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지금은 그만두신 전직 기관장은 등산광이셨는데 그 분은 특이하게도 토요산행을 즐기셨
다. 그러니까 토요일 일과가 끝나는 오후 1시를 조금 넘어서 산행지로 출발하는 것인데 그
러다 보니 서울에서 가까운 산을 자주 가게 된다. 보통 사내 마이크로 버스를 이용하여 직
원 20여명과 같이 산행을 하곤 했는데 매주 떠나는 산행인지라 20여명을 채우기가 여간 힘
든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산악회 총무를 맡고 있던 김아무개라는 직원은 매번 쪽수를 채우
느라 이 사무실 저 사무실을 다니며 제발 산에좀 같이 가자고 애원하기 일쑤였다.
나는 보통 혼자 또는 두어명이 가는 산행을 즐기는 편이고 여러사람이 몰려가는 등산은
별로 달가와 하지 않았던 터라 직장 토요산행에는 거의 참가하지 않는 편이었다. 어느 날
산악회 총무 김아무개씨가 우리 사무실로 찾아와 산행에 참가해 달라고 애걸조의 종용을 하
므로 토요산행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검단산이었다. 검단산은 경기도에 있는 산으로 그리
높지는 않으나 등로 초입부터 가파른 경사지를 올라야 하므로 다소 힘이드는 산이다. 특히
여름에 그 가파른 길을 오르다보면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곤 한다. 그날 바로 그 김아무개
씨는 큼지막한 수박 한 덩이를 특수장치를 한 배낭에 짊어지고는 땀을 비오듯 흘리며 경사
진 등로를 오르고 있었다.
수박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이건 누가 봐도 무리지 싶었다. 수박이 얼마나 무거운가. 평지에서도 수박 한 통을 들고
가려면 땀이 삐질삐질 나거늘 수박을 짊어지고 등산을 한다는게 제정신인가 말이다. 김아무
개씨는 앞이마가 시원하게 벗겨진 소위 공짜를 좋아한다는 대머리인데 실상은 속이 꽉찬 인
물이다. 수박을 짊어지고 가파른 길을 오르는 그의 대머리에서는 샘솟듯 땀이 방울방웃 솟
아나와 얼굴을 타고 또르륵 굴러내릴 정도였다. 하도 안스러워 바톤터치를 하자고 해도 막
무가내다.
검단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팔당호수가 보이고 그 주변의 풍경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불어오는 단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을 때 김아무개씨는 짊을 풀고는 지고온 수박을 여러조
각으로 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조각씩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나도 한 조각
을 받아 단 번에 먹어치웠다. 이때 그 수박맛을 무슨 맛이라고 해야할까.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울릉도 호박엿이 이런 맛일까. 아니면 애인과의 달콤한 키스가 이런 맛일
까. 좌우간 수박 한조각의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여기저기서 꿀맛같다는 탄성이 잦아지기
시작하더니 남은 거 없냐며 아우성들이다. 김아무개씨는 지긋이 눈웃음 지으며 게걸스럽게
수박을 먹고있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 아직도 덜닦인 땀이 왜그리 아름
다워 보이던지.
둘.
나와 울집 한신댁을 포함하여 5명이 일행을 이루어 강원도 평창 수정산에 등산겸 산나물
체취를 하러 갔었다. 수정산은 등산객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산이지만 일천미터를
넘는 꽤 높은 산이다. 우리는 등로를 벗어나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면서 산나물을 체취하였
다. 그러다 보니 일행이 제각각 흩어져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우리는 가끔 야호'를 외치
며 흩어졌다 모이고 흩어졌다 모이곤 하였는데 나는 한신댁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다.
