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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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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大念處經(D22, Mahāsatipaṭṭhānasutta)은
가)할 것: 앞으로 할 수행의 대상, 순서, 방법 등을 <잊지 않고> 기억(sati)하며,
나)하고 있는 것: 이렇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기억하고 있음에 의해서 또한 경험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잊지 않고> 기억(sati)하며,
dīghaṃ vā añchanto ‘dīghaṃ añchāmī’ti pajānāti 유능한 도공이나 도공의 도제가 길게 돌릴 때는 나는 길게 돌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돌릴 때는 나는 짧게 돌린다고 분명히 알 듯, |
다)한 것: 수행중에 경험한 것을 <잊지 말고> 기억(sati)해야 할
수행 주제(paṭṭhāna, 身受心法)에 대해 모두 갖추어 종합적으로(Maha) 드러내신 경(s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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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할 것'은 앞으로 즉 미래, '기억을 확립할 대상(satipaṭṭhāna)'인 본 경의 身, 受, 心, 法에 대한
'기억'에 의해서 이러한 대상들에 대한 지속적인 '주의 기울임(作意)'이 가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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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의 지속적인 作意(혹은 累積, 注意, samannāharati)가 우리말 '집중'과 의미가 통하지만
漢譯에서는 이것도 '사띠'에 의한 것이므로 有念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Yato ca kho, āvuso, ajjhattiko ceva mano aparibhinno hoti, bāhirā ca dhammā āpāthaṃ āgacchanti, tajjo ca samannāhāro hoti, evaṃ tajjassa viññāṇabhāgassa pātubhāvo hoti. 벗들이여, 안으로 정신능력이 완전하고 밖에서 사실이 정신영역에 들어오고,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에 일치하는 의식이 나타납니다. 諸賢 若內眼處不壞者 外色便爲光明所照 而便有念 眼識得生 ............. 意處壞者 外法便不爲光明所照 則無有念 意識不得生 |
여기서의 samannāhāro, 주의를 기울임. 有念은
正念에 의한, 如理作意에 의한 바른 집중이 아니라 삿된 집중으로 짐작됩니다.
‘수행자 고따마가 눈으로 나를 주시하면, 그때에 나는 수행자 고따마에게 질문할 것이다.’ Atha kho kāpaṭikassa māṇavassa etadahosi – ‘‘yadā me samaṇo gotamo cakkhuṃ upasaṃharissati, athāhaṃ samaṇaṃ gotamaṃ pañhaṃ pucchissāmī’’ti. 그때 까빠티까 바라문 학도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문 고따마가 내게 시선을 주면 그때 나는 사문 고따마께 질문을 하리라." <*cf. D22. 묘지에 던져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멍들고 고름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보듯, So imameva kāyaṃ upasaṃharati – ‘ayampi kho kāyo evaṃdhammo evaṃbhāvī evaṃanatīto’ti. 이 몸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교하여 관찰한다.> . 마침 세존께서는 바라문 청년 까빠티까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바라문 청년 까빠티까를 향해서 주시했다. Atha kho bhagavā kāpaṭikassa māṇavassa cetasā cetoparivitakkamaññāya yena kāpaṭiko māṇavo tena cakkhūni upasaṃhāsi. 그러자 세존께서는 당신의 마음으로 까빠티까 바라문 학도의 마음을 아시고 까빠티까 바라문 학도에게 시선을 보내셨다. <*서로의 눈이 겹치다/순간 눈을 맞추다.> . 그러자 바라문 청년 까빠티까는 이와 같이 생각했다. [까빠티까] ‘수행자 고따마가 눈으로 나를 주시하고 계신데, 내가 수행자 고따마에게 질문하면 어떨까?’ 427. Atha kho kāpaṭikassa māṇavassa etadahosi – ‘‘samannāharati kho maṃ samaṇo gotamo. Yaṃnūnāhaṃ samaṇaṃ gotamaṃ pañhaṃ puccheyya’’nti. 그러자 까빠티까 바라문 학도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문 고따마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빤히/계속/지속적으로 눈을 맞추다./동일한 상태를 유지하다./집중하다.> 나는 이제 사문 고따마께 질문을 하리라." |
문맥상 upasaṃharati은 <겹치다, 합치다, 순간 눈이 마주치다.>
반면에 samannāharati은
<일정한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다, 마주친 눈이 지속적으로 쳐다보다. 집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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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집중'이라는 의미는 三昧에 해당될 표현이 아니고
念이 이러한 念念不忘의 집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seyyathā pi Aggivessana, hatthidamako mahantaṃ thambhaṃ paṭhaviyaṃ nikhaṇitvā āraññakassa nāgassa gīvāyaṃ upanibandhati. Āraññak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sarasaŋkappānaṃ abhinimmadanāya, āraññak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āhānaṃ abhinimmadanāya, gāmante abhiramāpanāya, manussakantesu sīlesu sampādanāya1 evam eva kho Aggivessana, ariyasāvakassa ime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etaso upanibandhanā honti. Gehasitānañc'eva sīl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sarasaŋkappānaṃ abhinimmadanāya, gehasitānañc'eva darathakilamathapari'āhānaṃ abhinimmadan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악기베싸나여, 마치, 코끼리 조련사가 숲속의 습관을 제거하고, 숲속의 기억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숲속의 근심과 피곤과 고뇌를 제거하고 마을에서 즐기며, 사람들에게 맞는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 땅위에 큰 기둥을 박고 숲속의 코끼리의 그 목을 붙잡아 매듯, 네 가지 새김의 토대는 재가 생활을 습관을 제거하고, 재가 생활의 기억과 생각을 없애버리고, 재가 생활의 근심과 피곤과 고뇌를 제거하고 바른 길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기 위해 고귀한 제자의 마음을 붙잡아 맨다. |
또한 사띠는 앞으로 할 것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합니다.
