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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기행일기(츠시마*이키섬 역사*문화기행<하편>에서는 츠시마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어갑니다~~~~
!!!. 2011년 2월 4일 금요일 맑음(오후에 약간 흐림)
[이즈하라훼리터미날] 새벽 2시 30분경 이키섬의 아시베항을 출발하여 이곳 이즈하라항에 도착한 것은 역시 새벽 5시경이다. 비록 2시간여 밖에 안되는 시간이었지만 단잠이었다. 손님은 많이 없었지만, 우편선이라서 정기적으로 오가는 화물은 꽤 많은 듯, 배가 부두에 계류함과 동시에 카고의 선수가 열리면서 화물하역작업이 시작된다. 우리도 역시 2층 사다리를 통하여 배에서 내려 터미날의 2층 대합실에서 오늘 일정에 대비한다. 최소한 6시는 되어야 아침식사를 하고 렌트카를 빌려서 오늘의 츠시마에서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휴식자리를 찾다보니 길다란 벤치가 안성마춤이다. 베낭을 풀고서 1시간 정도의 휴식을 위해서 자리를 잡는다. 손님도 없는 데다가 실내온도 또한 아늑하여 잠시 눈을 붙이기에 적당하다. 어제의 피로와 수면부족을 다소나마 해소하고자 잠시 쿠션벤치에 누워서 잠을 청한다. 덮을 이불도 없는 야전침대이지만, 아시베항의 터미날에 비하면 완전히 특급호텔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잠을 깨어보니 창밖은 동이 떠서 완전히 밝아 있고, 시간은 이미 아침 6시를 지나고 있었다. 형님을 깨우고서는 세면장에 가서 세면을 한다. 온수가 나왔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대로 머리를 감고 말끔하게 면도까지 하고나니 한결 상쾌하고 제법 아침을 맞이하는 기분이 든다. 짐을 꾸리고 자판기의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오늘의 일정에 대하여 형님과 상의한다.
이즈하라 터미날 야전호텔에 잠시 묵도로써 감사하며 터미날을 나선다. 입구를 나서며 체감온도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겨울스런 날씨다. 하지만, 남쪽나라에서 맞이하는 정월의 아침은 선선한 봄기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이곳, 이즈하라(厳原)는 츠시마시의 소재지이지만, 육지의 일반 도시와는 달리 하나의 쵸(町;우리의 동<洞> 행정단위)에 불과하다. 고대시대에는 요라(与良)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무로마치(室町;서기1334~1573)시대에 츠시마국의 슈고다이묘(守護大名;지방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인 소씨(宗氏)가 이곳에 후츄(府中;지방관아)를 두면서, 도읍으로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소씨는 대를 이으면서 에도(江戶;지금의 토쿄)체제의 다이묘(代名)가 되어, 10만코쿠(石)의 코쿠지다이묘(國持代名;지방 소국의 다이묘)격이 되었다. 이즈하라도 거기에 부응하여 죠카마치(城下町)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성에는 아랑곳 없이 역시 이즈하라는 전국에서 드물정도로 "쵸(町)"에 불과한 작은 도시이다. 다만, 명칭은 바뀌었는 데, 에도시대에는 이 죠카마치는 단순히 지방관아가 있는 것에서 후츄(府中)라고 불리었을 뿐이었고, 그러다가 메이지 쵸년, 이 부근에 이즈가하루(伊豆ヶ波留)라는 지명이 존재했던 것에서 현재의 이즈하라(厳原)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이즈하라에 관한 이러한 지명유래이야기는 역시 시바료타로 선생의 글(壱岐*対馬の道)에서 알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츠시마에서의 아침을 맞으며, 아침식사를 위한 시내산책에 나선다.
[이즈하라 훼리터미날에 계류중인 배]
[이즈하라항 훼리터미날 빌딩]
[이즈하라시내 아침산책 첫번째 이야기] 이즈하라 훼리터미날에서 이즈하라대교 아래로 난 해안로를 타고 중심가라 할 수 있는 시내로 진입하면서 이즈하라 시내의 아침풍경을 감상한다. 도시를 둘로 나누며 저 위쪽 산기슭부터 시작된 두 줄기 실개천의 양편으로는 차량통행이 가능할 정도의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괜찮은 경관이다. 도로변 하천쪽으로 세워져 있는 가드레일은 조선통신사 행렬에 관한 다양한 모습들의 사진이 스테인드글라스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는 데, 형님은 그 모습들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사진찍기에 열심이다. 청계천에 비교하면 규모 등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시내경관을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마침,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하천의 한쪽 벽에 길다랗게 조선통신사 에마키(絵巻;두루마리 그림)가 타일벽화로 제작되어 설명과 함께 곁들여져 있는 것을 보고 심혈을 기울여 카메라에 담는다.
그렇게 30분여를 걸었을까? 하지만, 아침식사를 할 만한 식당이 안보인다. 아침식사 손님이 없어서일까, 식당은 많았지만, 영업을 개시한 곳은 한 곳도 없다. 마트가 있어 도시락이라도 먹을 수 있으려나 들어가 봤지만, 이곳은 또, 마트내에서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좀더 걷기로 한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이제는 경찰서와 법원, 시청 등이 있는 관공서 근처로 가보았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마침, 멋스런 외관의 식당처럼 생긴 곳이 있어서 다가가 알아보니 빵집이다. 가게주변이 풍기는 이미지는 제법 식욕을 돋구었지만, 역시 우리에게 아침은 시원한 국물과 밥이 최고이기 때문에, 빵집은 잠시 보류한다. 그리고는, 경찰서 맞은 편의 골목길을 따라서 들어가 보았다. 마침, 조그만 식당이 하나 있음을 발견하고, 냅다 반기는 마음으로 식당앞을 다가선다.
["조선통신사 행렬 두루마리그림(에마키<絵巻>) 일부"가 이즈하라시내를 관통하는 실개천 석축벽에 그려져있는 타일조각화]
* 조선통신사 행렬
-. 조선통신사 두루마리그림 * 부분 : 이것은 부분이지만, 원래는 길이16.58m, 폭 27cm의 두루마리그림(에마키)이다. 매년 8월에, 이즈하라에서 개최되는 "츠시마 아리랑축제"에서 조선통신사의 행렬을 재현한다.
[이즈하라시내의 한 복판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 진쟈의 모습] 진쟈의 뒷산은 아리아케(有明;558.2m)산이고, 정면의 산기슭으로 등산로가 있다
[아침식단에서 일본을 만나다] 건물 자체는 별로 독특해 보이지 않지만, "죠(じょう)"라는 상호명이 간단하면서도 한자가 곁들여져 있지 않으니 다소 궁금증이 간다. 매우 아담한 인상의 식당이다. 노렌(暖簾;일본의 음식점 등 출입구의 처마 끝이나 점두에 치는 상호가 인쇄된 포렴<막>)이 느려뜨려져 있는 것이 영업중임을 알 수 있었다. 문이 열린 듯 하여 들여다 보니 인기척이 들린다. 하지만, 금방 대답이 없다. 아직 영업전인가 싶어 잠시 뒤로 물러서 골목길을 다시 돌아나오려는 데, 아주머니가 출입문을 삐끗 열면서 바라보는 것이다. 아침식사가 가능한지를 물으니, 가능하단다. 아휴! 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곧바로 식당안으로 들어간다.
식당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갖게 된 첫인상은 완전히 이색지대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식탁이 놓여있는 공간도, 식탁과 의자도, 벽의 장식물도, TV나 기타 집기류도, 모두가 미니사이즈에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이색공간에 들어온 느낌이다. 마치, 유치원의 아이들 전용의 놀이공간마냥 정말 아기자기하다. 공간은 좁지만, 조그만 의자와 식탁을 구색에 맞추어 차려놓으니, 10명은 족히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실내장식은 또, 얼마나 독특한지 그야말로 뉴스감이다. 전국의 사찰이나 진쟈 등은 다돌아 보았을까, 다종다양 가지각색의 종이등이 사방 벽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니, 아래의 사진을 보면은 금방 알 수 있겠다.
어찌보면, 단순하게 조잡하게만 볼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것을 들여다 보고 생각해보면, 왠지모르게 느껴지는 것은 좁고 작은 것에 익숙해져 있는 일본적 문화가 배어있음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다소 변하기도 하였지만, 고도성장기 일본의 경제 패러다임은 "경박단소(輕薄短小)형(서양의 중후장대<重厚長大;크고 무거우며, 길고 큰 것>형의 추구에 대응하여 이르는 말)"이었다. "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은 것의 추구", 그런 측면에서, 내가 지금 앉아있는 이 작은 "죠"식당 내부는 그러한 기분을 느끼기에 족하고 남는 것이다. "죠(じょう)"라는 식당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의 일 만큼은 유난히 오랜 기억속에 남을 것 같다.
하여튼, 금강산도 식구경이니 일단은 주문을 한다. 아침식사라서 간단한 것 이외에는 안되는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얼큰한 우동으로 주문한다. 주문한 우동은 나오자마자 입술을 간지럽히며 혀끝과 입천정 사이를 열심히 구불거린다. 혀끝으로 느끼는 일본 전통의 우동국물 맛은 구태여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촌스럽다. 다소는 뜨거운 듯 호호 불며, 훌쩍이며, 고개를 우좌로 갸웃거리면서 맛있게 먹어대는 자신의 모습이 재밌을 뿐이다. 마지막 한 스푼의 국물까지 맛있게 먹어치우니, 이제는 뱃속이 든든해져 하루가 가쁜해질 듯 얼굴이 환해진다.
기다리는 하루의 일과가 마냥 늦장만을 부릴 수 없게 하기에, 계산을 마치고 부지런히 "죠"식당을 나선다. 이제부터 가야 할 곳은 렌터카영업소이다. 이즈하라 시내구경도 겸하는 뜻에서 신선한 아침공기 맘껏 마시며 산보를 시작한다.
[아침일찍 유일하게 영업을 하고있었던 "죠(じょう)"라는 식당의 외관모습]
["죠"식당 내부장식의 감상] 식당은 너무도 작고 아담사이즈였지만, 마음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실내장식물에서부터 작은 식탁과 의자, 그리고 40여년은 되었을법한 골동품 14인치 칼라TV 등, 진부한 듯 하면서도 무엇인가 주제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일본적임(가볍고 얇으며, 짧고 작으면서도 다기능적인 것의 추구)"을 엿볼 수 있는 식당이었다
["죠"식당 내부장식의 감상] 골동품 14인치 칼라TV와 잘 어우러진 주변의 장식물들. 마네키네코(招き猫 ; 행운을 부른다는 고양이 인형으로, 왼발을 든 것은 손님을, 오른발을 든 것은 금전운을 불러온다는 상징성을 가져 가게 등에 많이 놓여있다. 요즘에는 두발 모두 들고 있는 것도 나온다고 한다) 인형이 너무 귀엽다
[각양각색의 등초롱(쵸친<提灯>)의 모습] 일본 전국각지를 돌면서 수집한 것일까? 마치, 등초롱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식당이 있는 골목의 풍경] 담쟁이넝쿨과 돌담이 너무 아름답다
[이즈하라시내 아침산책 두번째 이야기] "죠"식당을 나선 우리는 골목길은 나와서 이즈하라시내를 양분하는 중심축의 2차선 대로변으로 나왔다. 나카무라(中村;마을이름)의 후레아이(触れ合い; 만남)공원을 중심으로 그 주변으로 이어져 있는 무가(武家)저택 거리의 돌담 등과 맞은 편 도로변으로 일렬로 나란히 서있는 츠시마 남부경찰서와 법원, 그리고 하치만구(八幡宮)진쟈 등을 전체적인 외양만을 잠시 감상해 보면서 도로변을 타고 이즈하라 우체국쪽을 향하여 걷는다. 도로를 중심으로 우체국방향의 도로변에는 몇몇 금융기관이 늘어서 있고, 도로 건너의 맞은 편에는 츠시마와 이즈하라의 심벌이라고도 할 수 있는 츠시마시 교류센터가 자리잡고 있다. 근래의 건축기법으로 많이 볼 수 있는, 1층의 지상공간과 2층 이상의 지상공간의 활용도를 높히기 위한 공법이다. 1층의 100엔숍이 쉽게 눈에 뜨이며, 관광객이 많이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교류센터건물을 끼고 돌면서 이즈하라 시야쿠쇼(시청)를 들어가는 중에 있다. 츠시마시 관광물산협회가 1층에 있어, 필요한 자료 등을 얻기 위하여 들려본다. 오전 8시를 조금 지났을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담당직원이 다정하게 반기며 인사한다. 필요한 자료와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응대하며 진열대의 자료를 챙겨준다. 출입문에 큼직하게 붙어있는 츠시마산고양이 보호포스터가 유익한 정보를 담고있어 카메라에 담고서 담당직원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시야쿠쇼를 나선다.
시야쿠쇼 맞은편에는 츠시마유치원이 있는 데, 이 두건물 사이의 곧은 도로는 아리아케산(558.2m) 기슭의 반쇼인(万松院)을 향하여 하수도와 함께 나있는 데, 100여미터 위쪽에 츠시마 자동차 검사소 및 정비소가 위치하고 있다. 정비소 내의 일부 공간에 렌트카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고, 우리는 지금 예약한 렌트카를 빌리기 위하여 그 곳으로 시간맞춰 가는 중인 것이다.
사무실 앞에 도착하니 오전 8시 30분이 조금 지났을까? 사무실 안에는 담당 여직원과 중년의 남직원 한 분이 업무에 바쁜 모습이다. 렌트카의 예약사항을 얘기하니, "혹시, 츠시마공항사무소에 예약한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분명히 이 곳으로 예약하였다면서 확인을 요하니, 공항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확인한다. 잠시 착오가 있었다면서, 죄송하지만, 30분정도만 기다려 달라고 한다. 렌트카를 공항사무소에서 가져와야 하기 때문이란다. 마침, 츠시마 도착 첫날에 날이 저물어 반쇼인을 미쳐 다돌아보지 못하였는 데, 거기를 다녀오면 시간이 안성마춤일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한다.
렌트카 사무실에 베낭을 맡겨둔채로 가벼운 차림으로 반쇼인을 둘러보기 위하여 나선다. 반쇼인은 그 곳에서 불과 50m정도의 거리에 있기 때문에 시간적으로는 30~40분이면 충분하다. 산기슭이라 공기는 맑고 마음은 녹음에 취하여 싱그럽다.
[이즈하라소재의 나가사키켄 츠시마 남부경찰서의 모습] 츠시마 북부경찰서는 츠시마시 카미아가타쵸(上県町) 사스나코(佐須奈甲)에 소재한다
[이즈하라시내의 다른 건물들과는 대조적으로 시각적인 이색미를 보여주는 빵집] "죠"식당을 찾지 못했다면 이 빵집에서 구수한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무가(武家)저택 거리] 이즈하라는 성시(城市)답게 여기저기 돌담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에도(江戶)시대 초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특히 1811년의 조선통신사 내방 때에 고도의 축조방법으로 더욱 훌륭하게 정비되었다고 한다. 조금 다른 형식의 돌담은 방화벽이라 한다
[나카무라(中村;마을이름)의 후레아이(触れ合い; 만남)공원] 돌담과 벤치, 정원수와 꽃나무로 조성된 이즈하라 시내의 작은 쉼터로 무가(武家)저택거리가 시작되는 곳이다
[무가(武家)저택 골목의 모습]
[츠시마시 교류센터] 이즈하라시내에서 가장 크고 세련된 건축물인 듯 싶다
[츠시마시 우체국] 부산우체국과 자매결연우체국이다
[츠시마 시야쿠쇼(市役所 ; 시청)의 모습]
[츠시마 시야쿠쇼내 관광안내소의 출입문에 붙어있는 츠시마야마네코(対馬山猫;츠시마 산고양이<삵괭이>)보호를 위한 포스터]
*** 저녁~동틀무렵, 가을~겨울은 특히 주의가 필요합니다!
-. 고양이의 생장기의 구분 : 출산기, 생육기, 독립기, 번식기
-. 엄마고양이로부터 이제 막 독립한 새끼고양이가 자신이 살수 있는 장소를 찾아서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또, 도로나 차량에 대한 경계심도 적기때문에 사고를 당하기 쉽습니다.
-. 번식기에는, 숫놈의 산고양이가 암컷을 찾아서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고를 당하기 쉽습니다.
-. 츠시마 산고양이의 월별교통사고발생건수의 그래프(1992년도~2010년 12월 현재)로 막대그래프의 청색부분은 어미산고양이, 황색은 아기산고양이를 나타낸다.
*** 츠시마 산고양이(삵괭이)의 특징
-. 몸통은 선명하지 않은 얼룩반점모양이다.
-. 머리부분의 이마에는 머리 후두부까지 계속되는 두 줄의 하얀 줄무늬가 있다.
-. 집고양이에 비하여, 꼬리는 통통하고 길다.
-. 귀의 후부에 "호랑이 귀모양 얼룩반점(虎耳狀斑)"이라고 하는 하얀 얼룩반점이 있다. 귀는 작고, 귀끝이 둥근 모양이다.
[츠시마 시야쿠쇼(市役所;시청)내 1층에 있는 츠시마 관광안내소]
[반쇼인(万松院)에 오르는 길] 츠시마의 북단에 있는 히타카츠항으로 들어와서 츠시마 종단버스를 타고 이 곳 이즈하라에 처음 오던 날 일몰시간에 임박하여 잠시 들러보기만 하고서 상세관람을 뒤로 미루었는 데, 오늘 아침에 공교롭게 적당한 시간을 활용하여 볼 수 있게 되니 매우 다행스런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츠시마 한슈인 소(宗)씨 일가의 묘소가 있는 보리사(菩提寺)인데, 서기 1615년에 소씨 제 20대인 소 요시나리(宗 義成;1604~1657)가 부친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1568~1615)의 추모를 위하여 창건한 쇼온지(松音寺)를 서기1622년에 부친 요시토시의 법호(法號) 반쇼인(万松院)에 연유하여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한 것이라 한다.
형님은 일본의 전국시대 말기에서 토쿠가와 초기에 장엄한 축성문화가 꽃을 피웠는 데, 이 곳 츠시마에는 이러한 성이 없었던 것에 기인하여 1669년에 츠시마 제21대 한슈인 소 요시자네(宗 義眞)가 파수대를 지어서 카네이시(金石)성이라 불렀다고 하는, 지금은 시민들의 운동공원부지의 일부에 남아 있는 성벽과 성문의 자취, 정원의 연못이 있는 카네이시(金石) 성터를 다시 한 번 둘러본다고 간다. 물론, 이 곳과 바로 연결된 코스이기도 하다. 나는 곧바로 반쇼인 본당과 앞뜰을 둘러본 뒤에 햐쿠간기(百雁木)라고 하는 돌계단을 오른다. 대나무 숲의 스산한 기운과 울창한 삼나무숲의 음산한 기를 느끼며, 묘지이기에 자못 위축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른다. 다소 이른 아침이기에 혼자서 산기슭의 묘원을 방문한다는 것은 다소 용기가 필요한 행위이기도 하다. 계단을 세어보니 약 130여개는 되는 듯 싶다. 좌우로 5~6개단에 한 쌍 꼴로 서있는 석등탑이 다소 떨어져서 감상하니 진짜로 한 쌍의 기러기가 꼬리를 맛대고 있는 형상이다. 이런 저런 생각속에 계단을 오르다 보니, 이제 다소 오래된 삼나무 고목과 묘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 더 오르니, 이제는 다소 완만한 경사지가 형성되면서 본격적인 묘원풍경이 펼쳐진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면서 올라온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일직선으로 이어진 계단길이 좌우의 기러기모양 석등탑과 삼나무 숲에 어우러져 말 그대로 장관이다. 잠시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삼나무숲의 음울한 기에 흘렀던 땀이 싹 가신다. 둘레를 둘러보며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거목 세 그루가 웅장한 몸집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키를 자랑하듯 우뚝 서있다. 하얀색의 표지목에는 반쇼인의 오스기(大杉;삼나무 거목)라는 큰 글씨와 세 그루 삼나무에 대한 이력이 적혀있다. 세 그루 모두, 나무둘레가 6~7m, 높이가 35~40m의 거목으로, 수령은 반쇼인 창건(서기 1615년)전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다. 잠시 카메라에 담아보고자 위를 올려다보며 시름을 하였지만, 온전하게 담기는 무리다. 프로 사진작가들의 사진기라면 모를까 여간 쉬운일은 아니라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이제는 묘원을 구체적으로 둘러보기로 한다. 오르는 좌측으로는 작은 도랑이 형성되어 있고, 그 위로 구름다리가 하나 자그맣게 놓여있다. 계단을 오르니 제법 평평하고 넓직한 부지에 상단히 큰 묘석 몇 기가 규칙적으로 둘러 서있다. 가까이서 묘석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니, 이 반쇼인 창건주인 츠시마 제2대 한슈인 소 요시나리(宗 義成;1604~1657, 소씨 20대 당주)와 그의 정부인(히노<日野>부인; ??~1663)의 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반쇼인의 창건주로서 그 역할이 컸던 주인공이라서 눈여겨 보았다. 주변을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둘러보면서 자리를 옮긴다. 반쇼인의 중요한 의미정도는 알았으니 다행이다는 마음으로 건너편의 다른 쪽의 특징적인 묘석을 찾아보았다. 매우 최근에 세워진 듯, 두드러져 보이는 묘석이 있어 다가가 보니, 츠시마의 마지막 한슈이자, 우리나라 구한말 고종황제의 왕녀인 덕혜(德惠;1912~1989)공주와 결혼하였던 소 타케유키(宗 武志;1908~1985, 소씨 37대 당주)의 묘였다. 카네이시성 공원에 있는 덕혜옹주비를 둘러보며 이 타케유키공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잠시 그의 불행했던 생애에 대한 안타까운 나의 마음을 띄워보이며, 불행한 역사가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발길을 아래로 향한다.
역대 한슈와 그 정실부인, 그리고 측실 등의 묘석이 차례로 묘원을 이루고 있으니, 이 정도의 규모는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츠시마라는 섬을 이미지상으로 생각해 봤을 때는 상당히 넓은 규모임을 알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반쇼인 사찰을 오타마야(御靈屋;귀인의 혼백을 모신 사당)라 부른다고 하는 데,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러한 조상을 모시는 풍속도는 비슷하다는 것과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사회의 인간적 도리구나 하는 것을 재차 깨닫게 되니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는 듯 싶다. 아울러는 우리나라같이 매장문화가 발달한 곳에서는 이 정도의 규모로 묘원을 조성하려면 왠만한 동산 하나 쯤은 통째로 조성해야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요즘에는 화장문화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도 하지만, 시대변화에 부흥한 새로운 문화의 정착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제, 츠시마 역대한슈인 소씨일가의 묘원을 모두 둘러보고 올라온 길을 내려가는 중이다. 햐쿠간기 돌계단에 이르니 계단의 아래쪽 바깥입구 쪽에는 많은 관강객들이 모여서 서성이고 있다. 어린 학생들로부터 중년이상의 어른들까지 있는 것을 보니 여행사의 패키지팀인 듯 싶다. 터벅터벅 아랫 계단까지 내려가서 바깥 쪽을 보니 도랑의 구름다리 위에 동행하는 형님이 서있다. 계단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부탁하며 포즈를 취한다. 이제 오전 9시를 좀 지났을까, 반쇼인 본당의 마당을 돌아서 밖으로 나온면서 다시 한 번 본당의 내부와 마당 한 켠의 우리의 신문고와 같은 칸코(諫鼓)라는 돌로 된 북을 살펴 본다.
비록, 일본국의 한 섬에 불과한 지역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한일 관계사에서 우리와는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섬이고, 또 그 섬지역의 주인장역을 역대로 이어온 츠시마 한슈인 소씨 일가의 역사가 숨쉬고 있는 이 곳이기에, 이 곳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관련 자료를 조사하여 간추려 적어보았다.
*** 반쇼인(万松院)은 천태종(天台宗)의 불교사원으로 츠시마 후츄한(府中藩;이즈하라의 옛이름)의 소(宗)씨의 보리사(菩提寺;고인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은 절)이고, 츠시마 역대한슈(藩主)의 묘원이다.
-. 카나자와(金沢;이시카와켄)시의 마에다(前田)씨 가문, 하기(萩;야마쿠치켄)시의 모리(毛利)씨 가문의 묘와 함께 일본의 3대묘지로 일컬어진다.
-. 서기 1615년에 제20대 츠시마 한슈(藩主)인 소 요시나리(宗 義成;서기1604~1657)가 부친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서기1568~1615)의 극락왕생을 빌기위하여 창건하였고, 부친의 법호(法号)에 기인하여 "반쇼인(万松院)"이라 하였다고 한다.
