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의 연접 3번으로 돼 있는 real problem을 더 딱부러지게 술어화하지 못한 것은 나의 무능이다.
여튼, 뒤의 진술이 중요한데, 다음과 같다. ,therefore I suspect there’s no real problem, but I’m not sure
there’s no real problem. there’s no real problem을 추상 대수의 방식을 써서, 대문자 A로 치환해보자.
다시 쓰면, I suspect A, but I’m not sure A. suspect와 be sure는 인간'계'의 [풍요롭고 지저분한] 의미
경관(meaningful landscape, 마음 극장)이고, 그렇다면 정신 공간(mental space)의 골자는 A, but not A이다. 여기서의 but은 and이고, 확장적으로 or다.
결국, 이 말은 A이면서 동시에 A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술되는 내용이 양자적이고, 언어도 양자적이다.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일 수 있다.
A이면서 동시에, not A(~A)일 수 있다니! 내 책의 제목이 '퀀텀 리딩'인 이유, 보이스의 중첩과 얽힘
(Superposition and Entanglement)과 상 전이(phase transition)가 장들의 제목인 이유다.
이게 영어의 instead of(rather than) 또 or의 진리값 획정에도 적용된다.]
양자 역학의 악명높은 난문제와 역설을 두고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한 말이다.
(양자 역학은 이론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극미 대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이론 체계다.)
하지만, 그라면 의식이란 얼키고설킨 사안에 대해서도 이런 촌평을 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의식의 정체를 이제 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도 일부 있다.
의식은 순전히 환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많은 과학자는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아직 의식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의식이 이렇게 계속해서 골치를 썩이자, 일부 학자는 양자 물리학을 호출해 그걸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 개념은 항상 의혹의 대상이었고, 하여 놀랍지는 않다.
이 수수께끼를 풀겠다고 다른 수수께끼를 적용하는 것이 현명해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로 물리학자들이 대단히 불편했던 것은, 마음이 일찌감치 양자 이론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는 점이다.
또 있다. 양자 컴퓨터가 기존 컴퓨터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예측된다.
우리는 이런 상황 및 사태 판단 속에서, 우리의 뇌가 인공 지능은 여전히 못 하는 것들을 해냄을 깨닫는다. "양자 의식"(quantum consciousness)은 신비주의 몰빵으로, 많은 사람이 조롱한다.
그렇다고 퇴장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원자와 아원자 입자 들을 알 것이다.
이것들이 비유하자면, 볼트와 너트를 써서 결합되는 수준의 세계가 있다.
양자 역학은 그 극미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보유한 최고, 최선의 이론이다.
양자 역학의 신비와 수수께끼는 많고,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다음일 것이다.
양자 세계의 실험 결과가, 간여된 입자의 특성을 측정하느냐 여부에 따라 바뀐다는 사실 말이다.
이를 "관측자 효과"(observer effect)라고 한다.
양자 이론의 초기 선구자들은 그 관측자 효과를 처음 접하고서, 몹시 곤'난'했다.
모든 과학을 지탱해주는 기본 가정이 무너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우리랑 무관하게 저 너머 외부에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우리는 상정했던 것이다.
세계의 거동이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
또 보기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면, 도대체가 '실제'라는 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과학자 일부는 객관성이 환상이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계속되는 추가 결론:
양자 이론에서라면 의식에 적극적, 능동적 역할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다른 과학자들은, 그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투덜거렸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달을 볼 때에만 그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늘날 일부 물리학자들은, 의식이 양자 역학에 영향을 미치든 말든, 그거랑 상관없이, 양자 역학 때문에
의식이 발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두뇌의 작동 방식과 거동 양상을 온전히 파악하려면, 양자 이론이 필요할 거라는 거다.
양자적 대상이 동시에 두 곳에 존재할 수 있듯이, 양자(적으로 거동하는) 두뇌도 한꺼번에 상호 배타적인
두 가지 생각을 품고 견지할 수 있지 않을까?
이 발안은 추단이다.