‘‘Kathañca, bhikkhave, satādhipateyyaṃ hoti?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마음챙김의 통달인가? ‘ Iti a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paripūressāmi, paripūraṃ vā ābhisamācārikaṃ sikkhaṃ tattha tattha paññāya anuggahessāmī ’ ti – ajjhattaṃyeva sati sūpaṭṭhitā hoti. '아직 성취되지 않은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성취하리라. 이미 성취된 선행에 관한 공부지음을 모든 곳에서 통찰지로써 증장하리라.'라고 안으로 마음챙김이 잘 확립된다. |
念의 領導<satādhipateyya, 기억이 이끎(lead)>의 내용은 미래 앞으로 (~을 하리라)
[미흡한 공부는 성취하리라. 성취된 공부는 어떻게 ~하리라.]라는 기억이 잘 확립되어 있는 것
ādhipateyya : [nt.] lordship; domination; power.
같은 단어를 통달, 지배, 우선함(A3:40), 권위(S55:30).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앞뒤 문맥으로 이해하면 대략 [adhipati: lead] 이끌어 나간다./主導.領導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主要因으로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다.에 해당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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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래와 관련된 사띠의 예는 경문 도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Yāvakīvañca, bhikkhave, bhikkhū paccattaññeva satiṃ upaṭṭhapessanti – ‘ kinti an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āgaccheyyuṃ, āgatā ca pesalā sabrahmacārī phāsu [phāsuṃ (sī. syā. pī.)] vihareyyu’n ti.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개인적으로 각각 마음챙김을 해서 아직 오지 않은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오게 하고, 이미 온 좋은 동료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도록 하는 한, Vuddhiyeva, bhikkhave, bhikkhūnaṃ pāṭikaṅkhā, no parihāni.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이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
*문맥으로 이해하면-
승가의 구성원인 비구 (각자에게서 생겨난) 개개인 각자가 다음과 같이
' 아직 오직 않은 좋은 수행자들은 오도록,
이미 온 좋은 수행자들은 편안하게 머물도록 해야지. '라고
이렇게 념두에 두고 기억하고 있는 한
퇴보하는 일이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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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念에 의한 作意에 의해서 '알아차림'이든 '혐오하는 인식(想)'이든 생겨나는 것이지만
사띠(sati, 念)가 '알아차림(앎, 知)'이나 想의 의미는 아니며,
더 더욱 위빳사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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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하고 있는 것'이란 과거 혹은 찰나전 일지라도 (~을 하리라)라는 것에
의欲을 내고, 結정을 하며, 지금 실행(정進)하고 있는 것이며,
이른바 '지금·현재' 수행주제에 대해 '알아차림(知)'이든 혐오하는 '인식(想)'이든
경험하는 것이며, 경험하고 있는 것을 '기억'하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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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한 것'이란 이른바 경에서 정형적으로 나타나는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
'오래 전 즉 과거에 한 말과 행한 것도 모두 기억한다.'라고 나오는 그 내용이며
이것<과거>은 또 다시 가)<미래 또는/인> 나)<현재>로 연결됩니다.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마음 챙기는 자이다. 그는 최상의 마음 챙김과 슬기로움을 구족하여 오래 전에 행하고 오래 전에 말한 것일지라도, 모두 기억하고 생각해낸다. So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pe… citte…pe…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그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며 머문다.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마음 챙김의 기능이라 한다. |
본 경에는 어근도 의미도 다르지만 형태만 같거나 (sati vā upādisese anāgāmitā)
어근도 형태도 다르지만 의미는 같은 단어 각각 1가지 외에
(uppannānaṃ kusalānaṃ dhammānaṃ ṭhitiyā asammosāya
*sammosa [for *sam -- mṛṣa, of mṛṣ: see mussati. sammosa after moha &musā>mosa]
bewilderment, confusion
mussati : [mus + ya] forgets
muṭṭha [pp. of mussati, mṛṣ] having forgotten, one who forgets;
only in two cpds., viz. ˚sacca [der. fr. foll.: muṭṭha+sati+ya] forgetfulness,
lit. forgotten -- mindedness, usually combd with asampajañña
upaṭṭhitassati ārādhako hoti, no muṭṭhassati
‘āraddhaṃ kho pana me vīriyaṃ bhavissa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passaddho kāyo asāraddho, samāhitaṃ cittaṃ ekagga’n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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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에 나오는 muṭṭhassati는 어떠한 경우든지 upaṭṭhitassati의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되며
그 의미는 forgotten이라고 번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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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단어 혹은 문맥상에 나타나는 sati(念, memory) -
cattāro satipaṭṭhānā, satimā,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satisambojjhaṅgaṃ,
sammāsati - ātāpī sampajāno satimā, sato ca sampajāno,
‘upekkhako satimā sukhavihārī’ti tatiy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adukkhamasukhaṃ upekkhāsatipārisuddhiṃ catutth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ati,
검토문제: (대)념처(身至念, 呼吸念)경, 4념처, 념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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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2. Evaṃ me suta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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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suta : [pp. of suṇāti] heard. (nt.), the sacred lore; learning; that which is hear.
sute sutamattaṃ bhavissati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다.
sotena saddaṃ sutvā uppajjati manāpaṃ, uppajjati amanāpaṃ, uppajjati manāpāmanāpaṃ.
