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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박자박 소읍탐방]<1>비단길에 핀 꽃, 상주 함창 금상첨화 아트로드
함창버스정류장 맞은편 ‘카페 버스정류장’ 주인장 박계해씨. 차창으로 본 건물이 맘에 들어 운명처럼 카페를 열었다고 한다. 상주=최흥수기자
내리는 사람도 타는 사람도 없었지만, 부산행 무궁화호 열차는 정확히 1분간 정차한 후 오후 3시33분 함창역을 떠났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 지난 8일, 플랫폼 주변 바닥을 노랗게 덮은 은행잎만 멀어져 가는 열차를 배웅할 뿐이었다. 부산~영주를 왕복하는 열차가 하루 6차례 서는 함창역은 무인역으로 운영된다. 역무원 대신 역을 지키는 건 ‘금상첨화(錦上添花)’ 함창을 알리는 전시물이다.
◇기다림, 그리움, 반가움, 아쉬움… 카페 ‘버스정류장’에서
함창은 인구 6,900여명(올 10월 기준)에 불과한 작은 읍이다. 상주 땅이지만 문경에서 더 가깝다. 여느 소도시와 마찬가지로 활기를 잃어가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2015년 ‘마을미술프로젝트’ 사업으로 걷기 길을 만들었다. 비단 위에 피운 꽃 길, 이름하여 ‘금상첨화 아트로드’다.
금상첨화는 단순히 뜻만 좋아 붙인 이름이 아니다. 상주는 예부터 삼백(三白, 누에고치ㆍ쌀ㆍ곶감)의 고장이었다. 비단은 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로 만든 천이다. 함창역 천장은 실제 명주실을 감은 물레로 장식돼 있다. 역에서 빠져나온 명주실 가닥은 역 광장을 두 차례 감은 뒤 마을로 타래를 풀어간다. 하얀 페인트로 가늘게 이어진 이 실타래만 따라가면 읍내를 한 바퀴 둘러 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따로 표지판을 찾을 필요도, 헤맬 이유도 없다.
역 앞 사거리에서 바로 오른편이 시외버스를 타는 함창버스정류장인데, 길 건너편에 또 다른 버스정류장이 있다. ‘카페 버스정류장’이다. 하얀 타일 벽 건물 앞에 옛날 버스정류장처럼 동그란 표지판이 서 있다. 입구는 도로 쪽이 아니라 건물 반대편 안마당이다. 카페 버스정류장은 내부에 들어설 때부터 여느 카페와 다르다. 가정집 같이 일단 신발을 벗어야 한다. 좁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서면 양편에 두 개의 홀이 있고, 아래층에도 하나 있다. 세 개의 독립된 공간은 탁자가 많지 않은 대신, 바닥에 앉아도 어색하지 않은 구조다. 카페는 70년 넘은 철공소 사택을 개조했다. 빈티지하지만 낡은 집 특유의 편안함이 묻어난다. 카페 장식에서 공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책이다. 계단 끝에도, 벽면에도, 이불장이었을 다락에도, 손 닿는 곳 어디에나 책이 있다.
겨울 추천 메뉴는 오래 우린 대추차다. 탁자에 꼬마 손님이 장식한 감잎이 놓여 있다.
화장실도 예외가 아니다. 변기에 앉으면 동그란 탁자 위에 놓인 빨간 책 한 권이 손에 잡힌다. ‘나의, 카페 버스정류장’은 카페지기 박계해씨가 쓴 자전적 수필이다. “운명이었다. 버스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간 이 집에 반해버린 것, 창에 붙어있는 ‘세놓음’이라는 글자에 이끌려 목적지도 아닌 낯선 동네에 내린 것, 집안을 구경하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 책 머리는 이곳에 카페를 차리게 된 배경으로 시작하지만 굳이 들추고 싶지 않은 사생활까지 담담히 적었다. 귀농한 전직 중학교 교사로서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 온, “세상에 걱정이라곤 없는 낙천주의자”로 보이지만 어디 삶이 쉽기만 했을까. “벼랑 끝에 선 서늘한 심정”까지 습기 없이, 그러나 건조하지 않게 풀어냈다. 차 한 잔 마시며 담소하듯 던진 문장마다 오십 중반의 연륜과 여유가 배어 있다.

