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살인
13 殺人하지 말라
You shall not murder.
Non occides.
Οὐ μοιχεύσεις.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 또한 구약시대에만 유효한 것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형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을 금하신 것은 모든 사람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모든 고의적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시는 등 인명피해에 대해서는 특히나 엄격하게 명하시는 것이다. 오늘날의 무신론적 인본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구약의 인명피해에 대한 보복법은 무자비하고 인정 없어 보일 수 있다. 인본주의자들은 이미 죽은 사람 때문에 비록 살인자라 하더라도 그 생명을 뺏어야 하느냐는 논리로 피해자의 억울함보다 살인자의 인권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살인자를 사형시키지 않고 수감만 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이야말로 인본주의자들의 어설픈 인권주장보다 더 평등하고 효과가 있다. 내가 상대방의 생명을 훼손시킨만큼 내 생명을 훼손시킴으로써 갚아야 한다. 심지어 내 가축이 상대방의 자녀를 들이받아 죽이게 되면 내 자녀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 오늘날에는 과실치사로 정상참작 될 수 있는 우연한 살인도 당시 율법에서는 도피성 제도를 마련하여 엄격한 제한을 두었다. 자기 의도가 아닌 우연하게 누군가를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긴급하게 피하여 자기 생명을 지킬 수는 있었으나 희년이나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원래 자기 거주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를 무시하고 도피성을 나왔다가 복수자에 의해 목숨을 잃어도 자기 책임이었다. 그는 비록 과실치사자여도 오랜 기간 동안 도피성에서 가족과 친지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구약의 보복법은 절대로 미개한 것도 아니고 잔인한 것도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한 공평한 법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도 적어도 인명피해에 대한 것만큼은 돈이나 징역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 신체적 제재를 가하도록 해야 한다. 우발적 살인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질환자나 미성년자가 살인을 저지른 경우에도 가급적 정상참작 없는 엄중한 처벌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살인은 금지하셨어도 전쟁으로 인한 살인은 허용하셨다. 그러나 이를 무분별하게 정당화 하여 전쟁과 관련없는 민간인까지 학살해서는 안된다. 전쟁에서만믐은 오로지 전쟁에 동원된 군대끼리만 살인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모든 전쟁과 전투에서 이런 원칙이 제대로 지켜진 적은 없다. 아무리 정당한 명분과 이념을 내세운 전쟁이라 하더라도 승리국의 군대는 점령 지역을 약탈하고 그 시민을 겁탈하며 함부로 죽이고는 하였다. 혹자는 하나님께서 아말렉의 모든 것들,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상관없이 진멸하라는 것은 무엇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는 하나님만의 특별하고 예외적인 주권적 명령인 것이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보편적 원리는 아닌 것이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을 철저히 말살하라는 계시를 주시지 않으시므로 우리는 보편적 원리에 따라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또햔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이단은 이를 오해해서 전쟁에서의 살인도 해서는 안된다 하여 입대와 집총을 거부하기도 하는데 이는 성경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이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살인이 허용된다고 해서 아무런 영향이 남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전쟁에 참여한 많은 군인들이 이로 인한 정신적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다윗조차도 전쟁으로 많은 피를 흘려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가급적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를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 지도자들은 누구보다도 더 살인을 합리화 하는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국가 지도자라는 지위를 내세우며 부당한 살인조차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기독교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북한이 6.25 침공했을 때 자기 혼자만 몰래 피난가고 다른 국민들은 피난가지 못하게 거짓 방송을 한데다 급기야 한강다리까지 폭파해 많은 국민들을 북괴의 손에 죽게 하였다. 얼마 후에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가까스로 서울을 수복한 후에는 자기 때문에 피난가지 못한 많은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서 대량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민주주의 이념을 수호한다는 명분하에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한 제주 4.3 학살 등의 수많은 자국민 대상 학살을 저질렀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하여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형제복지원과 서해 간척지 개발 사업으로 수많은 부랑자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전두환은 광주 시민 전체를 빨갱이로 몰아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섬멸하였다. 이명박은 46명의 고귀한 젊은 군인들이 희생된 천안함 사건의 주범이라는 것과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소리소문 없이 제거한다는 의혹을 강하게 받고 있다. 박근혜는 세월호 사고를 내버려둠으로써 3백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들과 탑승객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켰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기독교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듯 보이나 실상은 자기의 권력욕을 위해서 그런 가치들을 악용한 집단 살인자에 불과하다.
