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학자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이란 “아군의 뜻을 완벽하게 달성하기 위하여 적군을 강제로 제압하려는 폭력행위”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짐승과 다른 점은 개인 간,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이해, 양보, 합리성, 타협 등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 간의 갈등을 물리적인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 중에는 사람들이 이성 없는 짐승보다 더 악하고 잔인해져서 평소에 할 수 없는 짓들을 감행한다. 예의, 도덕, 상식, 교양이 사라지고 인간에 잠재하는 모든 악이 집합해서 표현된다. 전쟁의 야만성을 경험한 철학자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래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했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 일어난다. 지난 5600여 년간 14,500번의 전쟁이 있었고 역사의 91.6%가 전쟁으로 채워졌으며, 지난 3,400여 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86년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동안 약 35억 명, 20세기에만 전쟁과 혁명으로 약 9억 명이 살상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평화조차도 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대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평화는 전쟁에 의해서 얻어진다,” “평화도 전쟁을 준비한다.”라는 주장들이 있다. 인간이 죄인이란 사실을 전쟁이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
예수님은 칼을 뺀 베드로를 꾸짖으셨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평화주의 혹은 반전론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전쟁은 비참하고 의도하지 않았던 온갖 악이 다 저질러져서 인간이 악마처럼 되는 것을 고려하면 평화주의의 주장은 옳고 고상하다.
그러나 평화주의는 너무 비현실적이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인간 집단은 더 이기적이다. 평화주의는 악한 자에게 모든 이익을 다 안겨주고, 그들의 악을 더욱 조장하는 매우 무책임한 결과를 가져온다. 적이 공격해도 무기를 들지 않고 다른 사람이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 대는 것은 개인에게는 요구될 수 있다. 그러나 집단 간에는 적용될 수 없다. 다른 구성원들의 이해가 같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이상 때문에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도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가?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많이 고심했다. 그 결과가 바로 소위 ‘정의로운 전쟁론’이다. 역사상 정의로운 전쟁이론을 제일 먼저 제시한 사람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였고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이론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의 이론이다. 키케로는 (1) 전쟁의 유일한 정당성은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고, (2) 전쟁은 모든 협상이 다 실패했을 때 수행하는 최후의 선택이며, (3) 전쟁은 적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하고, (4) 전쟁의 목적은 정복이나 권력이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며, (5) 전쟁에서 포로나 항복하는 자들을 보호해야 하고, (6) 전쟁은 다만 법적으로 군인이 된 자들만이 관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지침은 그 본래의 의도대로 준수되는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오늘날 전쟁 당사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들의 전쟁이 방어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즉,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선제공격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위선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리스도인들도 동시에 세상 나라 시민이므로 전쟁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 칼뱅, 루터 등 신학자들도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수 있는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서 고심하였고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다. (1) 전쟁에는 그 불가피함을 결정하는 합법적인 권위가 있어야 하고, (2) 무기를 드는 것보다 더 큰 심각한 악이 있음이 분명해야 하며, (3) 방어해야 할 선(善)에 합당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전쟁을 통해 극복하거나 피하려는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되며, (4) 전쟁은 최후의 선택이어야 하고, (5) 전쟁은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도록 계산되어야 하며, (6) 전쟁의 결과는 전쟁을 일으킨 재난보다 훨씬 더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쟁’에 대한 키케로의 주장과 기독교 신학자들의 주장 간의 가장 큰 차이는 전쟁을 일으키는 목적이다. 키케로에게는 국가의 명예와 안전의 방어가 중요한 조건인 반면, 기독교 신학자들에게는 악의 제거가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다. 전쟁 대부분이 국가들 사이에 일어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국가의 이익이 아니라 악과 불의를 제거하고 선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한 애국은 무조건 자기 나라가 강하고 부하게 되기 위하여 무조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직하고 정의로운 나라를 만드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고 필요하면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정의로운 전쟁’이라도 한 번 시작되면 의도하지 않았던 온갖 악이 다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다. 비록 의롭더라도 전쟁을 피하도록 우리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다 동원해야 할 것이다.
최근 름멜 (R. J. Rummel), 로울즈 (J. Rawls) 같은 정치철학자들은 민주주의 국가들 간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편다. 개연성도 있고 적어도 지금까지는 실증되고 있다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한 민주주의, 특히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서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