-. 일본의 원호연간 겐로쿠(元祿;1688~1703)와 쿄호(享保;1716~1735) 시기의 큰 산불로 사찰의 정문만 남기고 가람(伽籃;절)은 소실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서기1879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본당 뒷편의 정원은 칸분(寬文;1655~1672)년간에 쿄토의 니시카와 요시나가(西川嘉長;쿄토의 풍류객)이 만든 것이고, 사찰의 정문은 모모야마(桃山;1568~1600, 토요토미히데요시 통치시대의 문화)양식의 건조물이다.
-. 묘지는, 산몬(山門;사찰의 정문)옆으로 햐쿠간키(百雁木)라고 불리는 123단의 자연석 돌계단을 다오르면 역대의 한슈(藩主)와 그 일족의 묘가 있다.
-. 본당에는 토쿠가와(德川) 역대 쇼군(将軍)의 금박으로 된 큰 위패와 조선통신사의 자료 등, 츠시마한(藩)정치 300년간의 귀중한 자료가 아주 많이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 츠시마와 소(宗)씨 : 츠시마의 중세사는, 우선 소씨 시조의 츠시마 입도(入島)로부터 그 막을 연다. 소씨의 시조는 타이라노 토모모리(平 知盛;서기1152~1185, 헤이안시대 말기의 헤이<平>씨 일가의 무장) 혹은 안토쿠(安德;서기 1178~1185, 제81대 천황)천황의 후예 등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헤이안(平安)시대 이후로 다자이후(太宰府)의 관리이었던 코레무네(惟宗)씨의 지족(支族)이 12세기경에 츠시마의 주재관리가 되어, 카마쿠라시대에는 츠시마국을 포함한 3州2島의 슈고(守護;소국의 군사*행정권자의 직제) 혹은 지토(地頭)였던 다자이후쇼니(太宰府少弐<무토/武藤>)씨가 츠시마국 슈교다이(守護代<슈고의 보좌직제>, 혹은 지토다이<地頭代>)를 겸직하며, 점차로 실권을 장악하면서 무사화(武士化)하여 소(宗)씨라 칭하였다고 한다. 13세기 중반경에는 재지(在地)세력인 아비루(阿比留;소씨 이전, 츠시마의 지배씨족)씨를 대신하여 섬내 최대세력이 된다.
특히, 소(宗)씨 가문 제21대 요시자네(義眞;서기1639~1702)의 치세 35년간은, 츠시마한의 황금기로 후츄(府中) 아수(阿須)천의 개천(開川), 오후나에(お船江;한슈 전용부두)의 축조, 은광산의 채굴 등의 토목공사, 산업진흥의 시책을 행하였는 데, 그 중의 최대의 업적은 오후나에고시(大船江越し; 츠시마남북의 중간지점 병목육지부 위로 양안(兩岸)의 큰 배를 육로이동하도록 한 것) 협수로의 운하건설이다. 섬의 중앙의 아소(浅茅)만은 서쪽의 조선 해협과 통하지만, 동쪽의 츠시마 해협에는 수로가 없기 때문에 옛날부터 화물을 배에서 내리고 배를 병목형 육지의 구릉으로 넘기는 방법을 취해왔다. 서기 1672년에 수로를 여는데는 성공하였고, 그 후로 계속하여 확장을 거듭하여 현재 상태(연장 240m, 폭 50m)의 운하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그는 문치에도 그 뜻을 기울여, 학자인 아메모리호슈(雨森芳洲;서기 1668~1755, 에도시대 중기의 일본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국어와 조선어에 능하였음)의 초빙으로, 일본 최초의 학교를 개설하기도 하였다.
*** 츠시마 후츄한(府中藩;이즈하라한)의 제2대 한슈(藩主)인 소 요시나리(宗 義成;1604~1657, 소씨 20대 당주)와 그의 정부인(히노<日野>부인; ??~1663)의 묘
-. 요시나리는 서기 1615년에 부친인 소 요시토시(宗 義智)가 죽자, 상경하여 토쿠가와 바쿠후 제2대 쇼군인 히데타다(秀忠;1579~1632)를 알현하고 가독상속을 허락받아 제2대 한슈가 되었다. 그는 반쇼인을 창건하였고, 조선통신사의 대우간소화에 따른 재정절감, 츠시마 은광개발 등을 적극적으로 행하여 츠시마한 정치의 초석마련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1635년에 부친인 요시토시가 이씨조선과 기유(己酉;1609년)조약(1592년, 1598년 두 차례에 걸친 토요토미의 조선반도 침략<임진왜란>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무역이 재개되었고, 일본으로부터 조선에 도항하는 사자(使者)의 자격 등에 대하여 정하였다. 메이지 초기까지 조약의 효력이 지속되었다) 을 맺을 때, 국서를 위조한 것 등이 바쿠후에 발각되어, 직위해임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토쿠가와 제3대 쇼군인 이에미츠(家光;1623~1651)는 조선과의 중계역에 소씨를 이용하는 것을 득책으로 여겨 그 죄를 면하여 주므로써 그 위기를 모면한다.
*** 츠시마 소씨의 마지막 당주인 소 타케유키(宗 武志;1908~1985, 소씨 37대 당주)의 묘
-. 소 타케유키는 현재의 토쿄도 신쥬쿠쿠 시부야(渋谷) 태생이다. 아버지 쿠로타요리유키(黒田和志)는 귀족원의원을 지냈으며, 츠시마 후츄한 제16대 마지막 한슈인 소 요시아키라(宗 義達;1847~1902)의 친동생인데, 요시아키라의 장남(宗 重望)이 일찍 죽자(1923년 3월) 타케유키가 그 뒤를 이어 소씨 37대 당주가 되었다(1923년 10월). 그 당시는 츠시마 중학교 재학중이었다. 졸업후에 토쿄로 돌아가 구 학습원고등과 및 토쿄제국대학교(현 토쿄대) 영문과 등을 졸업하고 영어학자 및 시인이 된다. 1946년에 귀족원 백작의원에 선출되기도 하지만, 이듬해 1947년 5월 3일에 일본국 헌법에 의해 작위를 상실한다. 레이타쿠(麗澤; 치바켄 카시와시 소재)대학교의 교수 등을 역임하다가 생애를 시작과 회화에 몰두한다.
타케유키는 1931년에 조선의 고종황제의 왕녀인 덕혜(德惠;1912~1989)공주와 결혼(일본황실에 의한 강제결혼)한다. 당시(1925년 3월)에 덕혜공주는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났었다. 1933년에는 장녀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하지만, 수년 후 덕혜공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치매증상을 갖게 된다. 그리고 1955년 6월에 이혼한다. 토쿄의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중 고국에 귀국한다(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1989년에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마사에 또한 주변의 시달림 등에 견디지 못하다가 1956년에 자살을 목적으로 실종된다(일본 청년과 결혼하였으나 결혼 2년 후에 유서를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주검으로 발견된다).
[본당의 모습] 여러번의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나, 현재의 전당은 서기 1879년에 건조되어 원래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는 츠시마 최고(最古)로 일컬어지는 정문과 그 양측에 있는 인왕존(仁王尊) 뿐이다. 내부의 본존(本尊)과 기타의 집기로는 카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작품을 보존하고 있다. 또, 토쿠카와 역대쇼군의 위폐와 조선국왕으로부터 보내온 삼구족(三具足;불전에 사용하는 세가지 불구<佛具>)으로 안치대를 포함한 전체가 동제품인 향로*화병*촛대 등이 있다.
[본당의 앞마당의 모습]
[칸코(諫鼓;신문고)] 영주에게 간언하고자 하는 백성이 울려서 그 뜻을 전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치한 북이다. 우리의 신문고와 같은 것으로 역시 본당의 마당에 보존되고 있다.
[햐쿠간키(百雁木)] 반쇼인의 묘지로 올라가는 132단의 완만한 돌계단의 이름을 말한다. 츠시마산 유명한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계단 양켠에는 석등(石燈籠)이 줄지어 서있다.
[반쇼인의 삼나무 거목 세 그루] 세 그루 모두, 나무둘레가 6~7m, 높이가 35~40m로 거목이다. 나무의 수령은 반쇼인 창건(서기 1615년)전에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츠시마 후츄한(府中藩;이즈하라한)의 제2대 한슈(藩主)인 소 요시나리(宗 義成;1604~1657, 소씨 20대 당주)와 그의 정부인(히노<日野>부인; ??~1663)의 묘]
[츠시마 후츄한 제3대 한슈인 소 요시자네(宗 義真;1639~1702, 소씨 21대 당주)와 그 부인(쿄코쿠타카카즈<京極 高和>;1619~1662)의 묘] 요시자네는 츠시마한 정치의 기초를 확립하고 전성기를 이루었다.
[츠시마 소씨의 마지막 당주인 소 타케유키(宗 武志;1908~1985, 소씨 37대 당주)의 묘] 이 묘의 주인은 1931년에 조선의 고종황제의 왕녀인 덕혜(德惠;1912~1989)공주와 결혼(일본황실에 의한 강제결혼)한 주인공이다.
[햐쿠간키(百雁木)계단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카메라에 담은 사진] 우리의 전통혼례식에 사용하는 나무 기러기를 닮은 모습이라 하여 햐쿠간키(百雁木)라 이름지었나 보다
[햐쿠간키 계단을 다 내려와 기념촬영한 모습] 퉁퉁하고 키큰 대나무도 삼나무 숲속에 끼어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요시나가(吉永) 렌트카 이즈하라영업소] 반쇼인 관람을 마치고, 이제 햇살이 퍼질 쯤의 시간이 되어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내방하고 있는 틈새를 비집고 나와 렌트카 영업소로 내려온다. 영업소에 도착해 보니, 벌써 우리들의 애마는 도착해 있었다. 경차로 이키섬에서 빌렸던 것과 대동소이 하지만, 차의 연식은 상당히 지난 듯, 다소 옛스런 외양을 풍긴다.
일단은 사무실에 들어가니, 츠시마 공항영업소에서 온 여직원 한 명이 반갑게 맞이한다. 이메일 접수시 아침 출차시간을 공항영업소에 맞춰서 하였더니, 다소 착오가 있었나보다. 덕분에 반쇼인 관람을 아주 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면서 렌트수속을 진행한다. 특별하게 시간지연 사유가 없어서, 금방 렌트절차를 마친다.
잠시, 친분도 쌓을 겸 해서 농담을 해본다. 반쇼인에 오르기 전에 자기 집의 앞마당에서 따온 것이라며 상당히 크고 토실토실한 귤을 한 개씩 먹으라고 주었는 데, 껍질을 벗겨서 좀 커다란 화분 위에 버렸었다. 그러자, 다소 성깔있게 보이는 여직원 아가씨가 마구 다그치듯 뭐라 하는 것이다. 그 때는, 미안하다면서 그냥 맛있게 먹기만 하였는 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지나치기에는 조금 약이 올랐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마침 분위기가 분위기인지라, "아침에 화분에 귤껍질을 버린 것은 나무의 거름이 되지 않을까 해서... (朝の事は、蜜柑の皮が木の肥料に成ろうと思って。。。)"라고 하였더니, 깔깔깔 웃으면서, "그것은 거름이 아니라 오염물이예요"라면서 응대한다. 아마도, 형님의 첫인상이 다소 낯설어 보였던 모양이다. 하여튼, 환한 웃음으로 서로의 인상을 익혀두고서 베낭을 들쳐메고 사무실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상한 귀염둥이 청색승용차가 한 대 보이는 것이다. 2인승 차량인 데, 우리가 탈 경차의 2/3밖에 안될 정도로 작고 귀여웠다. 차를 가져오느라 이 곳까지 운전하고 온 여직원을 태우고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온 것이다. 요시나가 렌트카 츠시마공항 영업소의 업무용 차량이란다. 신기한 모습으로 잠시 카메라에 담으려니 직접 시승을 권한다. 운전석에 앉아서 촬영도 하면서 운전대를 조작해본다. 매우 갠찮아 보였다. 혹시, 전기자동차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가솔린 차량이란다. 당장이라도 사고싶은 생각에 가격을 물었더니, 한화로 약 1,700만원(일본화 130만엔) 정도란다. 운전석이 우리와 같이 왼쪽으로 되어 있는 데, 수입품이란다. 나중에 생각이 있으면, 중고품으로 사란다. 잠시나마, 재밌는 시간을 가져보고, 이제 슬슬 오늘의 츠시마 여행을 시작하기 위하여 우리들의 애마에 오른다.
자동차는 열쇠는 차에 꽂혀 있어서, 차에 오른대로 시동을 걸고 전후진을 해보고서, 잘 다녀온다면서 영업소 사무실을 뒤로하며 도로에 접어든다. 츠시마 시야쿠쇼와 유치원 사이의 도로를 타고 나오다가 교차로에서 우회전 신호를 넣고서 곧바로 다음 목적지인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을 향한다.
[렌트카영업소 업무용 2인승 차량] 너무도 귀엽고 야무지게 보여 시승과 함께 기념촬영을 해봤다. 일본 엔화로 약 130만엔(한화 약 1,700만원)이란다
[츠시마 여행 렌트카] 츠시마를 여행하기 위하여 빌린 렌트카로 경차이다. 의외로 성능이 좋았다. 이키섬의 애마보다는 나이는 많았지만, 괜찮았다
[요시나가 이즈하라 영업소] 이즈하라차량정비소의 사무실을 임대하여 사용중인 듯 하였다. 츠시마공항에 주사무소가 있다
[아유모도시(鮎戻し)자연공원 가는길] 이즈하라 시내를 벗어나면서 들어서는 이 길은 여행 첫 날밤을 보내기 위하여 페코챤 민박집으로 갔던 그 길이다. 이즈하라 항의 해안을 끼고 오른 쪽으로 돌면서 페코챤 민박집이 소재하는 쿠타(久田)마을로 가는 해안쪽으로 다소 돌출한 지형이다. 역시 중앙선이 없는, 마주오는 차량을 비껴가기에는 다소 위험성이 다분한 그런 도로이다. 다소는 긴장된 모습으로 그 구간을 지나니, 이제는 쿠타마을 전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면서 4차선 넓은 도로가 앞에 펼쳐진다. 마을앞 도로변에 있는 페코챤 민박집 앞을 지나며, 지지난 밤의 추억을 되새긴다. 쿠타마을이 자리한 지형은 강 삼각주의 둔치에 형성된 지형마냥, 상당히 넓고 평평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어서 이즈하라보다는 오히려 명당으로 보였다.
이제, 우리차는 다시금 쿠타마을을 지나 타테라산(龍良山;558.5m)과 야타테산(矢立山; 648.5m) 사이를 가로지르는 우치야마(內山) 고개를 오르기 시작한다. 마주오는 차량은 매우 한산하다. 조금 오르니, 가는 길과 오는 길이 각각 독립되어 뚤려있는 쌍터널이 나온다. 관통하는 맞은 편 출구가 훤하게 보일 정도의 그리 길지않은 터널이다. 터널을 통과하니 갑자기 눈앞이 확 트인 느낌이 다가오면서 약간 구비진 모퉁이 도로변에 한 차선 이상의 넓이 정도로 넉넉하게 펼쳐진 전망포인트가 보인다. 이 고개의 가장 높인 듯 싶다. 전망이 좋은 곳으로, 휴게시설은 없지만 잠깐의 기분전환을 위해 썩 좋은 곳이다. 차량을 좌측으로 붙이며, 잠시 쉬어가기 위하여 차에서 내린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가? 갑자기 반대 편 도로의 갓길에서 승용차 한 대가 서있는 데, 창문을 열고 우리를 향해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께이듯, 잠깐을 두린번 거리는 데, 자세히 보니 이즈하라에 처음 도착하던 날 저녁식사를 들렀던 음식점에서 만났던 50대 중반의 중년부인이다. 인상적인 모습에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서 상당히 긴 대화를 나누었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이 인사를 하면서, 영문을 물으니, 츠시마가 자신의 비즈니스상에 주요 거래구역이란다. 그래서 자주 왕래를 한단다. 물론, 이 부인이 사는 곳은 큐슈북부의 사가켄의 어느 도시다.
잠깐 인사를 나누고는, 문득 오늘의 일정을 묻는다. 츠시마의 주요 지역을 고루 돌아볼 예정이라고 하니, 초행길에, 그것도 외국인 입장에서 매우 위험하다며, 자신이 오늘의 운전가이드가 되주겠다고 한다. 물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겨우 한 번의 지나가는 면식으로 이렇게 과분한 친절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단호히 거절을 하였더니, 그것이 아니란다. 자신에게는 전혀 부담가질 필요없이 자신의 말에 따르란다. 본토지역과는 다르게 도로가 너무도 험하고 이곳 저곳 찾아다니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에 도로표지판만 보고는 운전이 매우 난해하단다. 이즈하라 시내까지는 가까우니까, 자기차를 자신의 숙소에 주차해 놓고서 다시 돌아오자고 한다. 우리들 입장에서는 매우 부담가는 일이지만, 극구 만류하니 하는 수 없이 따르기로 하고 차를 돌린다. "허, 참! 살다보니, 이런 감읍할 일도 있구만. 마치 깊은 산 계곡에서 나뭇꾼이 선녀라도 만난 기분이군."하면서 오던 길을 다시 되돌려서 터널을 지나 내려간다. 그런데, 마침 도로 오른편으로 넓은 유휴지가 있어 그 곳에 자신의 차를 주차해 놓으면 되겠다고 하면서, 일단은 다시 차를 그곳으로 유인한다. 결국은, 그 곳에 자신의 차를 주차해 놓고는 우리 차로 옮겨타면서 운전대를 잡는다. 자신의 말에 따르는 것이 절대로 안전하고, 또 보고자 하는 장소를 거의 돌아볼 수 있다면서 하라는 대로 하란다. 그렇게 안하는 것이 오히려 실례가 되는 듯 하여 일단은 고맙다면서 운전을 맡기고 그 옆자리를 내가 앉고, 형님은 뒷자리를 앉는다. 이제, 츠시마에서의 본격적인 여행은 시작되는 것일까?
매우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우리 차는 다시 움직이면서 터널을 통과하고 우치야마전망포인트를 통과한다. 츠시마의 도로는 거의 속속들이 꾀고 있다는 이 중년부인의 너스레에 우리 두 장정은 그냥 몸을 맡기는 신세가 되어 주변의 산세에 경악과 아찔함을 만끽하면서 다음 목적지를 향하여 질주한다. 전망포인트를 지나자마자 처음 난코스를 만나며, 마주오는 트럭과 교차하는 데, 병목구간이라 여간해서 두 차량이 교차할 수 없는 듯 보이는 구간이다. 그런데, 마치 자기 신체의 일부인양 바퀴와 바퀴를 아슬아슬하게 비키면서 무사히 통과한다. 운전묘기라도 보는 듯한 절묘한 순간이었다. 대단한 운전실력이라면서 칭찬을 거듭하니, 운전경력 30년이 넘었단다.
우리 차는 다시 험로를 지나고 있다. 눈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곳은 단애의 절벽이다. 미끄러지면 도저히 살아남기 힘든 구간이다. 5분 쯤을 달렸을까, 갈림길이 나온다. 산 능선에서의 갈림길이다. 교차로가 상당히 미로찾기에 준할 만 하기에 족하다. 만약, 내가 운전하고 왔다면, 상당히 혼동될 만한 교차로다. 엉겁결에 지나치기는 하였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만한 곳이다. 그 곳을 지나니, 이제 곧게 뻗은 내리막 길이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이 인접한 곳이란다.
한산한 산속의 도로를 힘없이 미끄러지 듯 달리는 우리 차는 우연찮게 맞이한 우치야마고개의 운전여신에 의하여 안전하게 아유모도시 공원의 주차장에 랜딩기어를 내린다. 넓고 넓은 주차장에 우리 차량만 덩그러니 서있으니, 조금은 외로운 느낌이 찾아든다. 휴게소 건물에 다가가니 계곡 아래쪽으로 구름다리가 하나 보인다. 자그만 현수교량이다. 계곡의 세류천 이름은 세가와(瀬川)라는 동판을 보고 알 수 있었고, 다리 이름은 세이류하시(淸流橋)라 되어 있었다. 입구의 오른 쪽에는 재래식 벌꿀통이 놓여있고, 작은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우선은 다리를 건너 반대편 산 기슭에 발을 내딛는다. 건너서 산 아래쪽을 보니 100여 미터 아래쪽 숲속에는 건물이 한나 보인다. 캠핑장소라고 한다. 여름철 가족단위로 자연을 만끽하며 캠핑하기 좋은 곳으로 야영하기 위한 공간으로 마련해 놓은 곳인 듯 하다. 우리같은 여행객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 하여, 곧바로 드넓게 펼쳐진 한 장의 화강암 너럭바위 계곡에 발을 내딛는다. 위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계곡의 모습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자연의 신비감과 경외감을 느끼기에 충분하였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더욱 현장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월속에 깊게 조각된 암반위의 골로 흐르는 1급수의 천연수의 시원한 여름과 계곡 양켠으로 짙은 녹음 속에 우거진 삼나무숲의 자연이 엮어낼 가을단풍 이야기는 눈에 선할 만큼 우리들 마음을 감탄케 한다. 손으로 만져보는 암반수의 촉감은 느끼기에 청량감을 더해주듯, 금방이라도 코펠에 밥을 지어 갓담아온 생김치에 한 그릇 해치울 만큼, 촉감으로 느끼는 맛 자체가 일품이기 짝이 없다. 위아래로 번갈아 돌아서며 아름다운 자연속의 객이 되어 한 폭의 수채화로 담아보고자 포즈를 취해본다. 중년부인의 사진기술은 운전의 여신에는 걸맞지 않게 개성을 발휘한다. 갈길이 멀다하니 우리는 또 서두른다. 들어왔던 길을 따라 되돌아 나오며 다시 한 번 저 아래로 펼쳐지는 자연경관을 아쉬워 하며, 마음의 작별인사를 전한다. 다리를 건너 다시금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휴게건물 인근의 등나무 야외휴게소 앞 자연목판에 새겨진 한 수의 와카(일본 전통형식의 시)가 눈에 뜨인다. 만요슈에 실린 유구한 자연의 덧없음을 읊은 시로, 이곳의 자연속에 담긴 은근한 역사가 말해주는 풍정을 느끼기에 좋은 내용이었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을 좀더 이해하고 기억하기 위하여 그 내용들을 찾아보고 정리해 본다.
*** 아유모도시(鮎戻し)자연공원
-. 이즈하라에서 우치야마(內山)터널과 전망대를 지나 약 12.8km 되는 곳에 위치한 이 공원은 은어(향어)가 되돌아 올정도로 깨끗한 계곡물이 흐르는 자연공원이다. 약 26헥타아르의 대자연 경관을 살려서 조성한 자연공원이다. 계곡 전체가 한덩어리의 천연화강암으로 덮혀진 일본 전국에서도 유일한 청류천(淸流川)으로 "세가와(瀬川)"라 부른다. 구름다리, 방갈로, 산책로, 캠프장, 놀이기구 등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이나 단체의 캠핑장소로 적당한 곳이다. 사진은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의 입구"라는 공원주차장입구의 이정표다.
*** 아유모도시 공원의 휴게공간에 세워진 자연목판 위에 세겨진 만요가(万葉歌) 한 수
-. 아유모도시 공원의 휴게공간에 세워진 자연목판 위에 새겨진 만요가(万葉歌) 한 수가 벤치위에서 쉬고있는 자연인의 마음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 命惜しませ久しかれ名欲(内院)山 岩ふみならし又またも来む(이노치 오시마세 히사시카레 나호리야마<우치야마 ; 산의 마을쪽을 지칭하는 듯 하다> 이와후미나라시 마타마타모 쿠무)
~ 万葉集(第九巻)藤井連の返歌 / 만요슈(제9권) 후지이무라지노 헨카 ~
*** 이 내용은 일본 고대시가집인 만요슈(万葉集;일본 고대의 닌토쿠<仁徳天皇; 일본 제16대 천황, 제위 서기313~399년>천황기부터 나라<奈良;지금의 오사카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일본국의 발상지이다. 당시에는 헤이안쿄라 불렸던 지금의 쿄토로 천도하기 전의 도읍지로 당시 나라시대까지는 야마토 혹은 헤이죠쿄라 불리던 곳>시대 말기까지 대략 300여년간의 와카<和歌;일본 전통형식의 시>를 모은 가집이다. 약 4,500수의 시가가 20권의 책으로 엮여졌다. 천황과 귀족의 시가를 중심으로 여성이나 농민을 비롯한 변방의 군인 등까지 다양한 계층에 의해 불려진 시가의 모음집이다) 卷9-1779에 나오는 후지이무라지(藤井連)라는 사람의 연인과 나눈 증답가(贈答歌)중의 내용이다. 당시에 쿄(京;당시의 도읍지인 지금의 오사카 북동부 지역인 나라<奈良>시를 가리킨다)의 사람인 후지이무라지(藤井連)가 지금의 후쿠오카켄 북부 코쿠라(小倉)시 지역의 임지로 부임하여 있다가 임기를 마치고 쿄(京)로 돌아가면서(글쓴이의 추측) 그간 함께 지낸 연인과 헤어지면서 화답시로 읊은 내용이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증답가(贈答歌)의 만요시비가 JR닛포혼센(日豊本線;일본 큐슈북부 코쿠라-오이타-노베오카-미야자키-카고시마를 잇는 JR큐슈 여객철도노선)이 가로지르는 지역인 큐슈지역 오이타켄 타케다시 시기바루(大分県 竹田市 城原)에 있다.
