지는 날이 언제인가는 올 것으로 믿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나마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평화'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었다가 보습을 쳐서 다시 칼을 만드는 일이 없는 평화를 말합니다. 평화회담 해놓고 다시 싸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온전한 평화'는 보습과 낫이 농사도구로만 쓰이는 평화를 말합니다. 보습과 낫이 전쟁도구로 쓰이는 일도 많지요. 동학전쟁이 일어났을 때 동학군은 그런 것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그런 일이 없고 '보습은 보습이요 낫은 낫이로다.' 하는 상태가 이뤄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온전한 평화는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온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예언자 이사야는 아모스의 아들인데 이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와는 다른 사람입니다.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아모쓰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이 어찌 될 것인지 내다보고 한 말이다"
미래의 일인데 "받은 바",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미래를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보고 있습니다.
예언적 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언적 과거는 성경에만 있는 독특한 시제입니다.
이사야가 이 말씀을 받을 때 그의 눈에는 2절 이하의 광경이 눈에 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라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여호와의 전의 산'은 주님의 성전이 서 있는 산을 말합니다. 줄여서 교회를 말합니다.
이사야는 교회 중심의 세상이 이룩되어 온전한 평화가 이뤄질 것을 내다보았습
니다.
3절을 봅니다.
이사야는 많은 백성이 교회로 몰려오면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라고 말하는 것을 선명하게 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우선 저희 교회에 대해서 3절과 같은 환상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이 기대를 품고 몰려오는 환상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마음놓고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하나 있는데 금요일 밤 12시 반경, 금요심야합심기도회 마치고 집에 가면 시작되는 "X-파일"이라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왜 마음놓고 보는가 하면 토요일 새벽에는 새벽기도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FBI 특수요원들의 활동을 그린 영화인데 거기 나오는 FBI 국장이 흑인입니다.
아주 당당합니다.
요즘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은 파월 국무장관입니다. 중동 사태에 대해서도 이 분을 특사로 보내야 해결된다는 여론이 높았고 또 그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분과 여성 안보보좌관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등장합니다. 두 분 다 흑인입니다.
언제인가 한 번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장면들을 볼 때 저는 마르틴 루터 킹 목사의 끔을 생각하곤 합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은 흑인과 백인 자녀들이 나란히 학교에 가는 것을 꿈꿨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활동하던 때, 40년 전만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 좀 다릅니다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이 매우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는 흑별 차별이 없는 사회가 올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애썼습니다. 1968년 4월3일, 피살되기 전 날 밤 마지막 연설에서도 약속의 땅에 대한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꿈이 이뤄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화의 꿈,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세상이 오는 꿈을 늘 간절하게, 새롭게 꾸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고 이 말씀을 널리 전하기 위해 힘써야합니다.
3절 뒷부분을 봅니다.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평화의 근거를 말씀에 두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는 평화를 가르치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 고난 받는 종의 노래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찬송한 것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였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보배와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눅2:14)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말씀이 바로 평강이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에게 하신 말씀이 "평안하냐"였고(마28:9) 제자들 가운데 서서 이르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눅24:36).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였습니다.
칼과 창을 보습과 낫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말씀의 용광로에 넣을 때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용광로는 포항제철의 용광로보다 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가르치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52장7절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여러분, 평화를 공포하는 말씀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의 소유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여호와의 빛에 행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개역 개정성경」에는 5절부터 새로운 제목이 시작되는데, 여러 성경들이 5절을 4절 뒤에 붙이고 6절부터 새로운 제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는 평화에 관한 메시지의 결론입니다. 평화스러운 세계가 열리는 미래를 바라보며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빛은 여호와의 말씀을 말합니다. 신앙시인은 시편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주를 따르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평화를 가르치는 말씀을 행할 때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날,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않는 날이 속히 올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속으로 칼을 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마음에 칼과 창이 시퍼렇게 자리잡고 있는데 칼을 쳐서 보습을,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평화스러워야 합니다.
교회가 평화스럽지 못하면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이 마름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8·15 해장 뒤에 교회들이 많이 갈라졌습니다. 6·25 가 그것 때문에 일어났다고 한국교회 역사를 연구하는 분들은 입을 모아 증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여호와께서 정치적, 종교적 세력 위에 군림하심으로 시온을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열방은 그 영화로운 시온을 바라보고 여호와의 말씀, 곧 복음을 사모하여 몰려들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통치가 온 열방 위에 시행되어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평화의 말씀을 잘 지키며 평화의 빛을 전한 대표적인 인물이 11세기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입니다. 그의 평화의 기도를 다시 한 번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나로 사랑을 심게 하옵소서.
침해가 있는 곳에 용서를,
회의가 있는 곳에 신앙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암흑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을 수 있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여, 제가 많은 것을 구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남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나로 위로를 받게 하소서.
남을 사랑하기 위하여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대개, 우리가 받는 것은 주는데 있사오며,
용서를 받는 것은 용서하는데 있사오며
영생을 위하여 거듭나는 것은 죽는 데 있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