이것은 취나물, 저것은 곰취, 저것은 단풍취라고 하면서 가르쳐 주는 데 나는 도시 그것을
구별해 내기가 어려워 옆에서 멀거니 구경만 했다. 사실 멀거니 구경만 했다고 했지만 그건
정말 고역중의 고역이었다. 한신댁은 날이면 날마다 새벽 3시에 도봉산을 다녀오는 철녀인
데다가 나물을 캐는 재미까지 있으니 가파른 산을 오르내리면서도 힘들줄 몰랐지만 그 뒤를
따라 다니는 나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닌 것이다. 산에 관한한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나에게도 한신댁에게 만큼은 이겨볼 재간이 없다. 가끔은 더덕 군락지를 발견하여
그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더덕을 캐는 재미도 있기는 하였으나 한신댁 꽁무니를 따라 다니
던 나는 언제나 나물 체취가 끝날까를 생각하며 가져온 가방이 빨리 채워지기를 학수고대하
였다. 그렇게 3시간 정도 나물을 체취하고 나서야 우리는 정상 등로로 접어들어 정상을 향
해 본격 등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물을 체취하면서 물을 마구 마셔댄 터여서 우리일행의
수통에는 물이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나마 나는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 체질이어서 수통에
아직은 제법 물이 남아 있었으나 일행에게 양보하는 바람에 물을 거의 마시지 못하였다. 수
정산 정상에 오르자 드디어 나도 목이 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다 떨어지고 없었
다. 때가 되어 가져온 떡이며 김밥 등을 점심으로 먹는데 물이 없으니 목을 넘어가는 음식
물이 마치 돌덩이가 넘어가는 것 같았다. 그 흔한 물이 이렇게 절실한 줄이야 누가 알았겠
나. 나는 하는 수 없이 일행에게 한신댁과 같이 먼저 하산을 하겠노라 말하고 거의 뛰다시
피 물이 있는 곳을 향해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간에 한신댁은 곰취 군락지를 발견하고
는 또다시 나물를 캐러 저쪽 아래 등로를 벗아난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하는
수 없이 3거리 등산로에서 우리가 오른 오른쪽 등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 길가 바위에 앉아
한신댁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20여분쯤 지났을까, 한신댁이 오지를 않기에 지현아!'
하고 불렀더니 알았어'한다. 다시 10여분이 지나 지현아!'하고 불렀더니 대답이 없다. 지현
아! 지현아!! 지현아!!! 대답이 없다. 내려온 길을 되돌아 올라가 지현아! 불렀더니 또 대답이
없다. 주변 경사진 곳을 따라 내려갔다 올라왔다 마구 찾으며 지현아!를 불렀으나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지현아! 병성아! 한신댁! 나는
목청을 돋구어 미친 듯이 호칭이란 호칭을 다 동원하여 아내를 불러보았지만 산은 조용하고
묵묵부답이었다. 그렇잖아도 목이 타던 차에 입은 바싹바싹 말라왔다. 도데체 이눔의 여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뱀에게 물려 어디 쓰려져 있는 것은 아닌가. 낙상하지는 않았는가. 벼라
별 생각을 다 하면서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한신댁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터덜거리며 다
시 세갈래 등로쪽으로 내려오다가 머리가 반짝했다. 그렇지, 아마도 그럴거야. 이눔의 여자
가 얼마나 길치였더란 말이냐. 우리가 올라온 길이 바로 이쪽길인데 길치중의 길치인 한신
댁은 분명코 저쪽길로 내려갔으리라. 나는 그 길로 뛰기 시작했다. 길은 길인 것 같은 데 길
같지 않고 길같지 않은데 또 길같기도 한 그런 길을 따라 마구마구 뛰어내려갔다. 뛰고 또
뛰어 이제는 어느 정도 따라잡았을 거라는 지점에서 또다시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지현아!
