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온 멸망, 그 이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시체로 변한다. 담과 화이, 두 사람만 빼고. 초자연적 현상이 왜 두 사람만 비켜 갔을까. 담과 화이 사이에는 어떤 관계도 없지만 그러고 보면 말 못 할 공통점도 있다. 두 사람 다 스스로를 낙오자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더욱이 둘 다 지하에서 일하는데, 사랑과 연애의 세계에서 또한 그들은 빛 한 점 안 드는 세계에 거주한다는 점에서 지하는 그들 실존의 위치이기도 하다. 거부당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시체가 즐비한 이곳은 마침내 도래한 ‘그들만의 세상’이자 비로소 ‘완벽해진 세상’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정말 ‘구원’ 받은 걸까? 문제는 그들 사이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싫어하는 소설
『담이. 화이』는 ‘싫어하는 소설’이다. 서로를 싫어하는 감정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감정이 너무 익숙해서 우리 마음의 거울을 보는 것 같다. 둘의 관계는 한마디로 상극이다. 담은 쉬지 않고 일한다. 시체를 몰아서 강물 속으로 빠뜨리는 일. 그렇게 하는 게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담은 점점 더 그 일에 몰입한다. 그런 담의 눈에 비친 화이는 게으른 데다 사치나 일삼는 한심한 여자다. 그러나 화이 입장에서 본 담 역시 쓸데없는 일에 집착하며 으시대는 ‘하남자’일 뿐이다. 시체가 떼를 지어 몰려 다니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은 것은 담과 화이 두 사람이지만, 이들의 생존은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은 감정이 미움과 혐오라고 말하는 것 같다.
창세기 비틀기
사람들이 시체로 변하기 전, 사는 게 힘든 화이는 죽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는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모두 7장으로 구성된 소설 『담이, 화이』는 창세기를 비틀어쓴 종말기다.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담은 침례의식을 연상하는 행위 속에서 스스로를 세상의 끝 사람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의 첫 사람일 거라고 의미 부여한다. 과장된 자의식으로 위축된 자존감을 포장하는 것이 담이라면 화이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사치품에 탐닉하며 만들어 낸 허위의식으로 바닥난 자존감을 위장한다. 성서 속 아담과 하와가 태초의 인간이라면 소설 속 담과 화이는 최후의 인간이다. 그러나 이것도 최후는 아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최후가 오지 않았다. <출판사 서평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