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하노이, 물의 세계를 만나다
익숙한 풍경을 뒤로하고 낯선 땅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은, 언제나 마음속에 새로운 우물을 파는 작업과 같다. 그동안 남도의 붉은 동백이나 굽이치는 갯벌, 혹은 제주와 경상도의 서늘하고도 묵직한 산하를 누비며 문장을 건져 올렸다면, 이번에는 온기와 습기가 가득한 남국의 바다로 향했다. 오토바이의 매연과 사람들의 활기찬 소음이 뒤엉킨 베트남 하노이를 기점으로, 나는 거대하고도 신비로운 '물의 세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다. 낯선 물의 언어로 쓰인 풍경을 낚기 위한 여정이었다.
하노이의 도심을 벗어나 차로 몇 시간을 달렸을까. 창밖으로 펼쳐지던 평범한 농촌 풍경이 어느 순간 비현실적인 그림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평야 한가운데서 불쑥불쑥 솟아오른 기암괴석들. 마치 거대한 수석(壽石)을 전시해 놓은 듯한 그 기이하고도 장엄한 봉우리들은 다가올 물의 세계를 예고하는 서막과도 같았다.
작은 선착장에 닿자, 푸른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고 납작한 나룻배들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통 모자인 '논라(Nón lá)'를 깊게 눌러쓴 사공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레 배에 올랐다. 일렁이는 물결 위로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 수면의 서늘한 기운이 얇은 옷깃을 타고 전해졌다. 사공이 능숙하게 노를 젓기 시작하자, 배는 미끄러지듯 고요한 물길을 갈랐다.
철썩, 철썩.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노 젓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트렸다. 양옆으로는 깎아지른 듯한 석회암 절벽이 하늘을 가릴 듯 거대하게 솟아 있었다. 수백, 수천만 년 동안 물과 바람이 깎고 다듬어낸 대자연의 조각품이었다. 물은 산을 안고 돌았고, 산은 물속에 자신의 푸른 그림자를 깊게 담그고 있었다. 바위틈 사이사이로 뿌리를 내린 끈질긴 초록의 생명력들은 이 습하고 무더운 공기 속에서 더욱 짙은 빛을 발했다.
나룻배에 앉아 수면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바위산은 압도적이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감히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억겁의 세월이 그 단단한 표면 위에 새겨져 있었다. 앞서가는 다른 배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푸른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태우고 묵묵히 노를 젓는 현지 사공의 어깨. 자연의 거대한 품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고 미미한 존재로 보였지만, 동시에 그 거대한 풍경 속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어 하나의 아름다운 점경(點景)이 되고 있었다. 길 위에서 숱한 풍경을 마주해 왔지만, 이토록 물과 돌, 그리고 인간의 호흡이 가까이 맞닿아 있는 풍경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웅장하면서도 몹시 내밀한, 물의 속삭임이었다.
좁고 은밀했던 물길의 기억을 뒤로하고, 여정은 하롱베이(Ha Long Bay)의 광활한 바다로 이어졌다. '하늘에서 용이 내려온 만(灣)'이라는 그 이름처럼, 바다는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비경(祕境)을 품고 있었다. 이 거대한 물의 제국을 한눈에 담기 위해, 턱밑까지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가파른 전망대 계단을 올랐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정상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그 모든 수고로움은 하얀 포말처럼 부서져 내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필설로 형언하기 힘든 압도적인 파노라마였다. 옥빛, 혹은 짙은 에메랄드빛을 띠는 고요한 바다 위로 수천 개의 석회암 섬들이 점핑하듯 솟아 있었다. 안개와 해무가 옅게 깔린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겹겹이 포개어진 모습은 한 폭의 장대한 수묵담채화였다. 여백의 미를 아는 거대한 붓이 남국의 바다 위에 툭툭 점을 찍어 놓은 듯했다.
그 짙푸른 바다 한가운데, 하얀 유람선들이 마치 작은 장난감이나 평화로운 백조 떼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나룻배 위에서 마주했던 물길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좁은 협곡을 흐르던 물이 내밀한 자기 고백이었다면, 수천 개의 섬을 품고 있는 하롱베이의 바다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하는 거대한 침묵이었다. 파도조차 일지 않는 잔잔한 수면은 거울처럼 맑아서, 하늘의 구름과 섬의 그림자를 고스란히 비춰내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수면 위로 은잔을 엎질러 놓은 듯 윤슬이 반짝였다. 나는 전망대의 난간에 기대어 오래도록 그 풍경을 눈에 담았다. 내가 낚아채려 했던 풍경이 오히려 나를 단단히 포박하는 기분이었다.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캔버스 앞에서, 인간이 가진 알량한 단어들은 그 빛을 잃고 초라해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글을 쓰는 자의 숙명이란 기어코 그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언어의 그물로 건져 올리려 애쓰는 데 있지 않던가.
베트남의 물은 뜨겁고, 습하고, 또 깊었다. 수만 년의 시간 동안 바위를 깎아 섬을 만들고, 그 섬들 사이로 유유히 흐르며 생명을 품어온 이 거대한 물의 세계는 내게 많은 것을 묻고 또 답해주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붉은 노을이 하롱베이의 바다를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섬들의 실루엣이 검게 짙어지며 물과 하늘의 경계가 서서히 지워지는 시간. 나는 다시 펜을 들고 수첩을 펼친다. 나룻배 사공의 규칙적인 노 젓는 소리, 수면을 스치던 습한 바람의 냄새, 그리고 산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천하의 절경이 내 안에서 조용히 활자로 벼려지고 있었다.
길 위에서 풍경을 낚는 일은 결국 내 안의 풍경을 넓혀가는 일이다. 한국의 서늘한 산사나 척박한 유배지에서 길어 올렸던 고독하고 맑은 문장들 곁에, 이제 베트남의 짙푸른 바다와 억겁의 바위산이 들려준 웅장한 교향곡을 나란히 놓아둔다. 짐을 꾸리고 떠나고, 낯선 곳에서 헤매다 다시 돌아오는 끊임없는 반복. 그 속에서 오늘 또 한 뼘, 깊은 물의 빛깔을 닮은 문장을 건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