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한국자유주의학회 2026년 경제학 공동학술대회 세미나 개최 및 총회 공고
B. 자유주의학회 세미나
장소: 중앙대학교 310관 618호
일자: 2026년 2월 5일 9:20-10:50
사회자: 최창규 (명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1. 발표주제:하이에크의 두 개의 질서를 통해 본 동양 문명의 택시스와 코스모스
발표자: 오세희(자유기업원, 초빙연구위윈)
토론자 1: 최진덕(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토론자 2: 민경국(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2. 발표주제:자유주의 발아와 일제강점기 굴절ㅡ이승만의 Japan Inside Out 중심으로
발표자: 조맹기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토론자 1: 김이석(아시아투데이, 논설고문)
토론자 2: 류석춘(연세대, 정년교수)
3. 발표주제: 하이에키안 관점에서 본 공화주의적 자유개념
발표자 : 민경국(강원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토론자 1: 서병훈(숭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
토론자 2: 김상철(한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맹기(서강대 언론대학원 명예교수)
이승만의 생명·자유·재산 기본권 코드;
자유주의 발아와 일제강점기 굴절-이승만의 Japan Inside Out 중심으로.
자유의 발아, 종교·언론의 자유.
이승만의 기독교적 자유주의 발아, 그리고 일제강점기 굴절을 거쳐 1954년 ‘만국공법’을 통한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골격이 정해진다. 생명·자유·재산의 제헌헌법 기본권 코드가 형성된 것이다. 본 과제는 그 전 과정의 흩어진 궤적을 엮어서 조망한다. 그의 자유는 종교뿐만 아니라, 언론자유 그리고 ‘통상교제’로까지 설명이 가능하게 된다.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7월 24일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옛 조선총독부)광장에서 헌정사상 최초의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그는 취임사 첫머리에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느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라고 밝혔다.(1948.07.24. 취임사; 이승만 1941/2025: 306) 그렇다면 이 대통령의 ‘하느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자. 후자로 조혜자 여사(이승만 양아들 이인수 박사 부인)는 ‘시아버지는 도보로 전국을 3번 국토순방을 하셨다. 그 후 전국적 인물이 되었다.’라고 이화장을 방문한 필자에게 귀뜸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도보 행사들로 전국민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하느님 은혜’는 미연방수정헌법 1호(The First Amendment 또는 Amendment I)(1791)를 상기시킬 수 있다. 그 과제가 이 연구의 독특성이다. 평생 그는 하느님과 ‘일치’를 이뤘다. 언론학 연구자로서 그의 취임사는 종교와 언론자유를 함께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종교적 사유의 ‘자기 확실성’(self certainty)은 항상 교화(계몽)을 통해 현장의 실용성(usefulness)과 맞물린다. 그의 자유의 사고는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언론의 자유가 함께 어우러진다.
미국 연방수정헌법 제1조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국교금지조항),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정부에 대한 탄원의 권리를 막는 어떠한 법 제정도 금지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사 첫머리의 ‘하느님의 은혜’ 삶의 궤적은 그의 이해의 어뜸 요소가 되고, 건국과 더불어 그의 12년 간의 통치철학의 근간이 된다. 현재 좌익에서 이야기하는 탐욕적 독재자 이승만과는 거리가 먼 측면이다.
이승만은 배재학당 학생회에서 창간한 《협성회회보》에서 “나는 몇몇 청년의 도움을 받으면서 신문을 시작하였는데, 협성회회보는 한국사람들만으로 제작되는 신문으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의 것이다. 작은 신문이기는 했으나 그 지면을 통해 자유와 평등이라는 위험한 사상을 나의 힘을 더해서 역설했다.”라고 했다.(이정식, 1995:89) 즉, 이승만은 신문이 자유와 평등을 확산하는 도구가 됨을 역설한 것이다.
이승만은 신문의 세가지 목적으로 “⓵학문이요, ⓶경계요, ⓷합심이라”라고 했다.(이승만, 1995: 134) 즉, 신문은 교화의 도구로서, 환경감시로서 사회통합을 시도한다. 이는 최초의 일간신문 《매일신문》에서 그 내용을 밝힌 것이다. 좀더 풀이하면 통합으로서의 신문은 정확한 정보를 같은 논조로 계속 독자에게 접하게 함으로써, 의식의 통일을 구현할 수 있게 한다. 또한 환경감시는 정부기구를 감시하고, 환경의 변화를 독자에게 감지케 한다. 끝으로 이승만이 교화(계몽)의 도구로서, 신문을 고려에 넣은 것은 감각적 현실(sensuous reality) 인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습관화된 고정관념을 깨는 노력에 의미를 둔다.
평생 책과 글쓰기를 가까이한 이승만은 늘 교화로 고정관념을 깨었지만, ‘독재자’ 및 ‘사적 카르텔’을 형성시키는 인성으로 평가했다. 이는 잘못 이해를 한 것이다. 그 왜곡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이승만의 기독교적 삶은 한성감옥에서 시작되었다. 한성감옥은 당시 대한제국의 열악한 참상을 보여주는 비참한 장소였다. 코레라가 창궐하는 시기에는 죄수는 흔히 목숨을 잃는 비참함 자체를 경험했다. 국가 재정이 허약한 당시 감옥상황은 현재인 누구나 상상을 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서장이 바뀐 감옥의 상황은 눈부시게 달라졌다.
새로 부임한 한성감옥의 김영선(金英善) 서장은 1900년 2월 14일 취임하자, 감옥을 단순히 벌을 주는 곳이 아니라 책과 다른 잡지를 보거나,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것을 독려했다.(Chong Sik Lee, 2001: 51)
당시 이승만은 많은 독서의 일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중국, 영어, 한국 책을 읽으며, 주제에도 소설부터 기독교, 역사, 법 그리고 외교 서적까지 포함했다. 그 책들은 선교사들이 제공함으로써, 종교와 역사에 관한 내용이 주종이었다. 당시 읽었던 책은 Robert Mackenzie’s Nineteenth Century, Peter Parley’s Universal History, William Griffis’s Corea: The Hermit Nation. 그리고 중국 번역이 포함되었다.(Yu Yoeng-ik, 1999: 15〜69; Chong Sik Lee, 2001: 54) 또한 선교사가 잡지와 신문을 제공했기에 이승만은 세상의 절박한 정보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 시간이 단순한 제도 연구의 변화뿐만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간주했다. 기적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선교사가 한성감옥에 대부분 책을 넣어줬기 때문이다. 그가 읽은 미국 잡지는 Christian Advocat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The American Monthly Review of Reviews 그리고 둘 월간, 2 주간이 포함되었다.(Chong Sik Lee, 2001: 55)
감리교 목회자 신흥우(申興雨, 1883.03.26.~1959.03.15.)는 감옥 동료로서 이승만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전망」(Outlook) 주간지를 이승만에게 읽을 것을 권고했다. 申 목사에 의하면 ‘이승만은 빈번히 눈을 감고 암송한 잡지 내용을 반복했다.’라고 했다.(Chong Sik Lee, 2001: 55)
이승만의 기독교적 삶의 궤적은 자유를 잉태하고, 그 자유는 언론의 자유와 함께 한다. 그 고리를 이승만이 풀어갔다. 이 논의는 독특한 언급이다. 이 논의의 목적은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일본의 상황과 비교함으로써, 그의 언론의 자유 논의를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원래 협성회보 기재원 그리고 매일신문·뎨국신문 논객으로 활동했다. 언론인에게 독재자 혹은 친일의 정파로 프레임을 씌우는 일은 자유주의 언론에서는 조심스러울 순 밖에 없다.
자유주의 저널리스트는 공정·정의를 바탕으로 보도에서 ‘뉴스의 정확성·객관성·공정성’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 연구는 이승만은 보도하고, 비판하고, 분석하는 언론인 본연의 자세에 충실한 실체를 밝힌다. ‘Japan Inside Out’은 그 전형적인 예이다. 1930년대 초 이승만이 가졌던 현실인식과 그 상황의 인과적 분석은 1945년 일본의 하와이 침략으로 실체가 명료하게 되었다. 1941년 집필한 책이 신뢰성을 얻고, 당시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랐다. 좌익의 이승만 ‘독재자’ 혹은 ‘친일론자’ 규정은 허위의식의 이데올로기임이 밝혀진 것이다. 본 연구는 이승만의 생명·자유·재산 기본권 코드 주제 하에 ⓵종교와 언론자유의 만남, ⓶ 일제강점기 시기 자유언론의 굴절, ⓷자유주의 발아, 일제강점기 굴절 그리고 완성 등 순서로 서술한다.