양자 물리학이 마음의 작동에서 근본적 역할 따위는 하지 않는다고 밝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가능성들은, 정말이지 우리가 양자 이론에 힘입어 얼마나 기이하게 사고하는지를 보여
준다.
마음이 양자 역학으로 침입해 들어온 가장 유명한 사례는 '이중 슬릿 실험'이다.
막에다가 실틈 두 개를 평행하게 밀접 배치한다.
여기다가 광선을 비춘다고 상상해보자.
일부 빛은 실틈을 통과하고, 그 결과 두 번째 막을 때린다.
빛은 일종의 파동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두 개의 실틈에서 파동이 나오면, 그 파동이 서로 간섭한다.
파동의 고점이 일치하면, 서로를 강화하고, 고점과 저점이 일치하면, 말소돼버린다.
이런 파동 간섭을 회절이라고 한다.
회절이 일어나면, 뒤쪽 스크린에 일련의 밝은 줄과 어두운 줄이 교대로 나타난다.
빛의 파동이 증강되거나 말소된 무늬인 것이다.
이 실험은, 200년도 더 전에, 그러니까 양자 이론이 출현하기 훨씬 전에 파동 거동의 특징이라고 이해되었다.
이중 슬릿 실험은 전자와 같은 양자 입자들을 갖고서도 할 수 있다.
원자를 구성하는 미소 대전 입자를 생각하라.
이 입자들이 파동처럼 거동할 수 있다는 사실은 직관에 반하는 상황 전개이다.
아무튼, 이들 입자는 그 줄 흐름이 실틈 두 개를 통과하면 회절을 하고, 간섭 무늬가 생긴다.
이제 상상해보자.
양자 입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틈으로 통과시킨다고 말이다.
하나씩 하나씩 스크린에 도달할 테고,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냥 보면, 개별 입자가 자신의 경로상에서 간섭할 대상이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경과하면서 나타나는 입자 포격의 패턴은 간섭 띠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개별 입자가 동시에 두 개의 실틈을 통과해 스스로와 간섭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두 경로를 지난다"는 이 조합 양상을 우리는 중첩 상태(superposition state)라고 한다.
하지만 진짜로 이상한 건 지금부터다.
우리가 한 실틈의 내부 또는 바로 뒤에 감지기를 설치한다고 해보자.
어떤 특정한 입자가 거길 통과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요컨대, 이 경우에는 간섭이 사라진다.
입자의 경로를 그저 측정만 한 것뿐인데, 우리 때문에 결과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 관측 측정 행위가 입자의 운동을 방해하지 않음에도 그렇다.
물리학자 파스콸 조던은 1920년대에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라고 하는 퀀텀 그루 아래서 연구했다.
그의 말을 들어본다. "관측은 측정 대상을 교란할 뿐만 아니라, 측정 대상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 우리가 [양자 입자로 하여금] 위치를 딱 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측정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 자신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객관적 실제(실재)는 사라져버리는 듯하다.
그리고, 사태가 훨씬 더 기이해진다.
자연이 우리가 '보냐' 마냐에 따라 그 거동을 바꾸는 듯하다면, 우리가 묘안을 내서(또는 잔꾀를 부려)
자연으로 하여금 갖고 있는 패를 내보이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입자가 두 개의 실틈에서 어느 경로를 취했는지 측정할 수 있다.
하지만 입자가 실틈을 통과하고 난 후에야 이는 가능하다.
그 즈음이면 입자는 한 경로를 택할지, 또는 둘 다를 택할지를 이미 '정했어야' 한다.
이 실험이 1970년대에 미국 물리학자 존 휠러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 '지연 선택' 실험이 10년 만에 수행되었다. (일반으로 광자라고 하는 빛 입자를 사용하는데) 양자 입자
들이 한 경로를 택할지, 아니면 두 개의 중첩 상태를 취할지 정한 후에, 놈들의 경로를 측정하는 똘똘한
수법이 쓰인다.
보어의 확신마냥, 우리가 나중에 측정을 하든 말든 차이가 없다는 게 드러났다.
우리가, 최종 도달이 감지기에 등록되기 전에 광자의 경로를 측정하면, 간섭이 죄 사라졌던 것이다.
