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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박카스님
주 안에서 잘 지내시죠?
님과 글을 통해 대면하게 됨에 참으로 기쁨의 반가움을 가지며,
님이 질문한 글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드립니다.
님은 사사기를 읽으면서 갖는 의문에 대해 질문해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삼손에 대한 것입니다.
“사사기를 읽다보면 13~16장까지 삼손에 대해서 나오는데, 여러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그냥 성경에 대한 상식이 없는 문자적으로 읽으면 삼손은 실패한 사람 같은데, 또한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서도 삼손은 실패한 사사라고 평가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하던 중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히브리서 11장은‘믿음의 장’이라고 하는데 그 곳에 삼손이 등장을 합니다. 정말 삼손은 실패한 사사일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데 사용된 믿음의 사사일까,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님이 사사기의 삼손에 대한 내용을 읽고, 또한 그에 대한 언급을 해 주시고 있는 히브리서 11장을 함께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입니다. 히브리서를 통해서 사사인 삼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나갈 수 있는 접근에 있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삼손에 대해서 님이 들은 설교에서 들은 바대로 실패한 사사, 실패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이며, 이는 성경을 잘못 보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결코 그러한 삼손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를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죠.“믿음으로 아벨(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사라, 모세)은…”하듯이 또한 “(믿음으로…)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32)라고 기록하고 있어“믿음으로 삼손은…”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삼손을 실패한 사사라고 하다니요? 참으로 가당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소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하는 분들인 목사님들이 삼손을 실패한 사사로 말해가는지요. 이는 사사기에 등장하는 사사에 대해 하나님이 해 나가시는 일에 있는 의도를 파악함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요, 그러한 그들은 사사기의 인물과 그 사사에게 일어난 사건 여부의 자체를 가지고서 좋고 나쁨과 성공과 실패 여부로 보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리고 사사기의 모든 사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나가야겠습니다. 이에 사사 삼손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올바르게 잘 가져나갈 수 있기 위해서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을 (1) 사사기에 대한 설명을 드린 후에 (2) 본론에 해당하는 님이 질문한 내용인 사사 삼손에 대해 답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사사기
사사인 삼손에 대해서 말해나가려면, 먼저 사사기가 어떤 책인가에 대한 이해와 함께 사사기가 기록되는 사사가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에 따른 그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사사기는 어떤 책인가?
사사기는 사사 시대에 펼쳐진 하나님의 구속사를 기록한 성경인데, 이것에 이어지는 룻기와 함께 연속성을 갖고서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에서 다루게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그 후손들과 대대로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하나님의 왕국을 세워나가실 땅의 보호와 그 땅을 통치할 자손의 계보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말이죠.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가며 그 땅의 분배에 있은 이스라엘에게 사사기와 룻기를 통해서 새로운 전환에 있게 되는 것에서 전개되어 갑니다. 여호수아에 의해서 시작된 가나안 정복은 여호수아 생전에 다 마치지는 못하고 미완성의 상태에 남아 있게 됩니다. 가나안 정복을 마치는 때는 다윗 왕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됩니다. 이 다윗 왕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스라엘 시대적 상황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책이 사사기와 룻기입니다. 서방교회가 정경으로 삼고 있는 히브리 전통의 성경에서는 사사기와 룻기를 한 권의 책으로 다루고 있으며, 랍비들의 전통인 탈무드경(Baba Bathra 14b)에서는“사무엘은 자기 자신의 이름의 책(사무엘의 지침)을 기록했으며, 사사기와 룻기를 기록했다.”라고 하여 사사기와 룻기를 함께 다루고 있으며 이것의 기록을 사무엘이 하였다고 언급합니다. 이렇게 사사기를 기록한 저자에 대해서는 사무엘이라고 하는데 큰 이의를 달지 않습니다. 사사기를 기록한 저자가 사무엘이 아니라고도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견해는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사무엘과 같은 동시대의 인물일 것이며, 그는 선지자입니다. 성경 기록자는 선지자와 사도들이었으며, 또한 그 직임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사사는 어떤 자들인가?
