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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루도비코 상본>
▶루도비코(8.25)◀
1. 가톨릭 성인록
성인명 : 루도비코(Louis)
축일 : 8월 25일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왕, 3회원(ofm작은형제회)
활동지역 : 프랑스(France)
활동연도 : 1214-1270년
같은이름 : 누수, 루도비꼬,
루도비꾸스, 루도비쿠스,
루수, 루이, 루이스
♧♧♧♧ T ♧♧♧♧ T ♧♧♧♧
성인설명 :
· 성 루도비쿠스(Ludovicus, 또는 루도비코)는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Castilla)의 블랑쉬
(Blanche)의 아들로 프와시(Poissy)
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1226년 그의 부친이 서거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에 불과 했으므로 어머니가 섭정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는 아들의 왕권을 노리는 샹파뉴(Champagne)의 티보를 비롯하여 야심 많은 귀족들과 대항했고,
어떤 때에는 전쟁도 불사하였다.
· 그는 1234년 5월에 프로방스의 공작 레이먼드의 딸인 마르가리타(Margarita)와 결혼하여 열 명의 자녀를 두었다.
같은 해에 그는 대권을 물려받고 통치자가 되었고, 모친 블랑쉬는 고문관으로 아들을 도왔다.
그는 1242-1243년의 남 프랑스의 반란을 진압했고, 또 잉글랜드(England)의 헨리 3세를 테임브르그에서 격퇴하였으며,
포와투를 손에 넣는 등 국가의 권력을 점점 확대하였다.
1248년 그는 십자군을 지휘하여 출정하였으나 1249년에 다미에타에서 포로가 되어 사라센인들의 손에서 곤욕을 치렀다.
그 후 그는 석방되어 성지로 가서 1254년까지 머물다가 모친의 사망 통보를 받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플랑드르(Flandre)와의 평화를 이룩했고 리모주(Limoges), 카오르(Cahors) 등 수많은 지역을 평정하였다.
· 루도비쿠스는 천성적으로 신심이 깊었고, 또 실제로 이상적인 수도자를 꿈꾸었다.
이 때문에 그는 정의를 펴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렸으며, 왕으로부터 농부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권리를 옹호하여 성왕으로 불리었다.
동시에 그는 예리하고 힘찬 군주였으며,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는 하느님께 불경한 태도나 말을 한 사실이 없다.
그의 맏아들에게 했던 유언에서도 그는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설명하고 지키도록 부탁할 정도였다.
1270년 그는 재차 십자군을 일으켰다가 8주일 후에 이질에 걸려 운명하였다.
· 성인은 한마디로 가장 이상적인 중세의 그리스도인 왕이었다.
그의 치하에서 프랑스는 최대의 번영을 누렸다.
그의 신심은 자신이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됨으로써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는 작은 형제회 3회의 남자 수호성인이다.
그는 1297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Bonifatius VI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임종시에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주님, 저는 이제 당신의 집에 들어가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리이다. 당신의 이름에 영광을 드리나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에
“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 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생드니(Saint-Denis) 수도원 성당에 안장되었다.
2. 프란치스칸 성인록
▶성왕 루도비코 9세/축일:8월25일
San Ludovico (Luigi IX) Re di Francia
St. Louis IX, King of France
SAINT LOUIS—CONFESSOR, KING OF FRANCE
Born :25 April 1214 at Poissy, France
Died :25 August 1270 at Tunis, Algeria
Canonized :1297
Ludovico = variante di Clodoveo
Name Meaning :famous warrior
재속프란치스코회(Ordo Franciscanus Saecularis) 3회 주보성인
· 프랑스 국왕 루도비코 9세(1215 - 1270)는 빠리 근처 뽜시 출생으로 12살에 왕이 되었다.
젊은 시절 프란치스칸 교사들로 부터 교육을 받았고 후에 3회에 입회하였다.