*** 만요슈 원문과는 다소 다른 미화된 한자를 인용하여 새겨놓은 만요시비인 듯 하다. 아유모도시 공원을 상징하는 세가와천 계곡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덩어리로 이루어진 암반(岩盤)이겠다. 오랜 역사의 시간동안 계곡에 흐르는 물은 암반위의 표토를 씻어내리고 암반의 표면마저 깍아내리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치 은어가 헤엄치며 오르내리는 것 같은 모습이 조각되어 그려진 천연의 암반화(岩盤畵)를 탄생시켰다. 유구한 역사를 자연속에 그대로 연출해내는 아유모도시공원의 세가와천 계곡의 일본 유일의 암반천을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하여 이곳에 이 만요시가를 인용한 것은 아닐까?
*** 그럼, 만요슈의 원문탐구를 위한 나의 정성을 실어본다. 만요슈 眷9-1778과 1779 두 수를 함께 탐구해 보았다.
-. 시기바루(城原)의 후지이무라지의 연인이 배웅하며 먼저 읊다 ~ "明日よりは 我れは恋むな 名欲山 岩踏み平し 君が越え去なば。(아스요리와 아래와 코히무나 나호리야마 이하후미나라시 키미가 코에이나바)"
>>> 현대어로 번역하면, "明日から私はあなたを恋しく思う事でしょう。名欲山の岩を踏み均して越えて行ってしまったら。(아시타카라 와타시와 아나타오 코이시쿠 오모우데쇼우. 나호리야마노 이와오 후미나라시테 코에테잇테시맛타라.)"
>>> 우리말로 번역하면, " 나호리산(현재 오이타켄 타케다시<竹田市> 나오이리쵸<直入町>에 있는 산으로 추정)의 바위고개를 <짚신이 다달아지도록> 밟고 다넘어갈 때쯤이면, 내일부터 저는 당신을 그리는 마음으로 가득해질 거예요."
-. 후지무라지가 사랑했던 연인과 헤어지며 연인의 배웅에 화답하여 읊다 ~ "命をし ま幸くもがも 名欲山 岩踏み平し またまたも 来む(이노치오시 마사키쿠모가모 나호리야마 이하후미나라시 마타마타모 쿠무)"
>>> 현대어로 번역하면, "どうか命が無事であってほしい。名欲山の岩を踏み均して又再びやって来ようから。(도우카 이노치가 부지데앗테호시이. 나호리야마노 이와오 후미나라시테 마타 후타타비 얏테코요우카라)"
>>> 우리말로 번역하면 " 나호리산의 바위고개를 <짚신이 다달아지도록> 밟고 또 밟으며 다시 또 올것이니, 어쨌튼간에 건강하게 무사히 잘 지내고 있구려."
어느 나라의 문학이나 시가를 통하여 의미가 함축된 시어들을 대하게 되면은 은근히 입가로 머무는 무엇인가를 느끼기 마련이다. 일본의 전통형식의 시가인 와카 또한 읽고 이해하고 보면, 그 안에서 은근한 묘미를 느끼고는 한다. 먹지않아도 배고픔을 모르는느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유구한 역사속에 탄생된 이 아유모도시 자연경관을 단순한 몇 글자의 시가를 통하여 다시금 음미하게 되니, 신비감속에 사무친 은근한 재미를 더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자, 이제는 또 달린다. 아유모도시 주차장을 출발한 우리 애마는 다음 목적지인 츠츠자키마을을 향하여 상쾌한 출발을 하였다.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주차장의 모습]
[주차장 한 켠에 마련된 자판기 코너]
[아유모도시 공원의 휴게공간에 세워진 자연목판 위에 세겨진 만요가(万葉歌) 한 수]
*** 命惜しませ久しかれ名欲(内院)山 岩ふみならし又またも来む(이노치 오시마세 히사시카레 나호리야마<우치야마 ; 산의 마을쪽을 지칭하는 듯 하다> 이와후미나라시 마타마타모 쿠무)
~ 万葉集(第九巻)藤井連の返歌 / 만요슈(제9권) 후지이무라지노 헨카 ~
[아유모도시 계곡의 구름다리] 아름다운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의 세가와천 계곡을 가로지르는 "세이류하시(淸流橋)"의 모습이 인간과 자연간 교감의 통로로 그 역할이 당당하다
[세가와천의 상류쪽 풍경]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한덩어리의 화강암 바닥이 사진과 같이 자연스런 멋진 형상을 만들어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세이류(淸流)교와 아유모도시 암반계곡의 모습] 올하나 걸치지않은 나신의 여체마냥 속살의 모든 것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 츠시마 자연만의 본색이랄까? 한 덩어리라기에는 믿을 수 없는 츠시마 세가와천의 실체가 여실히도 돋보인다. 암반수(岩盤水)의 의미를 깨닫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실체가 바로 이곳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드넓게 펼쳐진 너럭바위 위에서 흐릿한 포즈를 취하며 서있는 작은 두 피조물]
[계곡의 작은 보(洑)마냥 상당한 깊이의 물웅덩이] 물놀이를 하기에 충분한 공간이다. 물놀이 도중에 바위 위에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로프에 매듭을 지어 늘어뜨려 놓았다
[물놀이를 위해 늘여뜨려놓은 동아줄과 계곡의 청명한 악사인 물보라]
[골짜기 세류천의 모습]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실감이 난다. 골짜기의 짙은 삼림과 어우러져 끝없이 펼쳐진 암반위 파인 골의 모습이 세월의 유구함을 여실히 증명해 준다
[구름다리 입구 아래쪽의 바위밑에 만들어 놓은 재래식 한봉(韓蜂)통의 모습] 츠시마에서는 가는 곳마다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세이류하시(淸流橋)] 이 다리는 서기 1989년 3월에 준공되었고, 토쿄제강주식회사가 시공사로 되어 있었다
[츠츠자키(豆酘) 가는길] 아유모도시 자연공원을 출발한 우리는 츠츠자키마을의 아카고메진쟈와 반도의 등대를 보기 위하여 부지런한 움직임을 보였다. 물론, 열심히 움직이는 사람은 우치야마 고개 운전의 여신인 사이키 부인이지만, 서두르는 마음은 한결같기에 마치 3인 일체가 되는 듯이 움직이는 것이다. 엇그제 못다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서로의 궁금한 점을 알게 되었다. 현재, 사는 곳과 가족관계, 그리고 직업 등, 으례히 사람들이 우연히 만남 사이에서 상투적으로 주고받는 얘기들을 통하여 오늘 하루의 시간들에 지루함이 없기 위하여 달리는 차안의 분위기를 바꾸어 갔다. 그러던 중에 재밌는 것은 사이키 부인의 직업이었다. 35년 이상의 캐리어 우먼이었는 데, 일본의 전통의상인 키모노(着物) 영업만 그렇게 오랜 기간 해왔다고 하는 것이다. 주요 고객들이 사가켄을 중심으로 이곳 나가사키켄의 츠시마에도 각지에 많다고 한다. 그래서 매번 자가용 차량을 가지고 방문하게 되는 데, 그런 연유로 이곳 지리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대화속에서 우리는 이제 츠츠자키 인근의 어느 마을에 들어섰다. 사실, 이곳의 방문계획은 없었는 데, 츠시마의 주택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곳이라 하여 들러봤다. 물론, 사이키 부인의 덕택이기도 하다. 수토케(主籐家;집주인의 이름)라는 민가인 데, 100년 이상된 고옥으로 유일하게 츠시마의 전통가옥을 유지한채 어떠한 화재사고도 없이 오늘까지 전해지게 되어 1969년에 국가지정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연세가 지긋한 노파가 주거하고 있는 데, 이렇게 관광객이 찾아오면 번거롭지만 볼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좁은 골목길을 들어서니, 이즈하라 교육위원회에서 세운 커다란 문화재 설명 표시판이 가옥의 대문기둥 옆편으로 있다. 대문 오른 편에는 상당히 큼직한 우물이 있는 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방치된 모습으로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사이키 부인이 사랑채의 주인님을 찾으니 연세 지긋한 노파 한 분이 문을 열고 나오신다. 사정을 얘기하니 정중히 안내하는 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가옥 안에는 다소 어두운 분위기에 살림이 가득하다. 사이키 부인이 설명해주는 것을 들으며 둘러보니 천정의 대들보 등 목조물 구조가 우리의 건축양식과는 많이 다른 특이점을 볼 수 있었다. 마루의 가운 데에는 코타츠(炬燵; 일본의 거실용 전통난로) 시설이 되어 있고, 벽쪽에는 토코노마(床の間;마루보다 다소 높게 벽이 깊게 파인 형태의 공간으로 벽에는 족자를, 바닥에는 꽃이나 장식물을 놓는 곳, 즉 장식대와 같은 역할의 공간)가 있다. 마루 아래로는 토방이 있고, 부엌공간이 있다. 오랜 전에 일본 본토의 비와코(琵琶湖; 일본열도의 오사카, 쿄토지역 인근에 있는 일본에서 가장 큰 호수) 지역 인근에 있는 어느 지인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었는 데, 이러한 전통가옥 구조였다. 물론, 구조는 다소 다르지만, 마루 중간에 놓여있는 코타츠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있어서 잠시 떠올려 본다.
삼림이 우거진 산간지역이라 역시, 집의 재목도 튼튼하게 좋고 넓고 높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인사를 하고 밖을 다시 나온다. 표시판의 글을 읽어보며, 가옥의 모습과 함께 카메라에 담는다.
표시판의 글을 통하여 츠시마 전통가옥 문화를 이해해 보며, 다시 한 번 사이키 부인께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 수토케(主籐家;집주인의 이름) 주택
-.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건조물 쇼와(昭和)44년 3월 12일(서기1969년) 지정
이 건물의 특색은, 토방 이외에 부엌, 응접실, 침실 등으로 이루어진 이를테면 세 칸 구조로, 현관쪽에 폭 한 칸의 입구를 부가하고, 거기에 툇마루가 두 방향으로 붙어있다. 토방은 비교적 좁고, 부엌이 넓다. 골조는, 주위를 굵고 편평한 기둥을 세우고, 활모양으로 휘어진 대들보를 격자모양으로 짜맞추어 독특한 의장(意匠)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와같은 방의 배치방법은 일본 전국적으로도 드물다. 건축연대는, 재목의 형상과 가옥의 구조면에서 19세기 중기쯤으로 추정되며, 건축의 질과 의장이 뛰어나고, 보존상태도 좋은 데다가 구조도 전형적이라서, 츠시마 지역의 농가를 대표하는 주택으로써 귀중하다.
[대문 입구에 있는 우물] 지금은 사용치 않은 채 방치되어 있는 모습이다
[앞 마당의 유자나무] 탐스러운 유자열매를 뽐내듯이 자랑하며 서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격자모양으로 짜맞추어 지어진 대들보 천정의 모습] 사진이 선명치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응접실의 모습]
[토코노마(床の間)의 모습] 마루보다 다소 높고 벽쪽깊히 방형으로 움푹 들어간 공간의 벽에는 족자가 걸리고 바닥에는 화병이나 장식물이 놓인다. 거실의 장식대 역할을 한다
[수토씨 집의 입구 골목의 모습] 역시 돌담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
[츠츠자키(豆酘崎)] 수토씨의 츠시마 전통가옥 마을을 나와서 우리가 지나가게 되는 곳은 츠츠자키 마을이다. 면소재지 정도의 츠시마 남단의 가장 큰 마을인 듯, 다소 넓다는 느낌을 받으며, 곧바로 츠츠반도의 등대가 있는 곳으로 향한다. 마을에서 반도로 가는 길은 매우 가파른 산길로 도로도 협소하다. 구불구불한 좁은 도로의 산길을 어찌도 그렇게 잘 오르는지, 말 그대로 곡예운전이다. 베스트 드라이버가 따로 없다. F1 그랑프리에 출전해도 손색이 없다고 농담을 건네니, 일본의 미에켄(三重縣)에 있는 스즈카 서킷트(鈴鹿サーキット; 자동차 경주 및 자동차 스포츠 리조트)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우리나라는 창원에서 가끔 열리는 것을 방송채널로 보곤 하였는 데, 일본의 스즈카 서킷은 주변이 모터 스포츠 공원으로 조성이 되어있어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 데,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언젠가 가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우리 차는 곡예운전을 거듭하며 마침내 츠츠반도의 등대있는 곳에 다다른다.
시간이 없어 아래로 이어지는 길로는 내려가지 못하고 나무숲 가운데로 나있는 계단을 따라 등대 있는 곳으로 오른다. 약 30m 정도 올랐을까, 우뚝선 백색등대의 모습이 대견하다.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잔풀이 시든채로 주변을 덮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며 전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보려 애를 쓰지만, 여간 힘들지 않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사방으로 큰 나무숲이 가로막으니 탁 트인 바다는 볼 수가 없다. 등대있는 곳을 내려와서 츠츠자키공원 설명 표시판을 읽어보며 잠시 인근의 내해를 감상한다. 낚시터랑 산책로를 따라 돌아보는 여유도 가지는 것도 좋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함이 못내 안타깝다. 이곳에 관한 자료이야기로 대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할 것 같다.
*** 츠츠자키(豆酘崎) 이야기 산책
-. 이 츠츠자키는 츠시마의 서남단에 돌출한 반도로 조선해협과 츠시마해협의 경계선에 위치한 곶(岬)이다. 옛부터 해로의 이정표 역할을 해왔지만, 조류가 빠른 데다가 얕은 여울이 많기 때문에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해안은 절벽이 이어지고, 파도가 부딪히는 모습에 거친 바다의 현장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전망대로부터 보이는 츠츠반도의 경관은 진한 군청색의 바다색과 암초로 인하여 일어나는 흰 파도와의 대비가 아름다워 카메라의 촬영욕구를 부추긴다. 계절과 기후에 따라서 바다와 하늘의 색깔이 달라짐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이키(壱岐)섬과 큐슈북단 사가켄(佐賀県)의 요부코(呼子)도 볼 수 있다고 한다.
-. 오자키(尾崎)산 공원은 츠츠반도 끝의 산이름으로 낙타등과 같은 봉우리 정상에 츠츠자키 등대가 서있다. 이 주변이 오자키산 자연공원으로 정비되어 약 5,000그루의 흑송(黑松)이 무성하게 숲을 이루는 가운데, 약 972m의 산책로와 휴게소 및 전망대 등이 설치되어 있다. 바다낚시를 위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으며, 훌륭한 낙조경관지로도 유명하다. 사진은 오자키산 자연공원 안내판을 기대고 찍은 것이다.
-. 츠츠(豆酘)반도의 등대(현지 표지판의 글) : 츠시마 해협은 예로부터 일본과 중국*한국과의 사이를 오가는 선박의 중요한 해로로, 이 츠츠반도는 츠시마 난류를 타고 북상하는 선박에 있어서 항해에 좋은 이정표가 되었다. 곶(岬)의 선단에는 묘세(ミヨー瀬)라고 하는 얕은 여울이 있어, 강한 바람과 파도와 조류 때문에 배가 이 여울에 올라가 얹히는 등 해난사고가 잦았으므로 이 얕은 여울의 위치에 서기 1909년 9월 1일에 최초의 츠츠반도 등대가 설치되게 되었다.
현재의 등대는 이 오자키산의 옛 일본육군요새 포대유적지가 있었던 산의 정상에 서기 1987년 3월에 새로이 지어진 것으로, 그 빛은 약 50km 전방까지 미친다고 한다.
또, 여기에는 전파(電波)등대 라마크 비콘(ラマーク ビーコン;Ramark Beacon, 피뢰침 형태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어, 선박이 발신하는 레이다 신호에 반응하여 선박의 레이다에 등대의 위치가 표시되도록 하는 장치이다. 요즘에는 선박에 GPS장치가 탑재되도록 하고 있으므로 수년 내로 전파등대는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도 설치되어 있어 안개나 비*눈 등으로 시야가 나쁠 때에도 내해로 가는 선박의 항해를 돕는다.
* 시설의 개요
-. 위치 : 북위 34도 6분 3초, 동경 129도 10분 15초
-. 도색 및 구조 : 백색 탑형 콘크리트구조
-. 등급 및 등질(燈質) : 무등급 단섬백광(單閃白光) 매10초에 1섬광주기
-. 광도 : 97만 칸델라(cd)
-. 빛의 도달거리 : 26해리(약 48km)
-. 높이 : 지상~첨단부 19.4m, 수면~등화 106m
-. 관리사무소 : 제7관구 해상보안본부 츠시마해상보안부 전화 0920-52-0643
이 등대의 점등 이래로 수 많은 뱃사람의 목숨과 귀중한 재산을 알 수 없을만큼 구해왔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앞으로도 밤마다 아름다운 빛을 내해로 향하는 선박에 끊임없이 보내줄 것을 기원하는 바이다. ~~~ 사단법인 燈 光 會 ~~~
이 알림게시판은 모터보트(Motor Boat)경주 공익자금에 의한 재단법인 일본선박진흥회의 보조금으로 설치된 것이다.
[츠츠(豆酘)반도의 등대]
[츠츠반도 등대의 모습] 주변공간이 그다지 넓지않고 잡풀 등이 우거져 있어 촬영이 다소 어려웠다
[츠츠반도 등대에 오르는 계단길]
[오자키산 자연공원 산책로] 주유(周遊)길이가 약 1 km 정도 된다고 한다. 시간이 없어 등대에 다녀온 것에 만족해야 했다. 부서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낚시꾼들의 낭만적인 풍경을 함께 감상하며 산책하는 것도 또 하나의 즐거움인 데, 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츠츠자키 앞바다] 당일의 날씨는 다소 흐린 탓에 먼바다는 감상하지 못하였다
[아카고메(赤米)진쟈] 츠츠반도에서의 보람은 츠시마의 남단에 있는 등대자리에 내 발자국의 도장을 찍었다는 것이겠다. 산책로를 걸어보는 아쉬움을 뒤로한채 우리는 다시금 갔던 길을 돌아나와 츠츠자키마을로의 발길을 서둘렀다.
아카고메진쟈의 이정표는 있는 데, 도로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기 때문에 찾기가 어려웠다. 인근의 주유소에 물어서 가르쳐주는 길로 들어가니 산기슭에 여러 개의 토리이가 보이고 아카고메진쟈라는 안내판이 서있다. 진쟈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잠시 허리를 펴며 주변을 살펴보니 앞으로는 아카고메 경작지의 논이 펼쳐져 있고 진쟈 경내는 삼나무 등 오랜된 고목들로 이루어진 숲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입구는 매우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토리이 기둥옆에는 액막이용 소금의 그릇이 놓여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경내를 들어선다.
진쟈의 제1토리이(토리이가 여러개 있을 때 부르는 호칭. 정문에서 가까운 것부터 1번이다)를 지나 참배자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정화수 샘터인 테미즈야(手水屋)에서 잠시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경내 참배로를 따라 본 당으로 들어간다. 주변의 환경은 깨끗해 보이는 데, 건물 자체의 관리는 자못 허름해 보인다. 방문객이 적기도 해서 그렇겠지만, 요즘의 농촌인구가 너무도 적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경내를 에워싸고 있는 산의 이름은 타테라(龍良; 558.5m)산이다. 츠시마는 섬 전체가 거의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데, 이 산은 츠시마의 최남단에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수전농지가 형성되어 있어 아카고메가 재배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이 조금은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겠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 진쟈도 몇몇 보물들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되어 관리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본당 뒷 편에 있는 거목이 있어 둘러봤는 데, 녹나무(쿠스노키;楠木)였다. 자료의 내용에는 츠시마에서도 최대급으로 나무둘레가 7.09m, 높이가 30m로, 나무 형세도 매우 좋은 거목이라고 되어 있다. 또, 다른 수종의 거목들로 푸조나무(무쿠노키;椋の木)와 올리브나무(호루토노키;ホルトの木, 포르투칼산 나무의 뜻)가 함께 눈에 뜨인다.
이렇게 숲이 장관을 이루니 참배로를 걷는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삼림욕에 세례라도 받은 듯 경내를 나올 때는 마치 새사람된 기분으로 충만하다.
그런데, 이 진쟈에는 이상하게 다른 곳의 진쟈와는 다른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었는 데, 유난히 경내에 크고작은 토리이가 많이 세워져 있다는 것과, 진쟈건물 또한 많다는 것이다. 물론, 대도시의 유명한 진쟈마냥 진쟈의 본당이 규모있고 잘 관리된 그런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조잡스러움을 느낄 정도의 서낭당 분위기를 풍기는 작은 규모의 진쟈도 몇 군데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촌스럽고 조잡감이 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한 가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섬사람들의 뭔가 모르는 마음속 깊은 신불(信佛)사상이 일상에 배어있다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이 섬을 떠나 객지로 몰려드는 현상이 시작된지 이미 오래므로 이렇게 외진 곳의 진쟈의 모습이 이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사람사는 사회의 어느 곳이나 서로간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재삼 느끼게 되었다.
이 진쟈에 관한 여러 이야기와 경내의 보물들에 관한 내막들은 향토자료 등을 통하여 더 알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이제 이 진쟈앞에 펼쳐진 아카고메 보존농지를 둘러보고 다음의 목적지로 향하기 위하여 다시금 차에 오른다.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다. 다음에 우리가 가는 곳인 비죠즈카산장에서 식사를 하기로 하고 조심스레 진쟈입구를 빠져나온다. 처음 우리가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인데, 마을을 조금 벗어나면서 "아카고메 보존농지"라는 푯말이 한글표시와 함께 세워져 있다. 잠시 내려서 저 아래로 펼쳐진 농지를 바라보니, 츠시마라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하면 상당히 넓은 농지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시골에는 시제답이라는 것이 있는 데, 각 성씨의 종중마다 시제를 모시기 위하여 시제답을 가꾸는 것과 마찬가지겠다. 그러고 보면 이웃나라의 문화는 무언가 모르게 닮은 꼴임을 자연스레 알 수가 있다.
잠시도 시간을 지체할 틈이 없는지라 우리는 또 갈길을 재촉한다.
"아카고메 신이시여! 오늘 우리가 가는 길이 부디 평탄하게 하소서... ... ."라는 마음의 기도를 올리면서 말이다.
[아코고메진쟈 입구의 모습]
[타카미무수비(高御魂) 진쟈] 경내에 또 다른 진쟈중의 하나다. 근래에 세워진 것이란다
[타쿠즈타마진쟈(多久頭魂神社)의 여러가지 보물]
*** 타쿠즈타마진쟈 범종(梵鐘)<국가지정중요문화재>
-. 지정년도 : 쇼와(昭和)50년(서기1975년) 6월 12일
-. 소유자 : 타쿠즈타마진쟈
-. 이 범종은 옛날 츠츠오테라(豆酘御寺)의 소장으로 최초 주조는 칸코(寛弘) 5년(서기 1008년) 아비루수쿠네요시이에(阿比留宿弥良家)가 봉현(奉懸)한 것이다. 인표우(仁平)3년(서기 1153년)에 추가주조, 그 위에 코에이(康永)3년(서기 1344년)에 재차 추가주조하였다.
-. 츠츠오테라(豆酘御寺)는 타이슈진쟈(対州神社)誌(지금부터 약 300여년전에 당시의 츠시마한슈였던 소 요시자네<宗 義真;1639~1702, 츠시마 제2대 한슈<藩主>>가 섬내 전체의 진쟈를 조사케 하여 상세한 내용의 책자로 만들어 낸 것. 서기1686년에 완성하였다)를 참조할 것.
*** 타쿠즈타마진쟈 쇠북(金鼓;킨코)<국가지정중요문화재>
-. 지정년도 : 쇼와(昭和)50년(서기1975년) 6월 12일
-. 소유자 : 타쿠즈타마진쟈
-.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대형 쇠북으로 일본에서는 전례가 없다. 총지름 81cm, 면지름 78cm, 북의 어깨부분에 "禪源乙巳五月日晋陽府鑄成<?>福寺飯子一印"(선원 을사 5월 모일 진양부 주성 <?>복사 반자일인)"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제작년도는 고려국 고종 32년(서기 1245년)이라 되어 있다.