2. 종교와 언론자유의 만남.
「전망」은 당시 라이만 애브보트(Lyman Abbott, 1835∼1922)가 편집을 맡고 있고 있었다. 그는 당시 목회자, 강사, 작가, 편집자 등으로 미국 조야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몇 십만 독자를 상대하는 편집자였다. 그가 낸 책들은 5천에서 1만 권씩 팔려나갔다. 그리고 당시 「전망」은 매주 125,000의 독자를 기록했다.
애브보트는 당시 설교를 하는 목사 중에 최고의 영향력을 지녔다. 이승만은「전망」주간지를 통해 애브보트를 접촉했고, 적어도 4년(1900∼1903) 동안 이승만(25∼28세)의 정신세계를 형성시킬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Chong Sik Lee, 2001: 55) 이승만은 매주 한성감옥에서 목회자, 외국 선교사와 대면했다. 그러나 그 만남은 「전망」에서 매일 만나는 것과는 질적 차이가 있었다.
「전망」은 뉴욕에서 초교파 주간지로서, 1870년 블리철(Henry Ward Bleecher, 1813∼1887)에 의해 The Christian Union에서 시작했다. 1881년 이후 애브보트는 이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는 편집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1893년 블리철과 애브보트는 노예해방 운동에 관여하고, 시민혁명동안 자발적 연대를 조직했다.(Chong Sik Lee, 2001: 56)
68페이지의 주간 잡지를 운영하면서 이 출판사는 100페이지의 화보잡지를 월간으로 발행했다. 뉴스 해설, 피처물, 설교집, 책의 발췌, 어린이 색션 그리고 그 주의 책 등을 내용에 포함시켰다.
그 다루는 내용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스페인-미국전쟁(Spanish American War), 복스 무장봉기(Boxer uprising) 등을 취재하여 잡지에 게재하고, 단행본을 출간했다. 각국에 특파원을 보내, 그들 내용을 독자에게 전달했다.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한 후 「전망」잡지는 케난(George Kennan)을 보내 평정 상황과 번영에 대한 많은 기사를 작성토록 했다. 사진, 스케치, 지도 등 화보로 잡지와 화보집를 출간했다. 당시 인기있는 잡지 Harper’s Magazine은 같은 것은 아니지만, 애브보트는 1870년 전에 그 잡지 공동편집을 했다.
애버보트의 설교와 강의를 숙독한 이승만은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갈구함으로써, 「전망」을 복제코자 했다.(Chong Sik Lee, 2001: 57) 애버보트는 사회, 역사 등 모든 현상을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보기 때문이다. 그는 성경의 기원과 내용을 말할 뿐만 아니라, 현대 유행한 다윈(Charles Darwin)과 스펜스(Herbert Spencer) 등 모든 시대의 철학자를 같은 차원에서 논의했다.
애버보트는 박식했으나, 독단적은 아니었다. 그는 정보를 전하고, 설득하고, 결단력 있고 그리고 그 자체를 즐겼다. 그는 미국 독자들을 상대로 했지만, 유별나게 유림(儒林)이 볼 수 있도록 저술을 했다. 더욱이 유학적 윤리를 깔고 있어, 아시아의 유림들이 즐겨 읽을 수 있었다. 어떤 주제는 유림을 위해 특집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Chong Sik Lee, 2001: 57) 1899 후반기와 1900년은 그리스토 삶의 법칙(Christ’s Law of Life)과 그리고 선택된 주제는 진지하고, 정직하고, 신적 심성을 표출했으며, 그리고 희망을 찬양했다.
그의 논리 전개는 배재학당에서 교재를 쓸 수 있을 만큼 성숙한 기독교 가치관이었다. 구원 신앙을 바탕으로 신을 찬양·찬송한 애버보트 설교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설득력이 있었고, 「전망」의 독자의 고정관념을 깨는 교화의 역할을 했다. 그렇더라도 그의 저술은 비신학적 세상과 탐욕의 감각적 현실을 거세시켰다. 그는 성스럽고, 정의롭고 그리고 신에 경도된 삶을 살도록 권장한 것이다.
애브보트의「전망」은 설교와 강의 내용을 게재했다. 그 내용은 배재학당에까지 소개되었다. 배재학당의 해외 어학 학습을 하는 학생들에게「전망」은 진정한 인문학 교과서였다.(Chong Sik Lee, 2001: 56) 그 잡지에서 취급한 수십 장르는 미국노동자, 뉴잉글랜드의 농촌상황, 뉴 영국 의회 등에 관한 기사, 중국 폭동 등 국내외의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다. 더욱이 1899년 1900년 쯤에서 영국 사진을 포함한 「전망」연재물, 즉 세익스피어 삶, 20세기 퓨리터니즘 등은 토론의 주요 주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전망」을 구독한 배재학당의 학교 교육은 전혀 ‘주입식 교육’, ‘암기식 시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는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의 입장에서 세계 문물을 소개했음이 틀림이 없다. 배재학당의 당시 교육은 「전망」잡지가 좋은 교화내용임이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역동적 사회현상을 언급하되 그 세계관은 철저한 기독교적 가치를 담았다. ‘창세기’가 그들의 세계관이 되고, 창조적·창의적 사고가 그들 학생들에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전망」자체의 역동성·유연성은 진보적 사고의 보고임이 확실했다.
한편 죄수들은 현재와 다른 교화를 택했다. 이 옥중학당은 우남의 발의에 의해 설립된 학교였던 것이다.(https://www.christiandaily.co.kr/news/124681#share) 이승만이 만민공동회 집회(1898년 4월∼1899년)에서 꿈꿨던 그의 계몽의 실천은 한성감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승만은 양의종(양기탁), 신흥우, 유성준 등과 함께 한글, 국사, 윤리, 산수, 세계지리, 영어, 일어, 문법 그리고 성경과 찬송가를 같이하면서 기독교 전도의 장이 되기에 충분했다.
서적실은 과거 개신교 선교사들이 상해와 일본 등지에서 구입하여 차입해 준 기독교 및 청말 중국의 제도개혁 관련 서적 그리고 각종 정기 간행물로써 꾸며진 도서관이었다.
이승만이 본 당시 한국사회는 문제 덩어리였다.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가 낡고 썩은 한국을 새롭고 부강한 나라로 대치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국인의 인성은 피폐해 있었다. 민족의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오랫동안 억압받고 침탈의 결과로서 정신세계가 짐승처럼 거칠어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 이해득실로만 따졌다. 그 결과는 명료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첫째로 해야할 것은 사람들의 심성과 행위를 교화시키는 것이다. 설령 사법체계가 존재할지라도 국민의 외향적 행위를 교정하는 수준이었다.
기독교는 전체적으로 나라의 도움을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들을 희생할 수 있는 관점에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전도함으로써 심성의 변화를 가져오게 할 필요가 있게 된다.(Chong-Sik Lee, 2001; 62) ‘동포들의 애호’는 하느님의 사역자로서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나의 사랑이 아닌,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발상이다.
그럴지라도 이승만은 십자가 예수의 사랑 메시지를 완전한 과업으로 여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심성이 변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과업이었다. 기도와 회개의 반복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그때 구원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서구인의 기독교적 관점이라는 비판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기독교를 자유의 종교(the religion of liberty)로 믿었기 때문이다.(Chong-Sik Lee, 2001; 62) 그는 기독교의 구현체로 미국을 인식한 것이다. 이는 초심의 퓨리탄적 사고였다. 더욱이 부유·번영의 미국은 민주주의와 기독교가 공존한 세계임이 틀림아 없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과학적 사고는 기독교의 영적 사고와 갈등을 일으키기 일 쑤였다. 세상일에 몰두한 것은 곧 성령을 부정하고, 구원의 확실성을 도외시하게 된다. 그 여파로 애브보트의 동생 애드워드 애브보트(Edward Abbott)는 교구공동체와 관계를 단절하고, 성공회 교회(Episcopalian)로 개종을 택했다.(Chong Sik Lee, 2001: 57)
원론적으로 그렇지만 않다. 교회는 신앙과 이성을 서로 대입하는 두 힘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이성을 신앙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상보적 동반자라고 여깁이다.(방종우. 2026.01.11.) 아우구스티티노 성인은 “‘이해하기 위해 믿고, 믿기 위에 이해하라’는 말을 남겼다. 즉, 이성은 자연적 진리를, 신앙은 계시의 신비를 알게 함으로써 신앙은 이성을 오히려 억압하지 않고 완성합니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 윤리적 논쟁 속에서 신앙은 이성과의 대화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수호합니다.”
