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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을 전공한 기자에게 가끔 질문이 날아온다. 꼭 주말 사극을 본 뒤다. 기자의 답은 하나. “역사 전공했다고 역사 다 알면 영어 전공한 사람은 토플점수 만점 맞나.” 혹은,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침묵으로 일관. 그동안 다른 프로그램은 봐도 사극(史劇)만은 절대 안 보았다.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까지 10년간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일까. 지겹고, 재미도 없고. 평생 역사연구에 몸 바친 분들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그런데 요즘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있다. 주말 저녁, 친구들과 한 잔 축이는 와중에도 저녁 9시면 혼자라도 빠져 나온다. TV를 켜기 전 목욕재개는 필수. 술 냄새 풀풀 풍기며 장군님을 마주하면 불경죄라도 저지른 기분이다. 방영되는 50분이 왜 그렇게 짧은지. 주체할 수 없이 떨어지는 눈물에 눈은 뻘겋게 충혈되기 일쑤. 카이런 드라이빙이 맡겨진 순간, ‘23전 23승 불패의 신화,’ ‘우리 장군님’을 좇기로 했다. “나이가 몇 살인데 드라마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냐.” “아니다. 이번에 우리 장군님 정신을 단단히 배워와 열심히, 부지런히 원고 쓸란다.”
가장 치열했던 전장, 가장 아름다운 경관
‘불멸의 이순신’ 촬영 세트장이 있는 전북 부안으로 향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부안IC를 빠져 나가자 이곳도 이순신 장군의 여파가 대단한 것 같다. ‘불멸의 이순신 촬영 세트장’이라는 이정표가 곳곳에 세워졌다. 더 놀라운 흔적이 있다. ‘불멸의 돼지,’ ‘불멸의 냉면,’ ‘충무공 밥상’ 등 장군을 묘사해서 만든 식당 현수막이 곳곳에 나부끼고 있다. ‘우리 장군님이 이곳 경제살림까지 책임지고 계시구나!’ 전북 부안 변산반도 인근에 세워진 세트장은 6곳. 노금 해수욕장에는 조선군 진지, 성천은 왜군 진지, 궁항은 전라좌수영, 격포항에는 거북선, 판옥선 등의 촬영용 배가 있다. 최고의 돌격선으로 세계 최초 철갑선인 거북선이 있는 격포항을 찾았다. 격포항 근처에 왔지만 특별한 것이 없다. 관광지로 바뀌어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들었는데 거북선은 눈에 띄지 않는다. “거북선 보러 왔는데, 세트장이 어디입니까?” “저쪽 부두 끝까지 따라가세요.” 대답하는 가게 주인의 반응이 시원치 않다. 몇몇 사람이 모여 있다. 그 앞에 시커먼 나무배들이 있기는 한데, 잘 보이지 않는다. 왠지 불안하다. 저 멀리 ‘용(龍)머리’가 보인다. 그 순간 밀려오는 실망감. 사진기자와 얼굴만 바라볼 뿐 할 말을 잃었다. 영웅과 함께 조선을 지켜낸 거북선의 웅장함을 느끼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파도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럽다. 입에 여의주를 물고 승천 준비를 기다리는, 그 이름도 당당한 ‘거북선’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 아쉬움을 떨쳐내고 전라좌수영을 꾸며 놓은 궁항으로 발길을 돌린다. 전라좌도수군절도사영(전라좌수영)은 현재의 해군함대사령부 격. 조선 성종 10년(1479년) 전라도 여수에 만들어졌고 고종 32년(1895년) 폐지될 때까지 400여 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였다. 한낮의 기온이 32도씨를 넘었지만 전라좌수영 세트장은 주차장 입구부터 인산인해다. 승용차부터 관광버스까지 차종 불문, 서울에서 부산까지 번호판 불문, 전국 각지에서 관광객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전라좌수영은 변산면 격포리 궁항 5천200여 평 규모로 옛집, 자재도구 형틀 등 옛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마당과 마당 사이 벽에는 방송 장면의 스틸 사진이 걸려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에서 바라보는 뻥 뚫린 서해 경치가 장관이다.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모자라는 세트장을 뒤로 하고 경남 통영을 향해 차를 몰았다. 부안-통영 거리는 300km에 예상시간 3시간. 갈 길이 멀다. 남해고속도로를 지나 통영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9시.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따온 이름. 그만큼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도시 전체에 가득한 곳으로 통영 이순신 투어는 한산섬이 필수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온바다가 필로 물든 치열한 전장.