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 시대란 중세를 꽉 누르고 있던 신이란 존재를 밀어내고 등장했다. 그렇다면 인문주의에 선 신보단 사람이, 종교철학보단 인문철학이 더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인문주의로 정신의 우월성은 더욱 부각 되다 2 인문주의 시대의 포문을 연 사람은 당연히 데카 르트이고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그의 말은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명언 중의 명언이 되었다. 이 말은 ‘신만이 나를 증명할 수 있다’는 생각을 무너뜨리고, ‘나는 나 스스로 증명할 수 있다'며 인문주의의 문을 활짝 열어 재낀 것이다. 신을 통해 모든 것을 증명하려 던 한계를 넘어 자신의 인식을 통해 나와 세상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니 분명 진일 보한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간과한 것은 '인간 정신의 우월함만 강변했을 뿐, 정신의 분열상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신을 인간으로 대체했을 뿐 여전히 정신(영)의 우월성에서는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정신의 우월 성만을 더 강화시켰을 뿐이다.
데카르트가 놓친 것
데카르트의 말이 일리가 있으려면 당연히 '생각 하는 나’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야 한다.내 자 신이 여러 명이 있거나, 생각이 수시로 바뀐다면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법원에서 판 결을 내릴 때 증언이 성립하려면 당연히 일관성 이 있어야 하며, 전체적인 흐름과 맞아 떨어져야 한다. 증언 내용이 시시때때로 바뀌거나 전체 정 황과 맞지 않으면 위증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이 나를 증명해줄 땐 나의 생각이 한결 같냐 하 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지 않아도 사 회적인 생각, 신의 생각이 있기에 그것에 철저히 맞추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나를 증명 해야 한다면, 나의 생각은 분열되어서도 들쑥날 쑥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의 사고란 단일할 수도 없고, 일관적 일 수도 없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나의 의식 속엔 '이번엔 좀 더 유머를 섞어가며 글을 써볼까’, ‘역사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데, 그 것부터 먼저 마치고 쓸까?’, ‘배가 고픈데 밥을 좀 먹어볼까?’, ‘뭔 글을 쓰는데 일주일 내내 걸리네. 그냥 여기서 대충 마무리 짓고 쉴까?’, ‘그래도 시 작한 것이니 마무리까지 잘 지어야지’ 하는 등등 의 많은 생각들이 스친다. 이런 생각 가운데 어떤 생각이 진정한 나의 생각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 까? 아마 데카르트는 그렇게 분열된 나를 향해 ‘사람이 일관적이어야지 이랬다저랬다 하면 못 써’라고 말할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아 이덴티티』다. 수많은 자아가 하나의 마을을 이 루며 살고 있지만, 결국 그 중에 하나의 자아가 모든 자아를 죽이고 살아남는다는 얘기다. 자아 의 일관성에 대해 이 영화만큼 상징적이면서 매우 폭력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도 드물다.
우리는 암묵적으로 ‘영과 육’을 분리하여 몸은 감 정기복이 심한 사람처럼 수시로 바뀌지만 정신은 그런 육체의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결 같 을 수 있다고 배워왔다.
이런 우리들의 착각에 대해 우치다쌤은 중학생과 인터뷰한 내용을 소개한다. 중학생들이 개풍관에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 이 ‘자기답게 살아라’라고 말을 하는데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자기답다'란 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중학생 이 던지기엔 다소 어른스러운 질문이고, 뭔가 그 럴 듯해 보이는 질문이어서 그걸 듣는 순간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자 우치다쌤은 “물론 저는 모든 사람들이 자 기답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학생들이 생 각하는 ‘자기답다’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라 고 정리했다. 이 결론이야말로 '자기답다’에 대해 여러 정의가 있음을 보여주는 명답이라 할 수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