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신행길에 있을 초보 부부에게 어쩌면 지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엄마의 마음으로 쓰다가 인생 선배로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니 문장이 길어지고 엉켰다. 아이들을 위한 말인지, 나 자신을 향한 위로와 다짐의 말인지 분간이 안 됐다. 꼰대처럼 줄줄 쏟아내던 말들을 다시 주워 담았다.
오늘부터 정말 부부 1일이네. 어서 와. 부부의 세계는 처음이지? 이제부터 두 사람을 부부의 세계로 초대할 게. 잊지 말아야 할 건, 부부의 세계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남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이해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내가 잘해야 상대방도 잘 하는 거지. 내가 이해해야 상대방도 이해하는 거지. 지금은 자신감이 넘치지? 하나뿐인 짝꿍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생각하겠지? 그러나 백 개의 지혜를 들려준 들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부부의 세계는 현실인걸. 살아보면 알겠지. 마음과 달리 입 밖으론 독설을 내뿜게도 되고, 문을 박차고 나가게도 되지. 그래도 문을 나가면 세상은 모두 남의 편, 내 편은 오직 우리 두 사람, 내 편 뺏기지 말고 잘 지켜. (그러고도 A⁴용지 한 장을 가득 써 내려갔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작은 딸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맞이한 가족은 다름 아닌 딸의 신랑이자 나의 첫 번째 사위이다. 이로써 근 30여 년 만에 식구가 하나 늘었다. 남편과 결혼해서 두 아이가 태어나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여섯 식구가 살 때는 집에 오는 친척들과 손님도 많아 늘 북적거렸었다. 시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특별한 손님맞이도 없이 단출하게 십여 년을 살았다.
딸 둘과 함께 살아가는 그저 그런 밋밋한 날들에 어느 날 사윗감이 들어왔다. 고지식한 남편과는 아주 사고방식이 다른 90년대생 남자다. 그리고 순종형의 삶을 살아온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내 딸도 90년대생이다. 사위는 결혼 전에도 집에 올 때는 주방을 기웃거리며, 뭔가 도울 일을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직은 아니라며, 거리를 두곤 했다.
딸의 커플은 꽤 오랜 시간 사랑했다. 둘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취준생의 시간을 서로 지지하며 함께 했다. 내 딸은 집에서 해 줄 수 없는 부분을 남친에게서 도움을 받고, 내가 줄 수 없는 위로도 남친에게서 받았다. 그렇게 십 년의 시간을 지치지 않고 사랑을 하며, 서로를 지켜보았다. 그러기에 딸의 엄마로서 사위를 고르는 조건은 있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둘이었기에 결혼의 조건은 차고도 넘쳤다. 물론 오래전부터 두 사람의 사랑을 응원해온 나였다.
그러나 막상 양가 부모의 상견례를 하고, 결혼식 날짜를 잡고, 딸의 신접살림 준비를 하려 하니 마음 한편이 허전했다. 그동안 마음에 들었던 사윗감에 대한 의혹이 생겼다. 착하고 싹싹하고 지혜로울 것 같은 사윗감에게서 정말 내 딸을 행복하게 할 최선의 남자인지를 자꾸 의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게 이 결혼은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할 권한도 없었다. 두 사람의 십 년은 엄마의 충고 몇 마디에 의해 좌지우지될 얕은 사랑은 아니었다, 어차피 둘의 인생은 두 사람의 선택이라는 걸 지지하며 결혼식을 준비했다.
딸 부부가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인사하러 집에 온 첫날이었다. 일주일간의 여행 후 첫 대면이어서 서로의 손을 잡고 등도 두드려 준 후 주방으로 갔다. 아침 일찍부터 장만한 음식을 차리느라 분주한 가운데 현관에서 북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위가 여행지에서 사온 선물 꾸러미를 풀고 있었다. 제주에서 가져온 한라봉을 비롯해 여러 가지 상자들이 있고, 그것들이 있었던 커다란 포장상자는 상자대로 널브러져서 현관을 가득 채웠다. 이어서 들이닥칠 손님들을 생각하자 우선 저 상자들부터 밖으로 치워야 할 것 같았다. 작은 딸을 불러 상자를 밖에 버리고 오라고 하자 사위가 따라나섰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얼굴을 찡그리며 내게 말했다
‘사위는 ‘백 년 손’이라는데, 오자마자 쓰레기를 버리라고 하면 어떡하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딸 부부의 절을 받고 나니 이제야 딸을 보낸 실감이 든다. 사위는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란 걸 인정한다. 아니 남편의 말처럼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이라고 생각한다. 내 딸을 사랑하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온 손님이기에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 내가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할 때 나의 엄마도 지금의 내 마음처럼 허전했을까?