물론 세상일에 깊게 빠지고 이성에 무개 중심을 두게 되면 성령을 잃게 되고, 계시와 영생에는 관심이 멀어지게 마련이다. 애브보트도 같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진화이론을 믿게 되면 성령(聖靈)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이승만의 이성존중은 복음 신앙에서 멀어지게 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정치적으로 경도된 기독교의 경향에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Chong Sik Lee, 2001: p.62) 그 대신 이승만은 기독교가 낡고 부패한 국가를 새롭고, 번영된 국가로 태어날 도구가 됨을 확고하게 믿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우상을 파괴하고, 습관을 고치고 마음을 교화코자 했다. 지적·인격적 교화가 하느님의 왕국, 즉 번영된 사회의 상황을 연출할 수 있었다. 애브보트는 이를 자기계몽(self cultivation), 인성 계몽(character building)으로 표현했다.(Chong Sik Lee, 2001: 60)
이는 정약용(丁若鏞, 1761∼1836)과 함께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림은 수기(修己)에 열중한 나머지 국가의 문제, 즉 세상의 타락을 외면한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의 계몽이고, 습관을 바꾸는 일이었다. 기독교적 리더는 연민을 가지는 것을 원하고, 인간의 충성심과 존경을 사양한다. 이는 신유학(新儒學)의 경향과 일면 상통하는 일이다.
이승만은 인간 이성과 제도의 개선에 관심을 가진 나머지 더이상 인식론적 유학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그는 개인의 역할 그리고 그 기대로 형성된 제도에 관심을 둔 것이다. 그는 이성적 관점에서 정보를 분석하고, 논리를 찾고, 인과관계를 따지는 습관이다. 그의 논리는 종교와 이성을 함께 논한 차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동포들의 애호’로 국민과 같이 풀고자 했다. 그는 대통령 취임사에서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은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 남녀의 합심 협력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을 것을 믿는 바입니다.”라고 강조한다.(1948.07.24. 취임사; 이승만 1941/2025: 306)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하에 역할을 나누는 과정이다. “중대한 문제에 대하여 극렬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從多數) 통과된 후에는 아무 이의 없이 다 일심으로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활히 처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1948.07.24. 취임사; 이승만 1941/2025: 306)
“민주 정부는 백성이 주장하지 않으면, 그 정권이 필경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전국이 위험한 데 빠지는 법이니...의로운 자를 옹호하고 불의한 자를 물리쳐서 의(義)가 서고 사(私)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전에는 일꾼이 소인을 가까이 하고 현인을 멀리하면 나라가 위태하다 하였으나, 지금은 백성이 주장이므로 민중의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명백히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1948.07.24. 취임사; 이승만 1941/2025: 308)
공공의 문제에 연민이 전부일 수 없었고, 평등만 앞세워 공산주의를 옹호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예외 없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서 문제를 풀어간다. “북 동포 중 공산주의자들에게 권고하노니, 우리 조국을 남의 나라에 부속하자는 불충한 이상을 가지고 공산당을 빙자하여 국민을 파괴하려는 자들은 우리 전 민족이 원수로 대우하지 않을 수 없나니...”라고 했다.(1948.07.24. 취임사; 이승만 1941/2025: 309)
미국의 개인주의적 민주주의 관리는 흥미롭다. 이승만은 중국·북한 공산당과는 다른 자유를 구가했다. 정부의 힘은 시민권(citizenship)으로부터 온다.(Synman Rhee, 1941: 237) 개인적 권리·자유는 국가의 구조가 세워진 기본적 기초이다. 국민이 정부에 복종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의 권리는 정부의 강탈로의 가능성에 대항하여 보호되어져야 한다.
이 원리에 따른 미국의 정부, 즉 연방정부·주정부는 너무 많은 권력을 허용하지 않도록 한다. 그 권력은 시민의 헌법적 권리를 찬탈하기 때문이다. ‘천지에 주재하신 하느님의 뜻에 의해 잉태한 생명’이라면 민주주의 제도에서는 3권이 분리됨이 당연했다. 행정부·입법부·사법부는 그들의 권력을 실행할 때 서로가 견제와 균형을 취한다.
연방의회도 상·하 양원으로 나누어져 같은 원칙 하에 상호감시, 견제한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도 다 같이 민주적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너무 많은 자유는 방종을 불러온다. 좋은 것을 너무 많이 갖게 되면, 그 값진 것의 가치를 망각하듯, 자유의 가치를 망각하게 된다..(Synman Rhee, 1941: 237)
극단적 개인주의 발전으로, 직·간접적으로 강한 분파주의가 형성된다. 이는 여론을 통합시키기보다, 여론을 분리시켜 사회의 갈등을 야기시킨다. 외국 전체주의 권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체주의 사상의 선전을 시도한다. 소련, 일본, 나치 그리고 다른 파시스트도 미국에서 조직을 갖게 된다.(Synman Rhee, 1941: 238) 아주 치밀하게 미국 내 저항세력과 손을 잡거나, 선전·세뇌를 통해 그 세력을 확장시킨다.
‘주의’(isms)로 도당을 형성하여,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폭력배들은 언제든 개인의 기본권을 삼킬 기세로 위협한다. 이들은 미국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파괴시키고자 기도한다.
미국인들은 아주 빈번히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동조하여 자신들의 정부를 곤혹스럽게 한다. 위약한 개인뿐아니라, 많은 미국인들은 빈번히 애국심에 허점을 보인다. 상대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전체주의자들은 집요하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개인의 자유·권리 같은 좋은 가치를 뭉갠다.
다인종 미국인들은 애국심에 모든 기대를 걸 수 없다. 그러나 애국심보다는 이성·합리성 그리고 개인성에 바탕을 둔 자유를 부각시킬 수 있다. 링컨(Abraham Lincoln)은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를 강조했다. 또한 윌슨(Woodrow Wilson)은 ‘우리는 민주주의로 세계를 안전하기 만들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Synman Rhee, 1941: pp.238∼9) 이 정신은 스페인과 미국 사이 전쟁시기 동안 회자되었다. 전쟁 결과 미국은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필리핀 섬나라를 포함해 스페인이 갖고 있던 점령지의 대부분을 인계받았다. 이는 제스춰가 아니라, 미국 정부는 이들 지역의 주민들을 교화시키고, 훈련시키는 일을 도맡았고, 그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게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를 정착시키도록 도왔다.(Synman Rhee, 1941: 240)
그 아이디어를 확산시키고, 세계 네트워크로 민주주의를 확상시키려면 대량의 물적 지원과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미국과 달리, 독일이나,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등 전체주의·공산주의 국가들은 ‘전략적 요충지’를 공략하여 식민지화하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미국이 이들 나라와 같이, 전체주의를 추종하였다면 윌슨의 자유주의는 확산되지 않았다. 시민권 중심의 세계질서는 난망을 겪게 된 것이다. 이때 이성적 판단에 의한 세계시민주의는 그 기능을 다하게 된다. 반면 원론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전방위적 시장상황을 활성화시킨다. 그들에게 재정을 투입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적 안정을 취하게 한다. 시장이 늘어나면 도움을 받는 국가도 결국 미국의 시장으로 작동한다. 이는 기독교적 복음이 가치이고, 통상교제의 가치이다. 그러나 아주 빈번히 애브보트 정신이 미국인들에게 망각되고 있었던 것이다.
전체주의·공산주의가 확산되면 미국인들에게도 위기로 다가온다. 물론 미국이라고 장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은 자유를 바탕으로 ‘시장의 힘’으로 전체주의, 공산주의 등 사회를 가 갖는 억압을 해방시킬 수 있다. 미국 정부는 그 지역의 시민들에게 교화와 훈련의 과업을 지고 있다. 정부는 이때 시민들에게 자유의 축복을 즐기도록 자유·독립 국가를 유지토록 한다.(Synman Rhee, 1941: pp.40)
그는 전도를 하듯 국가를 운영하도록 바랐고, 언론은 그 전도의 도구가 됨이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승만에게 종교와 언론의 자유는 함께 했음이 틀림이 없다. 그의 건국 2주년이 된 1949년 ‘자유의 공기’는 기독교의 자유와 같은 맥락에서 언급한 것이다.