오늘날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사명으로 뭉친 보수 우파 기독교인들은 과거 이승만 시절의 이념을 잣대로 그에 반하는 자들은 죽여도 된다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을 이어받고 전개하고 있다. 그 어떤 이념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초월할 수 없을텐데도 보수 우파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을 수호할수만 있다면 그 어떤 사악한 범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저들은 정의로운 지도자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저주와 위협과 모해를 일삼는다. 심지어 예능으로도 얼굴과 이름을 알린 대전의 어느 유명한 목사는 전광훈의 불법집회에 참여하여 북한주민 2천만명을 하나씩 끌어안고 자살해서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혐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기도 하였다. 아무리 사실과 근거를 들이대도 스스로 저 이념의 노예가 되어 외면해 버린다. 그에 대한 사회적 책임은 차치하고서라도 영적인 책임과 판단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가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더라도 다른 이를 시켜 살인하게 하거나 생명을 잃을 위험에 처하게 하여 죽게 하거나 마땅히 돌봐야 할 이들을 방치하여 죽게 놔두는 것도 살인에 해당된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협박하여 극심한 두려움에 빠지게 해서 자살하게 하는 것, 자기의 유리하고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상대를 억울하게 만들어 자살하게 하는 것, 법조인이 고의적으로 수사나 변호나 판결을 그릇되게 하여 피해자를 억울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신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중한 업무를 강제하여 과로사 시키는 것, 위험한 사업장의 안전대책을 제대로 구비하지 않아서 사고나게 하는 것, 부모로서 양육의 책임을 저버리고 자녀를 죽음에 이르도록 유기하거나 방치하는 것, 고의적인 진료 및 수술 태만으로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학교 등에서 특정 구성원을 집단으로 따돌리고 괴롭힘으로써 자살하게 하는 것, 코로나와 같은 국가적 재난상황에서 이웃의 건강과 생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드시 현장예배를 드리겠다고 억지를 쓰는 것 등이 모두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살인죄에 해당된다. 그런 자들은 오늘날의 사회법을 교묘히 악용하여 자기의 죄를 피해갈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계명에는 절대로 피해갈 수 없다.
자기 생명을 소홀히 가볍게 여기거나 자살하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한다. 우둔하고 완악한 우리는 자살자에 대한 연민보다는 그의 구원 여부에 관심이 많은데,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이므로 우리가 경솔하게 함부로 하나님의 권세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다만 성경에서의 자살자들은 부정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러면 안된다는 경각심과 더불어 주위의 자살자와 유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 자기 생명을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건강과 젊음이 영원할 줄 알고 마치 오늘만 사는 것마냥 폭음, 폭식, 위험한 스포츠와 묘기, 광란의 레이싱, 색욕 등에 함부로 자기를 내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자들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건강과 생명을 자기 쾌락을 위해서 급격하게 깎아먹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세상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되는 것이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종종 찬양이나 기도 중에 주의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고백하기도 하는데, 백중구십구는 진정성이 결여된 허망하고 경솔한 허언에 불과하다. 정작 그런 교인들은 자기 재물이나 신상에 조금이라도 손해가 생기는 것을 참지 못하는데 이는 결국 자기 생명을 그런 것들보다 하찮게 여긴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늘날 '살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으로나 사회 문화적으로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낙태와 안락사와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이 아닐까 싶다. 낙태에 대해서 아주 보수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임신 기간에 상관없이 절대 금지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하지만 율법에서 임산부를 걷어차 낙태하게 한 사람은 사형이 아니라 얼마간의 벌금으로 배상하라 규정하고 있으므로, 강간으로 인한 임신이나 태아의 질병으로 인해 산모의 생명이 위독할 경우에는 명확한 성경의 기준을 내리기 어렵다. 말로는 믿음을 가지고 출산하라고 편하게 떠들수는 있겠지만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고충을 어떻게 알겠는가. 안락사의 경우에도 보수적인 해석자들은 자살과 같은 살인이므로 절대로 안된다고 주장하고 사회법으로도 금지하고 있지만 도저히 회생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중증 질환자가 그저 의료 기술에만 의존해서 연명하는 것이 과연 환자의 인권을 위한 것인지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양 가족들의 경제적 손실 등을 실질적으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해오다가 견디다 못해 가해자를 살인한 경우 어떻게 판단해야 할 지 나는 잘 모르겠다. 앞으로 인권에 대한 관점은 계속 다양화 될 것이고 의료 기술도 계속 발전해 갈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지금이라도 이 이슈들에 대해서 두루뭉술한 원론적 해석보다는 좀 더 세밀한 적용 기준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속적으로나 갑작스럽게나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지 않는 것도 살인에 동참하는 것이다. 유랑하던 다윗의 무리를 공궤하지 않은 나발이나, 나사로를 집앞에서 굶어죽게 내버려둔 유대인 부자 등이 살인 공범에 해당된다. 다윗을 공궤하지 않은 죄로 나발은 몸이 돌같이 굳어 열흘동안 앓다가 죽었고, 나사로를 돕지 않은 부자는 음부에서 물한방울도 얻지 못했다. 모든 어려운 이웃을 도울 수는 없더라도 능력이 되는대로 구제에 힘쓰는 것이 교회와 성도들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