*** 타쿠즈타마진쟈 대장경(大藏經) (켄<県>지정문화재)
-. 지정년도 : 쇼와(昭和) 61년(서기1986년) 8월 29일
-. 소유자 : 타쿠즈타마진쟈
-. 우리나라 고려판대장경의 해인사(海印寺)판으로 츠츠(豆酘)관음사에서 전해오던 것이다. 대반야경(大般若經) 600권이 빠졌지만, 약 5,000권을 소장하고 있다.
*** 청자첩화 모란 당초문 대화병(靑磁貼花 牧丹 唐草文 大花甁) (켄<県>지정문화재)
-. 지정년도 : 헤이세이(平成) 18년(서기2006년) 3월 2일
-. 소유자 : 타쿠즈타마진쟈
-. 중국 최대의 청자도요지인 저장성(浙江省) 롱촨(龍泉)도요지에서 소성(燒成)된 대화병으로 목부분과 어깨부분에 양각의 첨착문양이 있다. 중국 원(元)나라 시대(10세기중반~13세기)의 작품이다. 높이 56.5cm.
*** 헤이세이(平成) 21년(서기2009년) 12월 츠시마시 교육위원회
[타카미무수비 진쟈와 타쿠즈타마 진쟈에 관한 니혼쇼키(日本書紀)의 기록]
*** 타카미무수비(高御魂) 진쟈(엔기시키 메이신타이샤<延喜式 名神大社>), 타쿠즈타마(多久頭魂) 진쟈(시키나이샤 메이신타이샤<式內社 名神大社>)
-. "니혼쇼키(日本書紀;서기720년에 완성한 일본 나라시대에 성립한 일본 역사서로 일본 현존의 가장 오래된 정사<政史>이다)"에 츠시마 시모아가타(下県) 아타이(直)가 모시는 타카미무스비(高皇産靈)신에게 신전(神田)을 헌상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신은 일본신화의 유명한 신으로 본 진쟈의 기원은 유구한 고대로부터 시작한다. 타쿠즈타마진쟈는 죠와(承和)4년(서기 834년) 타카미무수비 진쟈 등과 함께 종5위하(從五位下)를 하사받아 관사(官社)가 되었다. 중세에 신불습합(神佛習合)에 의하여 "츠츠오테라(豆酘御寺)"라고 칭하고, 메이지(明治)기에 현 진쟈이름으로 되돌렸지만, 사전(社殿)은 옛날 관음당을 사용하고 있다.
~~~ 헤이세이(平成) 21년(서기 2009년) 4월, 츠시마시 교육위원회 ~~~
[타쿠츠다마진쟈(多久頭魂神社) 범종]
*** 국가지정중요문화재 조각 쇼와(昭和) 50년<서기1975년>6월20일 지정
신불습합(神仏習合;토착신앙과 불교를 절충하여 하나의 신앙체계로 재구성하는 것) 시대의 유산으로 총높이 98.5cm, 화염보주(火焰寶珠)의 용머리에, 종의 몸체는 상대무의(上帶無衣), 하대(下帶)는 당초문유(唐草文乳;중국에서 전해진 덩굴 & 유방 문양)를 4단 4열로 배치하여, 연못(池) 사이에 금석문을 새겼다. 금석문의 내용은 칸코(寛弘)5년<서기 1008년> 최초주조(初鑄). 인표(仁平) 3년<서기 1153년> 추가주조(改鑄). 그 위에 코에이(康永) 3년<서기 1344년> 의 재차 추가주조(改鑄)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또 츠시마의 옛 민족 아비루(阿比留;소(宗)씨가 츠시마를 지배하기 전의 지배씨족으로 현재 츠시마에서 가장 많은 성씨이다. 이 성씨의 발상지는 치바켄 소데가우라<袖ヶ浦>시 부근이고, 서기 813년에 츠시마에 들어와 주재관인이 된 이후로 최대세력이 되었다고 한다)씨의 이름이 보이는 등 사료로써 귀중한 금석문이다. 또 용머리의 조형에 히젠(肥前;일본 큐슈의 나가사키켄과 사가켄 일부지역의 옛 지방이름)종의 특색이 지적된다.
~ 이즈하라쵸 교육위원회~
[타쿠츠다마진쟈(多久頭魂神社) 범종과 종루(鐘樓)]
[경내의 게시판] 가정마다 신을 모시는 감실(龕室)을 차려두고, 신에게 항상 마음으로 감사하자는 내용의 포스터이다
[진쟈의 제1토리이를 지나 참배자의 몸을 정결하게 하는 정화수 샘터인 테미즈야(手水屋)의 모습] 진쟈 참배자가 보통 손을 간단히 씻고 입을 헹구며 몸을 정결히 하는 곳이다. 샘터의 수도꼭지에는 정화수가 항상 나오고 있으며, 옆에는 히샤쿠(柄杓)라고 하는 자그마한 국자모양의 물뜨게가 준비되어 있는데,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가볍게 손을 씻고, 씻은 손의 손바닥에 히샤쿠로 받은 물을 따라서 입속을 헹군다. 히샤쿠를 직접 입에 대고 헹구는 것은 금물이고 반드시 손바닥에 물을 따라서 입을 헹구도록 한다. 그 다음에 본전에 다가가서 "이치유 니레이 니하쿠슈 이치유(一揖二礼二拍手一揖;한 번의 준비인사, 두 번의 90도 인사례, 두 번의 박수례, 한 번의 준비인사)의 방법으로 참배례를 행한다. 테미즈야의 천정부 현판에는, 본 진쟈를 위하여 특별이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다.
[본전에 들어가는 입구의 모습]
[토리이(鳥居)] 여러개의 토리이(鳥居;신성지역과 외부와의 경계를 표시하고 바다신, 산신, 곡물신 등, 제사지낼 신을 정중히 모시기 위한 신의 이정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가 있는 데, 맨 바깥쪽부터 "제1,2,3,... 토리이"라고 호칭한다
[타쿠즈타마진쟈의 개축기념비와 옛날 석등의 모습]
[본 진쟈내의 또다른 작은 진쟈가 마치 가정집 감실처럼 많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진쟈내의 본전(本殿)으로 들어가는 참배로] 참배로의 왼쪽과 본전 뒷편 안쪽 등은 숲으로 우거졌는 데, 녹나무(쿠스노키;楠木)*올리브나무*푸조나무 등 거목들이 눈에 쉽게 뜨인다. 특히, 사진에 보이는 녹나무는 본전의 뒷편 마당에 근접해 있는 데, 나무밑둘레가 7.09m, 높이가 30m인 츠시마에서도 최대급으로 나무형태가 꽤 좋은 거목이다
[타쿠즈타마진쟈의 역사를 증명해 주는 고목들]
[본 진쟈의 연중제기(年中祭杞)에 관하여 적혀있는 본전 내 입구현판] 크게 "다이사이(大祭), 츄사이(中祭), 쇼사이(小祭), 오하라이(大祓い;큰액막이 제사)"로 구분하여 각각의 제사이름과 제사일자를 기록해 두었다
[귤나무 이야기] 고대인은 토키지쿠노 카구노미(非時<ときじく>の香果<かぐのみ>; 때아닌 과일향)라고 하여 진귀하고 귀중하게 맛볼 수 있었던 과일이다.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사람이 수이닌(垂仁;제22대 천황)천왕의 명을 받아 중국에 건너가 이 과일를 구하여 그 다음 해에 돌아왔는 데, 천황은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 천황의 묘소에 이 과일을 공양하고 엎드려 곡하며 자신도 죽었다고 하는 옛날 이야기다.
~~~ 이즈하라쵸의 자연과 문화를 지키는 모임에서 ~~~
[본전 앞마당에 심어져 있는 귤나무와 그 유래가 적힌 판목]
[경내의 본전입구에 겹겹히 서있는 토리이(鳥居)와 그 풍경]
[ 타카미무수비(高御魂) 진쟈] 타쿠즈타마진쟈 경내에 함께 있다. 쇼와(昭和)61년(서기1986년)11월 길일에 세웠다고 되어 있다
[아카고메신덴(赤米神田 ; 적미재배 보존농지)]
아카고메(赤米, 혹은 아카마이)는 고대미(古代米)의 일종으로 벼의 재배품종중 주로 벼껍질 부분에 탄닌(Tannin ; 식물에서 유래하고, 단백질, 알카로이드, 금속이온과 반응하여 강하게 결합하여 난용성<難溶性> 염분을 형성하는 수용성 화합물의 총칭으로 식물계에 보편적으로 존재)계의 빨간색소를 포함하는 품종을 가리킨다. 일본에서는 고대부터 재배되어 왔지만, 품질면에서 백미(白米)에 열등한 품종으로 알려지면서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거의 재배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일본의 4개 지역(카고시마켄의 타네가시마<種子島>, 시마네켄의 오키시마<隠岐島>, 오카야마켄의 소쟈시신본<総社市新本>, 나가사키켄의 츠시마<対馬>)에서만 일부지역을 보존지로 정하여 재배해오고 있는 데, 츠시마의 여기가 바로 그 곳이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건강붐이 고조되면서 각지에서 농작면적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훙메이(紅米)라고 불린다.
이 신전(神田)은 일본의 진쟈 등에서의 운영경비에 충당하기 위한 영전(領田)의 것을 말하는 데, 서기 646년 이전부터 존재하였다고 한다. 또 7세기 후반에 율령제가 정비되어, 전지(田地)가 반전제(班田制) 등으로 정비되면서도 이 신전은 사전(寺田)과 함께 그대로 그 정비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이 신전이나 사전이 진쟈나 사찰의 소유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신불(神佛)에 귀속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아울러는 매매도 금지되었다. 더욱이는, 불수조전(不輸租田)이라 하여 조세 또한 면하였는 데, 9~10세기경에 율령제가 붕괴되면서도 이 면세권은 유지되었다. 그 후에 11~13세기 경에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가 성립하면서, 역시 면세전(免稅田)을 의미하는 신전(神田)으로 위치지워진다.
지금 이곳의 아카고메신덴(赤米神田)도 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현재의 일본 전국 각지의 지명과 성씨가 "신덴(神田, 혹은 칸다)"이라 하여 많이 존재하는 데, 이것 역시 위의 역사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여기에서는 이 아카고메신덴이 보존농지로 유지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하겠다.
츠시마에서는 옛부터 섬면적의 수전(水田)가능 면적이 1%에도 미치지못할 정도였으므로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또한, 설령 이 정도나마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한다고 해도 겨우 제사지내기에도 버거웠는 데, 이것은 츠시마민들을 매우 궁핍하게 하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되겠다. 이웃섬의 이키섬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현상이니 생각해보면 재밌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옛부터 이키섬 사람들과 츠시마 사람들 사이에는 항상 갈등관계가 존재하였다고 하였는 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츠시마민은 먹고살 양식이 없으니 빈번하게 도적으로 둔갑하여 이키섬이나 우리나라 부산*가덕도 등을 드나들며 노략질 행위를 할 수 밖에 없었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오직하면,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행위들을 막고 남해안 연안의 우리 백성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아예 연간 일정량의 양곡을 보내주기로 하였겠는가. 또한, 그 당시에는 조선국왕이 경상도의 속령으로 간주하여 츠시마도주에게 조선관직을 주어 다스리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시바료타로(司馬遼太郎)씨는 그의 글(街道をゆく; 길을 가다 시리즈) 에서 이러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하기도 하였는 데, "츠시마는 한반도 땅에 지척이듯 그렇게 가까우면서도 역사적으로 한 번도 한반도의 고대국가 등 중세이후의 국가에서도 자신의 영토로 삼은 적이 없는 데(물론, 시바료타로씨가 조선시대의 국왕이 경상도속령으로 다스린 적이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영토로 삼았던 것은 아니다는 의미다), 제주도는 그와 반대로 한반도의 육지로부터 츠시마에 비하면 훨씬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고려시대 이전부터 시대마다 자국의 영토로 삼아 관리를 파견하고 조세를 거두는 등 정치행위를 해왔다, 이 얼마나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말이다.
이러한 유머스런 글의 내용을 읽으면서는 누구라도 잠시나마 생각의 시간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 단원을 읽으며, 시바료타로씨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은근한 생각을 해봤다. "이 쯤에서는 우리나라 독도(獨島)에 대한 얘기도 잠시 언급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 뉘앙스만 띄워놓고 왜 그냥 넘어가시지?"라면서,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고의 철학(이 분의 작품세계에 들어가 보면, 또 인물사전에 소개된 글을 읽어보게 되면은, 이 분의 그러한 성품과 사고방식이 일상에 배어있음을 확연히 엿볼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러한 사람이지 않을까? 그 분의 그러한 사상의 세계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은...) 이 배어있는 분이, 특별히 독도가 일본땅이라는 증거사료도 없는 가운데 일본의 우익정치단체들처럼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발언이라도 한다면, 스스로의 철학에 일대에 있을 수 없는 우(愚)를 범하는 꼴이 되니까, 차라리 침묵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어보자... ... (뭐~ 그러한 뉘앙스랄 수 있을까?)"라는 재밌는 생각말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의 시대별 국가들은 츠시마를 별로 가치있는 땅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다스리기에 번거로운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함께 해봤다.
각설하면서, 이제 아카고메신덴 이야기에 대하여 마무리를 지어볼까.
츠시마의 남단 츠츠자키 타테라(龍良山;558.5m)산 기슭에 타쿠즈타마진쟈의 신전(神田)으로 그 역사성을 이어온 것과, 또 츠시마를 대표하여 이 아카고메가 갖는 역사적 의미가 매우 깊은 것에서, 지금 이곳에 유적지 차원의 아카고메경작 보존농지로 지정해 놓은 것이 이 아카고메신덴이다. 이키섬이나 일반 육지의 평야지에 견주면 보잘것 없는 매우 초라한 농지이지만, 츠시마 섬에서는 이러한 옥토가 그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녀왔을까 하는 것이다.
[아카고메신덴(赤米神田)이란 푯말과 그 논을 가리키는 화살표, 그리고 한글표기]
[츠츠지역에 전하고 있는 민속행사]
*** 토우케카미고토(頭受け神事)와 아카고메(赤米;적미) <<국가선택 무형민속문화재>>
-. 츠츠의 아카고메는 벼의 원생종(原生種)이라 일컬어지는 아카고메(赤米)가 엄격한 계율하에 신덴(神田;진쟈의 제사경비용 논)에서 재배되어, 이 마을 민속행사의 상징으로 현재도 전승되고 있다.
-. 아카고메 행사란, 아카고메를 제사하여 재배하는 행사의 것으로, 토나카마(頭仲間;우두머리패)라고 불리는 집단에 의하여 음력 1월 2일부터 음력 12월 말에 이르기까지 1년간에 걸쳐서 행하여진다. 일련의 카미고토(神事;신에 관한 일)를 담당하는 역할로서, 토(頭;우두머리)라 칭하는 신의 역할자에 의하여 행하여진다. 이 토(頭)는 1년마다 교체하도록 정해져 있고, 그 교체식을 "토우케(頭受け)"라고 한다. 이들 행사중에서도 중심이 되는 행사는, 음력 1월 10일 심야로부터 그 다음날 아침까지에 걸쳐서 행해지는 토우케이다. 이 아카고메를 수확하면 새가마니에 담아서 본 행사장의 천정에 메다는 "오츠리마시(お吊り坐し)"라는 행사를 하고, 이듬해의 토우케(頭受け)까지 모신다. 이 다음에도, 아카고메를 우지가미(氏神;씨족신 혹은 고장의 수호신)에게 공양하는 하츠호고메(初穂米;그해 최초수확한 벼이삭), 아카고메로 만든 약주(若酒)를 고장수호신에게 공양하는 토빙슈(斗瓶酒;말병들이술), 성주(成酒;합성주)를 공양하는 히노사케(日の酒), 아카고메로 절구형의 떡을 찧는 모치츠키(餅つき;떡찧기), 씨족신*고장수호신 등에게 제사하는 하츠마이리(初詣り;정월초의 성묘) 등의 행사가 행해진다.
-. 츠츠의 민속행사 : 음력1월 10일 심야~익일아침(토우케/頭受け), 음력 1월 12일(밋카이와이/三日祝い), 양력 6월 10일(타우에/田植え<모내기>), 음력 10월17일(오츠리마시/お吊り坐し), 음력 10월18일(하츠호고메/初穂米), 음력 12월3일(토빙슈/ 斗瓶酒), 음력 12월 19일(히노사케/日の酒), 음력 12월 28일<12월이 30일까지일 때는 29일>(모치츠키/餅つき), 음력 1월2일(하츠마이리/ 初詣り), 음력 1월 5일(시오아비/潮浴び<해수목욕>, 이에하라이/家祓い<가내부정씻기>)
[비죠즈카(美女塚)에서 미인을 만나다] 츠츠자키마을의 아카고메신덴(赤米神田)을 관망하고서 여기까지 오면서는 내내 아카고메로 지은 밥생각만 하였다. 물론, 미질은 개량미들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이야기 속에 파뭍혀 현지산 아카고메 밥을 현지에서 직접 먹어보는 것도 기분상 별미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곳에 보다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여 왕래하는 인구가 많아진다면, 상업적으로 그러한 식도락가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이런저런 생각속에 금새 도착한 곳이 미녀의 전설이 전하는 비죠즈카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예전에 TV방송국에서 "전설의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오랜 기간동안 방영되었던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전설적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들어가는 입구부터가 매우 이색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어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숙소로 운영되는 산장도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홈페이지도 개설되어 운영되고 있는 데, 이 곳의 전설적 이야기들에 대하여 상세히 소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데,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알 수 있어 좋았다.
밖의 정원을 돌아보는 동안 돋보이는 것은 역시 츠시마산 자연석에 의한 조경예술이다. 찻집과 산장의 사이에는 야외바베큐 시설도 되어있음을 볼 수 있는 데, 이러한 아름다운 정원의 분위기 속에서 바베큐를 해먹는 재미도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흠결 하나 없이 마치 판유리처럼 생긴 넓고 길다란 석판이 중앙에 솥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놓여 있는 데,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분위기가 맛을 돋게 하는 식이다. 생각같아선 오늘밤 하루를 보내며 그러한 낭만의 파티를 열고싶은 생각이 마음속 그득하다. 하지만, 어쩌랴! 보는 것으로 안분지족해야지. 하여튼, 보는 것은 이것으로 배를 채웠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 먹는 것으로 배를 채워야겠다. 서둘러 찻집 안으로 들어간다. 형님과 사이키부인은 이미 식탁앞에 물컵을 앞에 두고 앉아있다. 내부도 또한 넓고 쾌적한 분위기에 벽에는 볼거리가 너줄하다. 넓은 공간에 손님은 달랑 우리뿐이다.
의자에 앉자마자 주문부터 서두른다. 사이키부인은 이미 이곳이 당골이란다.
주인아저씨나 아주머니와는 아주 다정하게 대화를 나눈다. 부드러운 대화속에서 친절한 설명과 함께 주문을 한다. 식단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데, 맛있는 메뉴를 고르며 느끼는 감각은 더욱 재밌다. 추천 메뉴를 골랐는 데, 알고보니 츠시마의 특산이란다. 메뉴이름은 "비죠즈카 지도리소바셋트(美女塚 地鳥蕎麦SET;비죠즈카 토종닭 메밀국수 모듬)", 일단은 주문을 한다.
그리고,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사방의 벽공간에 붙어있는 내용들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정성드려 담아봤다. 바로 이러한 점이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속에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작은 글씨 하나라도 모조리 카메라에 담았다. 그만큼, 진귀할만큼의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주문한 음식이 나와 테이블 앞에 자리하니 냄새만 맡아도 구수함이 입맛을 당긴다. 한입감 쭈르르 입속에 넣어보니 그야말로 특미다. 시골에서 토종닭을 잡을 때에 닭털을 다 뽑고서 잔털을 없애기 위하여 불에 살짝 그을리는 데, 그 때에 닭살의 외피가 살짝 익혀지게 된다. 그 때에 나는 냄새의 고소함은 은근함을 더해주는 데, 지금 바로 그 냄새를 음미하는 것이다. 토종닭 고기살의 은근한 고소함과 졸깃함이 소바에 궁합을 이루어 만들어낸 초별미가 나의 식욕을 이토록 왕성하게 만든다. 애주가 형님이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 이상하리라, 니혼슈(일본청주)를 주문하니 금방 가져다 준다. 한 잔씩 기울이니 금상첨화다. 사실, 이렇게 맛있는 소바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츠시마 특산이니, 츠시마에 처음온 나로서는 당연한 것 아닐까.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대화를 하다보니 왠 시커먼 남자손님 세 명이 들어온다. 캐주얼 차림에 예술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사진작가쯤 되지않을까 생각했는 데, 마침 사이키부인께서 말을 건넨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사진작가였다. 토쿄에서 온 손님이란다.
어쨌거나, 부인의 덕택으로 오늘 여행은 매우 의미있고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 같다. 맛있는 츠시마 특산 지도리소바셋트에 배는 벌써 포만해졌고, 이제 다시 서서히 움직일 때다. 카운터에 음식값을 계산하고 밖으로 나오니, 시간은 이미 오후 1시를 넘어섰다. 다시 차에 오르니 운전의 여신 사이키부인은 또다시 힘차게 페달을 밟는다. 그러면서, 이 산장에 얽힌 몇가지 이야기를 해준다.
이 산장마을이 있게 한 주인공은 이 찻집과 산장을 운영하는 바깥주인이란다. 예전 직장을 정년으로 퇴직하면서 받은 퇴직금을 고스란히 투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일구어 놓았다고 한다. 참으로,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임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이 비죠츠카에서의 추억은 오래오래 남으리라, 생각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의 추억쌓기는 뒤로 물리며 다음에 이어질 츠시마이야기를 위하여 이곳의 미녀혼들에 손을 흔든다.
츠시마노 비죠사마, 마타 아우네!(対馬の美女様、又会うね!/츠시마의 미녀님들이여, 또 만나요!) 라는 인사말을 남기면서... ... .
[비죠즈카(美女塚)산장의 입구] 미녀의 모습을 담아낸 석탑의 상징물과 환영문구
*** 어서오세요(いらっしゃいませ;이랏샤이마세)
-. 숙박(혹은, 방의 시간임대)은 비죠즈카 산장에서
-. 식사는 (산해진미의 향토요리) 비죠즈카 찻집에서
[비죠즈카 찻집의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
[비죠즈카(美女塚)산장 안내를 위한 코너]
*** 비죠즈카산장에서 숙박하실 손님여러분께!
-. 체크인(Check-in)은 찻집(식당)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 오늘은 멀리서 오셔서 잊지않고 이 곳을 찾아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 미녀와 아카고메(赤米)의 고장 // 찻집에서 즐기는 맛 // 산해진미(山海珍味)의 정성
// 주무시는 것은 산장에서 // 심신의 편안한 휴식을
[비죠즈카 정원의 석공예술] 츠시마는 바위산의 결정체라 할 수 있을만큼 온 섬에 돌이 많다. 그래서일까 아름다운 정원석도 참 많아 이렇게 분위기 있는 정원을 꾸며 놓았다
[비죠즈카 찻집의 마당 정면에서 담은 사진]
*** 광고 깃발에는 "츠시마일품 타이슈(対州; 츠시마의 옛이름)소바(일본식 국수) 먹을 수 있는 곳"이라 적혀있다
[야외 바베큐회식 장소] 잘다듬은 판석(板石)테이블과 바베큐 구이솥이 중앙에 놓여있고 테이블 양쪽으로 통나무 벤치가 나란히 놓여있다. 사진 뒷편의 건물이 산장시설이다.
-. 위쪽의 목판글씨는 "사뿐사뿐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곳"(?)이란 뜻이고,
-. 아래쪽 내용은 "우리 가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시설은 바베큐 코너입니다. ~예약필요~
[수이킨쿠츠(水琴窟)의 단면도와 설명]
*** 이 수이킨쿠츠는 정원의 세숫물 그릇의 지하에 좌측의 단면도와 같이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물방울을 떨어뜨려 물소리가 동굴의 벽면에 의하여 반향케 하여, 그 소리가 마침내 땅위로 젖어오는 희미한 울림소리로 변하고, 이 때의 희미한 울림소리를 조용하게 음미하고자 한 것이다
[정원의 수이킨쿠츠의 모습] 은근히 재밋는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비죠즈카 찻집 겸 식당의 내부모습] 독특한 실내장식과 쾌적한 분위기, 그리고 조잡감이 드는 듯 하면서도 주제가 있어보이는 매우 인상적인 곳이었다. 세 손가락으로 포즈취하는 저 오바챤(아줌마)은 누구신가요? "나무아비타불(南無阿彌他佛)"이란 족자와 "생선그림액자"가 돋보인다
[비죠즈카(美女塚)의 유래를 엿볼 수 있는 사진들]
*** 비죠즈카의 옛날 이야기 : 아주 옛날 이야기이다. 마을의 아비루(阿比留)라는 사람의 집에, 츠루(鶴)라고 하는, 매우 아름답고, 그리고 영리하고 효성이 강한 딸이 있었다. 그러한 평판이 이 마을 저 마을로 전해지면서, 마침내는 저 멀리 도읍지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한 이유로 당시의 섬관리에게 명하여 츠루를 궁중의 궁녀로 불러오도록 분부하게 되었다.