지현아!!....그러나 역시 묵묵부답이다. 슬슬 부아가 오르기 시작한다. 이눔의 여자가.. 아니지
여편네가....도데체 얼마나 빨리 내려갔길래 이리 뛰어도 따라 잡을 수가 없더란 말이냐. 나
는 뛰어내려가면서 계속 지현아'를 목청껏 불러댔지만 역시 대답이 없었다. 이제는 다리가
휘청거린다. 입은 마르다 못해 퍼석거리기 조차 한다. 드디어 나의 입에서는 욕지거리가 나
오기 시작한다. 야!! 최똥개,이 바보 멍충아,야아아아.. 악!, 케겍,콜록콜록..써벌..너 정말
멍청하지? 왜 그렇게 멍청하냐구....소리를 질렀다가 궁시렁 거렸다가 하면서도 열심히 뛰고
또 뛰어 드디어 산 아래까지 다 내려왔으나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그렇
담 아내가 이리 내려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정말 뱀에게 물려서 어디 쓰러져 있는 것은 아
닐까. 성질이 나다가 걱정이 되다가 나의 마음이 오락가락하고 있을 때 저 앞쪽으로 좔좔좔
물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얼른 그곳으로 달려갔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엎드려
흐르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물맛 좋고....흐르는 물에 손을 담그고 땀과 나무먼지로 진탕
이 된 얼굴을 물속깊이 들이밀었다. 시원하고... 자! 이제 찬찬히 생각해 보는거다. 한신댁은
뱀에 물렸을 리가 없을거다..암..그렇구말구..아마 나를 찾으려고 지딴에는 무지 빠르게 뛰어
내려갔겠지. 그러니 지금쯤 저 아래 마을에 당도해서 나에게 전화할거야...과연 잠시후에 핸
드폰이 울렸다. 전화기 폴더를 열고 귀에 대자 '난데..'한다. 난데? 그럼 자네가 최똥개란 말
이지. 근데 지금 어딧냐고!! 냅다 소리를 질러댔는데 전화가 툭 끊어진다. 잠시후 또 전화가
걸려온다. '난데..들려?'한다. '지금 어디 있냐고' 또 전화가 끊어진다. 잠시후 또 전화가 걸려
오는데...'잘 안들리는데 듣기만 해. 여기는 여기저기 저기여긴데.. 그리로 와'한다. 산을 내려
와서도 콘크리트길을 한참을 내려와서야 평창휴게소에 닿을 수 있었다. 한신댁이 씨익웃으
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실눈을 뜨고는 있는 표정 없는 표정을 다 지어가면서 최대한도로
화난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한신댁은 유유자적 내팔을 끌어당기면서 음식점으로 데리고 가더
니 된장찌개 한 그릇을 시킨다. 어지간히 뛰어내려왔을 터이니 배도 고플터, 된장찌개나 먹
으면서 진정하라는 투다. 참 대단한 아짐이다.
그날 저녁 집에 온 나는 한신댁과 한판 전투를 벌였다. 내가 엎어치기 한판승을 따면 한
신댁은 안다리 후리기로 한판승을 따면서 주거니 받거니 했다. 둘이 한 몸이 되어 데굴데굴
구르는데 그 맛이 꿀맛같았다. 여체의 몸에서는 수박처럼 과액이 흐르는데 너무 많이 흘러
서 나는 다 받아 먹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한신댁은 어제 따온 곰취와 더덕을 밥상에 올려 놓았다. 독특한 향내가
주방에 가득했다.
셋.
저번저번 주에 도봉산을 혼자 올랐다. 도봉산 공원을 조금 지나면 구한말 조대비가 살았
다고 하나 지금은 만장사라는 절이 나온다. 그 절의 담장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아가면 그
유명한 다락능선으로 가는 길이다. 다락능선을 못미쳐 체육공원이 제법 크게 자리하고 있는
데 대학생 대여섯명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달란다. 카메라의 초점을 학생들에게 맞추고 있는
데 아카시아 향내가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학생들에게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곳으로 자리를
조금 옮기라 하여 사진을 찍어주었다. 다시 다락능선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등로에 키작은
아카시아가 꽃을 활짝피우고 있었다. 꽃 한 줄기를 따서 먹어보니 어릴 적 먹던 맛 그대로
다. 활짝 핀 아카시아는 제법 달작지근한 맛이 나고, 꽃피기전 봉우리만 핀 아카시아는 풋풋
한 맛이 난다. 그중 반개한 아카시아꽃이 제일 맛이 좋다.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자기에게도
하나 따주라 하기에 제일 맛있음직한 것으로 따주었더니 그걸 받아들고는 한송이 한송이씩
손가락으로 따먹는다. 아짐! 그건 그렇게 먹는게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먹는 겁니다' 하면
서 내가 시범을 보였다. 먼저 아카시아 꽃송이 끝대를 오른손으로 잡고 입을 벌려 왼쪽 입
가에 댄 다음 입을 다문다. 그런후 손을 오른쪽으로 슥 당기면 아카시아 꽃송이들이 한꺼번
에 입안으로 조르륵 들어오는 것이다. 아카시아는 이렇게 먹는 겁니다. 아짐은 내가 시범을
보인대로 아카시아꽃을 먹더니 호호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달아난다.