Yañca sotena saddaṃ suṇāti, taṃ viññāṇena vijānā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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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tañcāvuso,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sotaviññāṇaṃ
<*cf. 耳(sota)와 聲들을(sadde) 緣하여 耳識(sotaviññāṇa)>
Saṃvijjati kho, āvuso, bhagavato sotaṃ. Suṇāti bhagavā sotena saddaṃ.
Chandarāgo bhagavato natthi. Suvimuttacitto bhagavā.
2) 세존께서도 청각이 있어서 그 청각으로 소리를 듣지만
<*耳(sotena)로 聲(saddaṃ)을 聞한다(suṇāti). cf. 耳와 聲들을 緣하여 耳識>
그러나 세존께서는 욕망과 탐욕이 없으므로 세존의 마음은 잘 해탈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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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ekaṃ samayaṃ bhagavā kurūsu viharati kammāsadhammaṃ nāma kurūnaṃ nigamo. Tatra kho bhagavā bhikkhū āmantes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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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승자, 편집. 인연.
[4]‘‘bhikkhavo’’ti. ‘‘Bhaddante’’ti [bhadanteti (sī. syā. pī.)] te bhikkhū bhagavato paccassosuṃ. Bhagavā etadavoc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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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세존- "비구들이여." 비구들- "세존이시여."
[3]Uddeso . [5]373. ‘‘Ekāyano ayaṃ, bhikkhave, maggo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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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존- "뭇삶을 청정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뛰어넘게 하고, 고통과 근심을 소멸하게 하고,
바른 방도를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시키는,
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道 (외길, ekāyano maggo 즉) cattāro satipaṭṭhānā(4념처, 즉 正念, sammāsati).
‘‘Tisso kho imā, abhaya, nijjarā visuddhiyo tena bhagavatā jānatā passatā arahatā sammāsambuddhena sammadakkhātā sattānaṃ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ṃ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ṃ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Katamā tisso? 2. “아바야여, 아시는 분, 보시는 분,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서는 [오염원들을] 부수는 청정을 세 가지로 바르게 설하셨나니, 그것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며,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터득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셋인가요? |
A3:74, A4:194, A6:30, A6:26, A9:37.
즉 유일한 방법이라는 의미보다 한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道<一方通行路>
seyyathāpi, sāriputta, aṅgārakāsu sādhikaporisā pūrā aṅgārānaṃ vītaccikānaṃ vītadhūmānaṃ.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aṅgārakāsu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불꽃이나 연기도 없이 새빨갛게 달구어진, 한길이 넘는 숯불구덩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숯불구덩이를 향했다면, seyyathāpi, sāriputta, gūthakūpo sādhikaporiso, pūro gūthassa.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gūthakūpa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똥으로 가득 찬, 한길이 넘는 똥구덩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똥구덩이를 향했다면, seyyathāpi, sāriputta, rukkho visame bhūmibhāge jāto tanupattapalāso kabaracchāyo.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rukkha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잎사귀와 가지가 적어 그림자가 드문드문 있는, 비탈진 곳에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나무를 향했다면, seyyathāpi, sāriputta, rukkho same bhūmibhāge jāto bahalapattapalāso sandacchāyo.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rukkha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잎사귀와 가지가 많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평지에서 자라는 나무가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나무를 향했다면, seyyathāpi, sāriputta, pāsādo, tatrāssa kūṭāgāraṃ ullittāvalittaṃ nivātaṃ phusitaggaḷaṃ pihitavātapānaṃ. tatrāssa pallaṅko gonakatthato paṭikatthato paṭalikatthato kadalimigapavarapaccattharaṇo sauttaracchado ubhatolohitakūpadhāno.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pāsāda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누각이 있고 안팎이 회반죽으로 잘 칠해졌고 바람막이가 잘 되었으며 빗장이 채워졌고 여닫이 창문이 있는 저택이 있는데, 그곳에 있는 긴 의자에는 긴 양털의 덮개가 퍼져있고 꽃무늬가 새겨져 있는 흰색의 깔개가 있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깔개가 있고 침상에는 천개(天蓋)가 있고 진홍색의 머리 베개와 발 베개가 양쪽에 놓여 있는데, 그때 열기에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저택을 향했다면, seyyathāpi, sāriputta, pokkharaṇī acchodakā sātodakā sītodakā setakā supatitthā ramaṇīyā. avidūre cassā tibbo vanasaṇḍo. atha puriso āgaccheyya ghammābhitatto ghammapareto kilanto tasito pipāsito ekāyanena maggena tameva pokkharaṇiṃ paṇidhāya. 사리뿟따여, 마치 물이 맑고 상쾌하고 차고 투명하고 아름다운 제방이 있고 쾌적하고 가까이에 짙은 숲이 있는 그런 호수가 있는데 그때 열기를 타고 열기에 지쳐 맥이 빠지고 목이 타고 갈급증을 느끼는 어떤 사람이 외길을 따라 오직 그 호수를 향했다면, |
4念處
‘‘Katame cattāro? Idh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vedanāsu vedan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citte citt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 Uddeso niṭṭhito. . Kāyānupassanā ānāpānapabba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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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4. ‘‘Kathañca pana,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Idha, bhikkhave, bhikkhu araññagato vā rukkhamūlagato vā suññāgāragato 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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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라는 구문에 대한 의견.