츠루의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뜨고, 어머니를 남겨두고 집을 떠난다는 것 등은 생각지도 못할 일이고, 무엇보다도 태어나고 성장해온 이 마을을, 츠루는 더할나위 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어떻게라도 거절하도록 어머니에게 부탁하였지만, 어머니는 "불만스러운 것은 알고는 있으나, 거절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는 일... . 천자(天子)님의 명령과도 같으므로... . 마음의 고통은 나역시도 마찬가지야... , 어떻게 참고서 가줘야겠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츠루의 입장에서는, 이만큼 슬픈일은 없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도 없이, 눈물로 지새우는 나날이었다.
그러한 츠루의 소문은, 야마와로와 카오라에게도 전해지게 되었다.
모두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츠루씨는 특별하였다. 아주 신세를 많이 졌다. 무엇인가 보답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지 못할까?"
야마와로인 겐이 말한다.
"츠루씨는, 폭풍우가 계속되고, 산에 먹을 것이 동이 났을 때, 살짝이 산입구의 사당까지 몇 번이나 먹을 것을 가져다놓고 그랬었지."
카오라인 칸타도 계속해서,
"응... , 비가 오지않아 냇가의 물이 마르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게 되었을 때에, 우리들을 위해서 큰 냇가의 바위 위에 주먹밥을 많이 만들어 두곤 하였지. 마을도 매우 어려웠을 텐데, 츠루씨만은 정말로 마음 착한 사람이었지... ."
모두가 여러가지로 궁리하고 있던 중에, 마침내 츠루가 마을을 떠날 날이 오고 말았다.
애오라지,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마을 어귀까지 동행할 수 밖에 없으니... ... 라고 하여, 대표로서, 겐과 칸타가 함께 가게 되었다.
이미 대문앞에는 가마꾼이 가마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어머니와,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님께 석별의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마침내 츠루는, 눈물을 흘리면서 배웅하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겐과 칸타는 츠루를 두사람 사이에 끼고 양겨드랑이 옆으로 달라붙었다. 그들의 모습은 동행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 드디어 마을 어귀까지 도착할 쯤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츠루에가 말하였다... .
"츠루씨! 우리들은 여기까지밖에 배웅하지 못하지만, 착하고 착한 츠루씨의 일은, 모두가 결코 잊을 수 없어요. 모쪼록 무사히 잘 가세요, 그리고 언젠가 또 우리들이 있는 마을로 돌아와 주세요! ... "라고.
둘다, 그리고 모두의 생각은 확실하게 츠루의 가슴속에 사무쳤다... .
겐과 칸타는 가슴아픈 심정으로 동료들이 있는 산과 냇가로 울면서 돌아갔다.
잠시후에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길에 접어들었을 때에, 츠루는 동행자에게 말하였다.
"부탁이 있습니다. 우리 마을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보게 해주세요... "
가마는 멈추고, 츠루는 태어나고 자란 마을, 그리고 산과 냇가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는 데, 돌연히, "나같은 괴롭고 불행한 생각은, 이제부터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하도록 하지않고 싶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미인이 태어나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외침과 동시에 혀를 깨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슬픔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고, 마을사람, 그리고 야마와로, 카오라 등도 깊은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사람들도, 마을생각과 부모생각으로 효심강한 츠루를 심히 슬퍼하고, "츠루오, 오마에!(鶴王, 御前!;츠루왕, 당신!)"이라고 부르며, 비죠즈카(美女塚;미녀무덤)를 만들고, 애도하였다.
이 때로부터, 마을의 딸아이들은, 얼굴이 노출되지 않도록 수건으로 가리고, 조각천을 서로 잇대어 기워만든 초라한 의복을 몸에 두르도록 된 것이다.
이것이, 이 지역의 독특한 복장인 "하기토진(はぎとうじん;조각천을 덧대어 기워만든 농부복장)"의 기원이 되고, 또 언어사용도 "니고시(濁し;애매한 말투)"가 들어간, "츠츠방언(豆酘弁)"이 생겼다고 일컬어진다.
그러면서 츠루의 애절한 슬픔과는 달리, 현재도 여전히 미녀의 고장으로써 알려져 있지만, "츠츠(豆酘)미인"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츠루오, 오마에!(츠루왕, 당신!)"의 비죠즈카전설이 그 계기라고 전해지고 있다.
[히라마사(平政;부시리)라는 어종의 그림] 길이 159 cm, 높이 35.5cm 크기의 히라마사라는 어종의 그림.
*** 히라마사(平政;부시리) 이야기
-. 부르는 다른 이름(방언) : 여러 지역에서 "히라소 혹은 히라스"라 부르기도 하고, 미에켄에서는 "히라 혹은 마사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여기서 "마사기(柾目の魚)"란 이름은 바른 나뭇결(柾目;마사메)처럼 곧바로 뻗은 몸통의 세로줄무늬에서 비롯된 듯 하다. 또 치어는 카고시마켄 미나미사츠마시에서 "히라스코(平す子)라 부른다고 한다.
-. 생식지 : 일본 토호쿠(東北)지역 이남에서 분포하고 있다.
-. 특징 : 방어(鰤, 브리)와 매우 닮아서 전문가라도 잘못보기 쉽다고 한다. 방어와 구분하는 방법은, 몸체가 넓고, 세로줄무늬의 노란색깔이 선명하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오히려 쉽게 구분할 수 있다고 한다.
-. 출어적기 : 여름철 생선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제맛의 측면에서는 가을이 오히려 적기라 볼 수 있다고 한다. 가을에 아오모리켄과 산리쿠(三陸)지방에서 잡힌 것에는 놀랄 정도로 지방질이 많아 가격도 비싸다고 한다. 최근에는 양식어도 나온다고 한다.
-. 낛시 : 일본 칸토(関東)지역에서는 낛시 대상어로서 매우 인기가 좋은 어종이라고 한다. 특히, 이즈(伊豆) 7島 지역.
-. 산란기는 여름부터 가을이라고 하는 것에서, 여름이 적기라고 말하지만, 출어적기도 산란기와 겹친다. 사시미(회)는 몸통 자체의 좋은 맛을 즐길 수 있다. 지방이 적은 탓으로 구이나 찜보다는 후라이나 뫼니에르(프랑스요리로 생선에 밀가루나 버터를 발라 요리한 것)가 맛있다고 한다.
[그린투어리즘(Green Tourism) 첫경험]
-. 츠시마의 자연과 섬사람들의 따스함에 지금도 마음이 윤택합니다. 기대이상으로 120%의 손님대접에 감사한 마음뿐.
-. 진주속 알들이 표고버섯사냥 소바(蕎麦;일본식 메밀국수) 치는 소리, 즉흥낚시꾼 타이슈(対州馬;츠시마말)말과의 속삭임... ... .
[장수(長壽)의 비결] 사람사는 세상은 산고개 많은 여로(旅路)같은 것
* 還暦(60세) - 사람수명 60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당치도 않다고 물리쳐라
* 古希(70세) - 사람수명 70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아직 너무 이르다고 뿌리쳐라
* 喜寿(77세) - 사람수명 77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노년의 즐거움이 이제부터이니 서둘지말라고 하라
* 傘寿(80세) - 사람수명 80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이것저것 아직까지는 도움이 된다고 하라
* 米寿(88세) - 사람수명 88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아직은 조금 더 밥을 먹어야겠다고 하라
* 卒寿(90세) - 사람수명 90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나이에는 졸업이 없다고 하라
* 白寿(99세) - 사람수명 99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백세의 축하연이 끝나거든 하라고 해라
* 茶寿(108세)- 사람수명 108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아직은 차마심이 부족하다고 하여라
* 皇寿(111세)- 사람수명 111에 죽음이 닥쳐온다면, 이제는 서서히 양보해볼까 일본제일을
~~~ 氣(気を長く, 호흡을 길게), 心(心は円く, 마음은 둥글게), 腹(腹立てず, 화를 내지않고), 口(口慎めば, 입을 삼가하면), 命(命長かれ, 오래살게 되리니) ~~~
[비죠즈카에서의 점심메뉴] 비죠즈카 지도리소바셋트(美女塚 地鳥蕎麦SET;비죠즈카 토종닭 메밀국수 모듬)가 토종닭 고기살의 은근한 고소함과 졸깃함이 소바에 궁합을 이루어 아주 별미였다
[비죠즈카 미녀마네킹과의 포즈타임] 실물마네킹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그네는 아쉬움만 남는구려!
[비죠즈카 미녀마네킹의 아름다운 자태] "맛있는 나무통 생맥주를 제공중"이라 쓰여있는 팻말을 손에 들고 있는 그녀의 옛스런 모습이 아름답다
[야마와로(山童;일본 큐슈를 비롯한 서일본지방에 전하는 어린애모양의 동물로 물속에 산다는 상상의 동물인 캇파<河童>가 변한 것으로 산간부에 산다는 미확인 요괴)가 사는 숲] 츠시마 남부의 츠츠반도 주변에서는 옛날부터, 산에는 "야마와로(山童)"가, 냇가에는 "카오라(かおーら;어린아이를 닮은 미확인 전설의 동물)가, 그리고 바다에는 "료게(霊化;츠츠해역 내해에서 일어나는 조난사고에 따른 위험에 처한 어선과 어부들을 지켜주는 착한 역의 바다요괴)이 산다고 생각되어,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무섭기도, 또 어떤 의미에서는 친숙한 것이었다. 특히, 성지인 "타테라(龍良)산"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기 때문에, "야마와로"는 특별히 그 역할이 큰 존재였다.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과 더불어, 섬내에서도 다른 지역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야마와로", "카오라", "료게"는 자연과,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과 질서를 지속적으로 지켜오기 위하여 구전되어 왔다.
[국가천연기념물 츠시마야마네코(츠시마 산고양이)] 츠시마 산고양이가 츠시마 아래섬(남부지역) 이즈하라쵸 우치야마(内山)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또 보호에 노력을 기울이자는 포스터 내용이다
[이시야네(石屋根)마을 이야기] 비죠즈카에서 이시야네까지 오는 길은 지금까지의 구간보다는 꽤 먼거리인 데, 산길에 구불구불한 도로임에도 지리에 능하고 워낙 운전에 달인이다보니 금방 도착한 듯 하다. 어젯밤 다소 불편했던 잠자리 때문일까, 한 잔의 점심반주에 스르르 눈꺼풀이 닫힌다. 그래도, 참아야겠기에 열심히 창밖을 보면서 츠시마섬의 정취를 만끽한다. 달리면 달릴수록 도로변으로 펼쳐지는 츠시마 삼나무숲의 우거짐은 신통하기 짝이 없다. 신기하게도 산불로 인해 불탄 흔적이 전혀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조심하며 산불예방에 그만큼 수고를 아끼지 않기 때문인 것일까. 머리를 갸웃뚱거리며 내내 달리다 보니 차의 앞유리에 펼쳐지는 광경이 눈빛을 만짝이게 한다.
제법 넓은 평지가 실개천을 경계로 좌우로 펼쳐지며, 그 양쪽 평지의 끝은 산자락이 병풍처럼 정면 바다를 향해 뻗어있다. 제방과 제방은 조그만 다리가 가로놓여 이어주고 가는 방향 왼편으로는 실개천 제방안쪽을 따라 이시야네가 나란히 줄지어 서있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보게되니 대단한 건축양식임을 느끼게 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생각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양 보이지만, 이러한 가옥양식이 필요해진 경위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과학적사고는 작금에 다르지 않음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판석이 20cm정도로 두텁고, 크기도 상당하며, 직사각형 모형으로 한결같이 크기에 맞게 재단하여 지붕을 덮었다는 사실이 실로 경이적이지 아닐 수 없다. 가옥의 재목 또한 반듯하고 견실하다.
또한 이 마을의 가옥 구조는 대부분이 높고 넓은 데, 이유를 알아보니, 주변이 온통 산지라서 가가호호 산림지를 보유하고 있단다. 따라서, 집을 지으려면 언제라도 자기 임야의 나무를 베어서 건축할 수 있기 때문에 높고 반듯하며 튼튼한 집을 누구라도 소유하게 되는 것이란다.
이러한 건축양식의 동기는 주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곡식과 의류와 기타 귀중품 등을 화재나 장마, 그리고 바람과 쥐 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데, 주로 창고를 이러한 고상식 방식으로 건축하였다고 한다. 바닥으로부터 마루바닥이 상당히 올라가게 하고, 지붕전체를 돌로 덮는 방식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옛날에는 이러한 이시야네 가옥이 상당히 많았다고 하는 데, 지금은 우리가 바라보는 이 마을의 그것 뿐이라고 한다. 보다 구체적인 이시야네 이야기들을 알아보니 재밌고 생생한 얘기들이 많다.
*** 이시야네 이야기산책
이시야네(石屋根;돌지붕)의 집은 일본에서는 츠시마뿐으로, 츠시마에서 이 시이네(椎根)와 코츠키(上槻), 쿠네하마(久根浜), 쿠네이나카(久根田舎) 등, 이 부근에서 밖에 볼 수 없는 진귀한 건물로 나가사키켄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화재로부터 식량과 귀중품을 지키기 위하여 몸체로부터 이격시켜 세워진 고상식(高床式) 창고의 지붕을 판상의 혈암(頁岩;이판암<泥板岩>)으로 이은 것이다.
이것은 해풍이 강한 이 지방의 생활지혜로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두께도 있으므로 상당한 무게이기 때문에 깨어졌을 때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몸체에는 돌지붕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창고에만 사용하고 있다.
약 30년 전에는, 이 지방에 200채 이상의 돌지붕집이 남아있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20채 정도만 남아있다. 지금 남아있는 돌지붕집 주변의 창고도 옛날에는 전부 돌지붕집이었다고 하는 데, 지금은 대부분이 기와지붕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지어져있는 창고군이 전부 돌지붕집이라면, 필시 경치가 장관일 것이다. 현재는 옛날의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없어 아쉬울 뿐이다.
이 돌지붕집에 사용한 판석은 혈암(이판암)인데, 이것은 태고의 옛날에 호수나 바다 밑이었던 곳에 점토질의 진흙이 퇴적하고 굳어져서 암석이 된 것이다. 이 혈암(이판암)의 지층은 츠시마에는 매우 많은 것이다. 츠시마에서는 아소(浅茅)만에 떠있는 시마야마(島山)섬에서 채석한 것으로 시마야마(島山)석이라고 부른다.
이 돌지붕집이 지어진 시기는 일본 에도(江戸;1603~1868)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지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이네(椎根)지역의 관광안내판]
-. 이즈하라로부터 이곳 시이네까지는, 히카케(日掛け)경유시는 20km, 카미자카(上見坂) 경유시는 22km이다. 다음 지구인, 코츠키(上槻)까지는 9.5km, 쿠네(久根)까지는 12.3km이다.
-. 이 지역의 경승지 안내 : 이시야네 창고(켄지정 문화재), 타이슈(対州;츠시마)소바 명산지, 시이네하마(椎根浜) 해수욕장, 경승지 "토노하마(殿浜)"해안
[마치즈쿠리(마을가꾸기)경관자산] 景資第 2-90호, 니시야마(西山)家 돌지붕집 창고, 이 건조물은 미래에 남겨야만 할 소중한 재산입니다, 나가사키켄
[시이네의 이시야네(돌지붕집) 창고]
-. 켄(縣)지정유형문화재*건조물*쇼와(昭和)52년1월11일 지정
-. 이시야네(돌지붕집) 창고는, 고래의 곡물을 중심으로 한 식량과 일상생활 용품을 보관하기 위하여 사용해 왔다. 현재에도 그 기능은 바뀌지 않았다. 그 기원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옛 전통을 지닌다고 일컫고 있다. 섬내에서 나는 좋은 판석을 이용하여, 지붕을 이는 기법은 겨울철의 강한 북서계절풍과 비와 이슬로부터 소중한 식량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자연발생적으로 고안해 낸 것임에 틀림이 없다. 화재에 의한 손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민가로부터 격리시켜 세운다고 하는 배려도 체험적인 지혜에 따른 것일 것이다. 기둥은 모밀잣밤나무 재목이다. 주위의 벽과 마루, 천정은 소나무 재목을 사용하고 있다. 이전에는 섬 전체적으로 돌지붕집 창고가 지어져 사용되었지만, 아주 근년에 이즈하라쵸의 서해안에 남아있는 것에 불과하다. 본 창고는 "시마야마(島山)석"을 사용하여, 모식적으로 그 양식을 전하고 있다.
~~~ 이즈하라쵸 교육위원회 ~~~
[이 지역의 보편적 건축문화] 풍부한 임야지 보유덕택으로 이 지역은 이와같은 가옥양식이 일반적이다
[마을 할머니들과 사이키부인의 대화모습] 마을회관에 마실가는 중이란다
[이시야네다리의 모습] 마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약 15미터 폭의 2급 하천인 시이네가와(椎根川)에 놓인 조그만 교량이다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 가는길] 시이네의 이시야네마을에서는 약 30분여를 머물렀을까, 또 가야 할 길이 멀기 때문에 서둘러 출발을 준비한다. 잠시 기다리는 동안 우리 선녀부인께서는 어느새 마을안 슈퍼에서 가는 동안의 간식거리라며 일본과자를 한 꾸러미 사온다. 다음의 목적지는 와타즈미 진쟈인데, 상당히 먼 거리이기 때문에 가는 길이 다소 지루할 것이라면서 먹으란다. 평소에 흡연을 하지않은 관계로 군것질을 전혀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편도 아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미처 못했는 데, 오히려 부인께서 먼저 챙겨주시니 몸들바를 모르겠다. 맛있는 과자라서 사왔다는 데, 먹어보니 정말 맛이 꿀맛이다. 화제는 또 과자얘기로 엮여지면서 우리는 이제 이시야네 마을을 저만치 멀리하며 시이네가와 하구언지점을 지나고 있다. 오른쪽으로 굽이진 도로를 타고 조금 지나니 방파제가 보이고 큰 마을이 하나 보인다. 마을이름을 알아보니 코모다하마(小茂田浜)라는 마을이다. 우리나라 고려에 뼈아픈 시련을 안겨줬던 몽고군이 남송군과 고려군을 연합군으로 편성하여 일본열도의 큐슈북부지역을 내습(서기 1274년과 1281년)할 때에 츠시마에서는 이곳이 그 상륙지였는 데, 일본에서는 현재, "몽고군내습지"라 하여 사적지로 알려져 있다. 달리는 차속에서 마을정경을 카메라에 잡아봤는 데, 제법 잘 잡힌 듯 하다.
이곳도 역시 마을앞으로 흐르는 실개천이 있는 데, 이시야네마을 쪽에서 코모다마을방향으로 갈려면 이 실개천에 놓인 다리를 건너야 하고, 그렇지않고 실개천을 따라 곧바로 난 도로를 타고가면 이즈하라항이 나온다. 지도를 보니 현재의 위치와 이즈하라항 중간지점에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은(銀)광산 유적지가 있다. 욕심같아서는 가보고도 싶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차량은 곤바로 코모다하마 마을쪽의 다리를 건너서 마을앞을 지나친다. 항구마을이라 마을앞 부두에는 크고 작은 어선들이 계류해 있고, 마을의 분위기는 역시 조용하고 평화스러움 그 자체이다. 우리가 달리는 도로는 24번 주요지방도(이즈하라-츠츠-미츠시마線)로 가끔씩 터널이 있고, 츠시마 지도를 보면은 이즈하라 국제훼리터미날이 있는 해안하고는 정반대편의 해안로라 생각하면 되겠다. 즉, 츠시마 남쪽섬의 서북해안쪽으로 마을과 마을을 이으며 연계된 도로라 생각하면 쉽겠다. 마을앞을 전후한 도로들은 대체로 확장공사 등 도로정비를 하여 운전하기가 편하지만, 그 이외의 도로는 산과 산사이 혹은 산중턱에 걸쳐있는 길이라서 운전에 주의를 요하는 곳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이키부인께서는 카레이서(Car Racer)의 챔피언마냥 빈틈없는 운전솜씨로 그 어려운 난코스들을 잘도 질주해 간다. 가는 여정을 기억하기 위하여 가끔씩 터널입구의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터널이름을 기록에 남겨봤다.
가끔씩 해안에 가까운 마을들을 지나칠 때면 바다색과 회색빛이 어우러진 항구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잠시나마 시야를 자극도 해오지만, 내륙쪽을 달릴 때면 다소의 지루함이 졸음을 재촉하기도 한다. 이전의 출발지(이시야네마을)에서 1시간여 쯤 달렸을까 이제 우리차는 케치(鶏知)라는 제법 크게 형성된 마을을 지나면서 츠시마 종단도로(국도 382호선)에 접어든다.
이 곳의 인근에는 츠시마공항이 위치하고 있고, 또 지금부터 다음 목적지인 와타즈미진쟈까지 가는 구간은 츠시마의 북섬과 남섬을 잇는 격인 육지의 병목구간이다. 원래는 츠시마가 하나의 육지로 되었었는 데, 섬의 오른쪽 해안과 왼쪽해안간의 해로건설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운하를 건설하였는 데, 그것을 계기로 츠시마가 두 개의 남섬과 북섬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나뉘어지기는 했어도, 그 위로 교량을 건설하여 사람과 차량이 자유로이 왕래를 하기 때문에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 구간에 얽힌 역사이야기는 너무도 많다. 운하가 건설되기 전에는, 이 구간 중에 오후나고시(大船越)와 코후나고시(小船越)가 있는 데, 육지의 양쪽해안에서 각각 배를 끌어올려 둥근 통나무를 이용하여 서로 반대쪽 해안으로 이동시키곤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오후나고시구간의 육지를 절개하여 수로를 만들고 배가 서로 오갈 수 있게 하고, 절개지간을 교량으로 이어서 육로통행이 가능토록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또 하나의 운하가 생겼는 데, 이 운하는 일본해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한 것으로, 오후나고시구간의 운하의 수심이 너무 얕아서 간조시에는 큰 배가 통과할 수 없게 되는 불편함이 있어, 큰 배와 군함 등이 자유자재로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제키(万関)운하를 개통하고 또, 동시에 만제키교량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만제키 운하는 러일전쟁(서기 1904년)이 일어나기 직전에 건설되었는 데, 러일전쟁 중에 러시아 함대가 블라디보스톡 항구로 가기위한 지름길로 이 곳을 택하였다가 일본해군의 작전에 말려들어 대패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도 만들게 되기도 한다.
하여튼, 이전 출발지에서 거의 1시간 30분 가량을 달려서 이곳에 도착하여 그러한 역사적 사건들과 유래 등을 연상하며 통과하게 되었는 데, 그 것들에 관한 스토리를 하나하나 들춰내어 본다.
*** 오후나고시(大船越) 철교
-. 원래 츠시마는 섬 전체가 하나의 육지로 된 섬이었다. 조선해협으로부터 츠시마해협으로 통하는 협수로로써, 1671년에 21대 한슈(藩主)인 소 요시자네(宗義真;1639~1702)공이 이곳을 파내어 배가 통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후나고시 협수로의 남쪽은 수 백미터의 츠시마해협이 되지만, 북쪽은 아소만의 안쪽 깊숙히 들어가는 후미진 형이 되어, 조선해협으로 나오기까지의 거리가 15km정도나 된다. 남쪽으로부터 오후나고시 협수로에 들어서면, 오후나고시 어항으로, 수로라고 하기보다는 어항의 출구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수로도 항구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느낌이 든다.
이 협수로는 1671년에 소 요시자네 한슈가 파내어 만든 것이지만, 극히 최근까지는 얕아서 만조시에만 배의 통행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극히 최근(약 20여년 전으로 추정)까지는 물이 빠지면(간조시), 이 곳에서 조개잡이를 하였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바다를 준설(浚渫)하여 깊어졌으며, 물때와 상관없이 배가 통행할 수 있다.
이 협수로에는 1970년에 완성한 사진의 오후나고시대교(大船越大橋)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길이가 45m, 폭이 7.5m이다.