이윽고 다락능선에 다다른다. 다락능선은 리찌가 많은 곳이다. 리찌를 타지 않더라고 우회
하는 길이 있으므로 산을 오르는데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으나 오늘은 한 번 리찌를 타 보
는 거다. 맞춤 등산화 주인이 반리찌화라고 했으니 잘 하면 리찌를 탈 수도 있으리라. 10여
미터쯤 되는 리찌를 타기로 했다. 3m쯤이나 올랐을까. 크랙을 손으로 잡기는 했으나 신발이
미끄러진다. 손을 의지해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썻으나 역부족이다. 손에 힘이 빠지
더니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아! 이렇게 해서 산에서 죽는 것이구나. 순간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팔뚝과 무릎을 바위에 착 붙였더니 그나마 다소 미끄러지는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다행이 아래쪽에 리찌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던 고수들이 서너명 있어서 떨어지는 나를 붙잡
아 주었다. 팔뚝에는 긁힌자욱이 선명하고 무릎은 까져 피가 나왔다. 대충 지혈을 하고 좀더
올라 포대능선에 닿아서야 점심식사를 했다. 가방에서 김밥 두 줄과 토마토 한 개 그리고
참외 하나를 꺼낸다. 토마토는 애피타이저다. 김밥은 주메뉴고 참외는 후식이다. 잠시 바위
에서 미끄러지던 내 모습을 상상해 본다. 거의 치명적인 사고를 치를 뻔했던 때가 방금전인
데 나는 지금 밥을 먹고 참외를 깎고 있다. 웃음이 난다. 그러나 어찌하랴. 먹는건 먹는거다.
참외맛이 오늘따라 왜이리 달콤하더냐.
넷.
얼마전 가입해 있던 산행카페의 정기모임에 나갔다. 모임에도 잘 나가지 않고 게시판에
글도 잘 올리지 않고 다만 산행에 몇 번 따라간 것이 전부인데 나보고 산악대장을 하란다.
이게 뭔 소리래 하면서 의아해 하고 있는 사이 여기저기서 우~하며 박수를 치고 난리다. 이
런 걸 정말 엉겁결이라고 하는가 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산악대장이 된 것이다. 참 살다가
보니 별일도 다있다. 나는 나를 조금 알고 있는데 그 조금에는 내가 어디 묶여있기를 싫어
한다는 것이 하나다. 어디를 가더라도 즉흥적일 때가 많고 미리미리 약속도 잘 하지 않는다.
약속을 일단 하고나면 또한 그 약속을 거의 깨지 않는다. 그래서 약속은 나를 구속할 때가
많다. 산악대장을 일단 맡았으면 그것도 하나의 약속이므로 산악대장으로서 하여야 할 일들
은 꼭 해야함으로 그래서 어떤 직책은 또한 나를 구속한다.
산악대장이 되고서 처음으로 정기산행을 경기도 가평 명지산으로 공지한 터라 나는 하는
수 없이 명지산 사전답사를 가게 되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도 뭔가 께름직하기만 하다.
