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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점 3 루리코의 죽음
루리코는 강변에 엎드린 채 쓰러져 있었다. 조그마한 등의 흰 앞치마 끈이 바람결에 나비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루리코!”
게이조는 무릎을 꿇고 아이를 안아 올려 얼굴을 들여바보았다. 창백했다. 그러나 죽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맥박을 짚어 보았다. 손의 떨림이 멎지 않았다.
“앗, 맥박이 뛴다!”
그러나 그것은 방금 뛰어오느라 거칠게 뛰고 있는 게이조 자신의 손가락 맥박이었다. 뒤따라온 무라이가 손을 내밀어 감긴 눈꺼풀을 열어 보았다. 눈동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루리코가 핏기가 가신 입술을 약간 벌리고 있었다. 조금 드러나 보이는 충치가 애처롭게 여겨졌다. 게이조는 멍하니 서서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쓰에가 달려와 게이조의 몸에 부딪히듯히 하며 루리코를 껴안았다.
“루리코! 루리코!”
나쓰에가 루리코를 세차게 흔들었다.
“앗, 이게 뭐죠?”
외과의 마쓰다가 몸을 굽혀 루리코의 목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원장님, 목을 졸렸어요. 이건……”
마쓰다가 외쳤다.
루리코의 목에는 분명히 목 졸라 죽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죽임을 당했다고, 루리코가?”
게이조는 루리코가 죽임을 당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심장마비나 다른 어떤 이유로 갑자기 죽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어쩐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죽임을 당했다고요?”
나쓰에는 이렇게 외치고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무라이가 손을 뻗아 가까스로 나쓰에를 부축했다.
“선생님 싫어! 엄마도 싫어! 아무도 나하고 놀아 주지 않아.”하고 투정을 부리던 루리코의 목소리를 나쓰에는 다시 들은 것만 같았다.
게이조는 무라이의 무릎 위에서 정신을 잃은 나쓰에를 보고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어느 한 구석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부분은 매우 조용했다. 한없이 허무했다. 의사인 그는 지금까지 몇십 명의 시체를 보아 왔다. 그런데 그 어떤 죽음보다 루리코의 죽음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꾸고 있는 꿈 같은 느낌이었다.
멍하니 쳐다본 하늘에는 흰 구름이 서서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도 덥겠구나.’
게이조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무심히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임종 때 시계를 보는 의사로서의 습관인지도 몰랐다.
“여섯 시 오 분이야.”
그가 나지하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가정부인 쓰기코와 어느새 모여든 이웃의 여인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어서 어른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찢어지는 듯한 도오루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오루가 울고 있다.’
게이조는 갑자기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그는 문득 루리코의 죽음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우두커니 강변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마쓰다가 루리코를 조심스레 강변에 눞히는 것도, 무라이가 누군가와 함께 나쓰에를 데리고 가는 것도 그냥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원장님.”
게이조를 주시하고 있던 마쓰다가 불렀다.
“네.”
“경찰에 연락했습니다. 곧 사람이 오리라고 생각하지만…….”
“………….”
“원장님, 경찰에……..”
“아, 그래요.”
게이조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게이조는 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자신의 움직임이 느리다는 것을 느끼면서 루리코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작고 싸늘한 손이었다.
‘죽었구나!’
자신의 손가락은 따뜻하게 살아 있는데 피부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루리코의 손가락은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그것이 게이조에게는 무척이나 이상하게 여겨졌다.
‘죽었어.’
게이조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는 자식이 죽임을 당했다는, 있을 수 없는 참혹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혼한 이후로 자신들의 앞날에 이런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게이조는 지금 비로소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알게 된 것 같았다.
도오루의 울음소리가 멀어졌다. 게이조가 돌아보니 쓰기코에게 안겨 흐느끼는 도오루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죽였을까?’
게이조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무엇 때문에, 대체 누가 아무 죄도 없는 루리코를 죽였을까?’
이렇게 생각하자 게이조는 증오심 때문에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듯했다.
그는 아침부터 쨍쨍 내리쬐는 태양을 쳐다보았다.
‘이 태양 아래 루리코를 죽인 놈이 있다. 그놈은 지금 어딘가에 멀쩡하게 살아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게이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국 것으로 보이는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머리 위를 지나갔다. 비정한 울림이었다.
루리코의 장례식을 치른 지도 벌써 열흘이 지났다.
일찌감치 병원에서 돌아온 게이조는 이층 서재 책상에 기대어 루리코를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루리코를 죽였을까, 무엇 때문에 죽였을까?’