Idha, sāriputta, bhikkhu pacchābhattaṃ piṇḍapātapaṭikkanto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 ‘ na tāvāhaṃ imaṃ pallaṅkaṃ bhindissāmi yāva me nānupādāya āsavehi cittaṃ vimuccissatī ’ti.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공양을 마치고 탁발에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취착 없이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라고 결심한다. |
여기서의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구체적 내용은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 = '취착 없이 내 마음이 번뇌에서 해탈할 때까지 이 가부좌를 풀지 않으리라.'
본문에서는 '결심한다'라는 표현은 직접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M111에 의하면 欲-結(chando adhimokkho)에 의한 念(sati)을 감안하면
念을 決心(adhimokkho)으로 의역할 수도 있습니다.
So ārāmagato nisīdati paññatte āsane. 그분은 원림으로 돌아가시면 마련된 자리에 앉으십니다. 앉아서 발을 씻습니다. Nisajja pāde pakkhāleti; na ca so bhavaṃ gotamo pādamaṇḍanānuyogamanuyutto viharati. 그분 고따마 존자님은 발을 돌보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머뭅니다. So pāde pakkhāletvā nisīdati pallaṅkaṃ ābhujitvā ujuṃ kāyaṃ paṇidhāya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그분은 발을 씻고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앉습니다. So neva attabyābādhāya ceteti, na parabyābādhāya ceteti, na ubhayabyābādhāya ceteti; attahitaparahitaubhayahitasabbalokahitameva so bhavaṃ gotamo cintento nisinno hoti. 그분은 결코 자신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남을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둘 다를 해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분 고따마 존자님은 자신의 이로움과 남의 이로움과 둘 다의 이로움과 온 세상의 이로움을 생각하면서 앉아있습니다. .【眞諦】飯食事訖 於中後時 收衣鉢洗足已 如常敷座跏趺 安坐 端身而住 正念現前 |
*세존의 마음챙김의<기억하고 상기하시는> 내용- 自利利他와 모두의 이익를 생각하(시면서 앉아계)심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서: '알아차림'의 확립이나 '코 밑, 인중'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아님.
이론적으로나 교학적으로 배운 것을 <기억>하고서 혹은 실참한 것을 복습하고서
<앞으로 對面할> 내용을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순서로 할 것인지 미리 프리뷰하는 과정 같습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기억]하면서 <행>합니다. 그것이 그 다음에 나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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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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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경에 [sato]va .... [sato]va ... 라는 경문이 가끔 나옵니다.
그것은 [기억]하면서 <행>하고, [잊지 않]으면서 <행>한다.... 일 겁니다.
그는 [‘ 제발 가시가 나를 찌르지 않았으면!] ’이라고 하면서 [마음 챙겨]서 <나아>갈 것이고 [마음 챙겨]서 <물러>날 것이다. So [sato]va <abhikkameyya>, [sato]va <paṭikkameyya> – [‘ mā maṃ kaṇṭako ’] ti. 그는 [' 가시가 나를 찌르지 말기를! ']이라고 [새김을 확립]하고 <나아>가거나 [새김을 확립]하고 <물러>나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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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리뿟따여, 나는 나아가고 물러섬에 새김을 확립하고 한 방울의 물에도 나의 연민을 실어 ‘나는 길 위의 틈새에 사는 작은 생명체라도 다치지 않기를’하고 기원했다. so kho ahaṃ, sāriputta, [sato]va <abhikkamāmi>, [sato]va <paṭikkamāmi>, yāva udakabindumhipi me dayā paccupaṭṭhitā hoti – [‘ māhaṃ khuddake pāṇe visamagate saṅghātaṃ āpādesi ’]nti. 사리뿟따여, 그런 나는 [마음챙기며] 앞으로 <나아>갔고 [마음챙기며] <돌아>왔다. 그런 나는 한 방울 물에도 연민을 일으켰다. ['내가 땅의 틈새에 있는 저 미물들을 해치지 않기를.']이라고. |
*'내가 땅의 틈새에 있는 저 미물들을 해치지 않기를.'라는
========================= parimukhaṃ - 한 방울 물에 (있을지도 모를 중생들에 대한) 연민을,
확립<近立> paccupaṭṭhitā hoti = sato = satiṃ upaṭṭhapetv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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呼吸念의 [sato]는 16단계의 호흡법에 대한 기억입니다. 본경 (呼吸)身念에서는 4단계
그 내용은]
[8]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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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단계에서는 '長-短 呼-吸한다.'라고 般若한다(‘dīghaṃ assasāmī’ ti pajānāti).
3/4단계에서는 身과 관련하여 '~하리라.'고 學習한다(assasissāmī’ ti sikkhati).