사사 시대를 열어가는 사사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잇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사의 등장이 있게 되면서 입니다. 사사는 여호수아 이후부터 사무엘 시대까지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들의 일반적인 대명사입니다. 사사는‘심판하다’,‘재판하다’,‘(판결을)선고하다’,‘변호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사사들, 재판관들, 통치자들, 최고의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국 형성 이전의 이스라엘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크게‘소사사’와‘대사사’로 구분하여 분류하기도 합니다. 사사를‘대사사’와‘소사사’로 구분하는 학자의 견해는 사사의 인물됨과 그 역량에 따른 것이기 보다는 선지서를‘대선지서’와‘소선지서’로 구분하듯이 사사의 활동이 갖는 역할과 분량에 따른 구분에 의해서 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러한 구분은 소사사의 시대가 있었고, 대사사의 시대가 있는 시대적 구분에 의한 사사의 인물에 따른 분류가 아닙니다. 사사들은 평화시에는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종교를 이끄는 지도자들이었고, 전쟁시에는 백성들을 대적자들의 손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이끄는 군사 지도자들이었습니다.‘소사사’는 재판과 판결을 통해 사법적 활동을 했던 사법행정가로서 비군사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통치한 지도자들입니다. 사사기 10장 1-5절, 12장 8-15절에는 소사사로 활동했던 자들 중의 일부 명단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의 사밀 출신인 돌라(10:1-3), 길르앗 출신인 야일(10:4-5), 베들레헴 출신인 입산(12:8-10), 스불론 출신인 엘론(12:11-12), 에브라임 산지 비라돈 출신인 압돈(12:13-15)이 그들로, 이들은 공통적으로 에브라임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리고‘대사사’는 이스라엘이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소유가 된 땅에 크고 작은 전쟁이 발발함으로써 이방 국가에 의해 도발된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적대자들로부터 구원하였던 전투 지휘자들로서 전투적 용맹성을 보인 군사적 지도자의 역할을 했던 자들입니다. 옷니엘(3:7-11), 에훗(3:12-30), 삼갈(3:31), 드보라(4장), 기드온(6-8장), 입다(10:6-12:7), 삼손(13:1-16:31)이 그들입니다. 사사기는 소사사들보다는 주로 대사사의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의 활약상을 기록하고 있는 본문의 양도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이렇게 사사를‘소사사’와‘대사사’의 활동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굳이 이러한 구분에서가 아닌 한데 묶어서‘사사’가 하는 일에 대한 이해를 가져나가면 됩니다. 사사라고 하는 용어는 앞에서도 그 단어가 지닌 뜻에서 설명하였듯이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는 자(judge), 또는 백성들이 처한 위험과 위기로부터 구원하는 자(deliverer, savior)의 뜻을 가지는데, 그들은 평화시에는 백성을 다스리며, 전쟁 때는 외적의 압제로부터 백성을 구원하며 보호하기 위하여 군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문관과 무관을 겸비한 직분, 행정과 야전에서 모두 활동을 보인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사의 특징은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지기까지 선지자이며 또한 왕의 기능을 수행하는 자였다는데 있습니다. 이 사사는 하나님께 그들이 맡은 일을 해 나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역할에 따른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음으로써 세워졌으나, 왕들과 같이 왕조를 이어가는 계대(繼代)가 없습니다. 기드온과 사무엘의 경우 그 아들들이 사사로 여겨졌으나(삿 9:2; 삼상 8:1,2), 그것은 극히 잠정적인 것이요, 엄격한 의미의 사사는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사사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는 사사기는 여호수아 시대 이후부터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장하기까지의 약 350년 동안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B.C. 13세기 말부터 대략 10세기 초까지의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사 시대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삿 1:1)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구원자’를 세워 구원하시게 하시는 일을 위하여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웃니엘을 처음 사사로 세울 때부터(삿 3:8, 9. B.C. 1367) 사무엘 때까지, 또는 사울 왕을 세울 때까지(삼상 10:1. B.C. 1025)의 기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에 대한 연대에서 대해서는 342년간, 또는 이보다 길게 보는 410년간 등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사 시대를 웃니엘에서 삼손까지로 볼 때는 325년간이 됩니다만, 대체적으로는 사무엘 때까지로 봅니다. 사무엘은 사사라고도 부르고(삼상 7:6, 15, 17), 또는 선지자라고도 불렸습니다(삼상 3:20). 말하자면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요 또한 선지자 직임을 수행한 첫 번째 선지자인 셈입니다. 사무엘은 사사였으며, 또한 삼직의 하나인 선지자의 직임을 부여 받은 선지자로 각각의 직임이 갖는 성격이 병행되는 시기에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지자 직임의 시작은 사무엘 때부터인데, 사무엘을 사사라고도 부르고 선지자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사사 시대와 이스라엘 왕정 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의 주역을 담당한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사사 시대를 웃니엘에서 삼손까지로 보기도 하며, 사무엘 때까지로도 본다고 하여도 큰 무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사사 시대의 역사적 배경
