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 전화 또는 구두신청 : 전화 또는 구두 참가비 온라인 입금 신청 ㆍ 현장신청 : 대회 당일 오전 10:30 까지 접수
전화 : 033) 430-2717 / 팩스 : 033) 430-2522
팩스로 신청하실 분은 아래의 버튼을 눌러서 양식을 다운받아서 작성하셔서 033) 430-2641로 접수하신 후, 무통장 입금 해주시면 됩니다.
* 인적사항
ㆍ성 명 :
ㆍ구분 :
개인 단체
ㆍ주 소 :
ㆍE-mail :
ㆍ생년월일 :
년 월 일
ㆍ전화번호 :
- -
ㆍ휴대폰번호 :
- -
ㆍ비 고 :
(단체 참여신청시에는 비고란에 총인원, 기타인원의 인적사항을 기입해주시기 바랍니다.)
* 입금정보
ㆍ입금자명 :
ㆍ입금액 :
원
ㆍ입금일시 :
년 월 일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이후 한국 풍물에 관한 기록 가운데 드물게 견지 관련 사진이 남아 있다. 입수 가능한 사진을 모아 내 해석과 소감을 붙여 보았다. 대부분 사진이 얼음 삼봉견지 사진으로 사슬낚시 등 다양한 견지 모습이 기록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개화 초기의 사진은 대부분 외국인이 기록한 것이다. 특히 한겨울 강에서 얼음을 뚫고 낚시를 드리운 모습이 외국인에게 이색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내가 모아 본 사진 외에도 많은 기록화가 더 있을 것이다. 오랜 기록화가 단순히 풍물 사진이 아닌, 옛 견지기법의 보존과 복원에 도움이 되기 바라는 마음에서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이 작업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작업으로 생각한다.
스웨덴의 아더 그립슨 기자가 러일전쟁 취재 차 한양에 왔다가 1905년경 한강에서 겨울철 삼봉견지낚시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고인이 된 송우 씨가 견지계에 소개했고, 원본은 한국전력에 소장되어 있다. 사진에는 낚시꾼이 두 대의 견짓대를 얼음구멍 위에 놓고, 썰매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썰매는 당시 한강에서 물건 운반에 쓰였던 ‘막썰매’ 혹은 ‘띠썰매’이다. 인물 왼편에는 얼음 구멍을 뚫는 ‘쓰리’가 놓여 있다. 오른쪽 견짓대는 살이 17개이고, 왼쪽은 14개이고, 설장에 절피가 감겨 있다. 낚시꾼이 놓고 있는 견짓대 중 하나는 줄 색이 더 진하게 보인다. 줄을 가공한 것이다.
옛날에는 낚싯줄로 명주실을 쓰면서 줄이 상하는 것을 막고, 다루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뜸’을 먹이거나, ‘갬치’를 올렸다고 한다. 뜸은 감이나 도토리에서 추출된 탄닌 성분의 ‘갈’을 줄에 먹인 것으로 줄이 썩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갬치는 동물의 피나 옻을 줄에 입히는 것으로 힘없는 명주실이 빳빳하고 강해지도록 가공한 것이다. 색이 연하게 보이는 줄은 갬치를 먹인지 오래되어 색이바랜 실로 보인다. 드물게 촬영연대가 확인되는 사진으로 낚시 모습이 매우 자연스럽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http://nojum.co.kr/)에 수록된 사진으로 상태가 선명치 않다. 노인이 썰매에 앉아 얼음 구멍 위에 놓인 낚시를 보고 있고, 옆에 어린이가 구경하고 있다. 복장으로 미루어 연대가 오랜 사진으로 보이나 아쉽게도 촬영 연도가 원 자료에 밝혀 있지 않다. 구경하는 어린아이가 무척 추운 모양이다.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 (http://nojum.co.kr/)에 수록된 다른 사진이다. 노인이 썰매에 앉아 얼음구멍을 주시하고 있다. 짚신은 벗어 옆에 두고 있으나 맨버선 바람인지는 사진으로 확인할 수 없다. 낚시꾼이 쓰고 있는 모자는 노들지역에서 ‘휘양’이라고 부르는 방한모였다. 무명에 솜을 둔 것으로 남바우와 비슷하나 턱 부분을 여밀 수 있어 바람을 막았다.