버스정류장은 카페이자 서점, 출판사다. 손 닿는 곳 어디나 책이 있다.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눈앞이 이런 모습이다. 책장을 넘겨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카페지기 박계해씨의 자전적 수필집.
“기다림, 그리움, 사랑, 만남, 이별, 반가움, 아쉬움…”은 카페를 구상하며 정류장 하면 떠오르는 단어를 적은 목록이다. 카페의 작은 창가, 소파, 의자, 책장 곳곳에서 여행자가 발견할 수 있는 감성의 편린이기도 하다. 카페 버스정류장은 이렇게 오가는 여행객에 마음의 자리를 내어 주고, 때로 주인장이 주선하거나 인연으로 닿은 시 낭송, 연극, 영화 모임 장소로도 이용된다. 겨울에는 연탄난로에 밤새 우려낸 대추차가 맛있단다. 카페는 매주 화요일에 쉬고,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문을 연다.
◇왕가 마을의 넉넉함과 세창양조장의 쓸쓸함
따뜻한 차 한 잔으로 몸을 데우고 다시 실타래를 따라 조금만 걸으면 가야마을(증촌리)이다. 마을어귀의 황금색 엽전 조형물이 예사롭지 않다. 가야마을엔 두 개의 커다란 무덤이 있다. 고령가야(古寧伽倻) 태조왕과 왕비의 무덤이다. 안내문은 고령가야에 대해 이곳 함창과 문경, 가은을 영역으로 한 고대국가로 소개하고 있다. (경북 남부의 고령군과 구분하기 위해 ‘고녕’으로 표기한 책자도 있다.) 조선 선조 25년(1592) 경상도 관찰사와 함창현감이 무덤 앞에 묻혀 있던 묘비를 발견해 고령가야왕릉임을 확인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공식적인 학설로 인정받지 못해 정식 명칭은 ‘전(傳) 고려가야왕릉’이다.

증촌리 가야마을 입구의 작품 ‘거룩한 풍경’. 가야마을의 다양한 풍경을 담고 있다.

고령가야왕릉 입구의 홍살문.

마을의 얕은 언덕에 자리 잡은 고령가야왕릉. 함창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홍살문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넓은 잔디밭에 커다란 봉분이 아늑하게 터를 잡았다. 왕릉은 증촌리의 자랑이자 자존심이다. 왕가의 후예답게 마을도 여유롭고 넉넉하다. 담과 담이 맞닿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지만 집집마다 널찍한 텃밭을 보유하고 있다. ‘쌀 짓는 집’ ‘콩밭 메는 할머니 집’ ‘국가유공자의 집’ 등 재미있는 이름표가 붙은 담장 너머엔 김장거리 무 배추가 싱싱하다. 마당마다 오래된 감나무 한 그루쯤은 있어서 ‘삼백의 고장’이 괜히 나온 이름이 아님을 증명한다. 마을 한가운데 빈집을 개조한 ‘가야사랑마을 공작소’에서는 누에치기를 생업으로 살아온 마을의 옛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도 고령가야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증촌리 농가는 대부분 널찍한 텃밭을 보유하고 있다.

문패도 집집마다 특색 있다.

곶감이 주렁주렁, 상주는 삼백의 고장이다.
마을을 벗어나 도로를 건너면(이 도로에만 유일하게 길 표시가 끊어져 있다) 함창전통시장이다. 명주실 뭉치와 시장 아줌마의 파마 머리를 형상화한 난전 지붕 조형물이 돋보인다. 장날(1ㆍ6일)이면 의류ㆍ농기구ㆍ생선 등 온갖 물건들이 펼쳐지지만 평일이라 다소 쓸쓸하다. 대신 주변에 값싼 식당은 그대로 영업한다. 시장 한쪽 귀퉁이 ‘협동예술조합’에는 명주실로 짠 배냇저고리와 옷감 짜는 도구를 소재로 한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명주실과 파마머리를 형상화한 함창전통시장 조형물.

양조장을 미술관과 박물관의 개조한 세창주유소.
시장과 함창읍사무소를 지나면 ‘세창주유소(酒遊所)’로 이어진다. 기름 넣은 곳이 아니라, 술을 벗하며 즐거운 곳이다. 1956년부터 약 50년간 ‘세창도가’로 사용하던 건물을 갤러리로 개조한 공간이다. 쌀 빻는 장소는 만화갤러리, 자재 창고는 아트카페, 양조장 사무실은 섬유갤러리, 막걸리 만드는 곳은 시간갤러리로 각각 변신했다. 우물이 있던 자리는 퍼포먼스 작가 요아킴(Joakim Stampe)과 추이아(Chuyia Chia)의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금이 가거나 부서진 자리를 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상상력이 돋보인다. 우물 옆에 물바가지가 아니라 재래식 화장실을 풀 때 사용하는 바가지를 달아 놓은 것은 맘에 걸린다. 쓰임새를 몰라서 생긴 일이겠지만, 그것도 작품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두 작가의 드로잉 작품은 함창역 앞 담벼락을 비롯해 읍내 9곳에 흩어져 있다. 세창주유소 입구의 ‘있다(itta) 갤러리’에는 함창의 다양한 소리를 모아 놓았다. 시장의 수런거림과 바람소리 새소리까지 모두 함창의 역사이고 작품이다.