더욱이 이승만은 1899년 한성감옥에서 하느님을 영접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해석한 이정식은 1903년 한성감옥의 말년 간증을 소개했다. 이승만은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허약한 존재이지만, 주요 질병으로부터 고통을 당하지 않고 과거 몇 년동안 감옥에서 지낼 수 있었고, 그리스도와 국내외 친구로부터 받은 은혜에 의해 평안을 취할 수 있었다. 성령(the Holy Spirit)이 나과 같이 있음을 믿게 됨으로써, 나의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더욱 더 긍적적 영적 삶의 마음을 굳건하게 했다.”라고 했다(Syngman Rhee, 1995: pp.144〜147; Chong-Sik Lee, 2001; 63)
이승만은 허영의 의식을 거부하고, 심적 ‘절대적 자유’를 구가한 것이다. 그의 고백은 내적 고백이고, 의식의 혁명이었다. 신으로부터 받는 자기 존재 이유의 각성이 서술되었다. 또한 자신의 의식혁명은 그 연장 선상에서 언론의 자유를 통해 사회개혁의 신호탄이 된다. 나와 다른 사람이 협동할 수 있는 길이, 즉 일반성(universal)을 담보할 수 있었다. 닫친 사회에서 열린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을 텄다.
한편 이승만은 ‘사적 카르텔’의 테러의식 단절을 선언했다. 이는 종교·언론자유가 필요한 이유였다. 이승만은 생의 마지막까지 그 의식을 유지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기도에서 이승만의 독백의 정신세계를 알 수 있다 즉,“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http://xn—zb0bnwy6egumoslu1g.com/bbs/board.php?bo_table=Christian&wr_id=17
3. 일제강점기 시기 자유언론의 굴절.
정부·국회의 통일교·신천지 성토는 이승만 대통령이 이야기 한 ‘자유의 종교’(the religion of liberty)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스도교의 진보는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과 더불어 타인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도한다.(Chong-Sik Lee, 2001; 62) 하느님의 ‘사역자’로서 타인과 국가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도록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다.
물론 이승만의 자유주의와 전체주의 차이는 책을 대하는 태도에서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전체주의는 사회엘리트가 정보를 관리하고, 자유주의는 정보를 자유롭게 유통하도록 한다. 이승만은 한성감옥에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정보를 흡수할 수 있었으나 밖의 현실은 달랐다. 그 후 1941년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일본은 군국주의, 전체주의틀에서 정보관리를 했다. 그들은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고, 선전·선동술의 도구로 책을 만들어냈다. 그 관점에서 정보관리를 한 것이다. 언론자유의 굴절이 온 것이다.
1차 대전 후 독일에서 그 현상이 목격되었다. “1933년 나치 당원과 학생들이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 앞 광장에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책을 던져 넣었다. 괴벨스는 당시 비독일인의 영혼을 정화시킨다는 이유로 “반나치적 책들을 불태우자”고 했다.(Andrew Pettegree, 2023; 박진성, 2025.11.22.) 책이 자유주의 계몽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고는 오히려 아편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다. 마르크스, 루터 같은 사상가부터 에밀 졸라, 카프카 같은 소설가까지 약 1만8000권의 책을 도서관에서 끄집어내 불태웠다. 세계를 경악시킨 ‘베를린 분서’ 사건. 두 차례 세계대전 동안 각국 도서관에서 수백만 권의 책이 소실됐다.
한편 자유주의자는 전혀 달랐다. 책은 우선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의 관점에서 군사적으로 책을 관리했다. 그리고 그렇게 정보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1940년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노르웨이 해안을 점령한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작전을 준비하며 가장 중요한 참고 자료로 채택한 건 오래된 스칸디나비아 관광 안내서였다. 다른 국가의 지리 정보가 많지 않던 시대에 책이 전황을 뒤집는 전략적 자원이 됐던 셈이다.(Andrew Pettegree, 2023; 김태언, 2025.11.22.)
전쟁에서 도서관을 파괴한다는 건 적대국 시민사회의 심장을 파괴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서적은 고정관념을 퇴치하고, 의식혁명을 일으키게 한다. 또한 서적은 감각적 현실을 이성의 영역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전체주의 나치는 자신들이 원하는 정보만 선전·선동하고, 그들 정보만 기억하게 한다. 나치와 일본은 그 방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패전국에 상징적인 굴욕을 안겼다. 물론 기능적인 의미도 있다. 도서관이 사실상의 주요 ‘군수 기지’였기 때문이다.(Andrew Pettegree, 2023; 박진성, 2025.11.22.) 전쟁의 양상이 정보·과학전으로 흘러가던 당시 도서관에 책 형태로 소장된 지식은 그 자체로 군사력이기도 했다.
전시 전체주의 일본을 향해 이승만은 자유주의사상으로 일본을 바라봤다. 독립신문의 근대사, 그리고 한성감옥에서 가진 그의 소프트 노하우를 가진 그는Japan Inside Out (1941)『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에서 그 실체를 잘 설명했다. 이승만은 그 책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다. “한국은 4천 년 이상 동양문화의 높은 수준을 만끽했다. 평화는 철학, 정치 그리고 시(詩)등에서 국가를 선도하는 지배원리였다.” 등의 설명이라고 했다(이승만, 1941: 8) 그는 일상생활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가족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가 기술한 대한민국 국가의 기원은 2317 BC 단군에 의해 주어졌고, 1122 BC년에는 기자조선에 의해 다시 새롭게 하면서 평화의 나라(the Morning Calm)로 잡은 것이다.
아침 인사도 ‘안녕하십니까’ 그런 문화에서 성장하고, 길러진 나는 자연적으로 평화의 전도사이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서구의 군사 정복 사상 그리고 우월한 현대 전쟁의 무기 유입으로, 서구문명에 앞서간 일본은 충실한 모범생으로서, 현대식 장비와 서구의 군국주의 정신으로 무장했다. 그리고 속내를 숨긴 채 우리에게 가까운 이웃으로 잘 지내자고 했다.
당시 세계의 모든 국가는 힘이 있든 없든 문을 활짝 개방했고, 그들은 자신의 국가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법과 국제조약을 준수하게 되었다.(이승만, 1941: 9) 그 분위기로 탄 일본은 의심하지 말고, 우리를 믿으라고 설득했다. 반면 보수적 조선정부는 이 조약에 어린이 같은 심정의 신뢰로 대했다. 조선은 국가의 방위를 준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일본에 개방하는 정책을 폈다.
정보관리의 개념이 부족했던 상태에서 수기(修己)와 결인심(結人心)이 앞으로 다가올 난세를 풀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다. 물론 그 결기가 선진된 권력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 할 것으로 굳건하게 믿었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나고 곧 일어난 일상화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위험을 감지하고, 나라가 독립적 생존에서 절박한 위험을 전하는 일에 전념했다.(이승만, 1941: 9) 나는 24세 때 최초의 일간신문(매일신문, 1898년 4월 9일)을 발간하여, 칼럼 지면을 통해 일본과 러시아의 두 강대국이 하고자 하는 일을 백성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많은 애국 동지들과 협력해서, 우리는 국가 방어의 프로그램을 시작함에 있어 충분히 많은 사람을 참가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동기를 부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위정척사파 정부는 그 상황에 관용을 배풀지 않았다.
우리의 만국공동회의 국민운동을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수구파와 개화파 간의 오래동안 갈등으로 수구파는 개화파를 탄압하는 데 성공을 했다. 그 결과 다른 많은 동료와 함께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고, 나는 거의 해수로 7년 동안 영어의 몸이 되었다.
잠시 갑오개혁으로 개화파가 득세하는 시기에 이승만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상태였고, 일본은 조선을 삼킬 비수를 사용하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가능한 모든 출구를 막고, 외부 세계와 직접 호소할 수 있는 길을 차단했다. 개화파는 내가 일본을 대항해 ‘중재권 행사를 하게 할’(use its good offices) 뜻으로 미국에 파견하기를 원했고, 그리고 이승만도 그 길을 택하게 됨으로써 1904년 11초에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일본 모르게 민영화(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자연적으로 당시 지식인이 갖고 있었던 정서를 미국인에게 전하기로 노력했다. 1905년 미국 시민의 대부분 10년 전 한국 사람들처럼 상황을 잘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승만, 1941: 10) 몇 유능한 엘리트들은 그 사실들을 알리려고 했지만, 일반적 감정은 전적으로 친일적 정서에 익숙한 상태였다.
