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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인생] 23
1#준수의 오피스텔 주차장 안(밤)
서로 부둥켜안고 뒹구는 준수와 동원.
동원이 밑에 깔린다.
동원을 내려치려고 주먹을 치켜든 준수.
부들부들 떨고 있다.
동원: 쳐, 임마. 봐줄 거 없어. 아직 너 하나쯤은 이길 힘이 남아있어, 치라구.
준수: ...
주먹을 내리고 일어나는 준수.
돌아서간다.
동원이 일어나 준수의 허리를 부둥켜안는다.
피하며 동원을 낚아채는 준수.
앞으로 고꾸라지는 동원.
다시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대든다.
물러서는 준수.
동원이 주먹을 휘두른다.
피하며 동원의 배를 치는 준수.
윽 숨이 막히며 주저앉는 동원.
내려다보는 준수.
배를 움켜쥐고 주저앉아 가쁜 숨 내쉬는 동원.
준수: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어드릴까요.
동원: (뭐라고 하려는데 숨이 막힌다)
준수: 그런 식으론 윤혜진씨 마음 못 돌려요. 매 맞은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달려가서 뭘 어쩌려구요.
동원: (가쁜 숨)
준수: ...
노려보듯 보다가 가는 준수.
동원이 달려와 준수의 허리를 잡고 밀어붙인다.
앞에 세워놓은 차에 부딪치는 준수.
준수가 몸을 돌리는데 동원의 주먹이 날아온다.
턱을 맞고 비틀거리는 준수.
흥분해서 부르르 떨듯이 웃는 동원.
동원: 끝까지 해보자구.
다시 주먹을 날리는 동원.
준수가 동원의 손을 잡아 비튼다.
비명을 지르며 등을 돌리는 동원.
준수: 정말 죽고 싶어요.
차라리 애원하듯 소리치는 준수.
팔을 빼며 돌아서 발로 준수의 배를 걷어차는 동원.
배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는 준수.
동원이 온몸으로 준수를 밀어붙인다.
다시 나뒹구는 두 사람.
동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주먹을 휘두르고 준수는 맞으면서도 동원을 몸뚱이만 공격한다.
경비원이 달려온다.
경비원: 저저, 저러다 차 다 부서지겠다.
안절부절하는 경비원.
엉켜 붙어 나뒹굴던 동원과 준수가 지쳐서 벽에 기대 주저앉는다.
가쁜 숨 내쉬는 동원과 준수.
경비원: 그만들 해요. 다 큰 사람들이 무슨...
혀를 차며 돌아가는 경비원.
준수: ...
동원: ...
가쁜 숨만 내쉰다.
준수: 혜진씰 찾고 싶어요?
동원: ...
준수: 진심으로 혜진씰 찾고 싶으면 기다리세요. 혜진씨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동원: ...
준수: 어쩌면 일년이 걸릴지도 모르죠. 더 걸릴지도 모르구요. 그 정도루 상처가 깊다구요. (비로소 보며) 알고나 있어요.
동원: (가쁜 숨 내쉬며 노려본다)
준수: (웃으며) 날 원망할 거 없어요. 다애를 망친 게 당신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두 당신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으니까요.
동원: 다애와 내 관계에 끼어든 건 니놈이야.
준수: (웃으며) 그러시면 안 돼죠. 삼년씩이나 돈으로 다애를 망쳐놓고 다애한테 책임을 미루면요.
동원: 니 놈이 정말 다애를 좋아한다면 나하고의 관계는 무시할 수 있어야지.
준수: ...
물끄러미 동원을 바라보는 준수.
동원: 그 정도 과거도 용서 못하는 놈이 무슨.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준수.
동원을 노려본다.
몸을 일으키려고 움찔하는 동원.
준수: 혜진씨 마음이 돌아서면...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면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평생 함께 사세요. 혜진씨요... 북해도에서 날 안 만났으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나 역시 마찬가지구요. 그랬으면 용서구 뭐구 없는 거잖아요.
동원: ...
준수: 나는요, 윤혜진씨가 어떤 여자였든 사랑할 수 있어요.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추악한 여자라고 해도 상관없구요. 괴물의 탈을 쓰고 있어두 상관없어요. 나는 사랑할 수 있어요.
동원: ...
저도 모르게 좀 시큰해서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서 안절부절하는 동원.
준수: 나만큼 혜진씨를 사랑할 수 있으면 가서 비세요. 용서를 구할 사람은 당신이에요. 혜진씰 용서해줄 생각은 마세요. 당신은 혜진씰 용서할 자격이 없어요.
격해지는 감정을 누르려고 돌아서가는 준수.
동원: 세상은 사랑만 가지고 사는 게 아냐.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얼마든지 있다구.
준수: (돌아서며) 그러니까 윤혜진씰 놓아주라는 거예요. (다시 오며) 당신은 하늘이 무너져도 변할 사람이 아녜요. 혜진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뭘 하려구요. 평생 윤혜진씰 고문하면서 살 거 아녜요.
동원: ... (바라본다)
준수: (가쁜 숨)
동원: 그걸 알면서 왜 그 사람을 놔 주려고 하지.
준수: ...
동원: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준수: 사랑하니까요.
동원: (어이없다는 듯) 사랑하는데 왜.
준수: ... 사랑하니까요...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그 사람을...
숨죽여 우는 준수.
고꾸라지듯 허리를 꺾으며 주저앉는 준수.
신음하듯 새어나오는 준수의 오열.
2#거리(밤)
헤드라이트들의 물결.
3#달리는 동원의 차안(밤)
동원: ...
부들부들 떨고 있는 동원.
4#준수의 오피스텔 방안(밤)
침대에 엎드려 몸을 비틀며 고통을 참고 있는 준수.
5#혜진의 아파트 앞(밤)
차안에서 혜진의 집을 쳐다보고 있는 동원.
불 꺼진 집안.
동원: ... (소리) 사랑하니까 떠난다... 흥. 욕정이 식고나면 하는 소리가 그거잖아. 사랑해서 헤어졌다.