우물터를 활용한 요아킴ㆍ추이아의 작품.

함창의 다양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있다 갤러리’.
아트로트를 걸으면 함창의 정취에 푹 빠져 들면서도 아쉬움이 진하다. 길을 개설한 지 만 3년, 그 사이 거리 작품이 빛이 바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해도, 불 꺼진 갤러리에 들어서는 것은 개운치 않다. 컴컴한 실내에서 관람자가 직접 조명을 켜고 꺼야 해서 선뜻 발을 들이기가 주저된다.
◇”욕심 버리니 가치가 보여요”…즐거운 ‘허씨 비단’
“딸각딸각 철컥철컥” 족답기 베틀을 밟는 허호 사장의 얼굴이 연신 싱글벙글이다. 금상첨화 아트로드에 포함되지 않지만 삼백의 고장 함창에서 꼭 들러야 할 곳이 ‘허씨비단 직물공장’이다. 함창역에서 직선 도로를 따라 약 1km 떨어져 있으니 걸어도 멀지 않다. 올해 예순인 허호 사장은 5대째 비단을 짜 온 집안이다. 부인 민숙희씨 집안도 4대째 가업이다. 한때 함창에만 비단업체가 200여개에 달했지만, 지금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화장 위주로 장례문화가 바뀌면서 수의로 사용되던 비단 수요가 급격히 줄어든 탓이다. 그만 둘까 생각도 했지만 대량 생산을 포기하는 대신 고급 옷감에 치중하고, 좀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고부터 허 사장의 표정도 밝아졌다. 그동안 돈벌이에만 치중하느라 보지 못한 명주의 가치가 새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허호 허씨비단 대표. 사진 한 장 찍자 했더니 평생의 밥벌이인 누에고치를 배경으로 찍고 싶단다. 나뭇잎과 짚을 활용한 섶에서부터 개량 섶까지 변천사를 전시해 놓았다.

견학 프로그램에서는 베틀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고 직접 작동해 볼 수도 있다.

허 대표가 고치에서 실을 뽑는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감물을 들인 비단 스카프 뭉치. 모두 다른 문양으로 만들어져 요즘 허 대표에게 또 하나의 재미이자 실험이다.
견학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도 그 일환이다. 공장 1층을 아예 작업장이자 전시실로 꾸몄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작업부터 베틀에서 천을 짜는 작업까지 한눈에 보고 체험할 수 있다. 완전 수동부터 개량을 거듭해 온 베틀의 변천사도 함께 볼 수 있다. “이 낡은 기계들이 옛날엔 쓰레기였다가 지금은 보물이 된 거죠.” 집안 대대로 써 온 100년 넘는 베틀을 소개하면서는 자부심이 넘친다.
17세 무렵부터 베 짜는 일을 했으니 지겨울 만도 한데, 관심을 갖고 꾸준히 찾아 오는 이들이 있어 하루하루가 즐겁다. 2시간여 동안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결국 그의 ‘명주 인생’이다. “돈을 놓으니 가치가 보입디다. 욕심 부리지 않아도 어차피 내 몫은 내 주머니로 들어오더라고요. 허허.” 견학 프로그램을 마치고 허 사장은 버려진 잠실(蠶室)을 옮겨오기 위해 영천으로 가야 한다며 서둘러 공장을 나섰다. 머지 않아 함창에 근사한 박물관이 하나 생길지도 모르겠다. ‘허씨비단’은 견학 프로그램은 무료로 운영하고, 천연염색이나 감물염색 체험은 소정의 비용을 받는다. 054-541-3730으로 문의.
◇함창 가는 길
함창은 행정구역상 상주시지만, 문경시와 붙어 있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첫댓글 작년 상주 사촌이 농사짓는 샤아머스켓 포도 농장갔다가 들렸던 버스정류장
2022년에는 10월 17월에 방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