그는 모범적인 왕이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현명하고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렸다.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성직자들의 궁핍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십자군 원정 중 성지에서 사라센인들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석방되자
프랑스에 돌아와서 자신의 나라를 다스렸다.
두 번째 십자군 원정 중에 병든 병사를 간호하다 전염된 역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프란치스코3회의 주보 성인이다.
(작은형제회홈에서www.ofm.or.kr)
· 성 루도비코는 ’정의’로 대변되는 사람이다.
그는 국왕으로 재위하면서 뇌물을 금지했고
공정한 재판을 위해서 증인을 채택하는 법을 세웠으며 법정 기록을 남기도록 하였다.
한번은 어떤 백작이 자신의 영지에서 토끼를 사냥하였다는 죄목으로 세 아이들을 교수형 시켰다.
진노한 왕은 평민 출신 재판관들에게 백작을 심판하도록 하였고 그들은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정의로운 만큼 자비로운 마음도 컸던 루도비코는
사형 대신 벌금으로 죄 값을 치르게 하고, 그 벌금으로 가난한 이들을 구제하였다.
정의라는 라틴어는 어원적으로 ‘올바른 것(justitia)’뜻하는 반면,
‘심판’이라는 말은 ‘법(jus)’과 ‘말하다(dicere)’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법을 말하는’ 심판에는 자비나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정의는 법을 자구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법 정신에 따라 올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정의 안에는 항상 자비로움이 있어야 한다.
루도비코가 심판자가 아니라
정의로운 사람으로 알려진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수도회www.ofmconv.or.kr)
· 중세의
가장 이상적인 크리스찬왕으로 알려진 성 루도비코는
1214(1215)년 프랑스왕 루이 8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두터운 신심에서 나온 정의와 사랑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의 권리를 옹호하였다.
결혼하여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고 친히 그들을 잘 길러냈다.
성 프란치스꼬 제3회에 입회하고 기도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사랑에서 탁월했다.
왕국을 다스릴 때 국민들의 평화와 물질적 진보만이 아니라 그들의 영신적 진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스도의 무덤을 자유로이 참배할 수 있도록 두 번 십자군 원정에 나섰다.
1270년 카르타고 근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 프랑스의 왕이 되는 대관식에서 루도비코는
하느님이 도유하신 백성의 아버지, 평화의 왕으로 행동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다른 왕들도 물론 똑같은 맹세를 하지만
루도비코가 왕으로서의 의무를 신앙에 비추어 수행한 점이 다른 왕들과 다른 점이었다.
두 차례의 폭동을 겪은 후 그는 평화와 정의를 가져왔다.
루도비코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그의 어머니인 카스틸의 블랑쉬가 통치했다.
그는 19세 때 12세인 프로방스의 마르가리타와 결혼했다.
마르가리타의 건방지고 침착하지 못한 성질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결혼 생활은 사랑에 가득 찼다.
루도비코는 30세 때 십자군에 참전했다.
그의 군대는 나일강의 다미에타를 점령했으나 얼마 후 이질 때문에 허약해져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포위되어 마침내 포로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배상금과 함께 다미에타를 포기함으로써 군대를 석방시켰다.
그는 4년 동안 시라아에 머물렀다.
그는 십자군으로서도 칭송을 받았지만 더욱 큰 명성은
오히려 나라를 다스릴 때 드러나는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이었다.
· 그는 개혁 법안의 창시자로서 신하들에 대한 법규를 제정했다.
그는 신앙 증거의 시험 형태로 전쟁에 의해 시련을 겪었으며,
법정에서 성문화된 기록을 사용하도록 장려했다.
루도비코는 교황권을 항상 존중했지만 왕족의 이익도 수호했고
프리드리히 2세 황제를 파문하여 그를 공격하려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와 황제를 화해시켰다.
그는 병원을 짓고, 환자를 방문하고, 성 프란치스코와 함께 나환자를 돌보는 등 그의 백성을 위해 일했다.
(그는 성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제3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