좋아서 가는 것이 아니라 의무감으로 간다는 중압감이리라. 그래도 역시 어딘가를 간다는
것은 나에게는 기쁨이기도 하다. 광릉수목원을 지날즈음 차창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킨다. 온갖 나무에서 뿜어내는 산소내음은 신선하다 못해 비릿하기까지 하다. 운악산 가
는쪽 길을 버리고 현리를 거쳐 청평으로 가는 길가에는 애기똥풀 천국이다. 온통 노랗게 줄
지어 피어났다. 청평을 거쳐 가평읍내를 관통한 다음부터는 수량이 풍부하여 맑고 아름다운
가평천을 좌측으로 두고 차를 달린다. 개천가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만발해 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도로를 선정한다면 이곳 길이 필히 한몫하리다. 가평천을 따라 20여분을 달리면
이윽고 명지산 입구인 익근리에 닿는다.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30분. 아침을 걸렀으므로
아침겸 점심식사를 익근리 식당에 한다음 물 두 병과 건빵 한 봉지를 샀다. 물 한병에 500
원이니까 두 병이면 1000원, 건빵이 1000원. 그래서 합이 2000원이면 되는 것을 3300원을 받
는다. 물값은 두배 건빵값은 300원을 더 붙인 것이다. 왜이렇게 비싸요하고 따졌더니 이곳에
서는 다 그렇단다. 산꼭대기에서 파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에 면한 곳에서 아직도 이렇게 받
는 곳이 있다니 기분이 상한다. 그렇다면 다음부터 누가 이곳에서 물건을 사겠는가. 하나만
알았지 둘은 정말 모르는 상술이다. 아무튼지 물 두병과 건빵 한 봉지를 가방에 넣고 본격
등산길에 나섰다. 익근리 계곡을 따라 너른 길이 승천사까지 이어져 있기에 아마도 여기까
지만 너른 길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큰 트럭이 다닐 수 있을만큼 너른 길이, 그것도 먼지 날
리는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80년대 중반에 왔던 명지산하고는 천양지차다. 그때만 해
도 명지산은 등산객들 사이에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오지중의 오지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퍼석거리는 길이 근 한 시간 동안 계속 이어졌다. 햇빛을 가릴만한 나무도 없
다. 회원들에게 욕깨나 먹겠다는 불안감이 든다. 어찌된 영문인가 했더니 지난 해 태풍 루사
때 산사태가 나서 나무들이 많이 뽑혔는데 그 나무들을 운반하고 다시 식재를 하기위해서
길을 낸 것이라 한다. 길가에 잘려나간 큰 소나무들을 보니 마음까지 잘려나간 느낌이다.
다행히 풀섶에 무리지어 있는 찔레가 새하얀 꽃을 활짝 피워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찔레
꽃 한송이에 코를 대어 본다. 톡쏘는 향기다. 조금 떨어져 한참동안 찔레꽃 향기에 취해본
다. 명지산 입구는 찔레꽃 일색이다. 찔레꽃은 모두 하얀색이다. 그런데 저쪽 찔레꽃 한 무
더기가 연분홍이다. 찔레꽃이 맞는 것일까' 의아심이 일어 다가가본다. 찔레꽃이다. 꽃 안쪽
으로는 하얀색에 가깝고 바깥쪽은 핑크빛이다. 이걸 군계일학이라고 하는 것일까. 찔레꽃 붉
게 물든 남쪽나라 내 고향이라는 노랫말의 그 붉은 찔레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같다. 많
은 것중에 단 하나. 분홍의 찔레가 너무도 눈에 밟힌다. 문득 대학로에서 장구패와 공연하던
장사익이 생각난다.
찔레꽃
하얀 꽃 찔레꽃/ 순박한 꽃 찔레꽃/
별처럼 슬픈 찔레꽃/ 달처럼 서러운 찔레꽃/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밤세워 울었지/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 그래서 울었지 목놓아 울었지/
아! 노래하며 울었지/ 아! 춤추며 울었지/
아! 당신은 찔레꽃
찔레꽃은 왜 별처럼 왜 달처럼 슬프고도 서러운 것일까. 향기조차 슬프다니. 왜 그럴까.
그 답은 바로 당신때문이다. 애련한 당신. 한어린 당신. 철없는 당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
떠나가는 당신. 그 모든 당신 때문에 깊은 밤 찔레꽃 옆에서 슬프게 울고 서럽게 춤추는 것
이다. 당신이 찔레꽃이기 때문에.
이제 큰 길이 끝나고 소로가 나타난다. 등로는 제법 가파르다. 어느만큼 올랐을까, 갑자기
배가 꿈틀거리더니 뒤가 심란하다. 길에서 벗어나 외진 곳에 엉덩이를 까고 앉으니 좍이다.