차 시트에 머리 기대고 눈을 감는 동원.
동원: (소리)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도대체 내 인생이...
신음하듯 한숨 내쉬고 차에서 내리는 동원.
6#동. 거실(밤)
어둡다.
차임벨 소리.
안방에서 나이트가운을 걸친 혜진이 방문을 열고 내다본다.
혜진: 누구세요?
대답대신 차임벨.
반가워서 얼른 현관으로 가서 문 열어주는 혜진.
흠칫 놀라는 혜진.
동원: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혜진을 훑어보는 동원.
얼른 나이트가운의 앞가슴을 손으로 가리는 혜진.
동원: 자고 있었나?
혜진: 아녜요. 잠깐만요.
당황해서 안방으로 달려가는 혜진.
그 뒷모습 바라보며 씰룩하는 동원.
안방 문 닫힌다.
동원: ...
벽을 더듬어 방의 불 키는 동원.
안으로 들어와 방안을 훑어보더니 부엌으로 가 냉장고 열어본다.
동원: 맥주 좀 사다놓지.
냉장고 안을 이것저것 뒤지더니 냉장고 문 꽝 닫고 돌아선다.
혜진이 거실에 서있다.
동원: ...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혜진: ... (긴장해서 보는)
동원: 부부간에 내외한다더니 옷 갈아입으러 들어갔었던 거야.
혜진: 뭐 마실 거 드려요.
동원: 냉장고 안이 텅텅 비었던데.
혜진: 사다 드릴게요.
선반 위에 놓아둔 반 지갑 집어 들고 현관으로 가는 혜진.
그 혜진의 손을 잡아 끌어당기는 동원.
혜진이 손으로 앞가슴을 가린다.
동원: 징그럽다?
혜진: ...
동원: 내 손이 닫기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거 아냐.
혜진을 더 잡아당겨 안으려고 한다.
혜진: 이러지 마세요.
동원; (더 끌어안으며) 내 얼굴을 쳐다봐.
혜진: ...
동원: 방금 그 놈을 만나고 오는 길이야. 집으로 가다 생각해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구. 이건 주객이 전도된 거 아냐. 나한테 맞아도 시원치 않을 놈이 되려 더 큰 소릴 치고 있으니.
혜진: ...
동원을 뿌리치고 베란다 쪽으로 가는 혜진.
동원: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나.
혜진: ...
동원: 도대체 잠옷 바람으로 누굴 맞이하려고 한 거야.
혜진: ...
동원: 내 얼굴을 보더니 방으로 달려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걸 보니 난 아닌 것 같고.
혜진: (돌아서며) 그런 상상밖엔 못 해요.
동원: 그럼 어떤 상상을 하란 말야. 마누라가 남편 손이 닫기만 해도 경기를 일으키는데.
혜진: ...
동원: 오오라, 사랑의 손길이 아니다 그 말씀이지.
혜진: ...
동원을 바라본다.
이죽거리듯 웃고 있는 동원.
혜진: ...
맥이 풀린다.
마음대로 해보라는 식이다.
동원: 홧김에 다시 돌아가서 그 녀석하고 한바탕 했어.
혜진; (흠칫)
동원: 놀랄 거 없어. 힘으론 내가 못 당하지. 한참동안 두들겨 맞으면서 당신 얼굴이 떠오르더군. 사실은 그 녀석한테 실컷 얻어터진 다음 당신을 만나려고 했지. 점술 좀 따보려고... 날 보면 어떤 얼굴을 할까. (웃더니) 내가 어리석은 놈이지.
뭔가 꾹 참고 있더니 갑자기 울먹이는 동원.
혜진; ...
동원: (얼른 그치고) 기다릴게... 지금은 안돼... 나두 뭐가 뭔지 모르겠다구...
다시 울음 같은 게 치밀며 현관으로 달려가는 동원.
현관으로 내려가다 발을 헛딛고 휘청한다.
저도 모르게 놀라서 동원에게 가려는 혜진.
현관문 열고 나가버리는 동원.
혜진: ...
7#동. 앞(밤)
달려 나와 차에 타는 동원.
시동을 걸더니 시트에 머리 기대고 다시 울먹이는 동원.
8#동. 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혜진: ...
베란다 창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혜진.
동원의 차가 보인다.
헤드라이트를 키더니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원의 차.
핸드폰 벨소리.
놀라듯 얼른 핸드폰을 받는 혜진.
혜진: ...
기다린다.
“나 내일 떠나요.”
혜진: ...
9#준수의 오피스텔 테라스(밤)
테라스 앞에 펼쳐진 야경.
준수: ...예정을 좀 바꿨어요.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애서.
“날 데려가면 안돼?”
10#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혜진: ...
“다애 하고 함께 떠나요.”
11#준수의 오피스텔 테라스(밤)
준수: ...
“난... 난 어떡하라구.”
12#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혜진: ...
“인연이 있으면... 다음 생에서 만나요.”
전화 끊기는 소리.
혜진: (비명처럼) 끊지마, 준수씨. 잠깐만 기다려 준수씨.
13#준수의 오피스텔 테라스(밤)
준수: ...
가물거리는 불빛들.
문득 핸드폰을 테라스 밖으로 던져버리는 준수.
14#혜진의 아파트 거실(밤)
다급하게 단축번호 찾아 누르는 혜진.
떨리는 손.
“전화기가 꺼져있어...”
전화 끊고 다시 번호 누르는 혜진.
이윽고 울음이 터지며 주저앉는 혜진.
15#준수의 오피스텔 주차장 입구(밤)
튀어나오는 준수의 모터사이클.
질주해 간다.
16#다애의 원룸 안(밤)
계산서 뽑고 있는 명자.
침대에 옷을 다 펼쳐놓고 고르고 있는 다애.
명자: 다애야, 내가 재고가 얼마나 있나 뽑아봤더니 대충 이 금액이 나왔거든. (보더니) 다애야 이리 와서 좀 봐.