반면에 세존의 呼吸念(S54:11)은 '~하리라.'라는 것을 般若한다(assasissāmī’ ti pajānā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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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의 全身이 4단계의 身行(=色身, 즉 身至念은 色界-慾界의 身/色까지가 수행범위 cf. 心行=名身)
비구들이여, 이 들숨과 날숨은 몸들 가운데서 한 가지 [형태의] 몸이라고 나는 말한다. Kāyesu kāyaññatarāhaṃ bhikkhave, etaṃ vadāmī. Yadidaṃ assāsapassāsā 나는 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몸들 가운데 어떤 몸이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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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yyathāpi, bhikkhave, dakkho bhamakāro vā bhamakārantevāsī vā dīghaṃ vā añchanto ‘dīghaṃ añch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ñchanto ‘rassaṃ añchāmī’ti pajānāti . evameva kho, bhikkhave, bhikkhu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i,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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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Iti ajjhattaṃ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vā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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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와 같이 內로(ajjhattaṃ) 身을 대상으로 身을 隨看하면서 머문다.
이 身은 거친(麤) 물질(色)로 이루어진 名色에서부터 미세한(細) 4大의 色으로 이루어진 名色까지의 身
內로(ajjhattaṃ) 隨看할 때의 念수행은 定蘊(samādhikkhandha<M44>, 이것이 正念)에 속하며,
外로(bahiddhā) 隨看할 때의 念수행은 慧蘊(paññākkhandha)에,
內外로(ajjhattabahiddhā) 隨看할 때의 念수행은 定-慧(止-觀)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Samāhito, bhikkhave, bhikkhu yathābhūtaṃ pajānāti. 삼매에 든 이는 있는 그대로 잘 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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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안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합니다. 그는 안으로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면서 올바른 삼매에 들고 올바른 정화를 이룹니다. 그리고 그는 올바른 삼매에 들고 올바른 정화를 이루어 밖으로 타인의 몸에 대하여 앎과 봄을 일으킵니다. Idha, bho, bhikkhu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jjhattaṃ kāye kāyānupassī viharanto tattha sammā samādhiyati, sammā vippasīdati. So tattha sammā samāhito sammā vippasanno bahiddhā parakāye ñāṇadassanaṃ abhinibbatteti. 존자들이여, 여기 비구는 안으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는 자 되어 머뭅니다. 그는 안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여 머물면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됩니다. 그는 거기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되어 밖으로 남의 몸에 대해서 지와 견을 가지게 됩니다. |
*여기서 外로 他身(parakāye)이란
다른 有情의 身이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自身을 他로 知見하는 것을 의미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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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Samud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ā kāyasmiṃ vihar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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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부터는 身(=名色)에서 集/消滅 法을 隨看
名色(=身)隨看에서의 集/消滅 法은 자기자신에게서 일어나거나 사라지는 一切 法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身至念(M119, kāyagatāsati)에 의해서도 해탈이 가능합니다.
대념처경의 身隨看과 차이점은 4가지 色界 禪이 추가되어 있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S47:40 … samudayadhammānupassī dhammesu viharati, vayadhammānupassī dhammesu viharati, samudayavayadhammānupassī dhammesu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satipaṭṭhānabhāvan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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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52:1 ‘‘yesaṃ kesañc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viraddhā, viraddho tesaṃ ariyo maggo sammā dukkhakkhayagāmī. Yesaṃ kesañci cattāro satipaṭṭhānā āraddhā, āraddho tesaṃ ariyo maggo sammā dukkhakkhayagāmī’’ti.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게을리 하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괴로움의 멸진으로 바르게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를 게을리 하는 것이다. 네 가지 마음 챙김의 확립을 열심히 행하는 자들은 누구든지 괴로움의 멸진으로 바르게 인도하는 성스러운 도를 열심히 행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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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jjhattaṃ dhammesu…pe… bahiddhā dhammesu…pe… ajjhattabahiddhā dhammesu samudaya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dhammesu vayadhammānupassī viharati… ajjhattabahiddhā dhammesu samudayavayadhamm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1) … 안으로 … 2) … 밖으로 … 3)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안팎으로 사실이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고, 안팎으로 사실이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고, 안팎으로 사실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 6.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 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뭅니다. ‘‘So sace ākaṅkhati – ‘appaṭikūle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4) 만약에 싫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상념을 내고자 원하면, 바로 싫어하는 상념을 냅니다. .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뭅니다.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e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p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만약에 싫어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지 않는 상념을 내고자 원하면, 바로 싫어하지 않는 상념을 냅니다. .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뭅니다. sace ākaṅkhati – ‘appaṭikūle ca paṭikūle ca 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만약에 싫어하지 않는 것과 싫어하는 것에 대해 싫어하는 상념을 내고자 원하면, 바로 싫어하는 상념을 냅니다. .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에 대해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져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혐오하지 않는 인식을 가진 자로 머뭅니다. sace ākaṅkhati – ‘paṭikūle ca appaṭikūle ca appaṭikūlasaññī vihareyya’nti, appaṭikūlasaññī tattha viharati; 만약에 싫어하는 것과 싫어하지 않는 것에 대해 싫어하지 않는 상념을 내고자 원하면, 바로 싫어하지 않는 상념을 냅니다. <A5:144 7.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이유 때문에 비구는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제거한 뒤 평온하고 마음 챙기며 알아차리며 머물러야 하는가? ‘매혹적인 것들에 대해서 어디서건 어느 곳에서건 결코 나에게 욕탐이 일어나지 않기를.’ ‘성낼 만한 것들에 대해서 어디서건 어느 곳에서건 결코 나에게 성냄이 일어나지 않기를.’ - 비구들이여,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혐오스럽지 않은 [대상]과 혐오스러운 [대상], 둘 다를 제거한 뒤 평온하고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며 머물러야 한다.”> 만일 그가 ‘나는 혐오스럽지 않은 것과 혐오스러운 것 이 둘을 다 버린 뒤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무르리라.’라고 원하면 그는 거기서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 평온하게 머뭅니다.” sace ākaṅkhati – ‘appaṭikūlañca paṭikūlañca tadubhayaṃ abhinivajjetvā upekkhako vihareyyaṃ sato sampajāno’ti, upekkhako tattha viharati sato sampajāno. 만약에 그 양자를 제거하여 평정해지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바로 평정해지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립니다. . Ettāvatā kho, āvuso, bhikkhuno cattāro satipaṭṭhānā āraddho hontī’’ti. 9. 벗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성취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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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비구들이여,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身隨觀]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물 때, upaṭṭhitāssa tasmiṃ samaye sati hoti asammuṭṭhā [appammuṭṭhā (syā. kaṃ.)]. 그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된다. .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no upaṭṭhitā sati hoti asammuṭṭhā,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āraddho hoti. Satisambojjhaṅgaṃ tasmiṃ samaye bhikkhu bhāv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bhikkhuno bhāvanāpāripūri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잊어버림이 없는 마음챙김이 확립될 때, 그때 그 비구에게 마음챙김의 깨닭음의 구성요소[念覺支]가 생긴다. 그때 비구는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닦고, 이러한 닦음을 통해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를 성취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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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mpi kho [evampi (sī. syā. pī.)],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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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이 있다.'라는 기억이 확립된다, 다만 알 만큼만, 기억날 만큼만.