이 사사 시대의 일을 기록한 사사기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시대가 처한 상황, 곧 역사적 배경이 지닌 특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사사기 17장 6절에 기록하고 있는 바에서 알 수 있는“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게 되는‘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다’는 표현은 여기 외에도 18장 1절, 19장 1절, 21장 25절에 더 나타나고 있는데,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여호수아의 인도를 받아 가나안엔 들어와 신정왕국을 건설한 이스라엘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지 않으므로 무법한 자로 있으며 자기들이 마치 왕인양 왕과 같은 자가 되어 살았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에 속한 지도자(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함에 따라 변함없이 섬겼습니다(수 24:31). 그러나 그 이후의 시대는 하나님을 섬기는 데서 떠나 있는 배반의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은 종교 암흑기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에 거하여 있는 백성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자손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시내 광야로 인도해 오셔서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형성하신 것은 그들과 언약의 관계를 가져나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그래서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으로 맺어진 언약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한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백성이란 거룩한 존재로 남아야 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율법을 좇아 성전 제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하나로, 곧 언약의 백성으로 묶는 것입니다(시 50:5). 거기에 이스라엘의 참 이스라엘 됨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9장 5-6절에 그 사실이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있고자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속에 놓여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광야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가나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애굽적 요소를 버리지 못햇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큰 이유가 이스라엘에 가만히 섞여 들어온 이방인의 유혹, 그 충동을 받아서였는데(민 11:4-9), 더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스스로에게 있어서 애굽적 본능이 그들을 여전히 사로잡고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출 16:3). 그러니까 죄의 본능이, 죄의 세력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본능은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세계와 그 종교에 젖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이스라엘 종교, 곧 여호와이신 유일신 하나님에 의한 종교, 그래서 하나님만이 참신으로서 자신들을 다스려 나가실 왕으로 인식하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풍요로운 미래가 있는 삶을 위해 가나안 종교를 받아들이고, 가나안 풍속을 좇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농경신이요 소위 풍요의 신이라고 하는 바알을 신으로 섬기는 숭배, 다산의 신이요 번성의 신이라고 하는 아세라를 신으로 섬기는 숭배에 유혹되어 우상숭배 하였으며, 이방 족속과의 잡혼도 점차 거리낌 없이 해 나갔습니다(삿 3:5, 6). 사사기 2장 7절에서는“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하였으나, 2장 10-13절에 이르러서는“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일을 본 여호수아와 장로들이 생존해 있을 동안에는 그들의 지도가 있음으로 해서 그래도 여호와의 신앙에서 떠나지 않았으나, 그들이 죽고 그 세대 사람도 그 열조에게로 돌아간 후에 일어난 새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했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애굽에서 구원해 내셨는지, 무엇 때문에 그리하셨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새 세대에 이르러서 애굽적 요소는 가나안적 요소란 이름만 바뀌어서 노골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동안은 잠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상태는 급속도로 부패해 갔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이 그들의 왕으로 존재하지를 않았습니다. 자연히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났고, 성전이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신앙은 가나안의 종교와 더불어 한 종교, 다종교의 하나, 지역 종교, 민족 종교의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그 정신과 사상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왕이 없으므로, 그래서 갖자 자기의 소견대로, 자신들의 마음에 좋은 대로 행할 뿐이었습니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의 소견대로 사람들의 딸들을 취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좇아 범죄했던 것처럼 말이죠(창 6:2, 3).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삿 3:7). 하나님을 떠나 있느,s 것으로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그 생각에서 나오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창 6:5).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징계(징벌)하십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산다임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지케 하셨고, 장장 8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 군림하면서 그들을 ㄷ스리며 괴롭히게 하셨습니다(삿 3:8). 이스라엘이 이러한 곤경과 굴욕에 처한 것은 죄 때문이었음을 분명히 밝히십니다(삿 2:6-3:6). 그러나 하나님은 사사 웃니엘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메소포타미아 왕 구산 리산다임을 일으킨 것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범한 죄에서 돌이켜 회개케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겨 하나님과의 화목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웃니엘 이후에 등장하는 사사는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죄의 악순환 속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끊임없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보여줍니다.