낚시꾼 옆에 얼음 구멍에서 살얼음을 떠내는 ‘물치개’와 가지가 달린 작대기가 두 개 있다. 작대기 끝이 Y자 형으로 되어 있어 잉어 얼음낚시에서 줄을 감아 거는 ‘거낚’으로 추정된다. 물치게는 노간주나무로 만든 얼음 치우개로서 요즘에 얼음뜰채(?)라고 불린다. 촬영 연대는 미상.
사진첩「한국백년」에 수록된 ‘겨울 한강의 강태공’이라는 사진이다. 자료에 “1940년경의 사진으로 취미가 아닌 직업 낚시꾼의 모습이다.”라는 해설이 실려 있다. 그러나 낚시를 하는 인물의 복장이나, 도구가 1905년 사진과 별 차이가 없다.
사진에서 노인은 얼음 구멍 앞에서 견짓대 두 개를 들고 있다. 모습으로 보아 두 대가 줄이 엉켰거나, 아니면 오른쪽 견짓대는 ‘돌무’를 단 것으로 추정된다. 돌무는 견지낚시가 바닥에 걸린 것을 빼는 견지도구로 고기를 잡는 견짓대에 비해 줄이 짧게 감겨 있다. 또 견짓대의 실이 사진에서 하얗게 보이나 화학사는 아니고, 갬치를 먹이지 않은 명주 실로 보인다.
노인 앞에는 물치게가 놓여 있고, 왼편 낚시꾼은 쓰리를 얼음에 꽂아놓고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방한 차비가 튼튼해 보인다. (동아일보사,「한국백년」3권, 648쪽, 1991)
이 사진은 1920년대 대동강의 겨울 얼음낚시를 촬영한 것이다. 좌우로 낚시꾼 세 사람이 얼음 구멍을 응시하고 있고 주위에 구경꾼이 있다. 배경에 대동문과 연광정이 보인다.
자료 원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朝鮮의 酷寒 3, 잉어낚시(대동강)’. “조선의 강 표면은 겨울철에 단단한 얼음으로 덮여 있지만, 그 아래는 물이 흐르고 많은 물고기가 있다. 특히 많은 어류가 잉어이다. 얼음의 일부분을 깨트려 구멍을 뚫고, 구멍에 사방으로 구부러진 낚싯바늘을 내려 잉어를 낚는 것이다. 사진은 대동강에서 잉어낚시의 실제 모습을 찍은 것이다. 그림의 오른쪽으로 보이는 것이 유명한 대동문이고, 왼쪽이 연광정이다.
두 인물이 얼음낚시를 하고 있다. 한 인물은 짚신을 벗어 옆에 두고 나막신을 신고 있다. 옛날 한강에서 얼음낚시를 할 때 나막신을 신었다고 한다. 나막신에는 노들지역에서 ‘재리’(눈이나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나막신 굽에 박는 큰 징)라고 부르는 징을 박았다. 얼음에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신은 일반 나막신과 달리 ‘적신’이라고 하는 얼음질 전용 신발로서 나막신보다 크고, 운두가 높고, 깊어 버선을 두벌 신을 정도로 큰 빙상 전용 나막신이었다. 적신을 신는 또 다른 이유는 얼음 구멍 주위로 물이 차오르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강에 밀물이 차면 얼음구멍 위로 물이 넘치고, 또 썰물에 여럿이 얼음 위에 서 있으면 사람 무게로 얼음이 휘어 물이 솟아오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럴 때 적신은 버선을 적시지 않고, 방한에도 제격이었다고 노조사는 증언하고 있다.
