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고앞에는 교장선생님사택이 있었다.
그당시 어찌나 으리으리하게보였는지 모른다. 이종림교장님때 한번 들어가본적이 있다. 정구부가 우승을했을때 였던 같다. 다음시합에도 자신있다고 했다가 교장선생님한테 큰소리친다고 약간의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큰소리'가 아닌걸 우리는 계속증명했다. 그리고 용고앞 코너 집에는최승수가 살았는데 아마 약방 이나 문방구이었던 같다.
그리고 그건너편에는 아마사진관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이제는 기억이 가믈 가믈한다. 사진말이 나온김에 용고 사진사 아저씨가 생각난다. 용고다닌사람치고 이분을 모르는사람은 진짜 간첩이다. 특히 친구 나대성이가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그덕분에 많은사진을 찍었다. 2007 년에 돌아가신 그분의 명복을 빌며 ‘큰그릇’ 에나온 기사를 옮긴다.
영원한 진사 아저씨 박형근 님 별세. 7회부터 29회 졸업 때까지 모교
사진사로 근무했던 박형근 님이 지난 2월 3일 치매로 별세했다.
동문들의 재학 시절에 때론 불미 스런 일을 벌인 학생들의 보호자
로 아저씨, 삼촌역할을 하며 동문 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남긴 진사
아저씨는 조그마한 성의라며 장학 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봄철 체육대회나 연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정정함을 보여
주면서 재학시절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던 박형근 님의 명복을 빈
다. 향년 83세.
용고정문에서 국방부 쪽으로 올라가면 이길이야말로 역사가 많은곳이기도하다.
목동이 얼마전에 찍은 사진을 참조하기바란다 (오래만에 걸어본 용고앞-후암시장-국방부-서울역 길). 권승인, 김상두, 이영철선생님 (이석동문의 부친) 이 이근처에 살았던것으로 기억된다. 또한 이기혁, 장호식 이도 이곳에 한때 살았다.
이곳골목길에서는 때때로 상급생(때로는 동기생) 이 마음에 안드는 급우들을 데려다 군기잡는 곳으로 사용되기도했다. 특히 타교출신 동문 들에게는 더 심하게 다루었다. 내짝인 손병율은 다른 중학교에서 왔기때문에 몃번 당한것으로 기억한다. 지나간 철없던 시절의 일이었다. 웃어버리고 말자.
이곳오른쪽에 중국집이 하나 있었다. 하루는 옆에앉은 친구가 짜장면을 사주면서 내일 칸닝구를 하게해달라고 해서 맛있게 얻어먹은 기억이 있다. 아마 그친구는 어려서 부터 사교성이 좋아서 지금은 상당한 갑부가 되지않았을까….. 나는 한국에 있었으면 와이로(뇌물) 을 좋아해서 지금쯤 감옥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금가면 오른쪽으로 국방부 군악대 건물이 나오고 그뒤로 한국은행 사택 과 한국은행 정구장이 있다. 한국은행사택에는 ‘경기’ 다니는 학생이 많았고 부모님들의 수준도 인텔리들이 많아서 우리하고는 차이가있었다. 방과후에는 정구장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도 한은정구장을 빌려쓰는 우리로서는 약간의 열등감을 느끼면서 자랐다.
조금더올라가면 후암시장이 나오는데 우리는 ‘산판시장’ 이라고 불렀다. 코너집에는 ‘후광당’ 이라는 빵집이 있었는데 숙대입구의 ‘파리빵집’ 과 맞먹었고 특히 아이스케익 이 기억에 남는다. 왼쪽으로 동자동쪽으로 가면 왼쪽길로는 황성수, 이익흥씨가 살던 길이 나온다. 이익흥씨는 ‘각하, 시원하시겠읍니다’ 라는 에피소드로 유명해졌는데, 나는 누가 지어낸거라고 믿고있다.
또한 이곳에 위치한 ‘박미봉 미용소’ 는 유명했으며 내 동생들도 그곳에 다녔다. 나는 여동생이 6명이나 있는데 한명도 우리동기와 결혼은 커녕 교제한사실두 없다. 지금도 매우의아하게 생각한다. 6명이 다 이뻣고 내가 품질보장할수 있었는데 말이다.
용고10회는 용기가 모자르지않았나 생각된다. 하구헌날 우리집에 드나들던 친구들이 그렇게 많았건만.. 그렇지 않으면 내조부님이 무서웠나. 내 조부님은 한국을 끔찍히 사랑하셨던 분이었다. 친구들이 오면 앞에 꿇어 앉처놓고 시국담을 한없이 하시곤 했다.
후광당 건너편으로 가면 남산으로 올라 가는 길로연결되는데. 적산가옥들이 있었고 계지영이가 그곳에살았다. 지영이는 신학박사, 교수, 목사님으로 교계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으며 지금은 오렌지카운티에 거주하고있다.
후암시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대한민국 국방부청사가 있다. 한국의 국방부는 1대 이범석장관, 2대 신성모장관,….참으로영욕의 역사였다. 물론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무렵에는 자유당말기었지만 지금처럼 무질서하지는 않았다. 학생들이 국방부 청사를 진입하려고 헌병, 군인들과 싸우는겄을보며 통탄해 마지않는다. 우리 국방의 총산인 국방부를 어찌 데모대가… 몹시 찜찜하다. 군인들은 적과 싸우라고 군인이지 학생들과 싸우라고 존재하나.
누가 이젊은 학생들을 오도하고 있는가?
국방부에서 좀더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가면 서울역, 오른쪽으로 올라 가면 남산 층층게 – 옛날 신궁으로가는계단- 를지나면 남대문으로 빠지는데 그곳 에는 점쟁이 들이 길가에 죽 앉아있었다. 이길은 남대문, 회현동에 살던 급우들이 학교에오던 길로서 김광근 이도 이에 포함된다.
나는 갈월동50번지에살면서 전차타고 다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그때는 원효로-효자동 다니는 땡땡이 작은 전차가 있었고 몹시 흔들렸다. 노량진-동대문 을다니는 전차는 큰것으로 가운데 문하나가더 있었던것으로 기억하나 내착각 인지도 모른다. 급우들중에 소위 ’문안’ 에서 통학하는 친구들이 더 세련 되고 고급스러워 보였다 (홍준건등).
더구나 ‘기차통학생’ 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한강남쪽에 살면서 지각을해도 반에들어와서 ‘통학생입니다’ 라고 경례만 하면 언제나 무사통과 였다. 그때는 그들의 고충도 모르고 신기하게만 생각됬다. 이들중에는 이영우, 오세경 등이 있었는데 아마 고등학교때는 없어지지않았나 생각된다.
아, 눈깜빡할사이에 지나간 50년이여!
첫댓글 회현동 살때, 남산길 오르내리며 등하교하던 길에, 최덕만군과 같이 점쟁이(애기 신 들렸다고 하는) 한테 북에서 미쳐 월남 못한 가족들 안부를 묻던 기억이 납니다.... 참 많은 옛날 생각이 주마등 처럼......
참 놀랄만큼 많은걸 기억하고 있네.옛날이 너무 기립구먼
역시 나춘금이구나!! 그러니까 학생위원장이지!! 기억이 새록새록나는구나! 나역시 전차를 2번씩 갈아타는 장거리통학생(김신웅이랑 함께)이엿는데도 기차통학생의 특권은 못 누렸었고........그러던 우리가 "인생칠십고래희" 라느 70을 넘겼으니 정말 빨리도 갔구나.....!! 우리동기 모두에게 건강과 행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