또, 옛날에 배가 육지를 넘어가는 것은, 이 오후나고시와 코후나고시(小船越 ;수로는 만들지 않았지만, 옛날에 오후나고시와 함께 배를 육지로 끌어올려 통나무와 소 등의 축력을 이용하여 반대쪽 해안으로 배를 넘겼다고 한다)였다고 한다.
서기 1900년도에, 이 오후나고시 협수로에서는 수심이 얕아서 군함이 통과할 수 없게 되자, 구 일본해군이 군함이 통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파낸 인공수로인 만제키운하가 여기보다 약 2km 북쪽에 있다. 지금은 오후나고시 협수로와 만제키 운하 두 곳에서 조선해협과 츠시마해협 사이를 배가 왕래하기 때문에, 대형선박은 만제키 운하를 통행하고 있다고 한다.
*** 만제키바시(万関橋)
-. 만제키바시는 츠시마에 건설된 인공적인 운하위에 설치한 다리로써, 현재의 교량은 1996년에 건설된 것으로 세 번째(최초교량1900년, 두 번째 교량1956년)의 것이다. 현재의 다리는 처음보다 약 10m 정도 이동된 자리이며, 주민들이 배를 운항할 때에 섬을 돌아가는 불편함을 없애고 군함의 출입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만든 다리이다.
오후나고시(大船越) 철교를 지나 2.5km정도를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아치형인 다리가 바로 만제키바시이다. 교량의 폭이 10m, 길이가 210m인 이 다리 아래로, 수심이 4.5~5.1m, 폭이 40~60m인 만제끼 운하가 통과하고 있다.
원래 츠시마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 일본해군이 함대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해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을 뚫어 인공운하를 만들었다. 그 이후로 이곳에 다리를 세웠으며 현재 둘로 나누어진 츠시마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만조시의 조류는 여러 겹의 소용돌이가 생겨,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 다리는 일본이 자랑하는 러일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던 “츠시마 해전”의 대승을 가져다 준 아주 의미있는 다리이다. 일본과 러시아간 전쟁의 틈바구니에는 조선의 우선권이 중심에 있었다.
러일전쟁의 기록을 살펴보면, 1904년 2월 4일 일본은 對러시아 개전, 국교단절을 결정하고, 8일에는 육군 선발대가 한국의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로 향하고, 한편으로는 뤼순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어 10일에 러*일 양국으로부터 선전포고 되었다. 서전에서 일본은 한국을 제압하고, 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유리한 전략체제를 확립하였다. 4월 하순에 한국에 상륙, 북상한 일본 제1군은 5월 초에 압록강 연안에서 러시아군과 충돌하여 격파했고, 동월 랴오뚱(遼东)반도에 상륙한 제2군은 난샨(南山)과 따롄(大連)을 점령하고 뤼순을 고립시켰다. 다시 6월에는 만주군 일본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15개 사단을 동원하였다. 8월 랴오양(遼陽)부근에서 양국군이 첫 번째 대규모 접전을 벌였고, 10월의 샤허후이(沙河會)전투, 1905년 1월의 헤이꺼우따이(黑溝臺)전 등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고전 끝에 모두 승리하였다. 한편 뤼순의 러시아 함대는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을 꾀하였으나, 8월 황해에서 일본 해군의 총공격을 받고 항구안에 봉쇄되었다. 뤼순공략을 맡은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 쵸후한<長府藩>무사, 육군대장 종2위)의 제3군은 여러 차례에 걸친 203고지 공격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지만, 1905년 1월에 드디어 공략에 성공하였다. 유럽으로부터 지원군을 얻은 크로파트킹(1848~1925, 러시아 육군) 지휘하의 러시아군 23만과 오야마 이와오(大山巖 ; 1842~1916, 원수, 육군대장 종1위)가 이끄는 일본군 25만은 3월에 펑티옌(奉天)에서 회전(會戰)하여 러시아군이 패퇴하였으나 일본군도 사상자가 7만에 이르는 큰 손실을 보았다. 한편 러시아는 육전에서의 패배를 해전에서 만회하려고 로제스트벤스키 지휘하의 발틱함대를 회항시켜 5월 27, 28일 대한해협에서 대해전을 전개하였으나, 토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1848~1934, 사츠마한 무사, 원수, 해군대장, 메이지시대 일본해군 사령관)가 이끄는 일본연합함대에 격파되어 전멸당했다. 토고헤이하치로 제독은 츠시마 아소만에 미리 함정을 대기시켜 발틱함대가 지나가기만을 가다렸으며, 시간이 촉박한 발틱함대는 최단거리인 이곳 츠시마(만제키운하)를 통과하기에 이르자 이를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것이다.
[코모다하마(小茂田浜) 마을앞 정경] 시이네의 이시야네마을에서 멀지 않은 시이네가와 하구언에서 오른쪽으로 굽이 도는 지점에서 촬영한 것이다. 서기 1274년과 1281년에 2차에 걸친 원나라(몽고군)군대와 고려군 연합군의 일본(당시는 카마쿠라시대)내습시에 몽고군 내습지로 알려진 곳으로, 일본에서는 "겐코노에키(元寇の役) 몽고군 내습지"라 하여 사적지로 알려져 있다.
[코모다하마(小茂田浜) 마을앞 방파제]
[아레사카(阿連阪) 터널] 츠시마시 이마사토(今里)에 24번 주요지방도(이즈하라-츠츠-미츠시마線)에 위치한 터널로 연장 385미터이며 준공연도는 서기1979년이다
[이치쿠라사카(一倉坂)터널] 츠시마시 미츠시마쵸(美津島町) 케치(鶏知) 24번 주요지방도(이즈하라-츠츠-미츠시마線)에 위치한 연장 215미터의 터널로 준공연도는 서기 1988년 7월이다. 많은 터널들이 있지만, 여행경로의 추억을 기념하기 위하여 카메라에 담아봤다
[오후나고시(大船越) 철교]
[ 만제키바시(万関橋)]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에서 어로신((漁勞神)을 부르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만제키바시에서 잠깐 쉬면서 운하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시간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너무도 시간적 여유가 없어, 특히나 겨울이기 때문에 해가 짧은 탓에 어쩔 수 없이 아쉬움감을 떨쳐버린채 이곳까지 논스톱으로 오게 되었다. 이 곳에 도착하니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넘어섰다. 그래도, 천지신명의 덕택으로 무사한 가운데 일찍이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모든 것에 감사할 뿐이다.
이 곳의 특징이라면, 여러개의 토리이가 바다속에 잠겨있어 만조시와 간조시에 제나름의 운치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과 이곳의 관람이 끝나면, 아울러서 에보시타케(烏帽子岳) 전망대까지 같이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겠다. 하지만, 역시 에보시타케는 오늘 일정으로는 무리임에 분명하기에 일정에서 빼고, 특히나 형님께서 보고싶어 하는 곳이라서 서둘러 들르게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오후나절의 시간대는 간조의 물때라서 바다쪽 맨 안쪽에 있는 토리이까지 바닷물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진쟈의 본당앞의 뜰을 한 번 돌아보고 곧바로 바다 한 가운데의 토리이로 걸어가면서 멋진 풍경들을 사진에 담아봤다. 5개의 토리이가 일직선을 이루며 바다쪽을 향하여 세워져 있는 데, 그 중의 2개가 만조시에 바닷물에 잠긴다. 바깥세상과 신성한 진쟈경내를 구분짓고 신의 왕래를 돕기 위한 이정표로써의 역할을 한다는 토리이의 모습이 참 아름답다. 이 와타즈미진쟈가 위치하고 있는 이 곳은 매우 명당자리인 듯,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참 아름답고 주변과 잘 어우러져 안정감 있게 보인다.
앞으로 펼쳐진 바다는 아소만인 데, 츠시마지도를 놓고 보면은 섬의 중간쯤에 병목현상을 이루며 안쪽으로 깊게 들어간 곳을 말한다. 크게 만을 이루는 곳의 안쪽중에서도 안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다.
얼마를 보냈을까. 비록 길지않은 시간동안이지만, 모든 복을 품에 안은 듯한 기분 속에서 우리는 또 다음을 위한 걸음을 재촉한다. 진쟈 뒤쪽으로 산책로가 있고, 부부바위 등 들러보면 좋겠지만 두 번 다시 안올 것처럼 너무도 완벽하면 오히려 서운해질 것이라 핑계겸 여기면서 우리의 귀여운 애마에 오른다.
일본의 진쟈는 너무도 많이 보고 또 들러보았기 때문에 마치 많은 것을 아는 양 우쭐도 해보지만, 이번 기회에 보다 겸손한 마음에서 와타즈미진쟈를 통한 일본진쟈 상식을 일부분이나마 깊이있게 살펴본다.
***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 이야기
-.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는 아소(浅茅)만의 후미진 깊은 안쪽으로 에보시타케(烏帽子岳) 진입로의 기슭에 있다.
"엔기시키(延喜式 ; 헤이안시대에 편찬된 율령의 보조법령의 총칭인 산다이캬쿠시키<三代格式 ; 弘仁*貞觀*延喜格式>의 하나로 다이고<醍醐>천황이 후지와라토키히라<藤原御時平>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 전50권으로 905년부터 편찬이 시작되어 927년에 완성되고, 967년에 시행됨)"에 이름이 보이는 시키나이샤(式內社 ; 927년에 통합정리한 엔기시키<延喜式>의 권9, 10의 엔기시키진묘쵸<延喜式神名帳>의 안에는 당시의 "칸쟈<官社;관유진쟈>"로 등록된 전국의 진쟈일람이 수록되었는 데, "엔기시키 내에 기재된 진쟈"라는 의미로 엔기시키나이샤<延喜式內社>, 혹은 시키나이샤<式內社>나 시키샤<式社>라고 말하며, 일종의 제정일치<祭政一致>에 기초하여 조정<朝廷> 등에서 정하는 진쟈의 격식이 되었다) 에서, 진쟈전(社傳)에 따르면, 바다신인 토요타마히코노미코토(豊玉彦命)가 이 곳에 궁전을 세우고, 궁전 이름을 와타즈미노미야(海宮)라 이름짓고, 그 땅을 오토히메(夫姬)라 불렀다고 되어있다.
제사로 모셔지고 있는 신은, 토요타마히코(豊玉彦)의 딸인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와, 그 남편으로 우미노사치 야마노사치(海幸山幸;산해진미의 뜻)전설의 야마노사치(山幸;산의 진미)에 해당하는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命)이다.
진쟈의 앞에는 아소만의 바다가 펼쳐져 있고, 바닷물 중에 2개의 토리이가 서있다. 토리이의 수는 전부 5개로 바다 안쪽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진쟈의 샤덴(社殿)까지 연이어 서있다. 만조시에는 샤덴(社殿)의 근처까지 바닷물이 차는 데, 말 그대로 전설에 얽힌 분위기가 잔뜩 배인 진쟈임을 실감할 수 있다.
또, 샤덴(社殿)의 앞에는 이소라(磯良) 묘의 전설이 전하는 이소라 에비스(磯良恵比寿)라고 하는 이와쿠라(磐座)가 있다. 현지의 설명판에 전설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샤덴(社殿)의 옆으로도 이와쿠라(磐座)가 있는 데, 이것은 신께서 강림하시는 곳이라 한다. 반좌(磐座) 자체가 신성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신께서 오신다고 하는 장소가 신성한 것이라 한다. 같은 의미로 고자이시(御座石), 코린이시(降臨石)라고 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샤덴(社殿)의 뒷편으로는, 가까이 가보지는 못하였지만,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 2개의 바위가 놓여있다. 이것을 부부바위라 칭하고, 그 옆에는 토요타마히메노미코토(豊玉姫命)의 분묘가 있다. 그리고 그 서쪽의 산밑에는 토요타마히코노미코토(豊玉彦命)의 분묘가 있다고 한다.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 진입로에 있는 토리이]
[와타즈미진쟈(和多都美神社)의 샤덴(社殿)과 그 전경]
[이소라(磯良) 묘의 전설이 있는 이소라에비스(磯良恵比寿)] 물고기비늘형상의 반좌이다
[와타즈미진쟈의 이소라에비스(磯良恵比寿) 이야기] 등쪽에 비늘모양의 균열을 볼 수 있는 이 바위는 지금도 여전히 신성한 영지(靈地;신불의 영험이 현저한 곳)로써 혼령이 모셔지고 있다. 이것을 이소라(磯良;츠시마의 민간전승에 따르면, 바다신의 딸인 토요타마미코토<豊玉命>의 아이로서 바다아이<海童>를 가리킴. 이소라는 거북의 등을 타고 바다를 왕래하기도... )의 묘로 여겼던 전설이 있지만, 이것은 샤덴(社殿)이 운영되기 이전의 옛날 제사에서의 영좌(靈座;영위를 모셔놓는 작은 의자와 그것을 받치는 상), 혹은 고카미타이세키(御神体石)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전설속 이야기를 실감케 하는 간조기 토리이의 모습] 5개의 토리이중 2개가 만조시에 바닷물에 잠겼다가 간조시에는 다시 사진처럼 갯벌위로 모습을 드러내어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다.
[5개중 맨 바다쪽의 토리이] 신을 맨 먼저 맞이하는 토리이이겠다
[바다의 맨 안쪽에서 진쟈의 본전을 바로보며 촬영한 사진] 일직선의 토리이의 모습이 과히 예술적이다.
[제1번 토리이에서 정결한 마음으로 신을 영접하며]
[와타즈미진쟈와 사진의 오른편으로 보이는 에보시타케(烏帽子岳)에 오르는 길]
[제3번 토리이 속의 자화상]
[에보시타케(烏帽子岳;176m) 안내도]
[진쟈 정면의 오른편으로 나있는 실개천] 산세는 비교적 깊은 듯 한데 흐르는 물이 거의 없는 것이 상류에 아마도 작은 보가 있는 듯 하다.
[미네(三根)촌 역사민속자료관 가는길] 와타즈미진쟈에서 받은 신의 축복으로 우리는 다시 체내에 비타민이 충전된 기분으로 미네촌 역사민속자료관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을 시작한다. 츠시마종단도로인 382호선 국도에서 갈라진 지선을 타고 들어왔기 때문에, 다시금 되돌아서 나가다 보니 금방 국도에 진입한다. 지금 이 구간의 도로사정은 매우 좋은 편이라서 속도를 낼 수 있어 좋다면서 가능하면 운전을 서두르겠다는 우리의 선녀부인이 너무도 고마울 뿐이다. 츠시마섬의 정중앙쯤에 해당하는 토요타마쵸(豊玉町)의 소재지를 통과하면서는 차로부터 상당히 떨어진 위치에 소재하는 굉장히 큼직한 서구식 건물이 하나 우뚝 서있다. 그래서 물어보니, 공회당같은 시설로 주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능을 갖춘 공공건물이란다. 도시의 규모에 비해서는 턱없이 크게 보이는 건물이라서 궁금증을 가져봤는 데, 특별한 다른 내용은 없어 싱거운 듯,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여행중에 화제란 시시각각 돌출되는 것, 갑작스런 멧돼지 출현에 모두가 시선집중이다. 우리 차가 잠시 속도를 떨어뜨리나 싶었더니, 멧돼지는 제법 빠르게 움직이는 듯, 카메를 뺏지만 멧돼지 녀석은 벌써 오른편 산위로 잽싸게 사라져버린다. 카메라로 잡았어야만이 이야기가 실감나게 전개될 판인데, 그렇지 못하게 된 것이 너무도 아쉽다. 살이 쪄서 통통하니 매우 먹음직스런 고깃감이었는 데, 또 하나의 아쉬움을 떨군채로 우리는 또 달린다. 잠깐동안 긴장된 순간에 졸리던 잠이 싹 달아난다. 그러면서, 나는 국내에서 운전하며 도로변에서 여러번을 노루와 비껴간 적이 있다는 얘기로 화제를 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차량은 금새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전 출발지에서 불과 20분 정도의 거리쯤 될까, 고속도로가 아니기 때문에 지루함도 모른채 목적지에 금방 도착한다. 도중의 멧돼지 이벤트가 오늘 여행의 클라이막스라도 된 듯한 기분에, 여독으로 지친줄도 모르고 생기발랄한 다음 과정을 맞이한다.
미네촌 역사민속자료관은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인 한국전망대로 가는 382번 국도의 가는 편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번거로움 없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좋았다. 도로변에 커다란 입간판이 있어 반가운 미소로 인사를 건네며, 주차장으로 진입하니 이곳 미네쵸의 공민관(우리의 동사무소)이다. 차에서 내려서 잠시 주차장 주변의 조형물들을 살펴보며 심호흡을 해본다. 공기는 역시 맑고 신선하다.
[토요타마(豊玉) 소학교(초등학교)의 모습] "크게 키우자 토요타마 소학교(초등학교)"라는 표어가 2층본관 옥상에 걸려있다.
[토요타마쵸(豊玉町) 소재지의 모습] 섬내 건물로써는 매우 웅장하다. 결혼식 등을 행할 수 있는 공회당이라고 한다.
[토요타마쵸 소재지의 모습]
[탐스런 멧돼지와 마주쳤던 곳] 카메라를 잠시 놓고있던 참이라 탐스럽게 먹음직스러웠던 멧돼지의 모습을 찍지못하고 놓치고 말았다. 좌측산에서 내려와 순식간에 오른쪽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버렸다. 츠시마의 산림이 이토록 우거졌음을 알 수 있는 순간이다.
[미네(三根)쵸 역사민속자료관 둘러보기] 미네쵸 역사민속 자료관은 미네쵸 공민관(동사무소)의 한 쪽편에 별도의 전시실을 마련하여 자료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우리는 먼저, 공회관 주변으로 꾸며놓은 조형물들을 살펴보며 분위기에 젖어본다. 쾌적한 자연환경에 심호흡을 거듭하니, 머리속이 맑아지며 엔돌핀이 솟구친다.
부인께서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기에 현관에 들어서니, 내부의 모습은 의외로운 모습이다. 자료관 내부의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어 할 수 없이 보는 것에 만족해야만 하였는 데, 주요 자료 및 유물 등에 관한 설명을 실은 안내자료서가 있어 자료물 사진을 대신하여 도움이 되었다.
자료관 내부에는 어느 박물관과 다를바 없는 내용들로 충실했는 데, 츠시마의 역사에 관한 많은 유물들과 문화가 조선반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들로 가득했다. 멀리는 구석기 시대의 발굴 유적지 유물들로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츠시마 역사와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되어있어 이해하는 데 매우 좋았다. 자료관 구조는 단층구조로 한 격실로 되어있어 관람하는 데는 많은 시간을 요하지 않았다. 곧바로 밖을 나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서 다시금 출발을 준비한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고 있다. 그런데, 갈길은 또 멀다. 츠시마 북단에 있는 한국전망대까지는 이제 마지막 구간인 데, 물어보니 1시간 정도는 걸릴 듯 하단다.
우리는 다시 힘찬 출발을 위한 심호흡을 들이킨다.
아자, 화이팅! 을 외치며, 우리는 다시 마지막 질주를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 미네쵸(峰町) 역사민속자료관의 소개
-. 자료관은 독립한 건물이 아니고, 츠시마시 미네지구 공민관 건물의 일부에 병설되어 있다. 자료관 내부는 촬영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어, 직접 보고 이해하거나 팜프렛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구분되어 있는 데, 음성가이드로 안내하도록 되어있다.
흑요석(黑曜石)의 화살촉에서부터 고분시대의 부장품까지, 진열되어있는 출토품의 호화로움은 마치 보물산(寶物山)을 연상케 한다. 원격지와의 교역관계를 증명해주는 츠가루(津軽)지방의 골각제품과 오키나와의 조개, 그리고 조선반도에서 건너온 물건 등. 야요이(弥生)시대의 일본을 객관적으로 기록한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의 내용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할 만한 유물들이 진열되어 있다.
*** 미네쵸(峰町) 민속자료관과 관련한 유적지와 유물, 그리고 문화
-. 미네(峰)유적 : 미네유적 산지는 미네천 상류 왼편 산기슭에서 펼쳐지는 혓바닥 모양의 구릉지에 있으며, 수혈식 주거*고상식 주거의 기둥구멍 등, 츠시마에서 처음으로 야요이시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유적은 벼농사 개시기의 죠몬(縄文) 말기(기원전 4C)의 토기부터 기원후 7세기까지의 토기가 단절되지않고 출토되고 있다. 유적의 주체는 야요이 중기후반에서 후기말에 미네연안 일대에 유적지가 늘어, 분묘의 부장품이 많아지는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 가야노키(ガヤノキ) 유적 : 츠시마를 대표하는 야요이 시대의 유적으로 상자식 석관묘 10개, 특수 매납토분 2개로 구성되어 있다. 미네연안 일대의 수장묘적 유적이다.
-. 에비스(恵比寿)산 유적 : 12개의 상자식 석관묘가 발굴조사 되었으나, 하천공사로 소멸되었다. 철검에 장착하는 청동제의 아와츠부몬호츄 쥬지가타 하토쇼쿠(粟粒文方柱十字形把頭飾) 등이 출토되었다. 켄지정문화재이다.
-. 목판석관군 : 7개의 석관묘와 묘도(墓道)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5호 석관묘의 부장품은 풍부하여 위지왜인전에 기재된 "남북시적(南北市<入+米+翟>; 위지왜인전의 내용중 "始度一海千餘里至對海國~~~"문장의 마지막 4자를 말함)"을 증명할 자료로써도 주목되고 있다.
-. 사가(佐賀) 패총 : 미네쵸의 동해안 사가(佐賀)에 있다. 죠몬 중기에서 후기의 유적으로, 주거지*인골(人骨)*다량의 석기*골각기*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흑요암(黑曜岩)은 사가켄(佐賀県)의 고시다케산, 토기는 쿠마모토켄(熊本県)의 아타카(安宅유적)식 토기, 골각기는 수렵용 사슴피리*결합식 낚시바늘*회전식 이두작살 등이 출토되었다. 죠몬시대부터 츠시마에서는 해상교역이 활발하였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 코쇼지마(小姓島) 유적 : 사가만(佐賀湾) 입구에 자갈밭으로 이어지는 육지와 통하는 작은 섬이 있는 데, 이 섬이 코쇼지마다. 섬의 끝에 5개의 상자모양 석창묘가 점재하고 있다. 야요이 중기후반에서 후기전반의 유적으로 청동제 하토(把頭)장식*조선계 와질(瓦質)토기*야요이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 시이노우라(椎の浦) 유적 : 동해안의 시타카와 시코에 사이에 시이노우라(椎の浦)가 있는 데, 강 입구의 곶 끝단에 7개의 석관묘가 있다. 야요이 중기전반에서 고분시대에 이르는 분묘군이다.
* 키사카 카이진 진쟈(木坂海神神社)
-. 미네쵸의 서해안에 키사카(木坂)마을이 있고 이즈(伊豆)산 중턱에는 카이진진쟈(海神神社)가 진좌하고 있다. 츠시마에는 20좌의 시키타이샤(式內社)가 있는 데, 카이진진쟈는 그 중의 하나다. 음력 8월 5일에 카이진진쟈 타이사이(大祭)가 열려, 본전에서 묘부노마이(命婦の舞)가 봉납된다. "묘부(命婦)"란 여성 카구라시(神楽師)를 말하며, 카이진진쟈*이즈하라의 하치만구(八幡宮)*케치(鶏知)의 수미요시(住吉)진쟈에서 봉납하였다. 1996년에 "기록작성 등의 조치를 위한 무형민속문화재"로써 선정되었다.
-. 미네쵸 후루사토(故郷) 보물관 : 카이진진쟈의 전세품이 수장되어 있다.
-. 조선도자기 : 카이진진쟈에는 11점의 조선시대 청자가 전세되어 있는데, 7점이 고려청자이고 4점이 이조청자이다. 12세기의 음각여의두문매병 고려청자 등이 있다.
-. 목조가면 3면 : 카오(顔)가면<1302년>, 머리띠를 한 가면<1338년>, 류오(竜王)가면<무로마치시대>등 3개의 가면이 있다. 모두 켄지정문화재이다.
-. 동조여래입상(銅造如來立像) : 카이진진쟈의 고신타이(御神体)로 전해진 8세기의 금동신라불상으로 높이 38.3cm이고, 두상에서 양다리까지 한 개의 주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속은 비어있다. 머리 뒷부분과 뒷면에 주조 형틀을 들 때에 생긴 구멍이 남아있는 주조법은 금동신라불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974년에 일본 국정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엔츠지(円通寺)
-. 사가(佐賀)에는 무로마치시대에 토후(島府;츠시마 관청)가 있었다. 서기 1408년에서 1468년까지 소씨(宗氏) 3대가 60여년간 거주하였다. 이 때에 이씨조선과의 외교관계를 이용하여 왜구를 다스려 섬을 평정하고 키타큐슈(北九州)의 옛 영토를 되찾는 데 힘썼다. 엔츠지는 이 3대 소씨를 모시는 절이다.