다애: 언니가 계산해서 나중에 갚어.
명자: 야 그래두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다애: 은행에서 융자금 나오면 파리로 좀 부쳐줘.
명자: 너 거기서 아주 눌러앉을 작정이니.
다애: 이삼 년은 살아야지. 그래야 준수씨 딴 생각 안할 거 아냐.
핸드폰 벨소리.
다애 얼른 플립 열어본다.
다애: (전화) 준수씨?
“내 얘기 잘 들어.”
17#거리의 공중전화박스(밤)
준수: 내일 아침 비행기로 예약을 바꿨어. 공항에서 만나자구... 만일 사정이 생겨서 내가 못 나가면 너 먼저 떠나. 늦어도 이삼일 안으로 따라갈게.
18#다애의 원룸 안(밤)
다애: 거짓말 아니지. 나만 보내놓고.
“내 말 잘 들으라구.”
19#거리의 공중전화 박스(밤)
준수: 파리에 도착하면 오페라하우스 근처에 있는 호텔을 찾아봐. 드프랑스라고 작은 호텔이야.
“꼭 오는 거지, 준수씨.”
전화 끊고 모터싸이클에 타고 달려가는 준수.
20#다애의 원룸 안(밤)
불안해서 한숨 내쉬는 다애.
명자: 뭐라는 거야.
다애: ...
명자: 같이 못 떠난대?
다애: 아냐, 내일 떠나쟤.
애써 웃고 옷 정리하는 다애.
명자: 잘됐네. 그래, 준수씨 마음 변하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
21#강회장의 별장 앞(밤)
멎어있는 모터사이클.
준수: ...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본다.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철문을 뛰어넘는 준수.
안으로 달려간다.
22#동. 뜰(밤)
별장 문을 잡아 흔드는 준수.
응답이 없다.
뒤로 물러서서 별장을 바라보는 준수.
불이 모두 꺼진 별장.
준수: 내일 파리로 떠납니다. 소원대로 내 뒤를 따라 사람을 보내도 난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한 가진 명심하세요. 내 주위의 누구도 건드리지 마세요. 이건 나하고 회장님 사이의 게임입니다. 그러니 내 주위 사람은 건드리지 마세요. 만일 약속을 어기면 회장님과의 게임은 거기서 끝이 납니다. 그럼 성구가 어떤 앤지 성구의 밑바닥까지 모두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건 성구를 두 번 죽이는 거라는 거 잘 아실 겁니다. (뒤로 물러서며) 기다릴게요. 사냥꾼들을 보내세요.
울부짖듯 부르짖는 준수.
여전히 어둠에 잠긴 별장.
23#준수의 오피스텔 주차장(밤)
준수의 모터사이클 들어와 멈춘다.
준수: ...
사방에서 얼굴을 내비치는 사내들.
헬멧을 움켜쥐는 준수.
핸드폰 벨소리.
사내가 전화를 받는다.
다른 사내들이 차의 트렁크에서 쇠파이프를 꺼내 움켜쥔다.
체인을 꺼내 손에 감는 사내도 있다.
모터사이클에서 내리는 준수.
조여 오는 사내들.
사내가 핸드폰을 끊고 사내들을 제지한다.
가자는 고개 짓.
사내들 삽시간에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마지막 사내가 탄 승용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준수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24#동. 엘리베이터 안(밤)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 눈 감고 있는 준수.
엘리베이터가 멎고 문이 열린다.
눈을 떠서 앞을 보는 준수.
준수: ...
복도에 혜진이 서있다.
준수: ...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다.
그대로 서있는 혜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준수가 뒤돌아서 혜진의 손을 잡아당긴다.
덜컥 준수에게 끌려 안으로 들어가는 혜진.
25#혜진의 집 거실(밤)
들어오는 동원.
성숙: 얼굴이 왜 그래요. 누구하고 싸웠어요?
동원: 애들은.
성숙: 일찍 재웠어요. 아침 일찍 애들 깨워서 혜진이한테 데려다 주고 공항에 나가려구요.
동원: (본다)
성숙: 혜진이 하고 할 얘기도 좀 있고 그래서 제가 애들 데려다 주려구요.
동원: 그럴 필요 없어요. 애들은 내가 데려다 줄 테니까 그냥 공항으로 가세요.
이층으로 가는 동원.
성숙: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섭섭하죠.
동원: (멈춰서 돌아본다)
성숙: 저요, 진심으로 혜진이 하고 하 선생님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동경일 다 접어두고 이러고 있는 거 아녜요.
동원: 어떻게 보상을 해 드릴까요.
성숙: 어머머,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동원: 말씀드렸죠. 나리 엄마 곧 집으로 들어올 거라구요.
성숙: 혜진이 부탁으로 지금까지 있은 거예요. 혜진이한테 물어보세요.
동원: 아오끼상한테 안부나 전해주세요.
이층으로 올라가버리는 동원.
성숙: 내가 뭐 하 선생님 좋아해서 그런 줄 아세요. 기가 막혀서.
26#동. 애들 방(밤)
동원: ...
들여다본다.
잠든 나리와 나래.
동원: ...
가만히 한 숨 내쉬는 동원.
27#준수의 오피스텔 방안(밤)
혜진: ...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가방에 짐 꾸리는 준수.
문득 멈추고 혜진 본다.
혜진: ...
준수: ...
마음이 아프다.
다시 짐 꾸리기 시작하는 준수.
혜진: 얼마나 있을 건데.
준수: 말했잖아요. 오래 걸릴 거라구요. 강회장이 쉽게 잊어버리겠어요.
혜진: ... (애타게 바라보는)
준수: ... (보다가 화나서)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어요. 여기선 살 수가 없다니까요.
혜진: (터지듯) 사고였다면서 그 사람이 죽은 건.
준수: ...
혜진: 아냐.
준수: (다시 짐 싸며) 저녁에 하동원씨가 찾아왔었어요. 용서해준대요. 집으로 돌아오면.