사사기의 구속사적 관점
그러한 것에서 이스라엘이 이러한 패역의 죄악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위해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전에 여호수아를 사용하셨듯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게 하시며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이 곧 사사이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로운 일들을 행하여 나가신 것을 기록한 것이 사사기입니다. 이러한 사사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이 패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며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일해 나가시는 은혜로우심과 길이 참으심과 공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사기가 삼손 등 몇 사람의 활동에 맞추어 사사의 영웅적 활동과 그들의 신앙을 두각시키며 그와 같은 신앙 인물이 될 것을 말하는 것으로 설교되거나 이야기되고 있는 것은 사사기에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크게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는 여호수아 사후 이후에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느덧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어‘왕이 없으므로’,‘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는’죄악에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에 두신 이스라엘을 그들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징벌로 등장하는 적대자들로부터 보호해 나가시는 것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주로서 그들의 구원자이심을 나타내시며 또한 그 땅을 보존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사기는 사사라는 어떤 영웅적인 인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이시오 또한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신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350년에 이르는 오랜 사사 시대 속에서‘범죄 - 징벌 - 회개 - 구원 - 평화의 시대’가 반복되는 싸이클을 이루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한 계획을 실행할 준비에 있어 오셨습니다. 그것은 언약의 땅을 다스릴 영원한 왕권을 가지신 자손이 오는 계보를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12사사
여기에 등장하는 사사기의 사사는 (1) 웃니엘 – (2) 에훗 – (3) 삼갈 – (4) 드보라 – (5) 기드온 – (6) 돌라 – (7) 야일 – (8) 입다 – (9) 입산 – (10) 엘론 – (11) 압돈 – (12) 삼손까지 모두 12명입니다. 혹자는 바락을 드보라와 함께 사사에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락은 사사로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는 가나안이 20년간 이스라엘을 압제했는데,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계획을 계시하셨는데, 바락에게 일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전쟁에 참여케 하고 그의 손에 가나안 족속을 붙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드보라로부터 이러한 계획을 들은 바락은 드보라의 동행을 요청하였으며, 드보라가 이에 응하였습니다. 바락의 이러한 행동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선지 드보라가 동행해 줌으로 해서 바락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격려받기를 바랬던 것이라고 할지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으로 그 자체가 악한 행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를 바락에 붙이지 않고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하게 함으로써 바락이 이번 일의 영광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삿 4;1-10). 여기에서 보는대로 바락은 사사의 직임에서가 아니라 전쟁에 동원되는 군사를 지휘할 장군의 역할로서 였습니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성경에 나타난 여성의 본분이 그러하듯이 드보라도 역시 바락을 돕는 내조의 역할에서 사실 여자로서 사사의 임무를 수행한 전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12명의 사사의 성격은 이스라엘이 왕이 없이 살아가는 그들 앞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그리고 유일한 왕으로 계심을 가시적으로 나나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 민족이 이스라엘을 괴롭힐 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적하여 정복하게 하기 위해 사사들을 임명하여 쓰셨습니다. 사사들이란 원수의 장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만 아니라 주의 율법과 권리를 집행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정의와 권리를 수행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사사의 역할은 일반적인 법률의 집행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와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정부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곧 사사는 신명기 17장 9절과 19장 17절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서, 사사는 선지자이며 또한 왕과 같은 자로 존재하면서 이스라엘의 주이신 하나님을 드러냄에 있었습니다.