물론 미국인이 일본의 청일전쟁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노일전쟁 당시 일본을 보아왔다면, 일본의 한국 병합이 잘못됨을 인지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해양세력 일본인의 팽창을 예측할 것이고, 그들은 태평양에서 힘으로 위협하는 해양세력임이 틀림이 없었다.
미국인들은 현실 직시를 할 필요가 있게 된다. 물론 고통스런 과거 경험을 상기시키는 이유로, 일본을 감시하기 위해 미국에 경고하는 바람이다.(이승만, 1941: 9) 모든 국민이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것을 알도록 하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때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무엇이 실제 일어난 것을 중심으로 글을 작성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퍽, 실용적 접근을 했다. 그 노력이야말로 상실한 자유를 다시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구뿐만 아니라, 미국은 평화와 안전을 포함한 세계 주요 이슈를 능동적로 떠 맡아야 했다.(이승만, 1941: 14)
반민주주의·반전체주의로 남아있는 한 세계에서 평화와 진전은 없음이 틀림이 없었다. 현재 세계의 민주주의 유지는 미국 국민들이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정말 위대한 과업이다. 10년 전 20년 전 만에 해도 더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잠자고 있었고, 반면 일본은 그 동안 전체주의 정책을 계속했다. 물론 미국이 가짜 평화의 사상을 고집한다면, 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이승만, 1941: 14)
당시 미국 정부와 미국인은 부분적으로 각성하고, 가능한 빠른 속도로 필요한 정보입수에 전진의 박차를 가하고 있으나, 아직 정보 수집에 충분하지 못했다. 필연적 그리고 피할 수 없도록 미국 공중이 준비하는 중요성은 아무리 완벽해도 지나칠 수 없다. 일본인은 오래 전에 정신적 힘의 가치를 알았고, 국민은 서둘러 정신의 훈련을 참여했다. 최근 일본은 전쟁 심리의 발전 분야에서는 독일을 제외하고 세계 어느 나라보다 우월했다.(이승만, 1941: 14)
지배를 당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일본 지배자들이 배경으로하는 신성성(divinity)의 사상연구에 특수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신문 칼럼에서 일본제국의 신성성을 엿볼 수 있게 된다. 영자신문 The Japan Advertiser(후일 Japan Times와 통합)는 Niroku(1919..05.19) 사설을 번역하여 게재했다.
일본천황 가족 사명은 세계평화를 유지하거나 인류 복지 증진에 노력한 것은 틀림없다. 하늘은 이 미션을 잘 수행하기 위해 제국 황실의 가족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천황은 그 사명을 수행할 적임자임으로서 신민의 칭송과 숭배의 대상이었고, 영원히 그 행정의 특권을 가졌다. 일본제국의 황가는 신(God)과 같이 흠숭(欽崇)의 대상이었고, 은덕(恩德)·정의(正義)의 화신이었다.(이승만, 1941: 15)
천황가족의 대원칙은 신민의 이익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 대원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황실은 그들의 신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아버지로 소임을 다한다. 황실의 눈으로 보면 가지와 잎이 많아도 모든 인류는 하나이고, 같은 뿌리이다. 모든 인류의 분쟁들은 천황의 무오류의 정의로 풀이갔다.
그 논리하면 전쟁의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로 한 국제연맹은 일본황실을 정점으로 위치시킬 때에만 실제적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제연명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한 형벌적 힘, 국제적 차원의 초인종적 폭력성을 지녀야 하고, 이러한 힘은 일본 황실만이 가질 수 있다고 봤다.
일본인들은 황제라고 하지 않고, Tenno, 즉, 천국의 왕(天王)으로 부른다. 매번 그들은 천왕을 언급할 때,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거나, 모자를 벗는다. 그의 존엄은 모든 공적 보고서, 모든 학교의 역사에 규정했다. 학자와 철학자 변호사, 작가 등 모두는 이 중요한 원리로 가르치거나, 설득한다.
첫 천황은 신(神) 주무 텐노〔Jummu Tenno, 고대 국가 야마토(大和)의 초대 천황〕이다. (이승만, 1941: 16) 일본인에게 신성성은 천황과 땅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의 국민(こくみん, kokumin)에게도 그 성격이 부여된다. 일본의 원주민은 모든 신들(gods)과 여신(goddesses)이다. 그들의 후예는 현재의 야마모토족(大和族), 즉 태양의 자손이다.
이들 이외의 모든 민족은 용기와 지적면에서 일본인을 따라갈 수 없었다.(이승만, 1941/2025; 17) 그들은 태양의 족속이기 때문이다. 그 잣대라면 다른 모든 나라는 낮은 질서에 위치할 뿐이다.
모든 어린이들은 “①일본천황이 유일한 신성의 지배자이고, ②일본의 땅이 유일한 신성의 땅이고, ③일본 국민이 신성의 신민이고, 그들은 세계의 등볼이다.”이라는 믿음으로 성장했다.(이승만, 1941/2025; 17)
전쟁에서 죽은 군인이나, 애국자는 천황을 위해 그의 몸을 희생함으로써 이는 자동적으로 완전한 신의 반열에 위치하게 된다. 그 후 극락세계(the Lotus heaven)에서 대가족 신들의 세계에 동참하게 된다. 그 시기는 황통(Imperial Genealogy)은 700AD에 형성되었고, 막부정치(Shogunate)가 들어서자 전황제는 폐지되었으나 천황 권력이 다시 복권되면서, 그 야마모토족의 전통은 이어갔다.
그들의 믿음은 일본 종족에서 큰 통합과 진취적 힘이 됨이 당연하다. 설령 개인은 미약한 존재이나, 국가를 통해서만 신성한 존재로 전능한 힘을 갖는다. 그 논리로 일본의 7천만 각자의 신은 전시에 전쟁 기계로 변하게 된다.(이승만, 1941/2025; 17)
미카도〔천황〕가 단지 하늘의 왕으로 간주한 이후, 그 논리적 결론은 지구에서 정통성의 있는 지배자이고, 육군과 해군의 군은 세계의 무질서를 볼수가 없었다. 그 질서를 바로 잡을 개인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 천황 통치는 군뿐만 아니라, 정치적, 종교적 지배를 원했다. 당연히 일본인을 그들의 체제에 반대되는 자유·평등의 민주적 이념은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이승만, 1941/2025; 20)
하늘에서 정당성을 받은 지배계급은 대중 위에서 군림하게 마련이었다. 그 정부의 원리 운용원리에 따라 언론·스피치의 자유는 폐에서 독가스처럼 쌓이듯이 정치적 일본조직을 위험에 빠뜨린다. 미국처럼 국가 통수권자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거나, 매도하는 것은 일본에서 거의 볼 수 없었다.
교화의 정보는 국가가 용인하고, 관리하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미카도 문화에서 본 미국은 노동쟁이, 혹은 파업은 일본의 사회적 경제적 삶의 악행으로 간주하기 일쑤였다. 그들의 사고로는 미국의 백악관(白堊館)을 왕국으로 생각하는 대신, 그것을 관리의 직무실쯤으로 생각했다. 이로써 이들은 혼란과 무질서를 자초했다. 그 논리로 마카도 지배원리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먼저 한국·만주·중국 등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형성코자 했다. 그 방향에서 아시아 질서가 세계질서로 확산된다. 극동의 안정을 시작으로 세계의 안정질서를 확산시킨다. 그럴만한 이유도 충분히 존재했다. 일본인들은 수세기 동안 작은 섬나라에 갇혀서 살아온 편협된 미카도 족속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근대화는 천지개벽으로 다가왔다. 자기 하늘이 신화처럼 열리면서 신세계, 신문명, 신생활 양식에 접하게 된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가장 진기한 일은 문명인의 새로운 전쟁 도구와 일체의 군사 작전술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듯 그들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그 이후 그들의 전투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들의 과대망상증(megalomania)은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그 역사관에 대해 링컨(Abraham Lincoln)은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시대를 넘어 속일 수는 없다.’ 일본인은 지난 반세기 동안 신민을 속여왔다. 결국 현재 양의 가죽을 벗어던지고, 늑대의 잇발을 드러낸다. 그러나 세계 많은 사람들은 그걸 믿기를 거부하고 있다.”라고 했다.(이승만, 1941/ 2025:44)
일본인들은 신도의 신비주의(Shintoistic mysticism)로부터 점차적으로 극단적 애국심으로 독특한 전쟁 심리를 발전시켰다.(Syungman Rhee, 1941/2025: 22) 천황 숭배 사상으로 병행하여 전쟁의 예찬(cult of war)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객관적으로 나라의 팽창의 수단으로서, 전사의 숭배와 그 실천은 거의 종교적 수준이었다. 그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으면, 애국적 군국주의로 각인되었다. 모든 일본인들은 천황과 그 제국에 관해서 같은 태도를 가져왔다.(Syungman Rhee, 1941/2025: 22) 신민들은 황제와 그 제국을 위한 죽음이 현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시킴으로써 다양성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Syungman Rhee, 1941/2025: 22) 이승만은 “대개 한사람이나 한나라이나 제가 제일을 한다는 것은 자주라 일컫는데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을 독립이라 일컫으니 이는 인류로 생긴자의 천품으로 다 같이 타고 난것이라”라고 했다.(이승만, 1998: 79) 이런 기독교적 사고는 일본인들에게 익숙치 않은 개념이었다.