혜진: 누가 그 사람 용설 받고 싶대.
준수: 집으로 들어가세요. 바람 한 번 핀 거 가지고 인생을 망치고 싶어요.
혜진: 바람?
준수: 도대체 날 얼마나 알고 있는 거예요. 북해도에서 만난 게 처음이잖아요. 갈 길이 다른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거예요. 어차피 갈 길이 다르니까 그렇게 된 거구요.
혜진: ...
준수: (한 숨 내쉬듯) 내 실수였어요. 서울로 올라오는 비행기에서 다 지워버렸었는데. 네, 난 부인을 깨끗이 잊어버렸었다구요. 다시 만날 거라곤 상상도 안 했어요.
혜진: (눈물 참는)
준수: 네, 스토커처럼 부인을 따라다녔죠. 부인과 나눴던 정사가 잊을 수가 없었어요. 숨이 막혔다구요. 그 순간을 생각하면.
혜진: 그래두 좋아.
준수: ...
혜진: 그냥 욕정이었다고 해도.
준수: 그러니 다 잊어버리자구요. (다시 짐 싸며) 하동원씨 말이 맞아요. 사랑으로 포장한 욕정에 불과했다구요.
혜진: 그래두 좋다고 했잖아.
준수: 그런 하룻밤 욕정의 대상은 얼마든지 있어요.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보세요. 온 세상이 싸구려 욕망으로 넘쳐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누구 한사람 그걸 인정할 거 같애요. 사랑에 목말라 갈증이 난다고 하겠죠.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사랑에 목말랐던 게 아녜요. 그저 하룻밤 외로움을 달래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뿐이죠.
문 쪽으로 달려가는 준수.
현관문 여는 준수.
준수: 돌아가세요.
혜진: ...
준수: 돌아가라니까요.
달려와 거칠게 혜진의 팔을 잡아당기는 준수.
그대로 준수를 얼싸안는 혜진.
그런 혜진을 뿌리치려다 움직이지 못하는 준수.
혜진: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어. 왜 떠나려고 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혜진을 뿌리치려는 준수.
더욱 준수를 끌어안으며 가슴에 파고드는 혜진.
혜진: 같이 죽자고 했었지.
준수: (괴로운)
혜진; 난 두렵지 않아.
준수: (혜진의 팔을 잡아 떼어내며) 살고 싶어서 당신을 만난 거라고 했잖아요. 당신을 만나서 비로소 살고 싶어졌다구요.
혜진: 나보고 어떡하라구. 하늘 높이 날아올랐었는데 어디로 떨어지라구.
다시 준수의 품에 파고드는 혜진.
움직이지 못하는 준수.
혜진: 나 좀 안아줘...
준수: ...
혜진: 지금은 아무 생각두 하고 싶지 않아.
졸린 듯 눈을 감으며 준수의 가슴에 얼굴 묻는 혜진.
더욱 참지 못하고 혜진을 으스러져라 껴안는 준수.
숨이 막혀서 가쁜 숨 내쉬는 혜진.
준수: 그래요, 같이 죽어요. 죽으면 되잖아요.
준수의 손이 혜진의 옷을 벗기기 시작한다.
한껏 몸을 벌리고 준수를 받아들이는 혜진.
28#어느 카페(밤)
동원: 이 밤중에 웬일이야.
다애: 아무래도 계산이 틀린 거 같아서요.
동원: 무슨 계산.
다애: 생각해 보세요. 아저씨 말이 맞더라구요. 서로 필요해서 만났는데 마치 나만 피해잔 것처럼 떠들었잖아요.
동원: 그래서.
다애: (봉투와 차키 내밀며) 차키, 지금 살고 있는 집 계약서, 그리고 가게 보증금 대신 그동안 내가 저금해서 모아둔 돈.
동원: 까불고 있네.
다애: 내가 불편해서요.
동원: (앞에 놓인 술 한 모금 마시고) 파리로 떠난다고.
다애: 네.
동원: 이준수 그 친구하고.
다애: 해피엔딩 아닌가요. 난 준수씨 하고 떠나고 아저씬 사모님 차지하고.
동원; (싱긋)
다애: 아니던가. 결국은 아저씨 계획대로 사모님을 버리는 게 끝인가.
동원: 아니지. 와이픈 끝까지 데리고 살아야지.
다애: 자존심 상할 텐데.
동원: ...
다애: 그렇잖아요. 사모님 바람핀 게 그게 잊혀지겠어요.
동원: 잊혀지지야 않겠지. 어느 벨 빠진 놈이 그걸 잊어버리겠어.
다애: (갸우뚱 하더니) 아저씨 계산법은 정말 복잡하네.
동원: 복잡할 거 없어. 난 한 손엔 분노라는 채찍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용서라는 당근을 들고 말 위에 올라앉은 셈이지.
다애: 잔인하시네요, 하동원씨.
동원; (웃으며) 차라리 버리는 게 자비롭다?
다애: ... (바라보는)
동원: 뭐.
다애: ... 난 가끔... 사모님하고 준수씨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동원: ...
다애: 사랑에 빠지는 건 미친 짓이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사랑 없이도 잘 살고 있는 우리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윤혜진씨와 준수는 백년을 하루에 다 살아버리는 사람들처럼 행복해 보이고 부러웠어요.
동원: 그런데 왜 그 친구와 떠나려고 해.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되는 이 좋은 세상을 놔두고.
다애: ...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갈게요.
동원: 전화해. 언제든지.
다애: ...
동원: 내가 필요하면.
다애: ... (방긋)
동원: 왜.
다애: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찌 보면 참 편리하고 편한 아저씨잖아요.
일어나서 가는 다애.
동원: ...
다애의 뒷모습 바라본다.
아까운 듯 한숨을 길게 내쉬는 동원.
29#준수의 오피스텔 테라스(밤)
문을 열고 나오는 준수.
한껏 바람을 들이킨다.
어디선가 불꽃이 터지는 소리.