사사의 존재가 이러한 것이기에 웃니엘로부터 시작하여 삼손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12명의 사사는 그 한 개인의 영웅적인 삶과 역량의 여부를 말해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없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마음과 그 신앙이 있어야 할 것을 활동한 하나님의 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2. 사사 삼손
이러한 기본적 이해를 갖고서 이제 삼손에 대해서 보도록 합니다. 삼손에 대한 이야기는 여느 사사의 이야기보다 그 내용이 깁니다. 사사기 13-16장에 걸쳐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사 삼손의 생애와 행적에 관한 기사와 블레셋 사람에 의한 압제, 그리고 삼손이 그들의 원수의 장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내용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그 첫 시작을 말해 주시고 있는 서두인 13장 1절은 삼손의 등장에 앞서 먼저 이 당시의 역사적 시대의 상황을 알려 줍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첫 절에서“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은 사사로 활동하게 되는 삼손이 등장하게 되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여기서‘다시…악을 행하였다’로 번역되는 말의 원문은“그리고 그들은 그 악을 행하기를 다시 시작했다”, 또는“그리고 그들은 그 악을 행하기를 더했다”는 것으로, 13장인 본절에 이르기까지인 12장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행하여 온 악에 계속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반복되는 악한 죄에 있는 것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때에 소라 땅에 단 지파 사람 가운데 마노아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아내에게서 아이가 생겨 아들을 낳을 것임을 알려 주십니다. 그 아이가 바로 사사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삼손입니다. 하나님은 이때까지 삼손의 출생을 준비해 오고 계시는 것에서 마노아의 아내의 임신을 막고 계시는 섭리에 있었습니다. 이는 앞으로 있게 되는 사무엘을 낳는 엘가나의 아내 한나의 임신을 막고 계시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사무엘의 잉태와 출산이 있게 하신 것과 다름 아님을 떠올리게 합니다(삼상 1:1-20).
하나님은 삼손의 출생이 있게 하는 이유를 13장 5절에서 다음과 같이 알려주십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삼손의 출생을 알리며 그를 나실인으로 구별시키신 까닭은 그가 하나님께 바쳐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있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를 통해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실 것을 정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이에 삼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한‘구원자’를 세워 구원하시게 하신 자로 있게 됩니다. 이에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하여 아들을 낳자 이름을‘삼손’이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이 이름이 지닌 뜻은‘작은 태양’, 또는‘태양 같은 자’입니다. 트렌트 버틀러(Trent C. Butler)는“삼손 이라는 이름은 마노아의 아내와 더불어 말씀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이 있기 보다는,가나안의 태양신 세메쉬(Shemesh) 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하나님은 구원자이시다’를 나타내게 하시는 것에서 이름을 갖게 하신 다름 이름들과 관련하여 볼 때 맞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당시 이스라엘 자손이 처한 상태인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실 것에서 블레셋의 압제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두운 시대에서 하나님의 구원은 떠오르는 밝은 태양과 같이 빛이 되실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삼손의 생애를 보고 대체적으로 의아해 하며 그에 대한 이해를 잘못 가져나갑니다. 그것은 말이죠. (1) 첫째, 성인이 된 삼손이 딤나로 내려갔다가 거기에서 불레셋 처녀인 한 여인을 보고는 반하여 부모에게로 돌아와서 그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게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부모가 그의 일가족 친척이나 동족 가운데서 여자를 얻어 혼인할 것이지 여자가 없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는 압제자요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여인을 아내를 얻을 것이냐며 꾸짖어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아버지를 졸라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것입니다. 삼손은 이런 일이 이번 한 번이 아닙니다.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임으로 인해 그 여인을 이용하여 삼손을 대적하려는 블레셋과의 싸움이 일어나게 되고,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 대한 앙갚음으로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이 발생할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공격함으로 삼손에 대한 유다 사람들의 불만이 높아져 가는 속에서 삼손은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는 등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면서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구원자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삼손은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도 블레셋 여인인 소렉 골짜기에 사는 들릴라를 사랑하였습니다. 블레셋 왕들은 그 여인을 이용하여 삼손에게서 힘이 빠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하며, 들릴라는 관능의 미로 삼손의 마음을 사로잡아 여러 차례 애원하여 마침내 삼손으로부터 그 답을 알아내어 블레셋 왕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줌으로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머리에 삭도를 대어서는 안 되는 것을 어기게 되니 블레셋 왕들이 들릴라의 무릎에 뉘여 잠들어 있는 삼손의 머리카락 일곱 가닥을 잘라버림으로, 하나님이 떠난 삼손은 힘을 잃어버리고 사로잡혀 두 눈을 뽑히고 놋쇠줄로 꽁꽁 묶여 가사로 끌려가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삼손의 머리카락은 점점 자랐습니다.