자연은, 정말이지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볼 계획이라는 걸 '아는' 듯하다.
이 계열의 실험은, 우리가 양자 입자의 경로를 발견할 때마다, 가능한 경로의 집합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단 하나의 명확한 상태로 고정된다.
이 지연 선택 실험의 의미를 계속 알아보자.
측정이라고 하는 물리적 방해 행위 말고도 단순히 알아채는 거동만으로도 '와장창 붕괴'가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측정 결과가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줄 때만 사실과 실제가 붕괴한다는 얘기일까?
헝가리인 물리학자 유진 위그너가 1930년대에 그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대상에 대한 양자적 기술은 나의 의식에 관입하는 인상의 영향을 받는다.
철학의 유아(독존)론이야말로 어쩌면 논리적으로 현하 양자 역학과 일치하는 듯하다(아귀가 맞는 듯하다)."
심지어 휠러는 이 생각을 갖고 놀았다.
'알아챔'을 할 수 있는 생물의 존재 자체가, 가능했던 복수의 양자 과거를, 단 하나의 구체적 역사로 전환
해버린다는 발안, 말이다.
휠러의 말을 들어보자.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태초부터 우주 진화에 가담하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무대는, "참여 우주"다.
오늘날까지도 물리학자들은 의견이 제각각이다.
이 양자 실험의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묘안인지와 관련해서 말이다.
이들 실험과 관련해 그 성격과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 어느 정도는 (현 시점에서) 당사자 책임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든 저런 식이든, 의식과 양자 역학이 모종의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는 함의를 회피하기는
쉽지 않다.
1980년대 초에 영국의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그래서 제안했다.
이 연결상의 작동 방향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의식이 양자 역학에 영향을 미치든 말든, 그게 아니라, 양자 역학이 어쩌면 의식에 간여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이다.
펜로즈는 이렇게 물었다.
우리 뇌의 분자 구조가 단일한 양자 사태에 반응하여 자신의 상태를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들 구조가, 이중 실틈 실험의 입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중첩 상태를 채택하는 것 아닐까?
뉴런이 자극 분기해, 전기 신호로 통신을 하면서, 이러한 양자 중첩이 출현 부상하는 게 아닐까?
펜로즈는 말한다.
겉으로 보면 양립 불가능한 복수의 정신 상태를 우리가 유지하는데, 아마도 이것은 기이한 인지가 아니라,
실제의 양자 현상,일 거라고 말이다.
요컨대, 인간의 두뇌는 디지털 컴퓨터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양자] 인지 과정을 취급할 수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고전적인 디지털 논리를 활용하는 통상의 컴퓨터로는 불가능한 계산 과제까지 수행할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의 두뇌는 양자 정보 처리 기계]
펜로즈는 자신의 1989년 저서 <엠퍼러스 뉴 마인드 The Emperor’s New Mind>['황제의 새 마음'이란
역어는 영]에서 양자 효과가 인간 인지의 특징이라고 처음 제안했다.
이 발안을, '조율적 대상 환원'(orchestrated objective reduction)이란 말을 줄여, 오커(Orch-OR)라고 한다.
펜로즈가 '대상 환원'이란 말로 의도하는 것은, 양자 간섭과 중첩이 붕괴하면서, 실제가 부상하는 물리적
과정이란 것이다.
비누 거품 방울이 터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걸상이나 행성 같은 일상 생활의 대상은 양자 효과를 보여주지 않고, 이것은 중력 때문이라는 게 펜로즈의
생각이다.
오커, 곧 조율적 대상 환원은 펜로즈의 이런 제안에 근거한다.
펜로즈는, 원자보다 더 큰 대상의 경우, 양자 중첩이 불가능해진다고 생각한다.
왜냐, 이제는 중력 효과가 양립 불가능한 두 개의 시공간 버전을 압박해, 단일 결과를 내놓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
펜로즈는 미국의 의사 스튜어트 해머로프와 함께 이 발안을 더 밀어붙였다.
1994년도 저서 <마음의 그라데이션 경관 Shadows of the Mind>에서 제안하는 내용을 보자.