전세가 확장되면서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선전을 반드시 막아야 할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중국인들에게 이민법을 만들어 미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 틈을 타 일본인들이 미국이민을 서둘렀다. 그 현상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연승으로 전승국이 된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서해안 지역에서 반일본 선동이 일어나고, 캘리포니아에서 반일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 정서를 잠재우는 2가지 선전 방법을 사용했다.(Syungman Rhee, 1941: 200)
⓵보복의 방법이다. 일본 이민자는 샌프란시스코 근처 전동 버스 정류장에서 반일 군중집회에 참여한 노동자를 칼로 찔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현상은 2〜3개가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일본 공격자는 동시에 지역 경찰에게 자진 신고를 했다. 일본신문을 통해 “보복할 수단이 없는 일본인들은 그렇게 할 밖에 없었다고 강변했다. 이유 없이 일본인을 모욕하거나 불의로 대하는 사람은 같은 보복을 받을 것이다. 인간으로서 일본인은 배려나 피학대보다 어렵게 대하거나 존경을 원했다.”(Syungman Rhee, 1941: 201)
미국인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빼앗기니, 일본 이민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질만했다. 그러나 일자리를 찾아온 일본인은 이민자의 나라에서, 당연한 권리로 간주했다. 그게 불가능할 때, 일본인들은 폭력을 먼저 사용하고, 그 폭력을 미화하는 선전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동태복수(同態復讐法, lex talionis)의 원칙으로 '똑같이 보복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갚아라.’라고 강조한 것이다.
일본인의 획기적 사고는 들불처럼 미국 전역에 퍼져나갔고, 정신적으로 미국인들의 의식에 상당한 영향을 줬다. 미국인들은 두려움과 존경의 태도를 갖게 된 것이다. 이는 일본인 의 미국정복 전초 심리전이었다.
미국인의 배려와 관용 정신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는 오히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공산주의 정신에 더욱 가깝게 간다. 수렵·채취·어로의 폭력과 테러의 문화였다.
첫째 실험의 성공으로 ⓶째로 미국에서 일본의 선전활동을 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Syungman Rhee, 1941: 201) 1940년 5월 미국신문은 정보기관의 예측에 따르면, 일본이 선전을 위해 연간 적어도 5백만 달러를 쓴다고 했다. 실제 큰 시에는 일본의 선전자가 한 사람 이상이 상주했다. 그 행위는 거의 35년 전에 시작한 1백만 달러에서 충격적 증가를 되었다. 선전 활동의 비중이 점점 높여갔다. 그렇더라도 그 실제 사용한 돈은 권력 중심부의 최측근(inner curcle) 외에는 비밀로 전해질 뿐이었다. 그렇더라도 면밀한 관찰자에게는 알려지게 마련이었다.
그들이 어디에서 활동하든 모든 일본 기관들은 도쿄에서 통제당했다. 그들은 확실한 콘트롤 타워를 갖고 있는 것이고, 쓰는 것이든, 말하는 것이든 하나의 정보원으로부터 얻는 정보에 의존했다.(Syungman Rhee, 1941: 202) 정형화된 아이디어나, 반복적 정보의 송출은 선전 효과에 알맞은 방법이었다. 서구 문명을 능가하는 일본인들의 매력, 국토의 아름다움, 벚꽃의 아름다움, 전통문화 등이 신문과 잡지 기사거리로 매혹적인 주제였다. 그 주제로 세뇌를 시킨 것이다.
잘 정돈된 기사, 뉴스의 전달 그리고 일본 외교관, 해군제독, 자작(子爵) 귀족, 여행자, 친선 단체 등의 인터뷰 내용은 미국 전역의 언론에 연일 회자되어 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 주요 목적은 미국에서 각 조직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그들에게 호감을 얻게 함이었다.(Syungman Rhee, 1941: 202)
미국인들이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하였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인사에게 여흥·환대 등으로 충성스럽게 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 반한 기사를 작성할 때 편집자에게 편지글이나 보내기도 하고, 전화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더욱이 전기와 달리, 후기는 그 환대가 노골적이었다.
반일본 정서와 같은 출판물 게재를 비난하는 행동은. 일본인이나, 그들의 친구에게 통용될 수 없을 정도의 진실 혹은 거짓과 관계될 자극적 내용도 편집자에게 출판할 수 없도록 했다.(Syungman Rhee, 1941: 203) 동시에 일본인을 아첨함이 틀림이 없는 내용이 일면에나 잘 읽히는 면에 등장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점차로 미국에서 노동자 집단을 제외하고, 반일감정을 금기시하는 특수한 심리를 창출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동경의 지시에 따라, 일간신문, 공중연설, 유언비어 등을 통해 미국의 여론을 주도함으로써, 그 아이디어를 상식으로까지 수용하게 되었다. 그 반대로 따돌림을 당하는 분위기도 함께 연출했다. 미국 행정부와 국무부는 그 조작의 여론에 따른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다.
미국은 선전의 장점을 잘 알고 있으나, 그 자신의 선전기구를 갖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었다.(Syungman Rhee, 1941: 205) 미국 퓨리턴의 속성과 일맥상통하는 측면이다. 평화의 왕 제자들처럼 진성 크리스찬은 진성의 평화 주창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에 발린 평화주의자들’(lip service pacifists)이 아니라, 예수의 헌신과 양심의 제자로 자처했다. 예수는 모든 사람에게 지구의 평화와 선의지 원리를 가르치기 위해 이땅에 오신 것이다. 만약 계몽되고, 성실한 남녀가 바른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의 혼란된 세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라고 믿었다.(Syungman Rhee, 1941: 226)
미국인들의 기독교적 삶과 달리. 당시 세상은 현실적이고, 편리하고, 실천적 이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따른 정책적 변화를 추구했다. 그 수혜자로 일본은 그 대표적 나라였다. 그에 대항하는 미국이 어떤 지배원리를 결한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일본인 노력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의 2가지 민주주의 원칙, 즉 언론의 자유와 관용이 그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그 약점을 이용한 것이다.(Syungman Rhee, 1941: 202) 미국인들에게는 전쟁의 상황에서 자유·관용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과제로 남겼다.
한편 1930년대 일본은 전시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시 일본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내각이 1936년 1월 설립한 도메이(同盟) 통신사에서 그 선전활동의 왜곡이 심화되었다. 이들 뉴스는 국내의 신문·민간방송·NHK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다. 일본·한국·만주·중국 그리고 아시아 심지어 미국까지 그 선전의 영향력을 확장시켰다.
4.자유주의 발아, 일제강점기 굴절 그리고 완성.
일본이 즐겨 쓰는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the new order in East Asia)는 절대적 자유의 완성 그리고 의식의 혁명이 아닌, 공포와 테러의 지배였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문화가 실현되었다. 정보통제를 통한 국민의식은 선전·선동의 결과만은 바랄 뿐이었다. 한국에서 지난 35년 지배는 거대한 민족·역사 말살의 정책의 기록일 뿐이었다. 그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비무장에다 굴종만을 강조하고 있었다.
2천 3백만의 한국인들은 경제적 수탈 대상이며, 심지어는 대량 아사 상황으로 몰고갔다. 당장 실용성(usefulness)에 문제가 생겼다. 충동 욕구가 아닌, 장기적 목표추구에 문제점을 잉태한 것이다.
의식혁명은 조직·사회제도를 통해서 주로 이뤄진다. 대자적 자아(being for self)의 정형화된 패턴이 필요케 된다. 허영심만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주관성을 객관화시키고, 장기적 향상성(homeostasis)을 유지시켜야 한다.