딸을 보내면서 나는 또 비로소 엄마가 되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친구들이 위로의 말을 보내주었다. 대다수의 말들은 딸 보내서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고, 든든한 아들 하나 생겼으니 기뻐하라는 말이었다. 그 말은 경우에 따라서 틀린 말은 아니다.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없던 아들 하나 생겼다 생각하면 더 기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위가 사랑스럽고 든든해서 정말 믿음직하고 좋다지만 남의 배 아파서 난 아들을 내 자식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딸 같은 며느리, 사위 같은 아들’ 원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본인들의 행복을 위해서지. 당사자들에겐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생각해 보자. 내 딸에게 며느리 역할까지 하라고 할 수는 없다. 내 사위에게도 아들 노릇 하라고 하지 않겠다. 그건 겉만 번지르르한 말장난일 뿐이다. 중요한 건 딸의 남편이고. 아들의 아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세상에 하나뿐인 아들의 아내, 세상에 하나뿐인 딸의 남편인 것이다.
결혼은 사랑의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고, 둘이서 함께 걸어갈 새로운 출발점이다. 둘이서 만들어가는 이인삼각二人三脚의 첫걸음이다. 둘 중 한 사람이 빨리 가도 안 되고, 딴 방향을 보다가 헛디뎌도 안 되고, 서둘러 먼저 발을 내디뎌도 안 된다. 그러므로 묶여 있는 두 사람의 걸음, 그 안에는 수많은 물음표와 느낌표와 말 줄임표로 가득 채워진다.
살다 보면 아들 같은 사위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딸의 마음을 나보다 더 잘 헤아려주고, 나 역시 딸 보다 더 많이 사위에게 의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다. 부모들이 원하는 걸 아이들에게 억지로 짐 지워주고 싶지 않다.
밥은 잘 해먹을까? 걱정을 하는데 카톡으로 사진이 들어온다. 깔끔하게 차려진 밥상 사진이다. 엄마의 레시피를 묻지 않고, 백종원의 레시피를 찾아 콩불(콩나물 불고기)을 만들었는데 존맛이란다. 딸이 해준 콩불을 먹고 설거지를 하는 사위의 뒷모습도 포착되었다.
부부의 세계에도 90년생이 오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희망을 보기로 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내가 살아온 세계와는 다른 즐거움이 느껴진다. 마음이 흐믓하다. 딸과 사위는 행복하고 멋진 가정을 꾸려 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어느 일방의 희생으로 쌓아올린 위태로운 성이 아닌 둘이서 함께 그려가는 아름다운 부부의 세계를 기대한다. 지금 잡은 손 놓지 말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되고 이마의 주름살이 강물처럼 흘러도 늘 서로에게 단 한 사람의 사랑으로 살아갈 것으라 믿는다.
첫댓글 멋있는 내용입니다. 일부분은 주례사로도 좋겠습니다.^^ 아직 먼 훗날이지만 내 딸아이도 시집을 가면 그때가서 엄마가 아닌 아빠로서 이러한 마음이 들까 상상해 봅니다.
딸 시집 보내는 마음,
요즘은 아빠가 더 애틋해 하는 거 같아요.
예쁘게 잘 키우세요.
검은 머리 파뿌리는 옛말이죠.
요즘은 흰머리가 얼마나 빨리 나는데 ^^
친정엄마도 오십 되자 백발이 되셨죠. ㅎㅎ
글 잘 읽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훗날
딸 부부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부부는 그 당시 코로나를 뚫었다
라는 긍지하나는 분명 있을 겁니다.
사랑은, 또 부부는 모름지기 이래야만 한다는
어떤 이정표가 될 아주 훌륭한
신혼부부 탄생입니다.
염려 마세요.잘 살겁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코로나를 뚫은 사랑의 힘, 위대한 청춘들이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멋지진 않지만 착하긴 하죠. ㅎㅎ
다정하면서도 쿨한 장모님이시네요.
평소 엄마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딸인 것 같으니, 행복하게 잘 살겠지요.
쿨해야지요. 제일 중요한 덕목입니다. ㅎㅎ
장모님, 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생기신 거네요. 세상에 하나뿐이 아내로 남편으로 오래 행복했으면 합니다.
우리 윤슬 시인님 이젠 노을을 떠나 딸 가정으로 시를 쓰시겠군요. 기대합니다.
백년손님 잘 모셔야는데, 그러다 보면 또 책 한 권 나올 듯해요. ㅎㅎㅎ
난 사위 둘을 너무 자주 보다보니 아들이라기 보단 친구 같은 생각이 더 듭니다. 술친구....ㅎㅎ
술 잘 사는 예쁜 장인? 나도 그러고픈데 사위 보다 딸 눈치를 더 보게 됩니다.
제가 먼저 사위를 봐서 하는 말인데 사위편 드는게 딸편 드는거더라구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