이 양자 인지를 담당하는 구조(체)가 어쩌면 세포 내 미소관(microtubule)이라고 하는 단백질 줄기(줄거리)
(protein strand)[strand와 string((초)끈)의 유사성에 주목할 것.
어떤 영화의 말마따나, "(노)끈 없는 세상은 혼돈(chaos)이다".
strand, string, thread, etc.]일 수도 있다.
미소관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포에서 발견되고, 뇌를 구성하는 뉴런에도 있다.
펜로즈와 해머로프는 주장한다.
"미소관의 진동이 양자 중첩을 채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일이 조금이나마 가능한지의 증거는 아직 없다.
미소관의 양자 중첩 발안을 2013년 실험들이 뒷받침한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실상 그 연구는 양자 효과
얘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다수의 연구자는 오커 개념이 2000년의 한 연구로 배제 기각되었다고 본다.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가, 신경 신호 전달에 간여하는 분자들의 양자 중첩은, 그런 신호가 도대체 어디
라도 가는 데 필요한 단 한 순간의 시간량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없음을 계산해냈다.
중첩과 같은 양자 효과는 쉽게 파괴된다.
결어긋남(decoherence)이란 과정 때문이다.
결어긋남이 일어나는 것(불간섭)은 양자적 대상이 주변 환경과 상호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상호 작용으로 '양자성'(quantumness)이 피시식 하고 누출 소산해버린다.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처럼 뜨듯하고 축축한 환경에서는 결어긋남이 순식간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신경 신호는 전기 맥박이고, 하전된 원자들이 신경 세포의 벽을 뚫고 이동하는 것이다.
만약 이들 원자 중의 하나가 중첩 상태에서 신경과 충돌한다면, 테그마크의 계산에 의할 경우, 그 중첩이
10억의 10억 분의 1초 미만에 붕괴해버릴 것이라고 한다.
신경이 신호를 보내려면, 최소 10경 배 더 걸린다. [🍂 생물적 묘안이 있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뇌 내 양자 현상이란 발안은 심각한 회의론에 직면했다.
하지만, 펜로즈는 이런 주장들에 꿈쩍하지 않는다.
오커 가설을 고수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테그마크가 엄청난 속도의 세포 내 결어긋남을 계산했지만, 다른 연구자들이 생명 활동을 수행
하는 존재의 양자 현상을 입증해주는 증거를 찾아냈다.
철새들이 자기 항행술을 활용하는데, 이는 양자 역학을 이용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녹색 식물의 경우, 햇빛을 활용해 당을 만드는 광합성 과정이 양자 효과를 이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뇌가 양자 묘책을 활용할지도 모른다는 발안은 전혀 퇴조의 기미가 없다.
이를 지지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입론이 제출되었기 때문이다.
2015년 발표된 한 연구를 보자.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바버라 캠퍼스의 물리학자 매슈 피셔가 거기서 주장했다.
뇌에는 양자 중첩을 보다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는 분자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인 원자핵이 이런 능력을 가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 원자는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면 어디에든 들어 있다.
이것들은 자주 인 이온의 형태를 취한다.
이온 상태에서 한 개의 인 원자는 산소 원자 네 개와 결합한다.
이런 이온이 세포 내부의 기본 에너지 단위이다.
세포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ATP(아데노신트리포스페이트)라고 하는 분자에 저장된다.
ATP는 유기 분자(아데닌)에 결합된 3인산 열이다.
인산염 하나가 떨어져나오면, 에너지가 방출되고, 그 에너지를 세포가 사용한다.
세포의 분자 기계 (메커니즘)이 인 이온을 결합해 집단으로 묶어주고, 이걸 다시금 쪼갠다.
피셔의 제안 내용은 이렇다.
두 개의 인 이온이 '얽힘 상태'라고 하는 특별한 종류로 중첩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 원자핵은 스핀이라고 하는 양자적 특성을 지닌다.
이 스핀(spin)이라는 것으로, 원자핵이 특정한 방향들을 지향하는 극이 있는 작은 자석과 비슷하게 거동
하는 것이다.