무얼 먹었기에 배탈이 난 것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의정부 축석고개아래 주유소에서 기름
을 넣을 때 자판기에서 빼먹은 커피가 주범인 것 같다. 먹을 때부터 찝찝한 느낌이 들더니
이제사 소식이 온 것이다. 볼일을 다 보고 가방을 뒤졌으나 아뿔싸 휴지가 없다. 사무실에서
화장실에 갔을 때 어쩌다 이런 경우를 당하곤 했었다. 휴지는 늘상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에
무심코 엉덩이를 까고 느긎하게 볼일을 본 후, 휴지통이 비어있을 때의 황당함이라니. 늘 곁
에 있어서 고마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간과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깔끔하지는
않으나 나뭇잎으로 대충 뒷마무리를 했다. 등로를 오르다 두어 번 더 엉덩이를 깟다. 배가
앞뒤로 착 달라붙는다. 만만찮은 등로를 2시간, 익근리에서부터는 3시간 만에 명지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은 주변보다 높게 솟은 바위가 있다. 그 바위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숲이 융단처럼 펼쳐져 보인다. 초록의 바다다. 명지산 제2봉을 거쳐 하산을 시작한다.
하산코스는 더욱더 가파르다. 배가 고파온다. 배탈로 비워진 아랫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
다. 먹을 거라곤 비상으로 가져온 건빵과 물뿐이다. 언젠가 건빵을 사다가 딸 아이에게 주었
더니 아이는 그것도 먹을 수 있는 거냐는 듯 시큰둥하던 기억이 난다. 건빵은 이제 아이들
에게는 더 이상 먹을거리가 아니다. 등산할 때 비상식으로 두어 봉지씩 가져갔다가도 먹지
않고 도로 가져오던 것이 바로 건빵이다. 그러나 오늘을 다르다. 이것마져 가져오지 않았다
면 아마 허기로 탈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장기가 최고의 반찬이라더니 푸석한 건빵이
꿀맛같다. 건빵을 먹으며 내려오는데 낙엽위에 떨어져 있는 방울도마토 하나가 눈에 띤다.
누군가 떨구고 간 모양이다. 그것을 집어들어 대충 닦은 후 입안에 쏙 넣었더니 정말이지
이건 정말이지 죽이는 맛이다.
다섯.
명지산을 다녀와 대충 샤워한 후 다시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서자 한신댁이 째려본다. 산
에 갔다와서 등산복을 갖춰입고 그것도 야밤에 또 어디를 가냐는 투다. 싫다는 한신댁을 억
지로 끌어안고 쪼옥~하면서 좀 봐주라고 내숭을 떨었더니 빈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으나
아무튼지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한다. 명지산은 어쩔 수 없이 사전답사를 다녀온 것이고 이
제 떠나는 무박 2일의 소백산 철쭉산행이야말로 벌써 한 달 전부터 예약이 되어 있는 산행
이다. 더구나 이 산행은 예전에 나의 마음을 아리게 했던 여친이 주관한 것이 아닌가. 이럴
땐 한신댁에게 참 미안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음에 와닿는 느낌까지 내가 나의 힘으로
어찌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인가.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동대문에 도착하자 후배 부부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다. 여친은 아직 오지 않았다. 후배 부부가 같은 좌석에 앉을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여친은 나와 한 좌석에 앉아갈 것이다. 그런데 느닫없이 후배놈이 꼬추가루를 뿌린
다. 나와 여친이 같은 좌석에 앉으면 어색할 지도 모르니 자기가 나와 같이 앉겠다며 비어
있는 옆자리에 넙죽 앉는 것이다. 녀석이 여친과 나의 예전 미묘했던 모습들을 간파한 모양
이다. 아니 너 지금 무슨 짓이니'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리는데 입에서는 괜찮은데...'라고 모기