(2) 그런 어느 날, 블레셋 왕들이 잔치 자리에서 삼손을 끌어내어 그를 놀리며 웃음거리로 삼고자 두 기둥 사이에 묶어 놓고서는 자기들의 신에게 노래하였습니다. 이 자리에는 조롱당하는 삼손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어 지붕에 올라가 있는 사람만도 3천 명이나 되었으니, 잔치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 때, 삼손은 하나님께“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신전을 버티고 있는 가운데의 두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또 하나는 오른손으로 붙잡고는“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삿 16:30)하고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하여 기둥을 밀어내니 블레셋 왕들과 모든 백성이 무너져 내린 신전 돌더미에 깔려 죽으니 그 수가 삼손이 살았을 때에 죽인 사람보다도 더 많았습니다.
이러한 삼손을 보면서 혹자들은 삼손을 블레셋 사람인 이방 여인에게 눈이 멀어 버린 사람으로 말하며, 그런 그는 결국에는 사사의 활동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블레셋 사람의 구경거리가 된 채 비참한 죽음을 당한 것으로 보아, 삼손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평합니다.
삼손! 그는 과연 사사로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실패한 사람인지요! 삼손을 이렇게 보며 이해하고 있다면 이는 참으로 사사 삼손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생각은 참으로 그릇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성경은 사사 삼손을 결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히 11:32-34) 라고 하여 그를‘믿음으로…삼손은’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사람인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며 사랑에 빠져 나실인의 본분을 잃고 두 눈을 빼앗기고 우상의 신전 기둥에 묶여 이방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비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삼손이 믿음으로 사사의 일을 하였다고 그의 일생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왜인지요.
이에 대한 답을 말씀해 주시고 있는 첫 번째가 사사기 13장 1-5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보라 네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 하시니.
라고 하여, 삼손이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에 깔려 있는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를 알려 주시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이며, 두 번째가 14장 1-4절에서,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 올라와서 자기 부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맞이하여 내 아내로 삼게 하소서 하매, 그의 부모가 그에게 이르되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하니 삼손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오니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소서 하니라.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게 되는‘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사인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며 역시 블레셋 여인인 들릴라를 사랑함에 있게 된 것은 삼손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나실인인 것을 망각하고 사사의 본분에서 떠나 방탕하게 사는 것에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를 통해서 블레셋 방백(왕)들 및 그 백성들과 충돌을 갖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하게 하시는 일로서 하나님이 삼손의 마음을 이끌어 가시는 것으로 행하신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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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은 다른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선지자 호세아의 경우에서 보겠습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께서 브에리의 아들 선지자 호세아에게 부정한 여인과 결혼하게 하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시작되어 창녀 고멜과 결혼하고 그녀에게서 음란한 자식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를 낳는 호세아 개인적 경험을 다루는 것 같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한 관계를 설명하여 주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서 보게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부정한 아내(이스라엘)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며, 결국 남편이신 하나님께서 그녀를 사서 축복의 처소로 회복시켜 주심을 보여 주시는 것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에 나타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음란한 여인 고멜에게서 나온 음란한 세 명의 자식에 의해서 나타내 주시고 있는 것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하여 떠나 다른 연애하는 자인 우상을 숭배하여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이스라엘에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나타내시면서 이스라엘을 데려와 신부 삼으시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 더, 다른 경우를 들어 보겠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차남인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자손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에서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실 것,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김에 있게 하실 것에서 에서의 장자권을 야곱이 팥죽 사건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에서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 손길입니다. 혹자는 이 사건을 야곱의 간교한 꾀로 몰아가며, 형 에서의 장자권을 빼앗기 위해서 팥죽으로 눈이 어두운 아버지 야곱을 속인 간교한 꾀를 사용했다는 것으로 몰아갑니다만, 하나님은 이러한 방식을 동원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리브가의 복중에 있는 쌍둥이 에서와 야곱에게 장차 있게 하실 일에 대한 뜻을 알리신 것을 신실히 이루어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권을 소유한 야곱에게서 하나님의 총회를 이루는 하나님의 장자인 이스라엘이 있게 되며,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를 통해서 다윗 왕국이 세워지게 되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기록해 주시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을 비롯한 복음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를 사사 삼손이 블레셋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가 하면 또한 역시 블레셋 여인인 들릴라를 삼손이 사랑하는 것에 있는 것에서도 보게 되는 것이요 삼손이 그가 사랑한 들릴라에 의해 블레셋 왕들에게 넘겨져 두 눈이 뽑히고 놋 사슬에 몸이 꽁꽁 묶여 어둡고 차디찬 감옥에 갇히는 상태에 이르는 것에서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삼손은 블레셋 방백들이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삿 16:23)