사건이 일어난 후로 수도 없이 되뇌인 것을 그는 지금 또다시 생각했다. 장례식 때였다. 분향을 할 차례가 되어 무라이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고개를 깊숙이 떨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게이조는 무의식중에 깜짝 놀라 무라이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이지만 무라이가 범인이 아닐까 하고 의심했던 것이다.
게이조는 지금 그때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서재 창문에서는 10미터쯤 떨어진 바로 앞에 키가 큰 스트로브소나무 숲이 보였다. 게이조는 컴컴한 나무 숲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그 숲속의 작은 길을 범인의 손에 이끌려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코 따라갔을 루리코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지금도 범인을 무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키가 큰 무라이가 루리코의 손을 끌고 허리를 굽힌 채 걸어가는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그놈말고 누가 루리코를 데리고 갈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무라이가 루리코를 죽일 만한 이유를 생각해 낼 수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무라이가 범인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무라이의 그 크고 흰 손이 루리코의 목을 조르는 광경까지도 눈앞에 떠 올랐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창문 앞에 노란 풍선이 둥실 떠올랐다. 고무 풍선은 흰 실을 매달고 가볍게 흔들리면서 바람에 날려 창문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게이조는 갑자기 눈물이 복받쳐 책상 위에 엎드렸다. 노란 풍선이 가엾은 루리코의 영혼처럼 생각되어 루리코가 죽은 슬픔이 열흘이 지난 지금에야 비로소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아내도 도오루도 집도 지위도 그 밖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버린다 해도 이보다는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 살 난 루리코가 혼자서 컴컴한 숲 저쪽 강변에서 정체 모를 어떤 놈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 가엾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게이조는 이를 악물고 소리를 죽여 가며 마냥 울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아침의 일이었다. 루리코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출장 가는 게이조의 손에 매달렸다.
“아빠 손은 진짜 커.”
루리코는 조그마한 손을 게이조의 손에 얹으며 말했다.
그때 게이조는 투명하고 희디흰 루리코의 손에서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그것이 루리코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빠 손은 진짜 커.”
이 한마디가 루리코의 짧은 생애에서 그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게이조는 눈물을 닦은 손수건을 한동안 눈에 대고 있다가 얼굴을 들고 자기 손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게이조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자기 손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손은 루리코를 구하지 못했다. 크기만 할 뿐 아무 소용도 없었다.
“아빠 손은 진짜 커.”
하고 말한 루리코는 이 아버지의 손을 믿음직스럽게 느끼고 있었을까, 아니면 다만 크다는 것만 느꼈을까?
게이조의 손에는 루리코에 대한 추억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루리코를 안아 준 일이 과연 있었던가?’
하고 게이조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루리코는 1943년 봄에 태어났다. 전쟁 중이라 병원이 무척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였다. 게이조의 아버지가 일손이 모자라 과로로 쓰러지고, 아직 스물여덟밖에 되지 않은 게이조가 병원 경영을 물려받은 해였다.
의사도 간호사도 약품도 그리고 식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부족한 가운데 게이조는 한때는 병원 문을 아주 닫아 버릴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전쟁이 끝나 예금이 봉쇄되고 새 돈이 나오고 나서부터 경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20년동안이나 자리를 지켜온 사무장의 능란한 수완이 아니었던들 그 위기를 넘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름답던 병원의 정원은 감자밭으로 변하고, 입원 환자들은 직접 식사를 해결해야만 했다. 병원 안팎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게이조는 아침 일찍 출근하고 밤늦게까지 알하는 것으로 일손의 부족을 메워야 했다. 그런 고달픈 나날 속에서 게이조는 느긋한 마음으로 루리코를 마음껏 껴안아 주지도 못했다.
겨우 3년밖에 살지 못한 루리코에게도 전쟁의 영향은 크게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게이조는 새삼스럽게 절실히 느끼면서 루리코를 안아 본 적이 그다지 없는 자기의 두 손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버지인 자신의 손에 제대로 안겨 본 적이 없었던 루리코가 어쩐지 자신과 인연이 멀고 복이 없었다고 생각하니 가엾어서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어리고 가느다란 목이 어떤 놈의 손에 졸려 무참히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자 게이조는 큰소리로 통곡을 하고 싶었다.
‘루리코를 죽인 범인의 손은 어떤 손일까?’
그는 다시 무라이가 생각났다. 그러나 병원에서 만나도 무라이는 사건 전과 그다지 달라진 데가 없었다.