세간에서 어떠한 것도 取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머문다.
이와 같이 身隨看하며 머문다.
장자여, ‘나는 시각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의식은 시각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 ‘na cakkhuṃ upādiyissāmi, na ca me cakkhunissitaṃ viññāṇaṃ bhavissatī’ti. ‘…眼(~身-意)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내입처를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 라고 學習해야 합니다.… ‘…色(~法)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외입처를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 라고 學習해야 합니다.… ‘…眼識(~意識)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識을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라고…’ ‘…眼觸(~意觸)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觸을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라고…’ ‘…眼觸生受(~意觸生受)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受를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 라고…’ . ‘…地界(~識界)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6界를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라고…’ ‘…色(, 受, 想, 行, 識)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5蘊을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 라고…’ . ‘…空無邊處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무색계를 의지하는 識은 …’ ‘…識無邊處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무색계를 의지하는 識은 …’ ‘…無所有處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무색계를 의지하는 識은 …’ ‘…非有想非無想處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무색계를 의지하는 識은 …’ . ‘…이 世間과 저 世間을 집착하지 않으면, 나에게 世間을 의지하는 識은 없을 것이다’ 라고 學習해야 합니다. . Tasmātiha te, gahapati, evaṃ sikkhitabbaṃ – ‘yampi me diṭṭhaṃ sutaṃ mutaṃ viññātaṃ pattaṃ pariyesitaṃ anupariyesitaṃ anucaritaṃ manasā tampi na upādiyissāmi, na ca me taṃnissitaṃ viññāṇaṃ bhavissatī’ti. Evañhi te, gahapati, sikkhitabba’’nti. 14. "장자여, 그러므로 여기서 그대는 이렇게 공부지어야 합니다. '나는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알고 탐구하고 마음으로 고찰한 것을 취착하지 않으리라. 그러면 나의 알음알이는 그것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공부지어야 합니다." |
*‘~리라.'라고 반복 學習(하여야) 합니다.---이것이 '기억하고 있어야 할' 즉 사띠 혹은
欲, 結, 進 (혹은)에 의한 사띠<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그 이후 과정이 <[chando adhimokkho vīriyaṃ sati upekkhā]- manasikāro(作意 ☜ 如理), M111>입니다.
................................................na upādiyissāmi sikkhitabba’’n
cf.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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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Evampi kho [evampi (sī. syā. pī.)],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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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이하 身隨看에서 공통> <이하 신수심법에서 공통>
*다만 알 만큼만, 기억날 만큼만(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이것이 아빈냐(abhiññā = sati + ñāṇa)인 것으로 추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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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알려준 간접적인 기억(↔ 앎)을 'kaṭumikā'라는 표현이
반면에 본인이 직접 경험한 기억(↔ 앎)을 'Abhijāna'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Mil 11. Rājā āha ‘‘bhante nāgasena, sabbā sati abhijānantī uppajjati, udāhu kaṭumikāva satī’’ti? ‘‘Abhijānantīpi, mahārāja, kaṭumikāpi satī’’ti. 왕은 물었다. 『존자여, 기억은 주관적 의식으로부터 자각적으로 일어납니까. 또는 외부로부터의 시사(示唆)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주관적 의식(自證)으로부터도 일어나고, 외부로부터도 이루어집니다.』 |
Kaṭumikā (f.) [from karoti; see Sk. kṛtrima &kuṭṭima; also kutta &kutti]
artificiality, outward help, suggestion, appld to sati Miln 78, 79
Abhijāna (nt. or m?) [Sk. abhijñāna]
recognition, remembrance, recollection Miln 78. See also abhiññ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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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빈냐의 동사형(abhijānāti)을 '~을 기억한다.'라고 해석하면 문맥이 연결되는 경문이 많이 있습니다.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abhijānāmi kho panāhaṃ pitu sakkassa kammante sītāya jambucchāyāya nisinno 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 savitakkaṃ savicāraṃ vivekajaṃ pītisukhaṃ paṭhamaṃ jhānaṃ upasampajja viharitā. 31.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나는 아버님이 삭까족의 [농경제의] 의식을 거행하실 때(kammante) 시원한 잠부 나무 그늘에 앉아서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으며, 희열[喜, piiti]과 행복[樂, sukha]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Tassa mayhaṃ Aggivessana satānusāriviññāṇaṃ ahosi: esova maggo bodhāyāti. - 악기웨사나여, 그런 나에게 그 기억을 따라서 이런 알음알이가 생겨났다. '이것은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라고. |
본인이 직접 경험한 앎에 따른 기억 혹은 기억(sati)에 따른 앎(ñāṇa)이
아빈냐(sayaṃ abhiññā)이며 이것을 自內證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면 기억에 따른 앎은 모두 아빈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범망경(D1)에 의하면 (기억 sati에 의해서)
[과거로 모색하는 자]들의 邪見에 대한 설명이 18가지 종류로 나타납니다.
