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백산-의령에서 발해까지
일시 : 2025.02.09
장소,시간 : CGV 룡산아이파크몰 19:05~20:38
소감 : 다른 분들도 모셔서 같이 봐야 하는 영화다. 그런데 상영관도 적고, 제대로 된 시간대도 없어서 나 혼자 보러 갔다.
당시 관람객이 나 포함해서 총 3명이었는데 나머지 두 사람도 뜻있는 분들이신 것 같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안희제 선생님의 이야기를 보러 찾아오셨을 정도면, 력사를 알려고 로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발해 상경룡천부의 석등과 궁터를 드론 촬영으로 비추면서
서기 698년, 대조영이 유민들을 모아 발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1932년에, 나라 잃은 한 사람이 발해농장을 세웠습니다-
이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난 보면서 '독립운동가 선생님 이야기인데 왜 갑자기 상고사가 나오지?' 이 생각을 했는데,
나레이션의 의미를 해석하자면 '대조영의 발해 건국', '안희제선생님의 발해농장 건립' 은
나라 잃은 민중에게 살고, 성장할 자리를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곱씹을수록 통사적 관점을 취하고 있다.
감독과 각본가, 제작진이 근현대사 외에도 발해사 관련 자료를 찾고, 해석하려고 심혈을 기울였음을 느꼈다.
백산 안희제 선생님(1885~1943)은 경북 의령 출신으로 독립운동에 자금을 후원한 사업가이며,
1943년 만주 액하감옥에서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그는 소년 시절 할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나라가 망헀는데 선비가 어찌 쓰임이 있겠습니까) 상경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보성전문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3년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나라를 잃은 조선 실향민들을 보면서
운동의 방향을 다잡아 나갔다.
동시대의 독립운동가인 이갑 선생님이 안창호 선생님께 쓴 편지에 있었던 구절인
"안희제가 귀국 려비가 없으니 돈이 필요하답니다. 그리고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하는 상황입니다" 를 보면
당시 안희제 선생님은 경제력 없이 독립운동을 하는 일은 더더욱 고통스러운 일이며,
자신이 배운 경제학을 어떻게 독립운동에 응용해 나갈지 고민하셨던 것 같다.
이후 1914년, 안희제 선생님은 부산으로 돌아가서 대기업 백산상회를 건설하였다.
백산상회는 영남지역 자본가들과 련대하여 사업을 확장하였고, 창출해낸 돈을 독립자금 공급에 활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안희제 선생님은 문영빈, 정재완, 윤상은, 허결 등의 영남지역 지주들을 설득했고
특히 경주 최부자댁은 백산상회의 최대 주주로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어려워도 계속 그를 지원했다.
1919년 파리에 갈 돈(당시 3천원. 현재가치로 약 1억 5천원) 을 김규식에게 보탠 주체가 백산상회였고
도항증명서 강매 론란을 일으켰던 박춘금에 항의했던 것도 백산상회였고
더 나아가서는 김구선생님께 자금을 보탰다는 것을
이 영화를 보면서 처음 알았다.
백산상회는 밀정의 감시를 피해 수면 위로는 일반적 기업 활동을 했고, 총독부 관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겉으로는 일본 기업인들과도 교류하고, 위장함으로써 당시 일제가 지정했던 '합법 공간'을 최대한 리용하였다.
자칫하면 '변절' '기회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타협'을 영리하게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안희제 선생님도 밀정의 감시와 옥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1925년 일본외무성의 기록에 의하면, '안희제는 기업을 표하지만 실제로는 해외 독립운동가와 계속 련락한다'는
투의 기록이 있다. 다큐 후반에서 안희제 선생님 손자가 "할아버지는 조용히 말하시는 분이셨다" 고 밝히신
안희제 선생님의 성격도 밀정을 피해다니면서 형성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백산상회를 해산한 후 안희제 선생님은 대기업으로서는 '더불어 살아가자'를 실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 후 중외일보를 인수하고, 월간지 자력을 발행하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사업을 전개했다.
특히 자력 월간지에서는 일본에 대한 저항을 강하게 표출하여 불허가 출판물 딱지를 받기도 했다.