라고 하고 있고, 또한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노래하며 즐거워하기를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삿 16:24)
할 때, 사사 삼손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 16:28)
라고 하나님께 구하였습니다. 여기서 삼손은 하나님께 자신을 생각할 것을 구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사 삼손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에 대한 이해를 삼손이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그는 이번만 자신을 강하게 하실 것을 구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자신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할 것을 구하는 것에서였습니다. 삼손이 이처럼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함은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의도하신‘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할 것’에서입니다. 삼손은 말이죠. 이처럼 자신을 사사로 세우신 하나님의 경륜적 섭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런 자신에게 주시는 강한 힘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행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는 신전의 두 기둥을 밀쳐내어 신전을 무너뜨림으로써 블레렛 방백들을 비롯해서 삼손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는 결과에 있었습니다. 신전 지붕에 있는 사람만 해도 3천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지붕 아래인 신전 안에 모여든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이들 모두의 죽음은 삼손이 사사로 활동한 20년 동안 죽인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고 하니, 가히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블레셋 방백들과 그 백성들의 죽음은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볼 때 블레셋의 쇠퇴요 몰락입니다. 그 일을 이스라엘의 참 신이시오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신 것입니다. 사사 삼손은 그 하나님을 블레셋의 지배 아래 있던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이심으로,“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삿 13:1)에서 보게 되는 사사 시대에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악에 대하여,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께 믿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해 준 사람입니다.
하오니, 사사 삼손을 믿음에서 떠난 사람,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사람, 믿음에서 실패한 사람, 그런 그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비참한 죽음의 최후를 맞이한 사람 등 등 따위로 말해서는 결코 안되겠습니다. 이는 성경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믿음으로…삼손은’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사사 삼손은 말이죠. 믿음에 실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믿음으로 산 사람으로서, 그가 두 눈 뽑히고 신전 기둥에 묶여 블레셋 사람들에게 조롱당하는 처지에 있는 것조차도 그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거에서 있었던‘하나님의 의와 함께 하는 죽임’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있는 우리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이죠. 사는 것도 그리스도를 위함에 있어야 하며, 죽는 것 또한 그리스도를 위함에서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조롱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 수치이며 부끄러운 것인지요.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한즉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주와 함께 하는 그분의 나라의 백성으로 있음이 그러합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님의 질문엔 대한 답글을 마칩니다. 본 글이 성경의 관점에서 사사 삼손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나가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시구요.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명쾌한 설명을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가 들어온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는 삼손은 실패한 사사로, 특히 음란하다는 이유를 많이 들어왔고, 부모의 뜻을 어겼다고 들었고, 나실인으로서, 삼가야할 행동을 많이 했다고 들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목사님들께서 히브리서 11장의 설교를 하면서 삼손이란 이름이 분명히 써있는데도 불구하고 삼손이 믿음의 선진이라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일부 인터넷에 올려진 사사기 삼손에 대한 동영상 설교도 그렇고, 사사기 강해를 봐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 뿐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명쾌한 설명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이 답변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탁월하신 답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구약을 전공하신 박사님이십니다. 이천우교수님감사합니다. 늘 카페에 올리신 글 잘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