준수: ...
환영처럼 오타루의 불꽃놀이가 떠오른다.
얼른 그 불꽃을 지우려고 돌아서는 준수.
방안을 들여다본다.
30#동. 방안(밤)
침대에 잠이 든 혜진.
행복한 미소를 띈 채 마치 꿈을 꾸듯 잠이 들었다.
그 모습 위에 겹쳐지는 오타루의 불꽃놀이.
31#동. 테라스(밤)
돌아서는 준수.
준수: ...
천천히 난간 끝까지 걸어간다.
그 앞에 펼쳐지는 오타루의 설경.
준수: ...
눈을 감는 준수.
32#동. 방안(밤)(회상)
혜진과의 격렬한 정사.
혜진: 차라리 날 죽여. 나 혼자선 못 살아. 떠날 거면 날 죽이고 가.
33#동. 테라스(밤)
준수: ...
싸늘한.
34#다애의 원룸 안(밤)
명자: 차키랑 돈이랑 돌려주니까 하동원씨 표정이 어때?
다애: ...
명자: 썩은 오이 씹은 얼굴이지?
다애: ...
한 숨 내쉬고 침대에 벌렁 눕는 다애.
명자: 왜, 한 바탕 해주고 나니까 속이 시원할 거 아냐.
다애: 만일 준수씨... 공항에 안 나오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하니까.
명자: 나와, 걱정마.
다애: ...
명자: 그럼 어떡할 건데. 안 나오면.
다애: ...
명자: 그래, 준수 안 나오면 잊어버려. 니가 뭐가 걱정이니. 이쁘겠다 젊겠다.
다애: (벌떡 일어나 앉으며) 또 누군가 만나겠지? 안 그래 언니.
애원하듯 웃어 보이는 다애.
35#준수의 오피스텔 방안(밤)
혜진 잠이 깬다.
시트로 몸을 가리며 일어나 앉는다.
혜진: ..
소파에 파묻혀 잠이 든 준수.
무릎을 곧추세우고 턱을 괴고 앉아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잠든 준수.
그 얼굴 위에-
“하루만 더 있으면 안돼요.”
-오타루에서
준수: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데 나한테는 무의미한 시간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인생이 달린 시간이라면... 하루쯤은 빌려줄 수도 있잖아요.
혜진: ... (바라보는)
준수: 그냥... 하루만 빌려주세요.
잠든 준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혜진.
눈물이 핑 돈다.
36#동. 욕실(밤)
얼굴에 가볍게 물을 적시는 혜진.
거울을 본다.
혜진: ...
옷매무새를 고치고 밖으로 나간다.
37#동. 방안(밤)
나오는 혜진.
소파.
준수 없다.
혜진: ...
테라스 쪽 본다.
문이 열려있다.
38#동. 테라스(밤)
혜진이 온다.
준수가 야경을 바라보고 있다.
혜진: ...
준수: 갈 거예요?
혜진: 미안해.
준수: (고개 조금 돌리고) 뭐가 미안하다구요.
혜진: 준수씰 잡을 자격두 없는 사람이.
준수: (돌아서며) 누가 그런 소리 듣고 싶대요.
혜진: ...
준수: 말했잖아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서 떠나는 거라구요.
혜진: ...
준수: 자신이 없어요, 난.
혜진; ... (괴롭게 웃는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몰라.
준수: ...
혜진: 준수씨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잖아. 누구라도 옆에 있어주길 바란 거 뿐야.
준수: (뭐라고 하려는데)
혜진: 그런 식으로 날 이용했다고 탓하는 게 아냐. 나 역시 그랬잖아. 오타루에 이준수라는 사람을 만나러 간 게 아니니까.
준수: 그래요. 거기서 끝냈어야 했어요.
혜진: ...
바라보는 혜진.
준수: (괴로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는)...
혜진: (웃으며) 행복해... 다애씨하고...
준수: 가지 말아요.
혜진: ...
준수: 조금만 더 있어줘요.
혜진: ...
눈물이 핑 도는 혜진.
얼른 돌아서간다.
준수: 아직 할 얘기가 남았다구요.
쫓아가는 준수.
39#동. 안(밤)
핸드백 집어 들고 현관으로 가는 혜진.
달려가 문을 막아서는 준수.
준수: 내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율 말해줄게요. 나두 싫다구요. 당신하고 헤어지는 거.
혜진: ...
준수: 내 말을 들어보세요. 이런 식으로 헤어질 순 없다구요.
혜진: ...
바라보는 혜진.
애원하듯 바라보는 준수.
준수를 피해 나가려는 혜진.
준수: (몸을 비키며) 성구 내가 죽였어요.
혜진: ... (멈추는)...
준수: 자살한 게 아녜요, 성구는. 내가 죽였어요, 성구는.
움직이지 못하는 혜진.
마른침 삼키는 준수.
그 위에 전화벨 소리.
40#박병식의 집 앞(밤)
전화벨 소리.
41#동. 안(밤)
여기저기 뒹구는 술병들.
취했는지 겨우 몸을 일으켜 전화 받는 박병식.
박병식; 여보세요... 김형? ... 아냐, 초저녁에 술을 몇 잔 마셨는데 몸을 가누지 못 하겠더라구... 그래, 끊어야지. 혼자 사니까... 그랬어?
42#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방(밤)
김: 감정결과가 나와서 여러 번 전활 걸었어... 아침에 전화해 줄까 하다가 무척 궁금해 하는 거 같길래.
43#박병식의 방안(밤)
냉장고에서 냉수 꺼내 마시는 박병식.
박병식: 어떻게 나왔어... 그래?
44#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방(밤)
김: 여럿이서 서너 차례 세밀하게 살펴봤는데 타살 흔적은 찾아 볼 수가 없었어.
45#박병식의 방(밤)
박병식: ... 그래?
“일본 경찰의 판단대로 자살이거나 실족사가 맞는 거 같애.”
박병식: 으음(신음)
46#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방(밤)
김: 어떡할까. 이거 수사기관에 넘겨줘.