물론 실용성의 현실적 적용에만 얻을 수 있다. 교환의 경제원리가 작동을 한다. 종교·언론 자유뿐만 아니라, 통상교제의 원리가 기능을 한다. 이승만은 “물화를 상통하여 나의 옛 것과 남의 새것을 비교하여 쓰며 나의 흔한 것과 남의 귀한 것을 바꾸어 쓰며 개화와 풍긔가 날로 열리며 학문과 제도가 한없이 진보되여...또한 통상교제가 각국에 다 이익되는 것이요. 어느 나라에는 이롭고 어느 나라에는 해될 것이 아니라 만국이 이웃이 되며 사회가 형제되여 태평 안락을 일톄로 누릴지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리오.”라고 했다(이승만, 1998: 59)
각국과의 통상관계는 한 없이 좋으나 “각국의 교화가 한결같지 못하여 강포한 나라이 힘을 믿고 욕심을 부려 남의 토지를 점령하며 국권을 침탈하는 폐단이 종종 생기는 지라 이에 만국공법을 마련하여 권리의 방안을 정하며 독립국과 연방과 속국과 속지의 구별이 있는지라 독립국이라하는 것은 내치와 외교를 내가 자주하여 남의 간여하지 못하느니 아무리 적은 나라라도 능히 제일만 잘하여 갈진데...”(이승만, 1998: 59∼60)
한편 일본인들은 자기들이 무력으로 굴복시킨 적의 마음을 자비나 관대함을 베푸는 방식으로는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수단들, 즉 잔인무도한 무력에 의존만 했다.(이승만, 1941/2025: 290) 저들이 외치는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Asia for the Asiatics)’라는 말은 단지 ‘일본인을 위한 아시아’(Asia for the Japanese)를 의미할 따름이었다.(이승만, 1941/2025: 290) 닫친 사회는 열릴수 없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그 강압적 정책으로 일관하는 한 아시아 본토에서 일본 군인이 철수하는 그 순간 한국인, 만주인, 중국민들은 그들을 그냥 둘 이유가 없었다. 일본인들은 경제의 자동조절 장치가 발아하기 이전의 세계를 영위했다. 가족단위의 원시공산 집단이 확대된 상태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획책하는 사회는 단죄함이 마땅하다. 일본으로 하여금 아시아 전 대륙에 걸쳐서 야만행위를 자행하도록 내버려두는 행위는 국제적 범죄행위가 됨이 틀림이 없었다. 미국은 간헐적으로 이런 상황을 개선하려고 했다. 그 예가 미국-스페인 전쟁(Spanish-American War, 1898.4∼8)이다. 쿠바·필리핀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 간에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승리로 이끈 미국은 스페인·미국의 전쟁 후 필리핀 국민을 계몽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통해 자유·독립을 유지케 하고, 유능한 정부를 들어서게 했다. 신도의 신비주의, 황제의 지배가 아닌, 실용성을 가진 공무원(civil servant)이 필요했다.
자유주권의 시민사회는 어디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리더쉽을 요구한다. 국가의 순기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현재 혼돈과 아나키스트 국가는 대부분 현명한 리더쉽의 부재에서 온다.(이승만, 1941/2025: 281) 전체주의 국가조직은 독재자 없이는 작동을 하지 않는다. 국민 각자는 윤리·덕의 훈련을 결하고 있음으로써, 사회현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한다. 더욱이 이들 판단은 남과 다른 자아를 형성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들은 판단의 항상성을 갖지 못한 것이다. 이승만은 그 문화를 ‘첨 모르는 아이에게 잘드는 보검을 맡김과 같다.’라고 한다. 그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을 연출한다. 그 때 민주주의 사회는 강력한 행정수반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일본제국의 국가의 원형을 보면 그 해결책이 나온다.
국가들의 집단은 가족단위가 확장된 것에 불과하다.(이승만, 1941/2025: 281) 아시아 모든 국가는 호주제가 있었다. 최초의 경제단위인 가족이 호주제에 의해서 지켜진 것이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2005년 호주제를 폐지함으로써, 사회 기본단위가 파편화되었다. 기본권인 사유재산제가 흔들리고, 가족제도가 붕괴되면서 민중민주주의로 이전하게 되었다.
원론적으로 위약한 하부구조를 복원시키기 위해 크건 작건, 민주주의 국가이든 전체주의 국가든, 한 국가의 복리(well being)을 위해서는 리더쉽의 필수적 요소이다. 같은 맥락에서 국가들의 연합체에도 리더쉽은 요구된다. 자주권리를 갖는 열린 사회만이 갈 수 있는 길이다.
민주정부 하에서 각국은 무결성의 선거가 필요하고, 선거에서 가장 최적의 리드를 선출한다. 그때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연합체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미국의 리더쉽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이승만, 1941/2025: 284)
미국이 전체주의 일본과 손를 잡고, 중국을 버림으로써 공산주의를 팽창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이 중국에서 ‘21개 조항의 요구’(1915년 1차대전 중 일본이 영일 동맹을 맺고 독일이 중국에서 누리던 이권을 21개 항목의 특혜를 요구하여 차지했다.)로 그 절정을 보인 다.”(이승만, 1941/2025: 284)
일본이 외교 공세를 펼치고 있는 동안, 손일선(孫逸仙: 孫文의 字) 박사는 극동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수립하기 위한 작업으로 중국 투쟁을 미국이 지원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중화민국에게 심적 동정심을 보냈으나, 일본인들이 역선전의 영향이 압도적으로 작동하고 있어, 손문의 요청을 거절했다.(이승만, 1941/2025: 284) 다급한 손문의 중국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듯이 소련에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이로인해 중국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은 발판을 잡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손문 중국의 신세를 면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녹녹치 않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의식의 혁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동맹국 사정을 들어 Japan Inside Out에서 이승만은 자유주의 사상을 보급하길 바랐다. 그러나 원론적으로 미국의 상황은 딴판이었다. 예외가 너무 많은 것이다. 다인종 미국인들은 애국심에 모든 기대를 걸 수 없었다. 그 대신 애국심보다는 이성·합리성 그리고 개인성에 바탕을 한 자유를 부각시켰다.
링컨은 ‘국민의 정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을 위한 정부’를 역설했다. 또한 윌슨은 “우리는 민주주의로 세계를 안전하기 만들기 위해서 싸움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물론 세계 네트워크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면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했다. 독일이나, 일본 그리고 러시아와 중국 등 전체주의·공산주의 국가는 ‘전략적 요충지’를 공략하여 식민지화를 시작한 상태였다.
미국은 자유주의 시장경제로 수용하기를 원했다. 일본과 같은 전체주의를 추종하면 윌슨의 자유주의는 실현될 수가 없었다. 시민권 중심의 만국공법의 세계시민주의 질서는 난망을 겪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 판단에 의한 세계시민주의는 기대할 수 없었다.
반면 원론적으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전방위적 시장 상황을 활성화시켰다. 그들에게 재정을 투입하여 일자리를 늘리고 경제적 안정을 취하게 한다. 시장이 늘어나면 도움을 받는 국가도 결국 미국의 시장이 된다. 그러나 이런 좋은 가치를 많은 미국인들은 망각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당연히 전체주의·공산주의가 확산되고, 미국인들에게 다시 위기로 다가옴이 틀림이 없었다.
미국이 전체주의 일본과 손를 잡고, 중국을 버림으로써 공산주의를 팽창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은 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수립하고 종국적으로 세계를 제패하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이 목적을 위한 일본은 전 국민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호령하고 있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군국주의 정신을 함양시키고, 일본 민족은 창조주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신의 자손인 천황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바치면 그 보상으로 그들 역시 신들과 같이 앉아 있게 된다는 신념을 갖도록 교화시켰다.(이승만, 1941/2025: 292)
이승만은 일본의 길을 걷지 않고, 미국정부에 기대를 걸었다. 천황중심의 사고를 자주권리를 가진 시민중심의 사고로 제도를 형성코자 했다. 개인은 ‘제가 제일을 하는 것을 하는 것’, 즉 자유를 근거하여 자주권리를 확보한다. 초창기는 좌우가 대립하고 있어, 걸음마 수준이었어나,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려는 1954년 1월 개헌을 시도했다.(인보길, 2024.11.26.), 이 개헌은 경제조항을 개정은 ‘자유와 창의 존중’을 골자로 하고, 경제도 ‘민영 위주로 부흥’이라는 목적을 가졌다.