당시 검열로 사라졌던 창간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자력이다.
굶주려 여위고 손발이 묶이고
채찍에 맞으면서도 죽지 않는 조선의 자력이다.
나의 발밑에는 오직 생사가 있을 뿐이다.
다시 나를 위협하는 어떤 자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결의. 독립운동 자금을 보태는 사람으로서의 고뇌와 사명, 책임이 묻어나는 창간사이다.
이렇게 큰 일을 하고 있는데, 표면상으로는 이를 최대한 숨기려 했으니 조선총독부 측에서는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1932년 안희제 선생님은 '자력'을 실천하기 위해 만주로 가서 발해농장을 세운 뒤, 그 곳을 독립운동의 기지로 사용했다.
농장을 통해 하나의 생활협동조합을 구축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부하고 일하게 하여 군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투자하면, '다함께 하는 사회'를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백만여명을 넘었던 만주 유랑민들의 이주물결과 만주국의 통제, 중국 지주들의 탄압을 보면서
그 유랑민들을 지키고, 그들에게 사람답게 살 터전을 제공하기 위해 '자작농창제'를 시행하였다.
자작농창제란, 이주 농민에게 농장 소유 토지를 분배한 후, 생산한 곡물의 절반을 받아 다른 농지를 개간하고
수도를 개설하되.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 자작농으로 설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쉬운 해고', '주 120시간 근무' '산재처리 안해줌' 등등의 리윤 창출에만 몰두하며 사람을 갈아넣는
삼성같은 대기업과는 다르게 '사람을 살리는 로동', '사람을 살리는 돈'을 추구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종교와도 련대하여 발해농장에 대종교 총본사도 세웠고, 만주국 관리들을 진정시키고, 위장하기 위해
학교 졸업식에 일본군, 만주군도 초청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당시 친일로 전향했던 최남선이 발해농장을 찾아온 일화가 잠깐 나왔는데,
안희제 선생님은 기적이라며 놀라는 최남선에게
이 땅은 우리 한민족의 근원인 리유가 있다. 년후에 만주에서 제 2, 제3의 발해농장을 할 의향도 있다-라고 밝힌다.
사실 이건 기적이 아니라, 당연한 순리이다. 다만 최남선이 경제학,로동, 민중에 대한 공부를 등한시했을 뿐이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안희제 선생님의 유가족들을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안희제 선생님도 많은 독립운동가, 활동가들의 고민 중 하나인
'가족이 중요해? 신념이 중요해' 때문에 가족들에게 늘 미안해했음을 밝히고 있다.
안희제 선생님은 변장하고 밤늦게 귀가했다가 다시 나가는 등...신혼 기간이 거의 없었고,
장부의 금액변동내역이 발각되면 가족들도 피해를 받을 수 있으니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본인의 자료를 최대한 불에 태웠다. 그래서 남아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동지와의 련대가 중요하다.' '돈이 많다고 다 친일한 건 아니다. 선한 영향력에 돈을 쓰자'
'력사공부, 정치공부도 하면서 경제, 로동도 공부하자'이다.
력사,민중의 삶에 기반을 두고 경제, 로동을 공부해야 사람을 살리는 돈을 만들 수 있다.
<참고문헌>
1. 부산역사문화대전-백산상회, http://busan.grandculture.net:443/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00666
2. '천석꾼'집안 7남매 중 1명 대학 진학. 백산 안희제 선생 후손들 평생 갖은 고초, 2005-08-02, 국제신문
`천석꾼` 집안 7남매 중 1명 대학진학 : 국제신문
3. 의령군,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백산 안희제 다큐 영화 제작, 2024-08-27, 의령군청-군정소식-의령소식-보도자료
기획예산담당관 저술
http://www.uiryeong.go.kr/board/view.do?boardId=BBS_0000080&menuCd=DOM_000000203001005000&paging=ok&startPage=1&dataSid=1095360
첫댓글 소중한 경험이네요.
함께 못해서 미안합니다.
미안해하실 것까지야 없습니다.
상영시간대가 더 많이 확보되었으면 좋았을 겁니다.
@청년위원장_깜지 영화로서는 흥행이 안될거 같으니까...
력사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와 싸움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