얽힘 상태에서는 인 원자핵 하나의 스핀이 다른 것의 스핀에 좌우된다.
달리 얘기해보면, 얽힘 상태들은 사실 중첩 상태들로 두 개 이상의 양자 입자가 간여한다.
피셔는, 이들 원자핵 스핀의 양자-기계적 거동이 인간적 시간 수준의 결어긋남을 막아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도 테그마크와 생각이 같다.
펜로즈와 해머로프가 상정한 것과 달리 양자 진동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것이며, "하여 거의
즉시로 결이 어긋나버릴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원자핵 스핀은 주변 환경과 그다지 강하게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아무려면, 인 원자핵 스핀이란 양자 거동은 '결어긋남'으로부터 보호되어야만 한다.
피셔에 따르면, 인 원자들이 "포스너 분자"(Posner molecules)라고 하는 더 큰 대상으로 통합 편성될 경우,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한다.
포스너 분자란 인 이온 여섯 개의 집속 무리가 아홉 개의 칼슘 이온과 결합된 것이다.
포스너 분자가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 내부에 존재한다는 증거도 있다.
현 시점에서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피셔는 주장한다.
포스너 분자에서는 인의 스핀이 하루 정도 결어긋남에 저항할 수 있다고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에서조차 말이다.
이것은 결국,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요컨대, 뉴런이 포스너 분자를 삼켜버릴 수 있을 것이다.
포스너 분자가 내부에 들어가면, 신호 발화를 다른 뉴런으로 촉발할 수 있다.
깨지면서 칼슘 이온을 내놓는 것이다.
포스너 분자의 얽힘 때문에, 두 개의 신호가 얽히게 된다.
일종의 '사고'의 양자 중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원자핵 스핀이 일어나는 양자 과정이 뇌 속에서 일어난다면, 그런 양자 처리 효과가 대단히 흔한 현상일
것이다.
거의 항상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피셔는 말한다.
그는 정신병을 궁리하다가 이런 발안을 처음 얻었다.
"내가 맨 처음 뇌의 생화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3년 전이었어요.
그때 리튬 이온이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데서 도대체 왜 이렇게 극적인 효과를 내는지 탐구해보아야겠
다고 결심했었죠."
양극성 성격 장애를 치료하는 데 리튬 제제가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이게 효과가 있는데, 아무도 그 기전을 모르는 게 문제다.
"양자적 설명은 구하지도 않았어요." 피셔의 말이다.
그런데 우연히 읽게 된 논문에, 리튬의 어떤 '동위 원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리튬 제제가 쥐의 거동에
상이한 효과를 낸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딱 접했을 때, 그 안건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화학의 견지에서 볼 때는, 동위 원소가 달라도, 거동은 거의 똑같으니까 말이다.
리튬이 재래식 약물처럼 작용하면, 동위 원소들이 모두 동일한 효과를 냈어야 한다.
피셔는 깨달았다. (to be continued)
같은 리튬이라도 동위 원소가 다르면, 원자핵의 스핀이 다를 수 있음을 말이다.
이 양자적 특성이 리튬 약물 제제의 작용 방식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가령, 포스너 분자에서 리튬이 칼슘을 대체해버린다면, 리튬 스핀이 '감지되'면서 인 원자들의 스핀이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고, 나아가 그것들의 얽힘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시나리오가 사실이면, 리튬이 양극성 성격 장애를 치료하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일 수도 있다.
현 시점에서 피셔의 제안은 흥미진진한 발안 이상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가능성 있어 보이는 시나리오를 검증해볼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포스너 분자 내부의 인 스핀이 과연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양자 결맞음(coherence)을 유지할 수 있는지
알아보자는 기획과 검증이 그 출발점이 될 것이다.
사실 피셔가 앞으로 하려는 게 바로 이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슈 피셔는 더 이른 시기의 발안인 "양자 의식"과 결부되는 사태를 대단히 경계한다.
기껏해야 사변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들은 스스로가 자기들의 이론 안에 들어가는 것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거개는 희망한다.