당시 국무회의에서 제헌헌법 제6장 ‘경제에 관한 규정 중 4개 조항’ 개정안을 의결하여 당월 22일 이 대통령이 결제를 강행하였다. 그 이유로 “생산력의 고도 증강과 국가경제의 발전을 기하고자 중요자원 및 자연력(自然力)의 개발과 공공기업에 있어서 사유사영(私有私營)의 비중을 현행헌법보다 상대적으로 더 무겁게 하는 한편, 국가의 통제관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여 경제부흥을 촉진하면서 외국자본의 투자의 길도 넓혀주려는 데 그 주안이 있다.”한다. .”([조선일보] 1954.1.24.; 인보길, 2024.11.26.)
구체적으로 개정하고자 한 조항은 제87조로 중요 공공기업은 원칙적으로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할 것과 대외무역은 국가통제하에 둘 것을 규정하였으며, 제88조로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긴절한 필요가 있을 때에는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하든가 그 경영을 통제 또는 관리할 것을 규정한 상태였다. 이리하여 제헌헌법은 일면 자유주의 경제의 장점인 자유와 상의를 존중하면서도 (제5조 제15조 제84조 제2항), 타면에서는 사회주의적 균등의 원리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의 통제 간섭을 규정하고 있으나, 중요자원과 중요기업에 관한 한, 후자에 입각한 국유국영제도가 원칙이 되어있다.”(제85조 세87조 세88조)(인보길, 2024.11.26.)
결국 제헌헌법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균등을 중심으로 이뤄지도록 바랐다. 즉, 개인 단위의 경제가 아닌, 공유경제에 바탕을 두고 제헌헌법이 제정된 것이다. 그러나 제헌헌법 전반부는 개인의 기본권, 즉 생명, 자유, 재산을 중시함으로써, 뒤편 경제부분 공유경제는 전반부와 이질성을 보인다.
이승만이 이야기하는 자유는 개인의 종교적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집단의 공유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 제헌헌법 제87조는 ‘중요한 운수, 통신, 금융, 보험, 전기, 수리, 수도, 가스 및 공공성을 가진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한다. 공공필요에 의하여 사영을 특허하거나 또는 그 특허를 취소함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 대외무역은 국가가 통제하에 둔다.’ 또한 제88조 ‘국방상 또는 국민생활상 진절한 필요에 의하여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하거나 또는 그 경영을 통제, 관리함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한다.’라고 공유경제 일색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을 끌어오기 위해 공유경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현장의 실용이 요구되었고, 더 많은 계몽의 혁명이 필요했다. 언론은 만국공법에 기초하여, 공정·정의를 통해 사회제도의 통합을 강조했다. 또한 실용성을 담보하기 위해 외국자본이 절실한 시점이지만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절대빈곤 상태에서 폭동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사가 되었다.
의식혁명은 사회제도로 연계시킬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사영기업의 국-공유화 내지 그에 대한 국가의 통제관리를 최소한으로 제한하려고 했고, 아울러 우리나라 현실에 적합하도록 관련조항을 개정하려는 것이다. 경제조항의 개정을 앞두고 국회에서 백두진 총리는 “현하 한국 경제사정은 국내생산의 악화 및 외국자재와 기술의 도입을 불가피하게 하는데, 긴급을 요하는 건설사업을 강압적인 관청에 맡기는 것보다 민간의 왕성한 의욕에 맡기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라고 강변했다.(인보길, 2024.11.26.) 즉, 통제경제냐, 자유경제냐 하는 면을 보더라도 개인의 소유권을 적극 활용함으로써 경제적 발전을 기하게 된다는 견지에서 자유주의적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개헌이 불가능했다. 실제 개헌은 2년짜리 3대 총선 결과 ’자유당 대승‘ 기록으로 개헌에 날개를 달았다.
전국에서 5월 20일 치러진 3대 국회 총선에서는 예상외로 자유당이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총의석수 203개 가운데 자유당 116석, 무소속 67석, 그리고 뜻밖에도 민국당은 15석으로 참패하였다.(인보길, 2024.11.26.) 자유경제에 딴죽을 걸었던 민국당은 15석으로 소수당으로 몰락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유경제, 사회주의 성향의 헌법에 쐐기를 박으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3대 총선 결과로 사회주의 성향을 거세하고 ‘통상교제’를 통한 자유민주주의 경제정책을 폈다. 그의 자유는 결국 연방수정헌법 1조의 정신으로 돌아간 것이다. 여기서 생명·자유·재산의 제헌헌법 기본권 코드가 완성이 된다. 생명은 ‘나의 몸이 내것이 아니라 천지에 주재되신 이가 내게 맡기사’로 시작하여, 종교·언론 자유가 파생하고 그리고 시장경제의 개인 재산 형성 요건이 갖추어지게 된다.
한편 6·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한국 군사정전협정으로 일단락을 맺은 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해 1월에 자유주의 경제체제까지 도입을 하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는 경제뿐만 아니라, 종교와 언론의 자유를 함께 논한 것이다. 미국 수정 헌법 제1조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국교금지조항),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를 막거나, 출판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를 방해하거나, 정부에 대한 탄원의 권리를 막는 어떠한 법 제정도 금지하는 미국의 헌법 수정이다.
1953년 7월에 ‘한국경제부흥 5개년 계획안’이 발표되어, 덜레스(John F. Dulles)국무부 장관의 방한을 앞두고 급죄된 원조 선전용이었으나, 이승만 대통령의 미국 방문 시 미국 정부의 원조기관에 제출되었다.(이한빈 외:1969); 박태균, 2007: 216∼7) 이는 대한민국 경제가 미국의 시장경제 시스템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으로서는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Japan Inside Out)로 미국인의 종교관, 즉 ‘매일 다시 태어남’(A born-again Christian) 의미를 일본과 비교를 통해 각성시켰다. 뿐만 아니라, 현장의 실용성의 사회 제조건을 점검할 시가가 온 것이다.
이승만은 애브보트의 「전망(Outlook)」의 수제자로 교화, 혹은 전도에 철저했다. 그 사고가 1948년 건국초부터 대한민국을 국제질서 안으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한편 한미상호방위조약은 1953년 10월 1일 한국과 미국 간에 조인되고 1954년 11월 18일에 발효되었다. 이승만이 자유주의 꿈은 제도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하느님 은혜’와 ‘동포들의 애호’로 성공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완성시켰다. 즉, 자유주의 발아, 일제강점기 굴절 그리고 완성이 이어진 것이다.
참고문헌.
김낙환. 〈우남과 한성감옥Ⅱ-2: 감옥 안에서의 교육·저술 활동-우남 이승만 신앙연구: 신앙 형성(Spiritual Formation)을 중심으로〉. 《기독일보》, 2023년 06월 29일.
박태균,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 전략,”, 『이승만과 제1공화국』, 논형, 2007.
방종우 야고보, 〈신앙과 이성은 대립되는 것일까〉, 《서울주보》, 2026년 1월 11일.
양준모, 〈건국헌법에 담은 '시장경제 체제'...헌법 개정 통해 지속적 강화〉, 《자유일보》,
2025년 08월 04일.
이승만,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 비봉출판사, 2025.
이승만, 『우남 이승만 문서-이승만 저작 ⓵』, 중앙일보사, 1998.
이승만, 『뭉치면 살고- 1898∼1944 언론인 이승만의 글 모음』, 조선일보사, 1995.
이정식, “청년 이승만 자서전‘ 『뭉치면 살고』, 1898〜1944 언론인 이승만의 글모음, 1995 년, 조선일보.
이한빈 외, 『한국행정의 역사적 분석 1948∼1967, 한국행정문제연구소, 1969.
인보길,〈‘사사오입 개헌’ 파동=시장경제 첫 도입 개헌 … 경제 무시 야당은 엉뚱한 반대 투 쟁 …이승만 대통령의 종신집권 이유는?〉, 《뉴데일리》, 2024일 11월 26일.
Chong Sik Lee, Syngman Rhee- The Prison Years of A Young Radical, Yonsei University Press, 2001.
Pettegree, Andrew, The Book at War: How Reading Shaped Conflict and Conflict Shaped Reading Hardcover, Basic Books, 2023, 『책과 전쟁』, 배동근 옮김, 아르테, 2025.
Rhee, Syngman, Japan Inside Out, Gwangchang Media, 1941/ 2025.
Rhee, Syngman, Collection of Writings by the Journalists Syngman Rhee, 1898-1944, Seoul, 1995
Yu Yoeng-ik, Synman Rhee’s Miscellaneous Prison Writings, No. 80, June 199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