숨쉬는 소리를 한다. 아!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때 나에게 여친에게
서 전화가 왔다. 오셨어요? 네, 저는 방금전 도착했는데요 천천히 오세요. 나는 부러 꼬맹맹
이 소리를 하면서 무지 다정한 척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곁들인다. 이때 후배 와이프가 넌지
시 후배를 끌어당겨 자기 자리로 오게 한다. 아무래도 언니가 선배님하고 같이 앉아야겠어
요'하면서 주석까지 달아주는데 그 말이 왜그리 달콤하던지.. 나는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
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해놓고 보니 너무 뻔뻔한 것 같아서 껄껄걸 쑥스런 너털웃음을 웃고
야 말았다. 소백산 입구에 새벽 2시에 도착하였으나 비가 내렸고 산행을 시작하는 새벽 4시
경에도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우리일행 4명은 아쉽지만 등반을 포기하고 대신 부석사로 향
했다. 부석사 입구는 예전의 어수선했던 모습이 깔끔하게 변해있었다. 일주문을 거쳐 경사진
길을 여친과 한 우산을 쓰고 걸었다. 비오는 부석사의 정경은 풋풋한 나무들과 어울려 더욱
정겨워 보였다. 안양루 아래서 여친이 장만해온 음식을 먹으며 저 아래 낮은 산을 바라보았
다.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여친은 바그네리안답게 바그너 음악의 우수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
고 나는 브람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정말 오랜만에 긴 시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여친
에게서 풍기는 잔잔한 향수내음과 더불어 그 몸과 마음에서 은은한 향내가 전해져 왔다. 예
전의 그 아린 마음은 아닐지라도, 그래서 오히려 더 편한 것인지는 몰라도, 같이 있다는 사
실만으로도 그 맛이 얼마나 달콤하던가. 후배들아! 고맙다.
여섯.
그래서 말하거니, 너희가 삶에서 느끼는 순간순간의 이 모든 맛들을 알기나 하는 것이냐!!
-목우도
첫댓글 누구나 알고있는 공통된 비밀스러움..그러나 당사자간에만 통용될거라고 믿고 싶어 하는 순진한 모로스부호같은 목우도님의 글..활자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만한 일요일 한낮에 참 잘 읽었어요..고마워요~^^*그리구 이맛들중에 몇개는 안다는 말씀도 곁들임니다~
우도 아찌~^^ 안녕하세요.. 아찌 쓰신 중에 젤루 맛난 글이었어요..적어도 나한테는요.^^ 근데요.. 조오기 여섯번째 글에서는요.. 왜 화를 내구 그러세요~~ 깜딱 놀라짜나요.. 아흑. ㅠㅠ.... 장난이구용~ ^^; 즐건 저녁 보내세요~~~ ^^*
님의 글을 읽다 문득 어떤 사람일까 굴금해서 회원정보를 보았어요.실례인가요? 참 건강하고 젊게 사시네요. 글을 읽으며 꼭 내가 산행을 한 기분이었어요. 좋은 주말저녁 보내세요.
연화님,다빈님,풀잎님, 오늘 꼬리글 달아주신 분들은 모두 두 글자 닉이네요. 연화님은 아마도 저보다 더 많은 인생의 맛을 느끼실 수 있을거에요. 그런 느낌이 들어요. 요즘 다빈님의 글 열심히 보고 있어요. 어떨 때는 그 신선한 내용에 깜짝 놀랄 때도 있구요. 풀잎님, 아무캐두 저 회원정보를 좀 숨겨야 겠죠?
닉네임이 점잖아서 그렇게 보일수도 있겠네요..목우도님의 비하면 턱없이 부족해요..휴일 잘 보내셨나요?..그리구 산나물계의 거목으로 우뚝서신 한신댁의 행방과 안전을 걱정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는 이말도 하고 싶었어요~
목우도님, 정말이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저희가 어찌 님이 드신 산삼과도 같은 맛을 알겠습니까? 많이 부럽기도 하구여.. 조금 더 인생을 살아보면 느낄 수 있는 맛이겠지요 산삼을 5뿌리나 드셨군여 ^^* 울매나 장수하실라꼬요~~ 복장을 간소화 해야겠다여.. 런닝으루다가..산삼을 드시면 열이 많이 오른다지요??
애타게 찾으시던 그 분을 다시 만나신 건가요? 행복해 보이시네요,,,^^ 그 맛을 알려면 아무래도 등산을 해야할 것 같네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