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닥친 '소매업 대재앙'
잘나가다 내리막...
유통기업에 무슨일이
질주하던 이마트. 롯데마트
-2013년 매출 13조.9조 탄탄대로
-최근 온라인에 고객 뺏기며 위기
-혁신기회 놓치고 정부규제도 발목
-매장구성. 상품 30년간 변화없어
-업계는 "정부규제 심해 뭘 못해"
-코로나까지 덮쳐 '유통업 재앙'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놈은 가장 센 놈도 아니요, 가장 똑똑한 놈도 아니다. 가장 적응력이 있는 놈이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은 최근 인스타그램에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의 말을 옮겨 적었다. 이 게시물은 유통가에서 큰 화제가 됐다. 미국처럼 한국에서도 백화점과 대형마트가 무더기 폐점하는 '소매업 대재앙(retail apocalypse)'이 본격화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와중에 국내 대표 유통기업을 이끄는 정 부회장이 올린 글이기 때문이다.
백화점, 대형마트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통 유통 업계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다. 2013년 7351억원에 달했던 국내 1위 대형마트 이마트의 영어비익은 지난해 1507억원으로 5분의 1토막이 났다. 국내 유통 산업을 개척해 온 롯데쇼핑은 지난달 점포 중 30%를 정리하겠다고 발표했다. 1979년 롯데백화점 창립 후 이런 구조조정은 처음이다.
백화점과 동네 수퍼마켓 정도만 있던 국내 오프라인 유통은 1993년 이마트가 서울 창동에 국내 1호 대형마트를 낸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국내 유통업체는 월마트. 까르푸 등 세계적 유통 기업을 한국에서 철수시킬 만큼 경쟁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30년이 채 되지 않아 대형마트로 대표되는 국내 오프라인 유통은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그동안 한국 유통 업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월마트. 까르푸도 이겼던 국내 유통 혁신 기회 놓쳐
1990년대 창립한 이마트와 롯데마트(1998년)는 대형마트 체제를 완성하며 국내 쇼핑 지형을 바꿔놓았다. 2010년대 중반까지 한국 유통 기업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월마트. 까르푸 등 글로벌 유통기업들이 한국에 진출했다가 국내 유통기업과 경쟁에서 밀려 철수했다.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리며 유통기업들은 돈을 쓸어담았다. 이마트는 2013년 매출 13조353억원, 영업이익 7351억원을 기록했다. 후발 주자인 롯데마트도 2012년에 매출 9조690억원, 영업이익 3190억원을 올렸다. 하지만 영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마트와 롯데마트는 2012~2013년 기록했던 영업이익을 한번도 넘어서지 못했다. 오히려 이마트는 지난해 2분기 창사 이래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했고, 롯데마트는 지난해 250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다. 한국유통학회장을 지낸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부 교수는 "혁신 기회를 놓친 데다 정부 규제까지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전 세계 유통 패러다임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무게중심이 빠르게 넘어가고 있다. 2010년 창립한 쿠팡으로 대표되는 이커머스(전자상거래) 기업들은 백화점, 대형마트의 고객을 빠르게 잠식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2014년 전체 유통 매출에서 온라인 비율은 28.4%였다. 작년엔 이 비율이 41.2%까지 치솟았다. 지난해 매출이 오프라인은 0.9% 감소했으나, 온랑니은 14.2% 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2~3년 후 온라인이 오프라인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소비자들의 쇼핑 행태가 바뀌었는데도 국내 대표 유통기업의 대응은 늦었다는 평가다. 신세계그룹의 온라인 통합법인 SSG닷컴은 지난해 출범했고, 롯데쇼핑은 통합 쇼핑몰(롯데온)을 올해 상반기에 출범시킨다는 계획이다. 안 교수는 "유통 패러다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바뀌고 있는데 국내 대표적 유통 기업들은 시대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면서 "더욱이 정부가 규제를 쏟아내면서 유통 기업들은 최악의 위기 상황을 맞게 됐다"고 말했다.
오프라인 유통시장 자체의 지형도 바뀌고 있다. 유통가에서 '막내' 취급을 받았던 편의점 업계 대표 주자인 GS25와 CU는 지난해 각각 영업이익 2564억원,1966억원을 기록하며 이마트(1507억원), 롯데마트(-250억원)를 넘어섰다. 대형마트, 백화점 등이 온라인 기업들과 출혈경쟁을 펼치며 실적이 악화되는 동안 편의점 업계는 이커머스 기업과 협업하는 등 재빨리 움직인게 효과를 봤다는 분석이 나온다. 편의점 업계는 오프라인 점포가 없는 이커머스 업체들과 손잡고 택배 배송, 반품 서비스를 도입하고 자체 상품을 끊임없이 개발하며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사랑방'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대형마트들의 매장 구성과 상품은 거의 30년째 큰 변화가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대형마트를 운영하는 기업들도 할 말은 있다. '정부 규제로 뭘 하려야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정부와 정치권에선 대형마트를 소상공인 공격하는 적으로 보고 있다"며 "우리가 제때 혁신을 못한 측면도 분명히 있지만, 의무 휴업, 신규 출점 제한 과 같은 규제가 위기를 가속화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통시장 보호를 내세워 지난 2012년 유통산업발전법을 만들고 대형마트의 월 2회 휴업을 의무화했다. 현행법 상에선 대형마트가 온라인몰을 통해 고객 주문을 받아도 마트 영업 시간과 의무 휴업일에는 배송을 할 수도 없다.
◆2028년까지 대형마트의 3분의 1 사라져
오프라인 유통은 당분간 이런 규제에 발이 묶인 채 온라인의 공세에 맞서야 한다. 지금 추세대로 국내에서도 소매업 대재앙이 본격화할 경우 2028년이 되면 2018년과 비교해 백화점과 대형마트는 3분의 1이 사라질 전망이다. 롯데미래전략연구소에 따르면 2018년 기준 100개인 백화점은 2028년 66개로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연구소는 같은 기간 대형마트도 494개에서 166개가 준 328개로 축소될 것으로 예측했다.
예측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이마트는 지난해 사업 재편에 돌입해 잡화점 '삐에로쑈핑'의 사업 철수를 결정했고, 헬스케어. 화장품 전문점(부츠)도 절반이상 닫기로 했다. 롯데쇼핑은 백화점.마트.슈퍼.롭스 등 총 700여 점포 중 약 30%에 달하는 200여 점포를 정리할 계획이다.
업계에선 국내에서 확산하는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유통가 구조조정을 더욱 가속화할 것이란 전망도 내놓고 있다. 중국인 관광객은 물론 해외여행객이 급격히 줄면서 면세점 업계는 지난달에만 2000억원이 넘는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소비자들의 바깥 활동이 뚝 끊긴 데다 확진자가 다녀갔거나 근무한 사실이 알려진 백화점, 대형마트 등이 불가피하게 휴업하면서 유통가 전체로 보면 피해액이 5000억원을 훌쩍 넘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유통 업계의 하락세는 단순히 기업들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며 "어떤 업종보다 고용 창출 효과가 큰 오프라인 우텅 기업들이 몰락할 경우 고용시장에도 큰 타격을 줄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5년 3만85명이었던 이마트의 직원은 지난해 2만5797명으로 줄었다.
출처: 조선일보2020년 3월 6일 오피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