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에 4를 곱한 뒤, 그의 나이에서 6을 빼고,
거기에 영국식 억양과 날카로운 유머 감각을 더해보라.”
64년2월8일 토요일자 뉴욕타임스 기사는 이 같은 퀴즈로 시작한다.
퀴즈의 정답에 해당하는 비틀스 멤버 4명은 전날인 7일 미국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그날 뉴욕의 케네디 공항에는 여성팬 수천명이 휘파람을 불고 비명을 지르며 플래카드를 흔드는 등 북새통을 벌였다.
“볼링 선수 이래 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수출품”이 미국에 본격 상륙한 것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이날은 두고두고 기억된다.
롤링스톤스·더 후·야드버즈·맨프레드 맨 등 수십여 영국산(産) 그룹이 미국에서 히트곡을 내면서 ‘영국의 침입(British Invasion)’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에 이른다.
그뒤 미국인들은 듀런듀런·웸 등 영국의 참신한 젊은이들이 팝시장에 등장하던 20년 뒤까지 ‘또다른 침공이 시작됐다’며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을 달래야만 했다.
언제나 ‘만남’은 우연이다.
하지만 그 우연이 성공을 낳으면 만남에는 전설(傳說)이 따라붙는다.
존 레넌과 폴 매카트니의 만남에는 ‘20세기 최고의 작곡가’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비틀스의 매니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음반가게 주인으로 일하던 시절,
“비틀스 음반 주세요”라며 찾아온 꼬마 손님의 말에 흥미를 느껴, 당시 무명이던 비틀스의 공연장까지 찾아갔다는 에피소드가 지금껏 남아있다.
하지만 조지 해리슨에겐 그런 멋진 만남은 없다.
폴 매카트니의 1년 후배인 조지 해리슨은 존 레넌의 탐탁지 않아하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끈기 있게 따라다니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고 전한다.
그의 자작곡 ‘내 기타가 부드럽게 울 적(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이 넌지시 일러주듯, 조지 해리슨은 비틀스 부동(不動)의 기타리스트로 우선 기억된다.
(정작 그 곡에서 ‘부드럽게 우는’ 기타는 에릭 클랩튼이 맡았다.) 비틀스 초창기 곡들에서 드러나는 투박한 기타부터 ‘해가 떠오르네(Here Comes the Sun)’의 부드러운 어쿠스틱 기타를 거쳐, 명곡 ‘섬싱(Something)’ 초반부의 격조 있는 리드 기타까지 모두 그의 솜씨다.
대중음악에서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하고, 작사 작곡까지 소화하는
‘그룹 사운드’의 전형을 만들어낸 것이 비틀스라면, 그 공(功)의 정확히 4분의 1은 조지 해리슨의 몫이다.
’20세기 최고의 작곡가’가 한 밴드에 있다는 건 분명 질시와 경탄의 대상이지만, 그 밴드의 멤버였던 조지 해리슨에겐 오르기 힘든 절벽이자 풀기 힘든 숙제였음에 틀림없다.
공식 정규앨범 13장 가운데 2번째 앨범에서야 첫 자작곡(Don’t Bother Me)를 발표하고, No. 1 인기곡(something)은 마지막 앨범(제작 기준)에서야 나왔다.
하지만 악보를 볼 줄도 모르면서 주옥 같은 명곡을 쏟아내는 동료들 사이에서, 비틀스 시절 내내 절차탁마(切嗟琢磨)한 조지 해리슨 덕분에 우리는 ‘섬싱’ ‘해가 떠오르네’
‘내 기타가 부르럽게 울 적’ 같은 명곡을 가질 수 있었다.
비틀스 음반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조지 마틴은 조지 해리슨을 두고 ‘부단히 노력해 애창곡을 만든 싱어송 라이터였다’고 평했다.
‘노력하지 않고 부러워하기만 해선 안된다’는 새삼스러운 교훈을 조지 해리슨은 몸소 가르쳐준다.
아내를 버리고 오노 요코와 사랑에 빠져 ‘금녀(禁女)’의 영역이던 스튜디오까지 데리고 나타나 그룹을 갈등으로 몰아넣은 존 레넌,
늦총각 시절 항상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폴 매카트니, 그룹 해체후 한때 약물에 시달렸던 링고 스타와는 달리 조지 해리슨의 삶은 상대적으로 평탄하기만 했다.
크고 작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조지 해리슨에겐 굴곡이 적었다.
비틀스 중기 인도여행으로 동양사상에 심취한 것이 일탈이라면 유일한 일탈이다.
하지만 덕분에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와 ‘당신 안에 당신 밖에(Within You Without You)’ 등에 멋진 시타르(인도 악기) 소리를 넣었으니, 음악적으로는 플러스가 된 셈이다.
평온했던 그의 삶에 파문을 일으킨 건 다름아닌 ‘사랑’이었다.
레넌-매카트니는 그룹 시절 적어도 2명 이상의 여자에게 사랑 노래를 바쳤다는 혐의가 짙다.
하지만 조지 해리슨이 비틀스 시절 쓰고 부른 ‘러브 송’의 대상은 오로지 아내 패티 보이드뿐이었다.
영화 ‘하드 데이스 나이트’ 촬영장에서 만난 둘은 한눈에 사랑에 빠졌고, 동거와 결혼이라는 자연스러운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조지 해리슨은 ‘내 기타가 부드럽게 울 적’을 쓴 뒤, 이 노래에서 기타의 참맛을 내기 위해 절친한 친구였던 ‘기타의 신’ 에릭 클랩튼을 데리고 온다.
더 좋은 노래를 향한 순수한 욕심이 결국 조지 해리슨의 삶에서 한번의 쓰디쓴 실패를 낳고 만다.
조지 해리슨과의 우정이 깊어갈수록, 동시에 에릭 클랩튼은 그의 아내에게도 빠져들었다.
드디어 에릭 클랩튼은 공개적으로 ‘남의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戀歌)’인 레일라(Layla)를 쓰게 되고,
이것이 조지 해리슨에게는 마음 아픈 상처로 남는다.
흰색 표지의 걸작 앨범 ‘The Beatles’에서 조지 해리슨은 에릭 클랩튼의 초콜릿 즐기는 습관을 소재로
“지금은 달콤하지만 곧 괴로움으로 변할거야”라는 노랫말로 걱정해주기까지 했으니, 인간적인 괴로움의 깊이는 달리 짐작할 길이 없다.
하지만 둘은 엇갈리던 애정과는 상관 없이, 71년 방글라데시를 위한 자선 콘서트에 나란히 참여하면서 음악적·인간적 우정을 지속시킨다.
‘조용한 비틀(Quiet Beatle)’ 조지 해리슨이 지난달 29일 후두암으로 숨졌다.
공교롭게 우리를 웃고 울리던 그의 목에 치명적인 병이 찾아왔으니, 그 판단이야 오로지 하느님의 몫이다.
하지만 사람은 가도 음악은 남으니, 음악으로 세상에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야말로 음악인의 복(福)이다.
투병중 “삶이란 연꽃 잎에 떨어지는 빗방울과 같다”며 죽음을 담담히 예감한 조지 해리슨은
숨지기전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팬에게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나는 비틀스와 함께 성장했다”는 말로 애도를 표했다.
록앤롤·히피·인도·동양정신·약물·자유·평화·사랑 등 지난 시대의 정신이 서서히 저물고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의 가족들은 고인을 위해 1분간의 묵념을 제의했다.
그의 음악에 경의를 표하며 묵념. 향년 58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