왼편 노인은 예비 견짓대를 목 뒤 옷섶에 꽂고 있다. 요즘 낚시꾼과 같은 모습이다. 낚싯대의 얼래 부분의 길이가 다른 자료에 비해 긴 점이 특이하다. 또 평견지로 설장 너비가 좁아 보인다. 이 견짓대는 노들강변에서 ‘쪽재비 견짓대’로 불리는 형태로 폭이 좁고, 경량화되고 탄력이 있는 대였다. 과거 큰 얼레에서 현재의 견짓대로 이행되는 중간 과정의 형태이다. 원 자료에 ‘구멍낚시’라는 제목에 “꽁꽁 얼어붙은 강의 얼음을 깨고 구멍을 뚫어 낚싯줄을 드리우고 있는 태공들. 손과 얼굴만이 노출되어 있을 뿐 단단히 무장했다”는 해설이 있다. 낚시꾼 복장으로 보아 촬영 연대가 오랜 것으로 보인다. (민속공보사,「한국민속백년」, 1979년, 176쪽)
남바위를 쓴 낚시꾼이 책상다리를 하고 있고, 옆에 솜옷을 입은 구경꾼이 쭈그려 앉아 있다. 원 자료에 사진 제목이 ‘겨울낚시’로 되어 있고, “주로 붕어나 잉어를 많이 잡았다. 그 재미에 한겨울의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앉아 버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라는 해설이 있다. 낚시꾼은 남바우를 쓰고 있다. 구경꾼이 쓰고 있는 모자는 상제가 쓰는 굴건으로 보인다. 상제가 얼음판을 지나다 낚시를 구경하는 것인지. (서문당,「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생활과 풍속」, 99쪽, 1987)
상투를 튼 중년인이 한 손에 물고기를 들고 한 손으로는 얼음 구멍에서 무엇인가 꺼내고 있으나 사진 상태가 나빠 확실히 알기 어렵다. 들고 있는 물고기는 잉어인 듯. 옆에는 물고기를 담는 다래끼가 놓여 있다. 추운 겨울에 모자도 없이 인물이 맨상투인 점, 그리고 견짓대를 비롯한 낚시도구가 보이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얼음 구멍 속에 물고기를 저장했었거나, 물 속에 설치되어 있던 그물을 들어올리는 장면으로 보인다. 또 자연스런 모습이 아니라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한강에서 얼음낚시를 위해 구멍을 뚫을 때는 직사각형으로 가로를 길게 뚫었다. 사진과 같이 구멍을 둥글고, 넓게 뚫으면 사람이 빠지기 쉬워 낚시꾼이 기피했다고 한다. 왼쪽의 디귿 자로 굽은 물건은 물 속에 있는 물건이나, 그물을 걸어 올리는데 쓰는 ‘글겡이’로 보이나 확실치 않아 궁금할 따름이다. 원 자료는 朝鮮風俗風景寫眞(朝鮮風俗硏究會, ウツボヤ書冊店, 1920년)에 수록되어 있다. (민속공보사,「한국민속백년」, 175쪽, 1979에도 인용)
위 사진과 아주 비슷한 사진이 까를로 로젯티(Carlo Rossetti)가 쓴 「꼬레아 꼬레아니」(숲과나무, 1996년)에 수록되어 있다. 강 배경과 인물, 글겡이, 다래끼는 동일하다. 다만 인물 오른 쪽에 구경꾼이 쪼그려 앉아 있고, 뒤에 두 소녀가 잉어로 보이는 물고기를 들고 포즈를 잡고 있다. 제목은 ‘한강에서의 얼음낚시’이지만 위 사진과 동일한 장소에서 연출된 사진인 듯하다. 그렇다면 위 사진의 연대는 매우 오랜 것으로 보인다. 로젯티는 1902~1903년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를 지냈던 사람으로 당시 서울의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귀국한 후「Corea e Coreani」를 출간했다(1904년). 로젯티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편견 없이 진지하게 탐구한 사람으로 다른 외국인들이 저술한 어떤 책보다 조선의 문화, 풍물에 대해 많은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
한국낚시 55년에 수록된 한강의 얼음낚시 사진이다. (한국낚시 55년, 다락원, 2001년) 원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겨울 얼음판의 진풍경. 잉어가 지나다닐 만한 길목을 지키고 앉아 훌치기바늘로 잉어를 낚아채는 챌낚이 큰 인기를 끌 때가 있었다. 최근에 웬만한 추위가 몰아치지 않는 한 한강이 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자연히 꾼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 사진의 촬영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육이오전쟁이 끝난 후, 한강 철교가 복원되지 전의 사진이다. 강 속에 잠겨 있는 철교를 양쪽으로 꾼들이 줄을 지어 앉아 있다. 철교가 가라앉은 곳을 중심으로 잉어가 월동하는 유명한 잉어 곬이었다고 한다.