“비공식적으로 의뢰한 거니까 나중에 나한테 넘겨줘.”
김: 그럴까?
47#박병식의 방(밤)
박병식: 수고했어. 고맙네.
전화 끊는 박병식.
신음하더니 핸드폰 꺼내 번호를 찾는다.
“이준수” 라는 이름.
전화 건다.
48#준수의 오피스텔의 뒷마당(밤)
바닥에 떨어져 박살이 난 준수의 핸드폰.
“전화기가 꺼져있어.”
49#박병식의 방(밤)
“통화가 불가능합니다. 잠시 후 다시...”
핸드폰 끄는 박병식.
책상 위의 자명종 시계를 보는 박병식.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박병식: ...
뒹구는 술병을 집어 입에 부어넣는 박병식.
술이 없다.
일어나 약병을 찾아 손바닥에 털어 놓는다.
50#준수의 오피스텔 방안(밤)
술 따르는 준수.
떨리는 손.
혜진: 다시 한번 말해봐.
단숨에 마셔버리는 준수.
다시 술 따른다.
혜진: 거짓말... 준수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
준수: ...
혜진을 바라보는 준수의 눈빛이 괴롭다.
술잔을 집어 드는 준수.
떨리는 손.
입으로 가져가다 떨어뜨리듯 술잔을 내려놓는 준수.
준수: 다른 거 다 참을 수 있었어요. 성구는 내 약점을 찾아 휘저어 놓고 괴로워하는 내 모습을 즐기곤 했어요. 그래두 난 싫은 내색 한번 안했어요. 오히려 성구가 원하는 대로 더 괴로워하는 척 하면서 성구를 더 즐겁게 해줬죠. 난 어차피 악어새니까요. 악어를 즐겁게 해줘야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까요.
혜진: ...
준수: 수정일 이용해서 성구를 궁지에 몬 건 내가 성구한테 거둔 최초의 승리였어요. 수정일 죽였다고 믿고 도망쳐 다니는 성구를 바라보고 있는 게 너무나 즐거웠어요.
혜진: ...
준수: (기묘한 미소가 떠오르며) 성구는 점점 미쳐갔어요. 강회장이 보내주는 돈을 내가 중간에서 가로채고 전해주지 않자 성구는 점점 절망에 빠져갔어요. 여자와 술 없이는 성구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었거든요.
혜진: ...
준수: 내 계획이 거의 성공했다고 믿고 있을 때였어요. 성구가 날 송두리째 흔들어놓기 시작했어요.
51#오타루의 절벽 위.(회상)
마주선 준수와 성구.
성구: ...
준수: ...
성구: (씩 웃더니) 넌 오랫동안 이 기회를 기다렸지.
준수: ...
성구: 마치 성 처녀나 되듯이 떠벌여왔던 니 누이가.
준수: 닥쳐.
성구: ...
준수: 말했지. 다른 건 다 용서해두 내 누일 모욕하는 건 못 참는다구.
성구: (웃으며) 그게 그렇게두 부끄럽냐. 니 누이가.
준수: 그만.
성구의 멱살을 움켜쥐는 준수.
몸을 맡기고 싱긋 웃는 성구.
준수: 날 맘대로 짓밟아도 좋아. 난 어차피 악어의 이빨 사이에 낀 찌꺼기를 파먹고 사는 더러운 놈이니까. 니가 날 모욕하고 학대할 때마다 난 희열을 느끼는 비열한 놈이니까. 그래 난 니 돈이 필요해 난 너한테 길들여졌다구. 니 비위만 맞추면 편하게 살 수 있으니까. 하지만 내 누인 안돼. 내 누인 나한테 남은 단 하나의 자존심이니까. (멱살 더 조이며) 명심해. 내 마지막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구.
성구를 확 밀어버리는 준수.
힘없이 뒤로 밀려나는 성구.
벼랑 끝에 발이 걸려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으려고 애쓰는 성구.
놀래서 성구를 바라보는 준수.
두 손을 저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웃고 있는 성구.
갑자기 두 손을 놓고 벼랑 밑으로 몸을 던지는 성구.
준수: 성구야.
달려가 성구의 한 손을 움켜잡는 준수.
성구가 벼랑 밑으로 떨어진다.
벼랑 위에 엎드려 성구의 손을 잡고 있는 준수.
준수: 내 손을 꽉 잡어, 성구야.
성구: ...(웃고 있는)
준수: 내 손을 놓치면 안돼.
성구: 놔.
준수: ...
성구: 내 손을 놓으면 모든 게 끝나는 거야.
준수: ...
미끄러지려는 성구의 손을 필사적으로 움켜쥐는 준수.
성구: 내 손을 놔. 그럼 니가 내가 되는 거야. 진짜 강성구가 되는 거라구. 니가... 니가 내 인생을 사는 거라구.
성구의 손을 잡고 있는 준수의 손이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준수: 내 손을 놓치면 안돼. 성구야.
준수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성구의 손.
까마득한 벼랑 밑으로 떨어져 내리는 성구.
웃고 있다.
준수: 성구야.
울부짖는 준수.
52#준수의 오피스텔 방(밤)(현실)
혜진: 준수씨 잘못이 아니잖아.
준수: ...
부들부들 떨고 잇는 준수.
혜진: 그 사람이 준수씨 손을 놓은 거잖아. 준수씨 손을 놓지 않았으면 살 수도 있었는데 그 사람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라구.
준수: (비명처럼) 그런 게 아니라구요.
혜진: (숨이 막히는)
준수: (울부짖듯) 내가 죽인 거라구요, 성구는.
꺼이꺼이 울부짖더니 비틀거리며 테라스로 달려가는 준수.
혜진: 그래두 난 상관없어. 준수씨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가슴을 부여안으며 주저앉는 혜진.
혜진: 그래서 떠나려고 했던 거야. 그 사람을 죽였다고 믿기 때문에. (정신이 나서) 그렇잖아, 그렇게 믿고 있는 거야. 준수씨는... 그 사람을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거라구.