게이조는 아무 근거도 없는 이런 의심을 부끄럽게 생각하고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래층에 누워 있는 나쓰에를 위로해 주려는 마음에서였다. 나쓰에는 루리코가 죽은 후로 줄곧 자리에 누워 있었다.
게이조는 의자에서 일어나 잠시 망설였다. 그 날 무라이와 나쓰에게 함께 집안에 있으면서 루리코를 볕이 뜨거운 바깥으로 쫓아낸 것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게이조는 아내를 심하게 추궁하고 싶었다. 탓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오늘가지 꾹 참아 왔다. 나쓰에가 줄곧 자리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가엾은 루리코를 생각하며 마냥 울고 난 다음이라 감정이 격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아내가 미웠다.
강변에서 나쓰에는 무라이에게 안기다시피 하여 기절했었다. 지금에 와서 게이조는 그 일을 질투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내를 얻은 뒤부터 게이조의 타고난 질투심은 더욱 심해지는 것 같았다. 평소에도 외출에서 돌아온 나쓰에의 얼굴이 유난히 생기가 있어 보이면,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군.’
하고 게이조는 의혹에 사로잡혀 혼자 괴로워하곤 했다.
“꽤 생기 있어 보이는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소?”
하고 가볍게 한 마디 물어도 될 것을 조금이라도 아내를 의심하면 그렇게 의심한 데 대한 자기 혐오를 느껴 물을 수조차 없었다.
나쓰에도 입이 무거운 편이어서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성격이 때로는 게이조를 괴롭혔다.
지금도 게이조는 루리코가 죽임을 당한 날 나쓰에와 무라이가 응접실에 단둘이 있었다는 사실에 매달리고 있었다.
“직접 손을 댄 것은 아니지만 무라이와 나쓰에는 루리코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게이조는 소리내어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서재에서 나왔다. 계단을 내려서면 복도가 있고 오른쪽엔 응접실, 거실, 부엌, 그 맞은편에 부엌문이 있고 복도의 왼쪽에는 객실과 침실이 있었다. 또 그 맞은편에 넓은 마루가 기역자형으로 되어 가정부 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니 나쓰에는 문 쪽으로 등을 돌리고 요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게이조가 들어왔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그녀는 가만히 숲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쓰에!”
감정을 실어 나즈막히 소리를 질렀을 때 타월지로 만든 잠옷을 걸친 나쓰에의 어깨에서 느닷없이 흰나비 한 마리가 날아갔다. 그것은 나쓰에의 어깨의 일부가 흰나비가 되어 훌쩍 날아 오른 것 같은 기묘한 인상을 주었다.
나비는 어리둥절한 듯이 두세 차례 방안을 왔다갔다하더니 방을 가로질러 밝은 뜰을 향해 날아갔다.
“나쓰에.”
게이조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그는 아내가 가엾게 여겨졌다.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눈에 띄게 여윈 아내의 어깨에서 흰 나비가 날아 오르는 것을 보자 뜻하지 않은 애정이 가슴에 꽉 차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아내도 깊은 슬픔 속에서 무라이와의 일을 후회하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게이조는 루리코를 생각할 때마다 무라이와 아내에 대한 증오심이 깊어지는 것을 억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나쓰에가 아주 애처롭게 생각되었다. 불쌍하다. 불러도 여전히 시선이 숲 쪽을 향한 채 생각에 잠겨 있는 나쓰에의 슬픔이 그대로 게이조의 가슴에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나쓰에.”
다시 아내를 불렀을 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와다 형사입니다. 쓰지구치 씨, 범인을 알아냈어요!”
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리코의 사건으로 가까워진 와다 형사의 목소리여싿.
“범인을 알아냈다고요?”
게이조는 무라이의 이름이 문득 생각났다.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다리가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와다 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뭐요? 범인이 누구라고요?”
“아, 여보세요, 감이 먼데요. 잘 들려요.?”
“여보세요, 잘 들려요. 범인이 누구라고요?”
“사이시 쓰치오(佐石土雄), 사토(佐藤)의 사(佐)에 돌(石)이라는 뜻의, 사이시 쓰치오라는 사나이에 대해 뭐 짚이는 데라도 있나요?”
무라이는 아니었다.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게이조는 무라이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무라이가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무라이였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기대가 어긋나자 게이조는 한동안 멍해졌다.
‘사이시 쓰치오?’