한국낚시 55년에 수록된 한강의 얼음낚시 사진이다(?한국낚시 55년?, 다락원, 2001년). 원문 설명은 다음과 같다.
“한강 광나루 일대의 배 견지낚시 모습. 한강의 대표적 견지낚시터였던 이곳도 천호대교가 생겨나면서부터 그 명맥이 끊겼다.”
사진 촬영 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천호대교 공사(1974.8.17 ∼ 1976.7.5.) 전의 사진이라면 아마도 1960년대 이전의 모습일 것이다.
조선일보 사진 D/B에 1960년대 사슬낚 모습으로 밝혀져 있는 사진. 사슬낚에 고기를 걸고 노를 짓고 있는 노인의 사진이다. 멀리 보이는 다리는 광진교로 보인다. 낚시 배가 본류 제 포인트에 있지 않는 점, 그리고 물고기 입에 바늘이 걸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연출된 사진인 듯 하다. 아마도 사진을 찍은 이가 뭍에서 배를 물가로 불러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사슬낚을 해 본 조사의 경험 상 물고기 입에 낚시가 걸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대동강의 견지낚시 기록: 朝鮮總督府, 「生活狀態調事 二」, 平壤府 사진편. 1934년 위 사진은 朝鮮總督府에서 조사한 「生活狀態調事 二」 平壤府 편에 수록된 대동강의 낚시 사진이다. 이 책은 1934년에 출판되었지만, 사진의 촬영 연대는 알 수 없다.
이 사진은 흔치 않은 사슬낚 모습을 촬영하고 있다. 매상이 일곱 척이 강 복판에서 사슬낚을 하고 있다. 사슬낚은 노를 저어 배를 움직여 가면서 견짓대로 고기를 낚는다. 사진 가운데의 깊은 곳이 고기가 나오는 장소로 매상이 들이 순서대로 그곳을 순회하며 한사람이 챔질을 하고 돌아가면, 다음 사람이 챔질을 하며 빙빙 돌면서 교대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얼음견지 모습이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점, 그리고 견짓대가 작은 점, 쓰리나 기타 빙상 도구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잉어낚시로 보기는 어렵고, 납줄이 빙상낚시로 보인다. 당시 북선 사람들은 납줄이 얼음 낚시를 즐겼다고 한다.
이 사진은 1911년 이전에 그림엽서로 나온 한겨울 한강의 견지 모습이다.
이 엽서는 1911년도에 대구에서 일본으로 부쳐졌다. 이 사진의 장소는 흑석동 근처 노들강변이다. 낚시꾼들은 사진 전면에서 뒤쪽으로 열을 지어 낚시를 하고 있다. 이 곳은 돌밭과 감탕밭의 경계로 당시 유명한 곬이었다고 한다. 이 사진의 연대, 그리고 촬영 장소, 낚시꾼의 수로 미루어 보기 드문 견지낚시 기록화로 당시의 모습을 생생이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