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로 세계 해전사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순신 장군이 전투를 벌인 해전지는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통영 유람선 터미널에서 한산섬까지는 뱃길로 15분. 배에 올라 출발과 동시에 선장의 설명이 장황하게 이어진다. “통영은… … 이순신 장군은… … 제승당은… …” 하루에도 수십 번을 반복해야 하는 내용이니 막힘이 없다. 한산섬이 가까워지면서 바다 한복판에 ‘거북등대’가 보인다. 장군의 거북선을 본 딴 거북등대는 한산대첩을 기림과 동시에 어부들의 길잡이인 등대 역할을 하기 위해 1963년 암초 위에 만들어졌다. 매표소를 지나 제승당까지 1km의 해안 산책로는 눈을 어디로 가져가야 할지 고민할 만큼 운치가 그만이다. 왼쪽으로는 무성한 송림, 오른쪽으로는 옥빛 바다가 펼쳐진다. 장군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물이 마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짠 기운도 전혀 없었다는 우물물 한 그릇으로 무더위를 달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이곳 제승당에 3년 8개월 동안 머물면서 군사를 정비하고 군량을 확보하며 다양한 무기를 준비했다. 이후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곳에 통제사 조경이 유허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이 머물면서 집무를 보았던 운주당(運籌堂) 옛터에 제승당(制勝堂)이라는 건물을 지었다. 제승당 안에는 한산대첩도, 노량해전도, 사천해전도 등의 그림과 1/25로 축소한 거북선 모형 현자총통 등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다. 제승당 오른쪽에는 ‘수루’가 있다. 수루에서 바라보는 앞바다는 섬과 섬으로 둘러싸여 아늑한 호수 같다. 잠시 ‘장군이 되어, 장군의 마음으로 장군의 시조’를 읊조린다.
수루 앞에는 한산대첩에서 벌였던 학익진 전법을 그림으로 설명한 표지가 세워져 있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유인하고 포위한 뒤 장군이 명령한다. “방포하라.” 깨지고 터지고, 빠지며 침몰하는 왜군 함대의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제승당 왼쪽에는 한산정이라는 활터가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둔 과녁까지의 거리는 족히 100m는 넘어 보인다. 이곳에서 특별무과시험을 치르기도 했고 장군들과 병사와 활쏘기 시합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 팀이 이긴 팀에 음식을 대접하며 사기를 높였다고도 전해진다. 장군을 추도하기 위한 영정을 모신 충무사로 들어가는 곳에는 3개의 유허비를 볼 수 있다. 통제사 조 경과 이태상이 이곳을 재건할 때 세운 것으로 영조와 고종 때에 만든 것이다. 최근에 만든 한글 유허비에는 장군의 업적과 제승당 의미 등을 담고 있다. 한산섬으로 1시간마다 들어오는 배는 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특히 ‘제44회 한산도대첩축제’가 한산도 앞바다와 세병관, 문화마당 등이 펼쳐진다는 소식에 한산도를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산도에서 나와 찾은 곳은 달아공원. 이순신 장군 해전지 대부분이 한려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어 역사공부 외에 관광까지 할 수 있다. 시원스레 펼쳐진 바다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섬들. 이 좋은 경치를 우리에게 남겨준 장군께 감사의 묵념은 당연하다. 통영에서 30분 거리인 거제도 옥포로 차를 돌린다. 1592년, 경상우수사 원 균은 옥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5월 7일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척을 발견하고 동서로 포위해서 맹렬히 포격, 적선 26척을 격침시킨다. 조선수군이 치른 첫 해전으로 이 승리는 이순신 장군의 23전 23승 신화의 서곡이 되었다. 지금은 대우조선소가 자리를 잡고 있어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메가패스 장군님은 영원하다