-. 동조약사여래좌상(銅造藥師如來坐像) : 엔츠지의 본존으로 고려중기(약 13세기)의 작품이다. 손상되지 않은 엷은 붉은색을 띤 도금도 양호하게 남아있다. 1975년 켄지정문화재이다.
-. 엔츠지 범종(梵鐘) : 이조시대 초기의 범종이다. 전체적인 형태는 중국종의 영향을 받았고, 장식은 조선종의 의장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1975년 켄지정문화재이다.
-. 엔츠지 소씨일가 묘지(宗家墓地) : 엔츠지의 뒷쪽에는 호쿄인토(宝キョウ印塔 ; 묘지탑*공양탑 등에 사용되는 불탑<佛塔>의 일종)탑이 몇 개 있다. 각각의 묘에 대해서 전해지는 것은 불확실하다. 중세의 유서깊은 묘지로 귀중한 유적이다. 1974년 켄지정문화재이다.
* 기타
-. 호켄교(ホケンギョウ) : 오니비타키(鬼火炊き)라고도 불리며, 정월 6일에 행해지는 소정월행사이다. 옛날에는 츠시마 전역에서 행해졌으나, 현재는 행하는 곳이 많이 줄었다고 한다. 대나무로 뼈대를 만들어 삼나무잎을 겹쳐쌓아 탑을 만든다. 6일날 이른 아침에 불을 붙이면 아이들은 글을 쓰고 떡 등을 굽는다.
-. 야쿠마노토(ヤクの塔) : 음력 6월 초에 오(午)의 날에 행해지는 하계수확제이다. 그 해의 토야쿠(頭役 ; 그 해의 제사시 제주<祭主>역할의 자)로 선발된 토닌(頭人)은 신에게 첫 수확한 하타쿠모노, 보리이삭, 구사비(베라)와 보리소주를 바친다. "하타쿠모노"란 밭작물이란 뜻으로 밀과 콩을 섞어찧어 경단으로 만든 것이다. 마을에 거주하는 장남은 해안가에 돌을 쌓아서 마지막으로 까마귀돌을 올리고 작업을 마친다.
-. 카라무쇼(カラムショ) : 오미마을은 주변 마을인 키사카(木坂)와 함께 양묘제로 알려진 마을로, 오미의 지간지(慈眼寺) 경내에는 100개 이상의 탑이 있는 데, 이를 카라무쇼라 한다. 카라무쇼란 숭배하는 묘, 물을 제사지내는 묘라는 뜻으로 여기에 묻혀있던 사람은 다른 장소에 매장되었다.
-. 코야(小屋) : 안채와 떨어진 장소에 지어진 창고를 코야라고 한다. 안채에 불이 났을 경우에 귀중품의 유실 등을 막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중에는 2구 혹은 3구로 칸막이가 되어 있어, 곡류*도구*의류 등이 수납되어 있다. 츠시마에 많은 고문서가 현존하는 이유는 이 코야(小屋) 때문이라고 한다.
-. 모코야(藻小屋) : 해안가에 끌어모은 해초를 모아서 쌓아놓는 코야(小屋)로 해초는 말려서 밭의 비료로 쓴다.
-. 이모가마(芋釜) : 고구마를 보존하는 가마(토굴저장소)이다. 가마는 직경 약 1.2m, 깊이 약 1m의 웅덩이 모양이나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다. 가마는 진흙을 발라 볏짚 등을 깔아서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미네쵸 역사민속자료관을 알리는 382번 국도변 입간판의 모습]
[츠시마시 미네쵸 사적*문화 종합안내판] 츠시마시 미네쵸의 역사와 이 지역에 분포한 사적 및 문화를 안내하고 있다
[카노우라(鹿の浦)의 석회암] 카노우라 석회암은 약 4,500만년 전의 신세대 고(古) 제3기 초신세(初新世)의 츠시마층군 중에서 생긴 것으로, 츠시마시 미네마치(峯町) 시타카(志多賀)의 카노우라 남쪽 해안에서 서기 2004년에 발견되었다.
이 석회암은 특수한 종류의 니마이가이(二枚貝)가 밀집한 석회암으로, 조개는 "시로우리조개"류로 추측되며, 해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메탄가스를 체내로 받아들여 에너지로 변화시키는 니마이(二枚)조개이다. 그것 때문에 메탄 등을 분해하는 박테리아를 공생케 하고 있으며, "화학합성군집"이라 불리고 있다. 더욱이 가노우라 석회암의 시로우리조개는 특히 소형으로 신종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통상의 석회암은 따뜻한 남쪽 바다의 환호초 등, 태양의 영향을 받아서 생활하는 광합성군집의 것이지만, 카노우라 석회암은 메탄가스가 뿜어내는 짙은 어둠의 심해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전국적으로도 귀하고, 일본의 서해안 측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4,500만년 전, 츠시마가 대륙의 일부였을 때에 해당하고, 당시의 해저가 메탄가스를 분출하는 특수한 곳이었던 것을 말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 헤이세이 21년(서기 209년) 12월 츠시마시 교육위원회 ~~~
[미네쵸 공민관 옥외정원] 역사 유적 및 유물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옥외정원을 꾸몄다
[미네쵸 역사민속 자료관 과 츠시마시 미네지구 공민관의 현관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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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갈 산고양이/Bengal 山猫] 츠시마 보호수종이다
[츠시마북단의 한국전망대 가는길] 이즈하라로 되돌아가는 것을 빼놓고는 오늘의 마지막 드라이브 구간이다. 1시간 이상이 걸리는 상당히 먼 거리인데, 아무래도 저무는 햇살에 나 스스로가 졸릴 것같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무리 "아자, 화이팅!"을 외쳤어도 신체의 자연적 현상은 어쩔 수 없으리. 선녀부인을 격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히려 격려를 받는 격이다. 잠시 졸리는 모습을 보이니, 그냥 한 숨 자란다. 하지만, 명색이 여행이랍시고 왔는 데, 이 정도를 못참고 존다는 것은 나그네의 수치다. 첫날에 버스로 이 츠시마 종단도로를 타고 이즈하라로 내려갈 때도, 반쯤 졸은 탓에 츠시마 자연경관을 감상하지 못했는 데, 오늘만은 꼭 참아야겠다는 인내로 참고 또 참는다.
온통 삼나무로 우거진 숲과 터널이 반복적인 자연경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곤 하지만, 그로부터 느끼는 우리들 마음은 너무도 신비롭고 경이로울 뿐이다. 사방이 첩첩산중인 이러한 섬지역에서 수많은 세월동안의 역사를 꿋꿋이 이어온 츠시마도민 선조들의 지혜가 새삼 존경스러운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잠시 침묵이 흐를까 싶더니, 부인께서 갑자기 창문밖의 건물을 보란다. 츠시마에서는 1등가는 거부인 데,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보이는 저 건물이 그 건설사의 사옥이란다. 육지의 일반 건설사들의 사옥들에 비하면, 건물축에도 못들 정도로 외소하지만, 조금 더 가다보니 돌연 1국의 성채와 같은 큰 건물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마침, 교량을 지나며 그 큰 저택의 전체가 카메라에 잡혀 촬영하는 데 성공하였는 데, 외양만 보아도 거창한 규모다. 싯가 30억엔의 사택이란다. 토쿄나 오사카같은 대도시도 아니기 때문에 지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을 것이며, 대부분이 건물가인 데, 실로 엄청난 저택이 아닐 수 없지 않겠는가? 안에 들어가서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사진으로 봐도 개인사택의 규모로써는 대단한 규모임에 분명하다. 새삼, 스스로의 왜소함에 우울한 기분마저 드는 것 같아, 그 구간을 벗어나며 다음 화제로 넘어간다.
가면 갈수록 삼림의 자연경관은 점입가경이고, 태양은 점점 강렬함을 덜한다. 시간이 오후 5시를 넘어서며 이제 우리가 접어드는 곳은 사스나(差須奈)만이다. 역시 이곳은 항구마을이다. 부산과는 실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옛부터 국제항구(조선이 주 상대국)로 널리 알려져 메이지 이전에는 매우 활발한 도시였다고 한다. 일본의 토쿠가와 바쿠후가 서구열강의 개항압력에 못이겨 일본 최초로 나가사키(長崎)항을 유일한 국제항으로 개항하였는 데, 그 당시에 나가사키와 더불어 츠시마의 이 사스나항도 조선과의 교역을 위한 국제항구로 함께 개항하였다고 한다. 그런대도, 이러한 내용은 외부로 널리 알려지지 못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츠시마의 입장에서는 식료문제 때문에 조선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그에 대하여 조선측에서는 부산에 "왜관"이라는 츠시마의 재외공관을 두고서 그 안에서만 교역관계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기타 대일교역에는 큰 관심을 안가졌기 때문에, 조선측에서 츠시마를 통한 일본과의 교역을 위한 많은 상인들이 도일하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츠시마의 사스나항이 또 하나의 국제개항지라는 것이 많이 알려지지 못하였다고 한다. 시바료타로 선생의 "이키*츠시마 가는길(壱岐*対馬の道)"에서는 이와같이 논하고 있는 데, 이러한 내용을 알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또한, 이 사스나항이 개항되기 전에는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와니우라(鰐浦)항을 츠시마도주 소씨가 교역항으로 개항하였는 데, 지리적 조건이 사스나항이 좋다는 이유로 이곳을 개항지로 바꿔서(서기 1672년) 메이지유신기 이전까지 활용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사스나항이 지금은 옛날의 그러한 모습을 보이진 못하고, 다만 츠시마 북쪽 지역을 위한 관공서(츠시마 북부경찰서, 시야쿠쇼 분소, 가정법원 등)만 소재지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한 역사이야기가 많이 얽혀있는 사스나항의 소재지를 우리는 지금 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길을 지나면서 물레방아가 상징적으로 보여 카메라에 담았더니, 이것이 츠시마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을 알게 되었다. 일본에 최초로 밀보리가 중국대륙과 조선으로부터 도입되어 재배된 곳이 츠시마인 데, 이 "아가타노사토(県の里)" 소바음식점에서는 현지생산의 밀보리로 제조한 소바면을 사용하여, 혹은 가족단위 손님 등이 직접 소바면을 만들어 요리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곳이라 한다. 전국에서 이러한 식으로 운영하는 소바음식점은 얼마 안되는 데, 츠시마에서는 이곳이 유일한 곳이란다.
하여튼, 옛부터 전통이 있는 곳은 후대에도 그 명맥을 잇기 위하여 분주한 노력을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라는 것을 깨달아보며, 이제 얼마 남지않은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를 향하여 마지막 질주를 재촉한다. 츠시마의 북단이자 부산이 코앞에 보이는 한국전망대가 있다는 선입관에 벌써 가슴은 쿵쾅거린다. 아마도, 오늘의 여행이 무사히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반향일 것이리라. 만의 안쪽으로 진주양식 시설이 보이고, 그 해안로를 타고 휘돌면서 한국전망대가 있는 곳을 향해 달린다. 옛날에는 츠시마 전역이 진주양식으로 성황을 이루었는 데, 지금은 관련업종의 비즈네스상황이 좋지않아 이 지역 일부에서만 진주양식을 한다고 한다. 또, 이 지역은 츠시마의 명물이자 보호종인 히토츠바타고 나무가 밀생하며 보호되고 있는 곳으로 봄의 개화기가 되면은 벚꽃구경 만큼이나 성황을 이룬다고 한다.
이제, 마지막 오르막길이다. 경사가 상당히 심하고 도로도 뱀처럼 구불구불하다. 잠시 엑셀을 밟으니 금방 한국전망대 입구에 다다른다. 웅장하면서도 한국미가 절로 풍기는 건축양식에 매료되면서 오늘의 피날레를 장식한다. 우리의 천사주인공 사이키부인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한국전망대에 오른다.
[츠시마 1등부자] 츠시마에서 건설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어느 부자이야기. 위의 사진은 건설회사 사무동이고 아래의 건물사진은 사가이다. 싯가 30억엔이란다. 대도시도 아닌 섬의 시골지역에 지은 집의 싯가가 30억엔이라면 집의 규모와 시설이 어느 정도임은 상상할 수 있겠다. 집앞으로 지나가면서 차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짐작은 할 수 있겠다.
[아름다운 숲과 경차의 질주] 울울창창 하늘을 찌를 듯한 숲의 향연, 마천루의 고층빌딩 서울의 숲과 너무도 대비를 이룬다
[사스나(佐須奈) 소재지 / 아가타마을(県の里/아가타노사토)의 소바도죠(蕎麦道場)] 사스나항구 소재지의 모습이다. 물레방아와 건물의 모양이 너무도 특징적이다. 본인이 직접 소바면을 만들어서 먹을 수도 있게 시설된 소바음식점이다. 맛있는 소바의 조건은, 즉석에서 소바면을 뽑아서, 치고, 데쳐서 바로 먹는 것이란다. 일본내에 이와같은 소바도장은 많지 않은 데, 츠시마에서는 이곳 뿐이란다. 일본에 밀이 중국남서부로부터 처음 전해진 곳이 츠시마라고 한다. 물레방아에서 직접 도정한 천연소바 밀가루를 100% 사용하고, 츠시마 토종닭을 삶아낸 국물에 먹는 "이리야키소바(入り焼き蕎麦;구운 닭살을 넣은 소바란 뜻으로 츠시마의 명물) 가 맛이 그만이란다. 알고보니, 츠츠자키에서 오는 길에 들렀던 비죠즈카산장 음식점에서 점심으로 먹은 바로 그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이곳에서는 본인이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다는 것이 매력이고, 가족나들이 음식점으로 안성마춤이겠다. 지나가는 길에 촬영만 한 것이다. 가격은 4인 1조로 4,000엔(한화 약 52,000원). 직접 쳐서 만들어 먹는 데, 90분 정도 쇼요. 면발이 끊어지지않도록 하기 위하여 소맥분을 넣는 데, 이것을 츠나기(繋ぎ)하고 한다. 여기서는 이 츠나기소맥분을 넣지 않고 이 지역 자연산 그대로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사스나(佐須奈)항
-. 츠시마 윗섬(카미시마/上島)의 최북단에 인근한 츠시마의 북서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우리나라 부산*가덕도와 가장 가까운 곳이다. 에도시대에는 조선통신사가 최초로 기항하는 항구이다. 옛날에는, 이곳에 먼저 기항하였다가, 츠시마의 북쪽해안을 타고돌아 츠시마 동해안의 이즈하라항으로 갔다고 한다. 메이지시대 이후로도 부산항로의 중계지로 번성한 도시로, 번화가에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어 사람들이 분비었다고 한다. 지금도 우체국앞 도로변에는 상점가가 형성되어 있어 옛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현재의 사스나에 거주하는 세대수는 약 450세대에, 인구가 약 1,100명으로 츠시마 윗섬에서는 토요타마쵸(豊玉町)의 니이(仁位)와 인구서열로 1,2위를 다툰다고 한다. 츠시마의 북부경찰서와 가정재판소, 시야쿠쇼(츠시마 시청) 분소가 소재한다.
[사스나(佐須奈) 터널] 328호선 국도상 사스나와 와니우라 중간쯤의 카미츠시마쵸(上對馬町) 카와치(河內)마을 노선에 있으며, 2006년 12월에 중공되었다. 연장은 436m, 폭은 9.36m, 높이 6.1m로 2차선이다
[늦은 오후시간 석양이 서서히 비추어 오고 있을 때의 숲의 모습]
[와니우라(鰐浦) 한국전망대 올라가는 길] 한국전망대에 오르는 길은 구간은 짧은 편이지만, 제법 가파르고 구비진 도로였다
[츠시마북단의 한국전망대에서 부산을 바라보다] 아침 일찍이 이즈하라항을 출발하여 츠시마 저 남부의 츠츠자키의 츠츠반도등대에 들렸다가, 아카고메진쟈*비죠츠카산장*이시야네마을*만제키바시*와타즈미진쟈*미네쵸 역사민속자료관*사스나항*와니우라항 등을 지나 이곳에 오기까지 참 머나먼 길을 여행했다고 해야겠다. 물론, 섬이 아닌 일반 지역으로 교통인프라가 잘 되어있는 곳이라면 그다지 멀게만 느껴질 정도의 거리는 아니지만, 너무도 산세가 험한 지형으로 형성된 섬지역이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중간에 사이키부인을 만나지 못했다면, 내가 과연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당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하여튼,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게 사심없는 자기희생으로 봉사해주신 사이키 부인께 재삼 감사의 마음을 가지며, 이제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에서의 시간을 맞이한다.
한국전망대의 겨울풍광은, 남쪽나라인만큼 꽃이 없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지역과 유사한 수수한 모습이다. 일본속의 한국색채를 엿볼 수 있는 건축양식과 조선역관 순난추모비의 경건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조금은 엄숙한 전체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면 맞을까. 그러면서도 이국땅에서 고국을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이 걸린 전망의 지대라는 것이 삶의 신기루를 만끽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 자체가 실로 의미를 갖게 한다.
한국전망대의 꽤 넓은 주차장에 덩그러니 우리의 애마인 귀여운 경차만 주차해 놓고서 우선은 작은 볼일을 위하여 화장실에 들른다. 하지만, 화장실은 정상이 아니다. 동파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해 놓은 것이 눈에 가시다. 비수기라는 뜻인지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관광포인트에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너무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소형 태양광발열시스템 등을 활용하여 이런 불편은 없도록 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전망대가 있는 곳까지 산보를 시작한다.
겨울잔디의 쿠션이 제법 좋은 느낌의 감촉이다. 보도불록인도가 있지만, 울타리변의 자라는 식물들과 조선역관 순난추모비를 감상하기 위하여 잔디밭을 산보했다. 철쭉나무가 많은 듯 하다. 4월이 되면 주변이 정말 아름답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추모비앞을 다가가니 상당히 많은 정성이 기울여졌음을 알 수 있겠다. 자연석을 이용한 추모비건립 아이디어도 썩 마음에 든다. "조선'이라는 국호를 달리하는 시대의 사건이므로, 또 가능한 사건 당시에 가까운 시기에 세워진 추모비인상을 심어준다는 측면에서도 괜찮았다는 생각을 가져봤다.
침묵의 기도가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추모비에 관련한 비문내용들을 읽어본다. 예전에는 이 사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지 못하여 희생자들의 이름을 알 수 없었는 데, 최근에야 "종가문고사료(宗家文庫史料)"중에서 "도해역관 및 종자성명(渡海譯官 竝 從者 姓名)"의 묵서(墨書) 소책자가 발견되어 순직 300주기를 맞이하면서 본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서기 1703년 2월 5일(음력) 108명의 조선역관이 츠시마 3대 도주의 죽음을 애도하고, 제 5대 도주의 습봉을 축하하기 위한 공식 사절단이었다고 하는 데, 비록 오래된 옛 일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츠시마 병사 세 사람도 함께 승선하고 있었다 하니, 당시의 상황을 과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1703년이라면, 에도바쿠후기의 공식 츠시마개항지가 사스나항(서기 1672년)으로 바뀌고 난 시기인데, 여전히 이곳(와니우라항)도 조선과의 교역을 위하여 이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이즈하라항으로 가기 위한 기항지로는 사스나항보다 가깝기 때문에 종종 이용했으리라 생각도 해본다.
한일 관계사에서 츠시마의 비중이 상당하였다는 것은 자타가 알고 있는 사실이겠다. 당시에 희생된 역관들은 정식 외교사절단으로 양국간의 선린우호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당사자들인 것이다.
따라서, 츠시마의 입장에서는 일본이라는 국가적인 측면에서의 대한(對韓)관계와는 또 다른 이해관계가 있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선린우호적 관계의 지속을 위한 츠시마의 정성을 이곳에 깃들인 것이라는 의미를 깨달으며, 나는 이제 한국전망대 2층 계단을 오른다.
내가 오른는 이 한국전망대는 우리나라의 한옥장인들이 직접 설계와 건축을 하였다고 하는 데, 건축에 소요되는 자재 또한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공수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곳에 들어오는 입구에 세워진 정문은 물론 전망대에서 풍기는 건축미 자체가 전형적인 한국미 그대로이다.
전망대 내부에 들어서니, 생각과는 다른 의외의 분위기가 풍긴다. 소형 박물관같은 분위기다. 하긴, 어느 전망대를 가더라도 이 정도의 내부구도는 대부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여튼, 내부의 한국전망대의 기획미가 상당히 마음을 끄는 구도이다. 하나하나 다 읽어보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음에 일단은 카메라 메모리에 기억을 시키고 줄거리 정도만 부지런히 주워 담는다.
전망대의 앞쪽 베란다시설에는 유료망원경 등이 갖춰져 있지만, 육안으로도 날씨가 흐림을 인지할 수 있으니, 부산지형을 선명하게 바라볼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밤이면 부산시내의 야경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 데,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니 절로 실감을 할 수 있다. 산 아래로 보이는 와니우라항은 방파제로 둘러쌓인 모습이 그 어떤 태풍에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안정되어 보였고, 부산을 대신하여 확연히 돋보이는 저 앞의 우니지마(海栗島) 일본 항공자위대 기지는 일본열도 방어능력의 위상을 엿볼 수 있었다. 츠시마 전역의 일본 항공자위대 본부역할을 하는 모양이다.
전망대 2층의 관람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와 1층의 전망포인트에서 새롭게 기념촬영을 해보고, 이제 발길은 전망대 주차장으로 향한다.
자판기같은 시설이 없으니 따끈한 커피타임도 갖지 못하고 귀환하려 하니 마음이 다소 서운하다. 전망대와의 작별키스를 손키스로 대신하며 차에 오르니 갈길이 멀다하고 애마는 움직인다. 돌아나오는 길에 전망대 입구 정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니, 석양의 작열하는 태양의 마지막 별똥빛이 한옥양식 정문의 선율에 장단하며 아름다움을 토하는 중이다. 특별한 인위적인 조명도 필요없이 자연조명만으로도 카메라의 렌즈는 아름다운 장면에 윙크한다.
윙크에 윙크를 거듭하며, 우리 애마는 다시 기수를 돌려 올 때의 방향과는 다른 반대쪽 도로편을 이용하여 오오우라(大浦)항 방향으로 돌아나온다. 히토츠바타고의 만개한 모습이 타일벽화로 외벽이 장식되어 있는 히토츠바타고터널을 통과하여 츠시마북항이 있는 히타카츠항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진입하면서 우리의 이즈하라 귀환은 시작된다.
[한국전망대 주차장과 화장실] 화장실은 동절기 동파방지를 위하여 사용하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전망대의 모습] 보면 볼수록 너무도 잘생긴 것이 종생 이곳에서 살고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한국전망대 주변의 관광안내도] 누구라도 알기 쉽도록 칼라풀한 디자인으로 만들어 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여행미를 만끽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국 역관사 순난(殉難;순직)의 비] 조선국 역관사 순난비의 전체상이다. 이하의 부분사진은 비문의 상세내용을 잘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조선국역관 및 종자(從者) 순난 영위] 1703년 2월 5일(음력) 순직한 112위의 영휘(靈諱;죽은자의 생전이름)를 알지 못하여 1991년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 순직비를 세웠다. 최근 "종가문고사료(宗家文庫史料)"중에서 "도해역관 및 종자성명(渡海譯官 竝 從者 姓名)"의 묵서(墨書) 소책자가 발견되어 오늘 순직 300주기를 맞이하는 날에 "조선역관 및 종자 순난영위(朝鮮譯官 竝 從者 殉難靈位)"를 새겨 기리 추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아래 사진의 비문내용]
조선 숙종 29년 계미(1703) 2월 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부산을 떠난 한천석(韓天錫) 이하 108명의 조선역관 일행은 저녁무렵 츠시마의 와니우라(鰐浦)항 입항 직전에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한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이 사절은 정부(正副) 양사와 상관(上官) 28명, 중관(中官) 54명, 하관(下官) 24명으로 구성되었는 데, 이들은 츠시마의 제3대 한슈(藩主) 소 요시자네(宗義真)의 죽음을 애도하고 신임 한슈인 제5대 소 요시카타(宗義方)의 습봉(襲封)을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 국가외교 사절단이었다.
에도(江戶)시대 쇄국체제하에서도 일본이 유일하게 정식으로 국교를 유지한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것은 여러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과의 신뢰를 지켜온 선린외교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수행함에 있어 조선에서 에도(江戶;지금의 토쿄)까지 왕복했던 통신사와는 달리 츠시마의 후츄(府中;지방관청소재지)이었던 이즈하라까지 왕복했던 일행 100명 정도의 국가사절이 역관(譯官)이었다. 에도바쿠후(江戸幕府)가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측의 권한을 츠시마 한(藩)에게 일임하고 있었던 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 역관이라고 하겠다. 에도시대 조선의 사료를 보면 역관이 츠시마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험한 풍랑속에 묻힌 이 역관 일행의 배에는 4명의 츠시마 한시(藩士;츠시마한의 무사)도 승선하여 비운을 함께 하였다.