의식과 뇌가 양자 이론 밖에 있었으면 하고, ...... 어쩌면 그 역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우리는 의식이 뭔지도 잘 모른다.
의식을 설명하는 이론은 말할 것도 없다.
뉴 에이지를 설파하는 가내 수공업자들이 '양자 의식'이란 개념에 몰두하는 것도 참 거시기하다.
이 작자들은 양자 역학이 텔레파시와 염력 같은 것들의 합리적인 근거라고 주장한다.
물리학자들이 한 문장 안에서 '양자'와 '의식'이란 단어를 언급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이유다.
하지만, 현하의 이런 현실을 제쳐놓는다면, 양자 의식이란 발안은 그 역사가 길다.
'관측자 효과'와 마음이 이른 시기부터 양자 이론에 침입해와 확고하게 똬리를 틀어버렸고, 쫓아내기가
매우 어렵다.
우리가 결코 축출해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일부 있다.
2016년 영국 소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에이드리언 켄트가 추단하기를, 의식이 양자 체계의 거동을[결국,
작동과 구조를], 미묘한 방식으로 바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덧붙여서, 우리가 그걸 탐지해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켄트는 가장 저명한 '양자 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우리는 마음과 사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
(Credit: Andrzej Wojcicki/Science Photo Library) We do not understand how thoughts work.
켄트도 이 발안이 아주 조심스럽다.
"양자 이론이 옳바른 의식 이론을 제출한다고 믿어야 할 절대적인 이유 따위는 없습니다.
양자 이론의 제 문제가 의식 문제와 연계돼야만 한다고 믿을 이유도 없고요."
하지만 그는 이렇게도 말한다.
양자 물리학 이전의 체계만 갖고서 의식을 설명하는 활동을 둘러볼 때, 의식이 지닌 듯한 갖은 특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 난감하기만 합니다.
특히나 곤란한 문제를 하나 보자.
의식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들 알 것이다.
그 의식적 마음은 독특한 감각 지각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빨간 색깔이나 베이컨 굽는 냄새 같은 것을 말이다.
시각 장애를 지닌 사람을 예외로 할 때, 우리 모두는 빨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감각 지각을 교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물리학에는 그게 어떻고,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방법과 지식이 없다.
이와 같은 감각 지각을 '콸리아'(qualia, 감각 자료인데, 질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본다, 감각질, 질료적 감각
정보)라고 한다.
우리는 감각 지각 내용을 외계의 통합적 특성으로 인지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 감각 지각 내용은 우리 의식이 주조해내는 산물이다.
그리고, 이 사태를 설명하기가 만만찮다.
1995년에 철학자 데이비드 찰머스가 이를 두고 의식의 "난문제"라고 명명한 이유다.
켄트의 말을 들어보자. "의식이 물리학과 맺는 관계를 사유한 내용 전반이 난경에 처해 있어요."
그가 다음과 같이 제안하는 이유다.
"(비록 미약하고 미묘하다고 할지라도) 의식이 양자 확률을 변경한다고 가정하면, 의식의 진화란 문제를
조금쯤 진전된 형태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마음이 진짜로 측정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라면, '무엇이 실제인가'가 딱부러지게 정해지지 않는다.
어쩌면 의식이 확률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양자 역학이 허용하는 가능한 실제들이 우리가 실제로 관측하는 결과로 전환 고정되는 확률 말이다.
양자 이론 자체는 이를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켄트는 우리가 어쩌면 그런 효과와 영향을 실험적으로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가 결과 내지 영향 효과를 찾아낼 확률까지 추정하는 것은 정말이지 감연하고, 놀랍다.
"나 같으면, 구체적으로 뭔가를 하겠다는 의식 내지 의도가 양자 이론 내용의 일탈을 약 15퍼센트 정도
야기할 거라고 추정하겠습니다.
이걸 향후 50년 사이에 실험적으로 검증해낼 거라는 데에는, 3퍼센트 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물리학과 마음 모두에 관한 우리의 관념이 혁명적으로 바뀌고 말 것이다.
탐구하고 모색할 만한 확률인 것 같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