일어나 준수를 찾는다.
혜진: 내 말 들어봐, 준수씨. 그건 준수씨 잘못이 아냐. (준수를 찾으며) 나쁜 사람이야, 그 사람. 죽어서도 준수씨 괴롭히려고 계획적으로 준수씰...
준수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혜진의 숨이 막히듯 멎는다.
테라스 난간 위에 올라가 서있는 준수.
손을 뻗히며 테라스로 나가는 혜진.
53#동. 테라스(밤)
혜진: 안돼, 준수씨.
준수: ...
난간 위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준수.
혜진: 그러지마, 준수씨... 제발.
준수: (등 돌린 채)성구가 발을 헛딛고 절벽 밑으로 떨어졌어요.
혜진: ...
준수: 내가 성구의 손을 잡았어요.
천천히 난간에서 몸을 돌리는 준수.
웃고 있다.
떨고 있는 혜진.
준수가 휘청한다.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혜진.
“성구가 내 손을 잡으려고 버둥거렸죠.”
혜진: ...
다시 준수 본다.
웃고 있는 준수.
준수: (웃으며) 겁에 질려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성구를 바라보고 있는 게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어요.
54#오타루의 절벽(회상)
움켜쥔 손과 손.
절벽 위에 엎드려 성구의 손을 잡고 있는 준수와 준수의 손을 잡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성구.
준수: 수정이가 차에서 떨어진 건 니 잘못이 아냐. 넌 술에 취해서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지. 운전은 내가 했다구.
성구: (겁에 질려 바라보는)
준수: 괴롭겠지.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게.
준수의 손을 잡고 있는 성구의 손이 조금 미끄러진다.
필사적으로 다른 손으로 준수의 손을 잡으려고 버둥거리는 성구.
그러나 준수의 손을 놓친다.
준수: 난 항상 니가 되고 싶었어. 넌 항상 그걸 즐겼지. 이번엔 내 차례야.
성구의 손을 놓아버리는 준수.
준수의 손을 움켜잡으려고 버둥거리는 성구.
그럴수록 준수의 손에서 미끄러지는 성구의 손.
이윽고 준수의 손을 놓치고 벼랑 밑으로 떨어지는 성구.
55#동. 테라스(밤) (현실)
준수: ...
한껏 몸을 뒤로 젖히고 소리 없이 웃고 있는 준수.
편안하고 행복한 모습이다.
혜진: ...
그런 준수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혜진.
준수가 젖혔던 몸을 바로 세우고 혜진을 바라본다.
준수: ...
씨익 웃어 보이는 준수.
난간 위에서 테라스 바닥으로 뛰어내린다.
울음이 터지는 혜진.
두 손을 활짝 펴 보이며 웃는 준수.
준수: 네... 내가 죽였어요, 성구를...
울고 있는 혜진.
준수: 또 한번 기회가 와도 난 망설이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도 성구의 손을 놓아버릴 거라구요.
미친 듯이 그러나 소리 없이 웃어대는 준수.
56#박병식의 집 안(밤)
준수와 혜진, 다애 등의 사진을 뒤적이며 전화 걸고 있는 박병식.
박병식: 홍다애씨? 밤늦게 전화해서 미안해요. 나 박병식이라는... 그런 게 아니라 이준수씨 하고 통활 좀 하려고 했더니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57#다애의 원룸 안(밤)
네 활개 펴고 자고 있는 명자.
다애: 무슨 일인데요... 파리요? ... 네, 내일 아침 비행기로 가기로 했어요.
“이준수씨도 같이 가기로 했나?”
다애: 안되나요?
58#박병식의 집안(밤)
박병식: 안될 거 없지... 별 일은 아니고 이준수씨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59#다애의 원룸 안(밤)
다애: 말씀하세요.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전해드릴게요.
60#박병식의 집안(밤)
박병식: 으음... 그냥 이렇게 전해줘요. 오해가 풀렸으니까 안심하고 떠나라구... 그냥 그렇게만 전해줘요.
61#다애의 원룸 안(밤)
다애: 그럼 준수씨 결백이 밝혀진 셈이네요.
“그렇지.”
다애: 고마워요, 아저씨. 이 은혠 꼭 갚을게요.
전화 끊고 명자 흔들어 깨우는 다애.
명자: 왜 그래.
다애: 준수씨 결백이 밝혀졌대. 준수씨 공항에 안 나올까봐 조마조마 했는데 이젠 안심이네.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다애.
62#박병식의 집안(밤)
여전히 전화기 든 채 싱긋 웃고 있는 박병식.
무거운 몸을 움직여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박병식: ...
멍하니 천장 보더니 싱긋 웃는다.
스탠드의 불을 끈다.
63#다애의 원룸 안(밤)
다애: 뭐라구.
명자: 그렇잖아. 준수가 너하고 파리로 도망치려고 한 건 성구씨 아버지 때문인데 오해가 풀렸으면 도망칠 이유가 없잖아.
다애: 꼭 그렇게 말을 해야겠어. 벌 받는다, 언니. 나중에라도 길 걸어갈 때 조심해라. 마른하늘에 벼락 맞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명자: 너 공항에 나가봤자 헛걸음 하는 거야. 준수가 그 여자 버리고 너하고 갈 거 같으니.
다애: 그래, 아주 초를 쳐라. 재를 뿌려.
벌렁 누워버리는 다애.
다애: ...
점점 불안해진다.
벌떡 일어나 앉는다.
명자: (하품하며) 그렇게 궁금하면 지금 준수씨한테 가서 물어봐. 갈 건지 말 건지.
다애: ...
명자: (힐끔 보더니 놀리듯) 그 아저씨두 참. 하필 그걸 왜 지금 알려줘. 비행기 뜬 다음에 알려주지.
다애: ...
점점 심각해지는 다애.
구석에 놓여있는 여행용 가방을 바라본다.
여행용 가방.