이러한 邪見들은 自我와 연관된 作意의 결과입니다. 즉 如理作意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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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Kāyānupassanā iriyāpathapabbaṃ [13]Kāyānupassanā sampajānapabbaṃ [14]Kāyānupassanā paṭikūlamanasikārapabbaṃ [15]Kāyānupassanā dhātumanasikārapabba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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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16]Kāyānupassanā navasivathikapabbaṃ
"다시 비구들이여, 1) 비구는 마치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죽은 지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이 지나 부풀고 검푸르게 되고 문드러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는 바로 자신의 몸을 그에 비추어 바라본다. '이 몸 또한 그와 같고, 그와 같이 될 것이며, 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고. 379. ‘‘Puna caparaṃ, bhikkhave, bhikkhu seyyathāpi passeyya sarīraṃ sivathikāya chaḍḍitaṃ ekāhamataṃ vā dvīhamataṃ vā tīhamataṃ vā uddhumātakaṃ vinīlakaṃ vipubbakajātaṃ. So imameva kāyaṃ upasaṃharati – ‘ayampi kho kāyo evaṃdhammo evaṃbhāvī evaṃanatīto’ti. 9. [세존]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묘지에 던져져,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 지나 부풀어 오르고 푸르게 멍들고 고름이 흘러나오는 시체를 보듯, 이 몸에 대하여 이와 같이 ‘이 몸도 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와 같은 존재가 되고 이와 같은 운명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비교하여 관찰한다. ‘‘Iti ajjhattaṃ vā …pe… 이와 같이 안으로 … evampi kho, bhikkhave, bhikkhu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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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가지 공동묘지 死體수행에 대해서 한 가지만 의견을 드리면
'묘지에 버려진 死體(sarīra)를 보게되면
'죽고 나면 이 身(kāya)도 저렇게 되겠구나!'라고 upasaṃharati하는 것을 身隨看이라고 나타납니다.
Upasaŋharati [upa + saŋ + hṛ] -- 1. to collect, bring together, heap up, gather
-- 2. to dispose, arrange, concentrate, collect, focus
-- 3. to take hold of, take care of, provide, serve, look after
1. 가져오다, 모으다, 쌓다. 2. 집중하다, 주의를 기울이다. 3. 야기하다, 산출하다. 4. 준비하다, 배치하다.
5. 옆에 놓다, 비교하다. 6. 대화하다, 중상하다. 7. 포착하다. 8. 빼앗다. <빠알리-한글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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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 kho, bhante, brahmā sanaṅkumāro ekattena attānaṃ upasaṃharati, ekattena attānaṃ upasaṃharitvā sakkassa devānamindassa pallaṅke pallaṅkena nisīditvā deve tāvatiṃse āmantesi – 22. "세존이시여, 그러면 범천 사낭꾸마라는 자기 모습을 하나로 만듭니다. 자기 모습을 하나로 만든 뒤 신들의 왕 삭까의 자리에 앉아 삼십삼천의 신들을 불러서 말합니다. |
'비추어 바라본다', '비교하여 관찰한다'로 번역되어 있는 upasaṃharati는
눈을 마주치다(겹치다), 分身을 하나의 몸으로 만든다(합친다)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겹치다, 합치다'는 의미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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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본문의 내용[白骨관, 不淨상 수행]은
<만약 묘지에 부패하고 있는 屍體를 보게되면
현재 자신의 身을 묘지의 死體와 '합치다, 겹치다, overlap'>하는
想像(imagine)하기 혹은 豫測하기를 말합니다.
즉 현재에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 혹은 결과를 미리 아는 것입니다.
사띠수행 중에는 想像(imagine)하기도 포함된다고 말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실 줄 압니다만,
문맥상으로 이러한 의미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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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amañca, bhikkhave, anurakkhaṇāppadhānaṃ? Idha, bhikkhave, bhikkhu uppannaṃ bhaddakaṃ samādhinimittaṃ anurakkhati aṭṭhikasaññaṃ puḷavakasaññaṃ vinīlakasaññaṃ vicchiddakasaññaṃ uddhumātakasaññ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anurakkhaṇāppadhānaṃ. 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보호하는 노력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일어난 경이로운 삼매의 표상을 잘 보호한다. 즉 [시체가] 해골이 된 것의 인식, 벌레가 버글거리는 것의 인식, 검푸른 것의 인식, 문드러진 것의 인식, 끊어진 것의 인식, 부푼 것의 인식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보호하는 노력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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身隨看을 간략하게 마무리하면서
이러한 4念處를 수행한다는 것은 세존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심과 관련된 사띠가 있습니다.