오늘날 점차 더해가는 한*일 교류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의 정신으로 순직한 일행의 넋을 위로하며, 양국간의 영원한 우호증진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여기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써 비를 세워 길이 현창(顯彰)코자 한다.
[조선 역관사 배의 음각화]
[조선역관사비 건립협찬금 방명록]
[조선국 역관사 순난추도비 건립실행위원회 명부]
[조선국 역관 및 종자 순난 영위 건립위원회]
[조선 역관사 순난추도비 배면부] 조선 역관사 순난추도비 건립위원회 / 1991년 3월 20일 세우다
[조선통신사의 소개와 왕래지도] 원래, 조선통신사는 우호를 나누는 사자(使者)라고 하는 이유로, 이웃나라와 우호를 다지는 것을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으로부터의 사자로 가는 사람은, 풍부한 글재주를 지닌 사람이 선발되었다.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 사후, 토쿠가와이에야스(徳川家康)의 명에 따라, 소(宗義智)씨는, 조선에의 강화교섭을 명받아 교섭을 개시하였다. 교섭은 난항이었지만, 1617년에 제 1회째의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의 회답겸 쇄환사(回答兼 刷還使)로서, 조선으로부터 내일(來日)하였다. 조선으로부터는, 정사(正使)로서, 여우길(呂祐吉) 등 일행 504명이 에도(江戶)에서 토쿠가와이에야스, 히데타다(秀忠)와 만났다.
그 후로, 1811년까지, 12회의 조선으로부터의 통신사가 일본에 방문하였다. 통신사 외교는, 1811년으로 마지막이 되었지만, 츠시마와 조선과의 외교는 메이지유신기까지 계속되었다.
[츠시마 근해의 해도] 부산항과 츠시마 북단과의 거리가 불과 49.5km인 것에 비하여, 츠시마 북단과 일본 큐슈북부 후쿠오카의 하카타항과의 거리는 145km나 된다.
[츠시마 섬내의 관광명소의 소개] 미우타하마(三宇田濱) 해변, 와니우라( 鰐浦)의 히토츠바타고(이팝나무), 나루타키(鳴滝 ; 우는 폭포), 슈시 모미지카이도(舟志紅葉街道 ; 슈시<지명>의 단풍길), 아지로노 렌콘(網代漣痕 ; 아지로의 잔물결화석 / 약 3,000년전에 퇴적된 지층으로 물결모양의 잔흔이, 높이 10~15m, 경사 30도, 길이 140m 정도에 걸쳐 남아있는 곳) , 킨노 오오이쵸(琴の大銀杏 ; 킨마을의 거목 은행나무, 약 1,500년 추정의 수령을 지닌 은행나무로 일본에서 최고령목)
[히토츠바타고] 사진은 이곳 "와니우라(鰐浦)지구 히토츠바타고자생지"의 꽃이 만개했을 때의 풍경사진이다.
-. 히토츠바타고는, 모쿠세이(木犀;박달나무류)과의 활엽고목(闊葉高木)으로 나무질이 매우 단단하여 "나타오라시(なたおらし)"라고 불리기도 하고, 하얗고 조그만 꽃을 나무위에 피워서 후미진 강을 환하게 밝힌다는 것에서 "우미테라시(海照らし)", 눈익지 않는 나무라는 것에서 "난쟈몬쟈(なんじゃもんじゃ)"라고도 불리는 것처럼, 많은 이름을 가진 나무이다.
-. わが庭の//ヒトツバタゴを見つつ思ふ//海のかなたの対馬の春を(와가니와노//히토츠바타고오미츠츠오모후//우미노카나타노츠시마노하루오 ; 우리집 뜰의 히토츠바타고를 바라보면서 바다 저쪽의 츠시마의 봄을 생각하네) --- 1984년 신년와카모임 개회식에서 쇼와(昭和)천황이 읊었다고 한다.
일본천황으로서 본토로부터 많이 떨어져 있는 츠시마섬을 그만큼 많이 생각하며 염려하고 있다는 의미가 담긴, 즉 자국의 영토에 대하여 가지는 깊은 사랑같은 것을 짧은 시구에 담아 낸 것이라고나 할까?, 내 나름의 와카감상의 시간을 가져봤다.
[한국과 츠시마의 역사에 관한 연대기]
[한국전망대 시설안내도] 이 지역은, 해협을 사이에 둔 한국과는 불과 49.5km의 극히 가까운 거리에 있다. 대륙문화의 근원을 찾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상호간 밀접하고도 중요한 위치적 관계에 있으며, 외교의 관문으로써 번창하였던 옛 시대는 물론, 그 교류의 등불은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국경의 땅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게 되는 이웃나라, 한국을 실제로 전망해보고, 역사에 입각한 감동을 느껴보길 바란다. ~~~ 1997년 4월 카미츠시마쵸(上対馬町)장 ~~~
-. 전망대의 계단을 올라서 유리문을 열고 내부에 들어서면, A구역은 한국-츠시마-하카타 간의 교통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B구역은 전망대 홀, C구역은 츠시마 관광명소의 소개란이다. 그리고 D구역은 한국 부산 및 가덕도의 바다건너 보이는 야경모형이 만들어져 있고, E구역은 츠시마와 조선통신사 등을 주로 한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야경"을 테마로 한 모형]
[한국과 일본 본토와의 가교인 츠시마] 역사적 사실 등을 통하여 한국과 일본열도 사이에서 츠시마가 어떠한 가교적 역할을 해왔는가 등의 내용을 소상히 설명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으로는 한국-츠시마-일본본토 사이의 교통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본 여행기의 상 1편에 소개된 내용이다.
[와니우라항과 일본 항공자위대기지] 일본의 항공자위대기지가 있는 우니지마(海栗島)가 가까이 있음에도 흐리게 보일 정도로 당일날의 츠시마 날씨는 다소 흐려서 한국전망대의 의미를 만끽하지 못했다.
[와니우라(鰐浦)항구의 모습] 시바료타로 선생의 "이키*츠시마 가는 길(壱岐*対馬の道)"이라는 여행기를 읽으며,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토쿠가와 바쿠후 시대에 일본이 개항하게 된 국제항구는 "나가사키(長崎)항"과 바로 이곳 츠시마의 "와니우라(鰐浦)항"이 하나 더 있었다는 것이다. 무역항으로 열도록 에도(토쿠가와) 바쿠후가 허락하였는 데, 이곳 와니우라항은 지리적으로 한국으로부터 사스나항보다 멀고 지형적으로 불리한 조건 등의 이유 때문에 얼마 이용하지 못하고, 사스나항으로 개항지가 바뀌었다(서기 1672년)고 한다.
물론, 무역항으로 허가한 것은 츠시마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식량이 항상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식량을 어디선가 들여와야 하는 데, 일본 본토는 너무 멀어서 어려웠고, 따라서 한국의 부산에서 식량을 들여와야 했다. 그런 이유로 츠시마 도주가 바쿠후에 건의하여 이루어졌는 데, 부산에는 조선조정에서 "초량왜관"이라는 한정된 대외무역거래구역을 만들어 놓았고, 츠시마에는 와니우라항 대신에 사스나(佐須那)항을 개항지로 정해둔 것이다. 하지만, 조선조정에서는 무역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이곳 사스나항까지 무역일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단지 일본인(주로, 츠시마민)들만 왜관을 자주 드나들며 무역거래를 행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조선통신사의 왕래시나 기타 행사시(츠시마도주 경조사 등)에만 사스나항을 통하여 출입국 하였다고 한다. 일본 본토로 가기 위해서는, 부산에서 출발하여 최단거리인 사스나를 경유, 다음으로는 이즈하라, 이키섬의 히타카츠, 사가켄의 카라츠항, 시모노세키를 통하여 세토내해로 들어갔다고 한다.
[사진의 히토츠바타고의 아름다운 모습과 기념촬영] 꽃피는 4~5월은 아니지만, 그 때를 대신하여 사진의 모습과 기념촬영 시간을 가져봤다
[한국전망대 정문의 계단위에서의 포즈] 촬영해놓고 보니 제법 어울리는 한 쌍이다
[한국전망대 출입계단 아래쪽의 옥외 1층 전망대에서 부산항을 바라보며 촬영] 전망대의 2층구조물을 지지하고 있는 1층의 기둥과 처마가 액자의 틀이 되어 아름다운 한 편의 작품사진이 되다. 보이는 섬은 일본 항공자위대기지가 소재한 우니지마(海栗島)이다
[전망대 2층에서 촬영한 산기슭의 마을모습] 2층의 전망대에서 아래쪽을 내려다 보니, 우리가 있는 이곳의 산기슭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와니우라마을의 모습이다
[한국전망대 관람을 마치고 귀환길에 오르기 전의 우리 애마] 오늘의 선녀부인께서는 끝까지 스스로가 택한 자원봉사임무에 충실하기 위하여 여전히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다
[한국전망대 입구] 전망대에 오르면서 촬영하지 못하여 돌아오는 길에 촬영하였다. 이제 석양의 클라이막스에서 최후의 작열함을 보이는 태양신의 별똥빛이 아름답다
[한국전망소의 정문] 석양속에 작열하는 태양의 별똥빛에 반사되어 비치는 한국전망소 정문의 모습이 아름답게 돋보인다
[츠시마북단에서 츠시마종단도로를 타고 이즈하라로의 귀환길] 와니우라의 한국전망대에서의 출발시각은 거의 오후 6시가 되어서다. 가는 길은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을 이용한단다. 츠시마 중간쯤의 인공운하가 있는 만제키바시의 병목구간에 이르기 전에 토요타마쵸의 우라소코(浦底)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382번 츠시마 종단 국도와 이어질 때까지의 우리가 이용할 구간은 츠시마 북섬의 와니우라포구와는 반대해안쪽의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같은 도로운행의 지루함을 피하는 것도 있지만, 지름길이면서 좀더 많은 볼거리를 보여주기 위한 사이키부인의 아름다운 마음의 배려이리라.
우리 차는 불과 잠깐 사이에 히타카츠항으로 이어지는 교차로를 지나친다. 여행을 하며 잊지 않았던 것은, 1차적으로 이키섬에서 언급했던 "카츠(勝)"라는 글자를 지는 지명의 유래에 대한 수수께끼의 해결이다. 이키섬의 카츠모토(勝本)항에 관한 것은 나의 예상에 적중하여 이전편에서 그 내용을 밝혔고, 이제 츠시마의 북편 "히타카츠(比田勝)"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츠시마의 히타카츠항에 대한 지명유래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얘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내가 예상했던 한반도를 향하여 가까운 쪽에 "승(勝;이길 승)"자를 지닌 지명이 있다는 것은 분명히 "국경의 의미로 전쟁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유래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츠시마의 히타카츠는 그러한 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음에 나의 예상과는 무관한 것으로 결론지으며, 나의 퍼즐게임은 50:50으로 싱거운 무승부 게임이 된 것이다. 이것은 물론, 나만의 비밀수수께끼이기 때문에 혼자만의 얘기다.
히타카츠항 진입교차로를 지나치면서 도로는 이제 협소해진다. 중앙선이 없는 지방도로써 경차정도는 겨우 빗겨갈 수 있을 정도의 도로폭이다. 10여분쯤 지났을까, 도로는 비록 협소하지만 도로변의 녹음이 너무도 좋다. 드라이브하면서 데이트를 즐기기에 너무도 좋은 곳이란다. 이미, 한국전망소에서 소개된 곳이지만, 슈시모미지카이도(舟志紅葉街道 ; 슈시마을의 단풍길)라고 하는 가을단풍이 아주 멋스러운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라고 한다. 단풍철은 아니지만 제법 운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편으로는 너무도 음습하여, 옛날같은 산적시대를 생각하면 오히려 무서웁기 짝이 없는 그런 구간이라는 생각도 머리가 섬뜩하며 하게 된다. 도로번호는 39호선 지방도이다.
출발후 40분여를 지났을까, 갑자기 차를 멈추기에 살펴보니 미처 내가 생각지 못했던 볼만한 명소임을 알 수 있었다. "킨노오오이쵸(琴の大銀杏)"라는 일본 제일의 고목은행나무가 켄(縣)지정 주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되면서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었다. 무려 수령이 1,200~1,500년 정도에 이르는 아주 희귀한 은행나무였다. 잠시 휴식도 취할 겸 돌아보니 장구한 역사를 지켜오며 갖은 고난을 다겪은 듯, 이 은행나무도 사람만큼이나 아픈 시절이 많았던 것이다. 에도시대 중후기에는 낙뢰로 인하여 몸통이 크게 상처를 입었고, 메이지 초기에는 인근의 화재로 불이 옮겨붙어 가지에 많은 몸살을 안은 것 같았다. 일본 최고령 은행나무인 역사의 산증인 할아버지께 겸허함으로 복을 빌면서 아름다운 포즈타임을 가져보기도 한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침, 의외의 볼거리를 볼 수 있어 좋았다면서 부인께 인사를 하니, 이제 오늘의 볼거리는 이것이 마지막이란다. 하긴, 이제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니 당연한 것이겠다. 그러면서, 나보고는 한 숨 깊이 자라고 추근댄다. 하지만, 명색이 사나이임에 의리와 인내는 지켜야 되겠기에 잠깐 조는 것으로 피로를 대신한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차는 츠시마 종단국도를 진입하고, 만제키바시를 지나 이즈하라에 도착하게 된다.
하지만, 한 가지 숙제가 남았다. 사이키 여사님의 차가 쿠타마을의 우치야마고개에 있기 때문에 거기까지 다시 움직여야 된다. 시간적으로는 10분도 안걸리는 거리지만, 조금은 번거로운 일이다. 숙소는 이미 사이키부인께서 본인이 묶고있는 곳으로 예약을 해놓았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다. 시간은 저녁 8시경에 이르고 있었을까? 우리는 다시 사이키부인의 승용차가 주차된 곳으로 이동하여 함께 되돌아 온다. 사이키부인의 차는 이미 앞에 보이지 않고,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밤길이니만큼 안전하게 운전하여 숙소에 도착한다.
숙소는 비즈네스호텔로 2층방이었다. 숙박비를 계산하고 체크인을 한 후에, 우선은 즐거운 저녁식사를 위하여 식당으로 이동한다. 식당은 첫날밤 사이키부인과의 인연이 비롯된 그 식당이다. 형님과 사이키부인은 생선조림정식을, 나는 신선한 회정식을 주문하니, 아주 먹음직스러운 저녁식사가 테이블을 장식한다. 우리나라 식단같으면, 밑만찬으로 테이블이 가득할 테지만, 일본음식은 주메뉴에 포커스를 주기 때문에 우리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싱싱한 생선회가 테이블에 오르니 팔딱팔딱 시각미와 함께 푸짐함이 그득하다. 일본청주를 한 잔씩 건배하니, 하루의 여독이 싹 가시는 기분이다.
오늘의 마지막 시간을 정리하면서, 사이키부인께는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하면서, 아울러는 오늘의 이 신세를 한국에 오시면은 꼭 갑겠노라고 약속한다. 사이키부인의 한국친구분께는 다시 한 번 오늘의 이야기를 전하며, 한글로 된 편지의 요지를 아주 멋있게 통역하여 부인께 알려주었다고 하니, 오히려 고마운 인사를 받게 된 처지다.
얼큰하게 홍조된 얼굴의 모습이 오늘의 자화상이 된 우리는, 각자 개인의 영역으로 돌아가 편안한 자기의 시간을 갖는다. 따끈한 샤워기의 물은 편안한 오늘밤의 피로회복제가 되어 주기에 충분하다. 포근한 침대위의 육신은 그저 밤신의 인도하심에 이끌려 내일을 향한 몽중극락(夢中極樂) 세계로의 우주선에 오른다.
[히토츠바타고 터널] 2001년도에 준공되었고, 터널길이는 360미터이다. 히토츠바타고(이팝나무) 꽃이 만개한 모습의 타일벽화가 터널입구의 벽을 장식하고 있다
[슈시(舟志;지명)의 모미지카이도(紅葉街道)] 슈시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형성된 단풍나무로가 으쓱한 분위기이면서도 드라이브를 즐기는 자들의 운치를 더해준다. 가을 단풍이 무르익을 무렵의 드라이브코스로 만점이란다
[이즈하라 귀환길에 만난 일본제일 수령(樹齡;약 1500년)의 은행나무]
"일본 제일 수령의 킨마을 거목은행나무(日本一樹齡 琴<마을이름>の大銀杏)"라는 간판과 은행나무 몸통과 가지를 바치고 있는 철재빔이 노거수임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거창한 모습이다.
[킨노오오이쵸 진쟈(琴の大銀杏神社)] 은행나무 큰줄기 아래로 조그만 진쟈(神社)가 빨간색 토리이(鳥居)와 함께 서있다.
[킨(琴)마을의 거목은행나무 전신모습] 은행나무 전신을 담고자 했으나 그래도 가지끝은 잘린다. 아래쪽 몸통줄기에 비하여 가지가 많아서인지 곧은 줄기는 수령에 비하여 그다지 굵지않고 크지도 않는 듯 보인다
[낙뢰와 화재로 훼손된 은행나무 줄기의 모습] 낙뢰와 화재로 훼손된 은행나무 줄기의 모습이 장구한 긴 역사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다고나 할까?
[킨노오오이쵸(琴の大銀杏 ; 킨마을의 거목은행나무. 이 지역의 이름인 "킨(琴)"마을의 나무라는 의미로 이와같이 이름이 지어진 것 같다)]
* 켄(県)지정 천연기념물
-. 지정연도 : 쇼와(昭和) 36년(서기 1961년) 11월 24일
-. 츠시마섬 전역에 알려진 츠시마의 명목(名木)이다. 츠시마의 지츠키(地搗き;달구질)노래에 "킨(琴)노 이쵸(銀杏)노 키(木) 츠시마(対馬)노 오야키(親木), 도(胴)노 마와(周)리 산쥬(三十)토 고히로(五尋)<거문고 은행나무 츠시마의 어버이나무, 나무둘레 삼십과 다섯 발("발 혹은 길"은 길이 재는 단위로 약 1.8m로 성인이 양팔을 벌린 길이정도)>"라고 불리어 왔다. 눈높이 정도에서의 나무둘레 12.5m, 나무크기 약 23m에 달하는 수컷목(雄木)으로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은행나무이다. (1위로 큰 은행나무는 이와테켄<岩手県> 쵸센지<長泉寺>에 있다)
서기 1798년에 낙뢰에 의해 화재가 발생하여 몸통속에 동굴이 생겼다. 게다가 메이지 초년(서기1868년)에 민가의 화재로 불길이 옮겨붙어 일부가 소실되기도 하였다.
수령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1,200년 혹은 1,500년으로 보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은행나무(킨노오오이쵸)는 일본 최고(最古)의 은행목이라는 연구보고가 있다.
-. 헤이세이(平成) 21년(서기 2009년) 1월 12일, 츠시마시 교육위원회
* 우리나라에도 은행나무는 많은 데, 이같은 노거수(老巨樹)가 있을까 하여 찾아보았다. 알아보니,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의 용문사에 수령 약 1,100년의 것이 있는데, 천연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었다. 이 나무는 여러 전설이 있는 데, 그 하나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 잃은 슬픔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심었다고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신라고승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자라서 이 은행나무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나무가 서있는 용문사의 유래도 두 가지여서 신라 신덕왕 2년에 대경대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또 경순왕이 친히 행차하여 이 절을 세웠다고도 한다. 이 때를 기준으로 이 은행나무의 수령을 1,100년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기타 "신목(神木)", "천왕목(天王木)"이라 하여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있다고 한다.
* 은행나무의 한자이름인 "은행(銀杏)"의 유래를 찾아보았다. 씨가 은처럼 흰색이고 노랑색 열매의 겉모양이 살구와 비슷하기 때문에 "은행(銀杏)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공룡시대부터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화석나무"라고도 한단다.
[현재 위치에서의 츠시마관광 안내판]
[킨마을의 거목은행나무와의 아름다운 포즈타임] "이 은행나무의 정기를 이어받아 오래오래 장수하도록 킨노오오이쵸 신께서 굽어살펴 주소서!"라고 하면서 카메라 렌즈에 잡힌 나의 익살스런 모습이 추억스럽다
[킨마을 거목은행나무 할머니의 금불지피는 모습] 재래식 부엌에서 금불을 지피고 있는 시골할머니의 모습이 이채롭다. 궁금한 이야기에 대하여 듣고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시간도 또 분위기도 여의치 않았다
[이즈하라시내에서의 즐거운 저녁만찬의 시간] 메뉴를 각각 다른 것으로 하였더니 식탁이 조금 푸짐해 보인다. 싱싱한 바다회의 저녁궁합은 천하일미였다
[먹고남은 생선뼈의 후식요리] 접시에 담겨진 모습 자체만으로도 싱싱함 그대로를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남은 생선뼈를 바라보며, 우리나라 횟짐의 매운탕후식 얘기를 하였더니, 잠깐사이에 주방그릴에 구워온다. 적당하게 마치 먹기 좋을 정도로 구워진 생선뼈가 약간씩 붙어있는 고깃살과 함께 술안주에 그만이다. 오늘 처음 또다른 일본요리의 이색진미(異色珍味)를 맛보게 되어 추억이다
[씨사이드 어넥스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 여행 마지막 밤을 보낸 씨사이드 어넥스 비즈니스호텔의 모습이다. 사이키 선녀부인의 소개로 이즈하라 번화가에 소재한 이 호텔에서 묶게 되었다. 지난밤의 피로와 당일의 여독이 겹쳐 저녁식사중의 한잔 술에 일찍이 깊은 잠에 빠졌다
~~~ 다음 이야기는 츠시마*이키섬 기행 마지막편인 하2편으로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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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등'을 쵸친이라고 읽는군요. 츠시마의 정경이 아름답네요~
진주시의 제등축제가 유명하지요. 심플한 여행이 취향이라서 클래식 카메라의 예리한 촬영기술은 발휘하지 못합니다. 잘봐주시니 고맙습니다~~~
허걱 정말 기네요. 카페 사상 가장 긴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글이 정말 길어서 한 번에 다 못 읽을 정도네요. 이 글을 쓰신 것이 더 대단합니다. 완벽 정독하겠습니다.
여유있는 시간여행이 되지 못하여 좀더 풍부한 내용의 글을 엮지 못하였습니다. 부족하지만, 도움되시는 내용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좋은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우우와아-피크닉님. 안녕하셨습니까? 이 여행기가 봄에 2편까지 올려주셨었는데 궁금하던 차에 이렇게 나왔네요.
세상에 사진만 근 200장 이시고, 이 글을 읽는데만 꼬박 1시간이 걸렸습니다.
5편으로 나누어 올리시는 것이 다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통 여행기에 사진 로딩 갯수가 50개가 한도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200개를 올리실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이 글은 문화기행을 도시, 유적, 전원, 해안 등 여러 측면에서 조명하고 계시네요.
제목을 안보고 이 글만 보면 쓰시마섬인지 모를 정도 같습니다.
하루의 반나절 일정을 담으신 것 같은데 사진들을 많이 촬영하신 것 같습니다.
정성스럽게 올리신 글 잘 보았습니다.
어느새 사진의 장수까지 헤아리셨군요.
자주 이용하다보니 많은 양의 사진을 올리는 방법이 생기더군요.
저는 선각자들의 많은 여행기를 독서하면서, 저 나름의 여행기 쓰는 법을 연구해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일기형식의 글이 좋을 것같아 엮어보았는 데,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시니 용기가 솟는군요.
이제, 마지막 편이 남았는 데, 정리되는대로 올릴까 합니다.
모쪼록, 끝까지 성원해 주시고 좋은 충고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무얼 하시는 분인지 궁금합니다. 역사를 가르치시는 학교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아닐까 추정하여 봅니다.
반갑습니다.
그저 아마추어 수준의 보통사람일 뿐입니다.
인생의 황금기에 알 수 없는 제 3의 훼방꾼들 때문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그 시행착오의 여파가 오늘까지 이어오면서 스스로의 생에 좋은 깨달음을 안겨주었지요.
"인생은 여행처럼 사는 것이다"라는 깨달음을 말이죠.
여행을 하는 데는 나름의 역사상식이 필요한 듯 하여 취미를 가지고 연구하는 자세와 함께 꾸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직업적으로 역사전문가는 아닙니다.
그저 개인의 취향차원에서 습작의 습관을 기른다고나 할까요?
과분한 댓글의 말씀 겸허하게 충고로 받아들일까 합니다.
모쪼록, 일철련의 좋은 추억과 인연이 영원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