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 속에 왜송 한 쪼가리 넣어 본 적 없어
어느 날 먹 만든다는 이가 그를 찾아왔다. 뜬금없었다. 그가 죽염 굽는 가마에 값비싼 토종 소나무만을 골라 태운다는 소문이 났더란다. 그 그을음을 받아서 좋은 먹을 만들어 보겠노라고 먼 길을 찾아 온 것이다.
돌아보면, 가마 속에 왜송 한 쪼가리 넣어 본 적이 없다. 값싼 장작을 두고 오로지 귀한 조선 소나무만을 가려 쓴다. 독성을 없애주는 성분도 성분이지만 맑은 솔향을 보태고 싶은 그 마음이다. 그의 가마 앞에 쌓아진, 잘 말려진 조선 소나무는 좋은 죽염 만들기의 시작은 바로 여기서부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토라고 가리지 않으랴. 가마를 쌓은 황토벽돌이며 지붕을 얹고 소금 채운 대통을 밀봉하는 황토 역시 거름기 미치지 않는 깊은 산중에 들어가 석 자 이상 깊이에서 ‘약 되겄다’ 싶은 것만을 가려 쓰고 있다.
그렇게 까탈스럽게 고르고 고른다. 대나무는 3년생 국산 왕대를 겨울(음력 10월경)에 잘라 쓴다. 소금이 흡수하게 되는 대나무 진액(대기름)의 유황성분이 이 때 가장 풍부하며 대밭에서 막 베어온 생대라야 진액이 마르지 않아 좋다. 추운 겨울에 작업을 하는 이유다.
소금은 신안 하의도나 비금도 등처럼 육지에서 가깝지 않은 섬에서 구한다. 순수한 천일염, 그것도 여름소금을 구하노라면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함은 물론이다.
볶아서 미세하게 빻은 소금을 대략 60cm 길이의 대통에 담아 채운다. 황토로 밀봉하고 도자기 그릇 굽듯 가마 안쪽에서부터 차근차근 세우고 나서 불을 지핀다. 한번 지피면 12시간 정도는 불을 넣는다. 그 불이 사흘도 탄다. 1600도의 고온으로 타오른 가마는 불을 꺼도 그 열이 1주일을 간다. 그때서야 재작업을 할 수 있다. 꺼낸 죽염에서 혹여 섞일 수 있는 숯을 긁어낸 다음 빻고 또 빻아 다시 새 대통에 넣어 굽는다.
소금을 구워 고열로 녹여 내릴 때는 쇠로 만든 가마를 쓴다. 철의 기운을 죽염 속에 보태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로소 나무(木 대나무) 불(火 소나무장작) 흙(土 황토) 쇠(金 쇠가마) 물(水소금)의 오행(五行)의 기운이 갖춰진 죽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세 번 정도 구워낸 죽염은 일상의 생활염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완전한 죽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아홉 번을 거듭 구워내야만 한다. 한번 더 구울 때마다 소금은 점점 줄어든다. 열 가마 소금 넣으면 한 가마 남짓 나오는 것이 죽염이라는 것이다. 효율성이나 이윤을 따지자면 미련하고 어리석은 고집이다.
“그렇게 아홉 번 구운 소금은 부딪히면 쨍쨍 소리가 나요. 쇠가 됩니다.” 그 ‘완성의 소리’를 즐기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보답이고 즐거운 상(賞)이다.
▲ 타오르는 불길 속에 소금을 채운 대통이 보인다. 3년생 국산 왕대를 음력 10월경에 잘라 쓰
면 풍부한 대나무 진액(대기름)의 유황성분이 소금에 스며든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정성 다했다’는 숫자 '9’
왜 하필 아홉 번인가 물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정성을 다했다는 뜻을 담은 숫자겠지요.”하는 대답이 돌아온다. 한 번 한 번 공들인 그 아홉 번의 지성이라면 그건 정말 소금이 아니라 ‘금’이라 여기고 들여다볼 만하지 않은가.
“여덟 번만 굽고 아홉 번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모를텐데요.”
“자존심이고 양심이죠.”
간명한 대답이다. 그의 자존심과 양심은 함께 작업하는 마을사람들이 제일 잘 안다. 그이들이 외지 나간 자식들이나 친척들에게 ‘만수죽염’을 곧잘 선물하는 이유다. 사이비죽염들이 매스컴에서 비난을 받아도 그의 죽염은 판로를 염려하지 않았던 이유다. 알음알음으로 그를 믿고 가져가는 사람들이 그의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기를 바랍니다.”
그 욕심으로 정강이를 무수히 다쳐가며 불을 지피고 죽염을 굽는다. 선천성 장애인이었다면 차라리 보이지 않는 환경에 익숙해졌을 법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몇 걸음을 옮기면서도 손을 내밀어 눈앞에 절벽처럼 다가오는 어둠을 헤치고 나가야 한다. 그런 더디고 굼뜬 움직임으로 소금 지어 나르고, 담고, 황토흙 이겨 봉하고, 가마 속에 무릎걸음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대통 나란히 쌓고, 불 지펴 죽염을 굽는다.
▲ 깊은 산 골골에서 채취한 풀과 덩굴을 발효시켜 산야초 효소도 담근다. 항아리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건 그의 손길이 미칠 수 있을 만큼만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많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작업을 할 때마다 상처투성이가 된다. 엉겁결에 의지하던 지팡이를 놓고 양손으로 작업을 하다가 생기는 상처다. 그렇게 아홉 번을 하는 것은 눈밝은 이들이 하는 것의 또 아홉 배쯤은 힘든 일일 것이다.
“건강한 사람도 힘들다 힘들다 하면 힘든 것이고, 저처럼 불편한 사람도 편하다 편하다 하면 편한 것이죠. ”
아홉 번 뜨거운 가마에 들어가야 하는 것, 그 불길을 견뎌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그는 어느새 심지가 쇠처럼 단단한 사람으로 단련돼 가고 있는 중인 게다.
“눈앞 이익에 눈 멀면 되나요?”
신학식씨는 해마다 그 해 첫 불을 가마에 지필 때면 돼지를 잡고 마을잔치를 연다. 첫 해 불 때던 그 마음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그 마음으로 죽염을 만들고 산야초 효소를 만든다. 항아리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건 그의 손길이 미칠 수 있을 만큼만 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많이 만들어내는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많이 팔고 많이 벌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남이 어떤 길을 가서 어떤 이익을 구하든 기웃거리지 않는다. 작은 이익을 얻고자 두리번거리지 않는다. 떼돈 벌겠다는 욕심 같은 것은 그를 넘어뜨리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큰 욕심을 부려야죠. 눈앞 이익에 눈 멀면 되나요?”
눈 먼 그는 한 치 앞 세상에 연연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더 잘 보게 된 것이 있다.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덕(德)을 쌓고 선(善)을 쌓는 길. 이젠 헤매지 않아도 보인다. 세상 끝까지 헤아려 보면, 거기 가야 할 길이 또렷하다. 그 길 아니면 안 되는 길.
기사출력 2006-09-20 15:4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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