64#혜진의 집 거실(밤)
성숙이 방에서 나와 살금살금 부엌으로 간다.
동원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성숙: 안 주무시는구나. (가서) 저 좀 앉아두 되죠.
동원: ...
성숙: (얼른 앉으며) 아까 화내서 미안해요. 나도 모르게 울컥 해가지고.
동원: ...
성숙: 하 선생님이 내 진심을 몰라주고 야박하게 나오시니까.
동원: ...
말없이 술잔만 만지락거리던 동원이 갑자기 소리 내어 웃는다.
성숙: 왜 웃으세요. 내가 이러는 게 우스우세요?
동원: ... (한숨)
성숙: 그래요, 신주쿠 선술집에서 혜진이랑 하 선생님 처음 만난 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구요. 나두 참, 그런데두 시치미 뚝 떼고 혜진일 추켜 세워줬으니. 거기서 운명이 바뀐 거잖아요.
동원: (씁쓸한 미소)
술잔을 흔들더니 한 모금 마신다.
성숙: 동원씬 그 때 몰랐죠. 내가 좋아하는 거.
싱긋 웃는 성숙.
동원: ...
성숙: (한 숨 쉬며) 그래요, 혜진이가 나보다 더 약은 거죠, 뭐. 순진한척 (한 숨 쉬고) 저두 술 한 잔 주세요.
동원: (무시하고 잔 흔들며) 참 알다가도 모를게 여자라고 하더니(웃으며) 양파처럼 벗겨도 벗겨도 속이 나오지 않는 게 여자라면서요.
성숙: 아녜요, 동원씨. 여자라고 다 그런 거 아녜요. 나 같은 여자는요. 한 꺼풀만 벗겨도 속이 다 보인다구요.
동원: ... (비로소 성숙 본다)
성숙: 혜진이만 그런 거예요. 요즘에 그런 여자가 어딨어요.
동원: ...
물끄러미 성숙을 바라보더니 문득 쓸쓸하게 웃는 동원.
고개 돌려 술 마신다.
성숙: 왜요, 하 선생님.
동원: 윤혜진이가 부러울 때가 있어요. (웃는)
성숙: 뭐가 부럽다는 거예요.
동원: 사랑에 미칠 수 있다는 게 부럽다구요.
입을 꽉 다물고 신음하는 동원.
눈치 보는 성숙.
동원: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건지.
남은 술 벌컥 들이켜고 부르르 떠는 동원.
65#준수의 오피스텔 안(밤)
현관으로 나가는 복도 벽에 기대 앉아 마주보고 있는 혜진과 준수.
혜진: ...
고개 들어 준수 본다.
준수: ....
곧추세운 무릎 위에 팔을 얹어 늘어뜨리고 앉아있다.
혜진: 어느 쪽이 진실이야.
준수: ...
혜진: 준수씨가 손을 놓은 거야 그 사람이 손을 놓친 거야.
준수: (본다)
혜진: 어느 쪽이야.
준수: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손을 놓았든 놓쳤든.
혜진: 왜 중요하지 않아.
준수: 어느 쪽이든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구요. 성군 죽었구 난 살아있어요.
혜진: 내 말 잘 들어봐, 준수씨.
준수 쪽으로 무릎으로 기어와 준수의 두 손을 마주 잡는 헤진.
혜진: 준수씬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거야.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질 못 하고 있다구.
준수: (고개 돌리는) ...
혜진: 잘 생각해봐. 어느 쪽인지.
준수: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예요.
혜진: 내 운명두 걸려 있잖아. 거기에.
준수: ... (본다)
혜진: 다시 한번 생각해봐. 두 사람이 다투고 성구가 실수로 발을 헛딛고 벼랑 밑으로 떨어졌는데... 거기까진 맞지.
준수: ... (다시 고개 돌리는)
혜진: (준수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아 돌리며) 그 다음을 잘 생각해봐. 어떻게 됐는지.
준수: (얼른 다시 고개 돌리며) 나두 잘 모르겠어요.
혜진: (울부짖듯)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라니까.
준수: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요.
혜진을 뿌리치고 방 쪽으로 도망치는 준수.
그런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준수: ...
기억을 더듬듯 허공을 헤매는 준수의 눈길.
괴롭고 안타깝다.
혜진이 다가와 준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다.
혜진: 그래.. 생각하지마.
준수: ...
혜진: 어느 쪽이든 난 상관없어.
준수: ... 성구가 떨어지고 나서 난 정신없이 산을 내려왔어요. 한참을 그렇게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성구 생각이 났죠.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혜진: ...
준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눈 감고 있는 혜진.
준수: 그런데 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성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자 난 무서웠어요. 다시 정신없이 도망쳤죠.
혜진: ...
준수: 그래요, 난 성구를 또 한번 죽인 거예요.
혜진: ...
마치 꿈꾸듯 미소 짓고 있는 혜진.
준수: (돌아보듯) 그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난 마음속에서 수없이 성구를 죽이고 또 죽였어요. 내가 성구의 손을 놓았든 성구가 내 손을 놓쳤든 그건 아무 의미가 없다구요.
몸을 돌려 혜진의 두 팔을 잡는 준수.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아련한 눈길로 준수를 바라보는 혜진.
준수: 난 도망칠 거예요. 파리로 갈 거라구요. 거기가 어디든 좋아요. 성구를 잊어버릴 수만 있는 곳이라면 난 어디든지 갈 거예요.
혜진; 나는?
준수: ...
혜진: 난 어딜 가야 준수씰 잊어버릴 수 있는데.
준수: ...
혜진: 안 된다고 했잖아. 날 버리고 가면.
주먹 쥐고 손으로 준수의 가슴을 때리고 또 때리는 혜진.
흐느끼는 혜진의 입술을 막는 준수의 입술.
준수의 목을 끌어안고 쓰러지는 혜진.
격렬한 몸짓이 이어진다.
열려진 테라스의 문.
바람에 커튼이 팔랑인다.
<23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