어디선가 한 번 들은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많은 환자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할 수는 없었기에 뭐 짚이는 데가 있는냐고 묻는 형사의 말에 그런 것 같기도 하여 없다고 잘라서 말하기 어려웠다.
“뭐 짚이는 데라도 있나요?”
게이조의 답변이 늦어지자 와다 형사가 약간 다급하게 물었다.
“아니, 없는데요…….”
어쩌면 한 번쯤 진찰한 적이 있는 환자일지도 모른다.
“없어요.”
하고 거듭 말하고 나서도 게이조는 뒤가 개운치 않았다. 어쩌면 의외로 자주 보았던 사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까?”
“그러네요. 하긴 제 직업이 직업이니 만큼 일단 진료카드를 살펴보고 나서 말씀드리지요. 그런데 그 사이시 쓰치오는 뭐 하는 놈입니까? 어디서 살죠?”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 게이조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사나이에게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증오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격렬한 증오심 때문에 온몸이 갑자기 팽창되는 듯했다. 그놈에게 와락 덤벼들어 목을 졸라 죽여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도 전혀 죄가 되지 않는 듯이 죄악감이 따르지 않는 살의에 가득 찬 나머지 수화기를 잡은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실은 말이죠, 사이시 쓰치오는 죽었습니다.”
“아니, 죽었다고요?”
게이조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그놈의 목을 졸라 죽여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참이 아닌가.
“유감 천만입니다. 유치장에서 목을 맸답니다.”
“그건 또 무슨 영문입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게이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놈은 무엇 때문에, 무슨 원한이 사무쳐서 루리코를 죽였나요?”
“글쎄요, 삿포로에서 걸려 온 전화라 자세한 건 알 수 없습니다만 밝혀지는 즉시 알려 드리죠.”
게이조는 수화기를 기에 댄 채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전화가 끊긴 것을 알아차리고 그는 그제서야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무엇 때문에 루리코는 사이시 쓰치오라는 알지도 못하는 사나이에게 목이 졸려 죽어야 했는가?’
그것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수수께끼였다.
‘무엇 때문에 루리코는 그런 사나이를 따라 강변까지 갔을까?’
게이조는 아무래도 그 날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날 집에는 무라이와 나쓰에가 단둘이 있었을 뿐이다.
쓰기코와 도오루가 집에 없었다면 유부녀인 나쓰에에게 적어도 루리코를 곁에 둘 정도의 마음가짐은 있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도 없는 집안에 외간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루리코는 말이에요, 상대만 해주면 하루 종일이라도 집안에서 잘 놀아요.”하고 언젠가 나쓰에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 루리코를 집안에서 놀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루리코를 얼굴도 모르는 사나이의 손에 내맡긴 것은 다름아닌 무라이와 나쓰에가 아닌가. 범인인 사이시라는 사나이도 물론 밉다. 그런데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 상대는 게이조가 한 마디 욕설도 퍼붓기 전에 자살해 버렸다. 이렇게 되고 보니 게이조로서는 무라이와 나쓰에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이 울분을 풀 수 있는 길이었다.
침실로 돌아와 보니 나쓰에는 여전히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등을 돌려 앉아 있었다. 복도 하나를 사이에 둔 거실에서 받은 전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러나 나쓰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범인에 대해 알고 싶지도 않은가?’
증오에 찬 눈길로 나쓰에를 노려보던 게이조는 순간 불안해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아내를 다시 바라본 게이조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까부터 같은 자세로 가만히 앉아 있는 그 모습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여겨지지 않았다.
게이조는 황급히 모란빛 이불을 밟고 가서 나쓰에의 어깨를 와락 껴안았다.
“나쓰에!”
얼빠진 눈이었다. 죽은 사람의 눈보다는 더 얼이 빠져 있었다.
“범인을 알아냈소!”
나쓰에는 약간 고개를 흔들었다.
“범인은 죽었어.”
나쓰에는 천천히 게이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다시 눈길로 뜰로 돌리는가 싶더니 그 눈이 이상하게 빛났다.
“아, 저, 저기 루리코가.”
나쓰에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바보 같으니!”
게이조는 허우적거리는 나쓰에를 힘껏 껴안았다.
“루리코에게 가게 해줘요. 저기 저 마가목나무 아래에….”
게이조는 나쓰에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미쳤소? 나쓰에, 루리코는 죽었소. 뜰에 있을 리가 없잖소?”
게이조는 딴 사람처럼 여윈 나쓰에의 가냘픈 어깨를 얼떨결에 꽉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