서울에서 전화가 계속 온다. 한순간 쏟아진 폭우에 서울이 물바다란다. 먼길 출장에 비 맞으며 얼마나 고생이 많은지, 안쓰러운 목소리들이다. “한강이 넘쳐 잠수교도 통제됐어. 거기도 난리지?” “여기 날씨 쨍쨍한데! 장군님 혼이 살아 있는데, 당연히 장군님이 보살펴 주시겠지요.” 마지막으로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충남 아산 현충사다. 그렇게 말짱하던 하늘이 통영을 벗어나면서부터 물벼락을 쏟아낸다. “어, 이게 아닌데, 장군님이 봐주실 텐데”라는 말을 사진기자와 나누며, 현충사로 향한다. 어찌된 일인가. 진짜인가 보다. 현충사에 도착한 순간, 비는 그치고 파란 하늘에서 태양이 내리쬔다. ‘역시 장군님이야.’ 현충사는 충남 아산시 영치면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사당이다. 숙종 32년(1706년) 지방 유생들이 조정에 건의해서 세웠으며 이듬해 현충사로 사액(賜額)된다. 고종 2년(1865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일시 문을 닫았고 일제의 탄압으로 20여 년간 향불이 끊기기도 했다.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최가 되어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한 뒤 영정을 모셨고, 1962년에는 유물전시관이 건립되었다. 16만 평 규모에 본전, 유물관, 고택, 활터, 홍살문, 고향에서 외적의 칼에 죽은 이순신 장군의 아들 면의 묘소 등이 있다. 정문인 충무문 왼쪽에 있는 유물관에서는 국보 76호 <난중일기>를 볼 수 있다. <난중일기>는 임진왜란 7년 동안에 쓴 일기로 임진란이 일어난 다음달부터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기 한달 전까지의 일들이 적혀 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었다.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가들이 편의상 난중일기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해 만든 책인 <서간첩>도 있다. 개인간의 편지임에도 편지마다 전란을 걱정하는 장군의 애타는 심정이 구구절절이 적혀 있다. 1576년 3월 무과시험인 병과에 급제했을 때 받은 무과급제교지(武科及第敎旨)도 볼 수 있다. 역시 관람객의 발걸음을 잡는 것은 거북선이다. 당시 효율적인 전투력을 고려해 건조되었다고 적혀 있다. 길이×너비가 113×34척(34.2×10.3m). 속도는 7노트(시속 7km)로 짐작하고 있다. 선체 위에는 판자와 철갑을 덮고 쇠못을 꽂아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다. 이는 왜군의 도선을 막기 위한 방편.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다. 130∼150명까지 탈 수 있고 내부가 2층으로 되어 아래에서는 노를 젓고 짐을 실으며, 위에서는 총포를 쏠 수 있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거북선의 진수는 1592년 3월 27일 여수 앞바다에서고, 실전에 배치된 것은 왜적이 침입하기 전날인 4월 12일이었다. 실전 투입은 장군의 2차 출동(사천, 당포, 당항포 해전)에서가 처음이었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본전. 타오르는 향 앞에서 묵념을 올릴 뿐 특별히 할 말이 없다. ‘그저 감사하다는, 위대하다는, 존경합니다라는 말밖에.’ 장군이 살았던 옛집을 재현한 고택(古宅)은 소박한 냄새가 물씬하다. 고택 옆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곳은 장군이 활을 쏘던 자리다. 과녁은 활터에서 145m 떨어진 곳에 있는데 장군이 연습했던 당시에는 200m 거리였다고 한다. 특히 장군은 임금이 북쪽에 있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했다고 전해진다. 2박 3일간 이순신 장군만을 생각하고 서울로 올라오던 길. 또 한 군데 생각나는 곳이 있었다. 바로 광화문 사거리다. 가끔 ‘OX’ 퀴즈에 나오는 문제 하나. ‘광화문 이순신 동상은 오른쪽에 칼을 쥐었을까, 왼쪽에 찼을까’. 오른쪽이다. 이 동상을 보고 ‘잘못 만들었다, 아니다’라는 논란이 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오른쪽에 칼을 찼고, 두 눈을 치켜뜨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르게 살라고 그리고 똑바로 살라고. 마지막으로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의 말을 인용해 보자. “메가패스 장군님 인기 ‘짱’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정신 꼭 본받겠습니다.”
DRIVER’S MEMO
서울을 출발해 전북 부안을 거쳐 남해 일대를 돈 다음 서울로 올라온 2박 3일 동안 쌍용 카이런의 주행거리는 1천168km. 지난달 춘천 품걸리의 오프로드 길을 달렸다면 이번 여행은 온로드의 연속. 고속도로가 2/3를 차지할 정도로 고속주행이 대부분이었다. 액셀 페달을 밟음과 동시에 움직이는 빠른 응답성, 특히 시속 170km까지 쉽게 오르내리는 ‘쏘는 맛’이 매력. 고속에서의 안정감을 무기로 고속도로에서 승용차와 스피드 겨루기를 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여기에 거친 디젤음이 전해지지 않는 조용한 실내에서 듣는 음악소리는 덤이다. 제원상 연비는 10.6km. 측정 결과는 10km 정도로 나왔다. 일반적으로 제원의 80% 정도가 실제연비임을 감안하면 연비도 뛰어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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