이른바 念佛(佛隨念, buddhānussati)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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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ṭṭhāpetabbā. 如來를 <대상으로 안으로> 마음챙김을(이) 확립해야 한다. |
그 내용은 다음과같습니다.
itipi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ṃ buddho bhagavā. 이른바 그 분 세존께서는 공양 받을 만한 분,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분, 밝은 앎과 실천을 갖추신 분, 잘 가신 분, 세간을 잘 아시는 분, 최상의 분, 사람을 이끄시는 분, 천신과 인간의 스승, 깨달으신 분, 세존이시다. |
지금까지 [sati upaṭṭhāpetabbā]와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는
經名(Mahāsatipaṭṭhāna), 혹은 4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 parimukhaṃ satiṃ upaṭṭhapetvā, sati sūpaṭṭhitā
sati paccupaṭṭhitā, upaṭṭhitassati ārādhako hoti, no muṭṭhassati,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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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內로 부처님에 대한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이 <알아차림>이나, <위빳사나>이겠습니까?
이른바 [如來十號]의 내용을 진실로 믿고 신뢰하여
부처님의 덕성을 기억하면서 十號를 羅列(列擧)하는 것이 念佛(佛隨念, buddhānussati)이며
이것이
[tathāgataṃ ārabbha ajjhattaṃ sati upatiṭṭhāti.
如來를 <대상으로 안으로> sati가 확립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재가자는 물론 출가자에게도 무엇보다 필요한 덕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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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려운 경문 부분적이나마 감히 도전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내용은 지금까지 했던 그 의견이고 그 내용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절에 갔다가 <사띠 빳타나 수행- 우 냐나로까 사야도 법문>라는 책을 받았습니다.
훌륭하신 스님의 글을 읽으면서 대념처경을 다시 보았습니다.
참고만 하십시오. _()_
「상윳따 니까야」에서의 정신・물질[名色]의 일어남과 법의 일어남을 인용합니다.
"육근의 안・이・비・설・신 5가지의 감각기능은 마노를 의지하며, 마노가 5가지 감각의 대상과 감각 영역을 경험한다고 본다. 마음은 정신‧물질[名色]의 일어남이고, 법은 마음의 작의(作意)으로부터 일어난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5가지의 감각의 대상과 감각 영역을 감수한 마노는 마음챙김[sati]을 의지한다고 설명하고 있네요.
sati는 "알음알이를 가진 몸으로 확립하는 것"이고요
즉,
"전면에 마음챙김"으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과거의 기억도, 각성의 새김도, 마음을 다잡는 챙김 도 포함하니까요!
경문을 칸에 넣어서 색깔도 입히셨네요^^
대부분의 내용에 동감합니다......
"경험"이라는 것을 사띠와 많이 연결지으셨네요...... 환영합니다.
밖으로 타인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을 타인으로 관찰한다고 해석하셔ㅆ네요....... 환영합니다.
전면에 사띠... 이 해석만은 아직 ... 환영하지 못하ㅂ니다.......ㅎㅎㅎ
여러 부류의 정통수행자들이... 몸을 곧추세우는 자세를 공통으로 사용하듯이.......
전면의 사띠를 공통으로 사용한다고 볼 때... 밖으로 향했던 감각기관들을 안으로 돌이키는 과정이... 전면의 사띠와 연관이 될 듯합니다.
수행주제를 정리하는 듯한 뉘앙스로 해석하시니... 생각적인 부분을 너무 강조하신듯.
저는 요즈음............ 사념처가 <왜? 中道인가?>에 대하여 궁금합니다.
혹시 견해가 있으신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AN6.61 majjhesutta에서의 6가지 중간과 알음알이를 신.수.심.법에 마음챙겨 sati하면 두극단을 따라가지않게하고
중간을 힘차게 드러내는 majjhena 지혜의 중도를 체득하게됩니다.^^
이것이 [숫타니파타]의 최초 경집 피안도품 [학인 티샤 메떼이야 경]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이번 6월 9일 majjha 닦음의 논문을 발표합니다. 주제는
"니까야 majjha 닦음으로 구현한 중도와 유식에 관한 고찰" 입니다.
인도철학회가 주최하고 부산 동명대학교 입니다. 1시-6시 일정중에서 4시 이후 발표 예정입니다. 발제자 저는 우법 김근중 입니다.
majjha닦음이 중론의 '팔불게(중송)'으로 오는 과정과 중간으로서의 알음알이를 갖추는 '유식' 내용입니다. Be happy!
내용이 좋겠네요......... 발표하신 후에 ....... 본 카페에도 논문을 소개해 주십시오.
중론과 유식의 회통은 ...... 드믄 내용인데요..........
사념처는 오온이 둑카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게 하는 되새김작용이기 때문에 열반에 이르도록 돕는 방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고락중도인 중도는 완전한 버림(renunciation)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쾌락행이나 고행은 완전한 버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행은 일종의 위선인데 고행자들은 나중에 더 큰 쾌락을 누리기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중도는 지금이건(쾌락주의) 나중이건(고행주의) 모든 쾌락의 추구를 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도 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둑카일체! 일체둑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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