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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 기념비에 새겨진 글-
마음을 다해 학문을 권장하고 부지런히 힘써
仁을 베풀었다.
은혜를 입게 하고 덕을 베풀며
학교를 세워 오래도록 봄이 오다.
위대하도다. 學山 선생은 칠원의 훌륭한 집안인데 재주와 품격이 단정하고 온아하였으며 학식이 고명하였다.
갑술년(1934년) 봄 학교 건설을 하여 홀로 계책을 다하였으며 어질고 수고를 하고 나무 아래에서 교화함이 극진하여 학교를 준공하여 입실하니 촌음을 아꼈다.
병자년(1936) 풍우에 교실이 무너져 다음 날부터 또 나무 아래에서 교학하기를 게을리 아니하였다.
정축년(1937년)에 다시 창건하니 노심진력함이 배로 더 하였다.
기타 지방 출입에 각종 사업을 친절히 설명하고 지방의 개발에 한결 같으니 눈으로만 보고 있을 수 없고 침묵만 할 수 없어 비석에 새겨 오래도록 전하게 하고자 한다.
1939년 5월
천포 유지 일동 세움(죽포 조득송 역)
이 글은 1939년 보성군 회천면 회천동초등학교(현재는 폐교됨) 앞에 세워진 학산 윤윤기(윤승원) 기념비에 적힌 내용이다. 기념비는 이 학교의 모태가 된 천포간이학교를 열고 정착시킨 학산 윤윤기의 공덕을 기리고자 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것이다. 원래 한자로 쓰여진 비문을 현대어로 풀어쓴 글이다.
2. 한학을 버리고 신학문을 택하다
학산 윤윤기, 우리나라 초등교육의 산실 광주교육대학교에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것만 보아도 그가 우리 초등교육에 기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민족교육의 선각자로 칭송받고 있지만, 그의 삶은 그동안 베일 속에 숨겨져 있었다.1)
윤윤기는 보성군 노동면 신천리에서 부친 윤병남과 모친 김삼송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첫 부임지인 장흥 안양공립보통학교 교원명부에는 1900년 7월 9일 보성군 복내면 장천리 148번지에서 출생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보성 노동이 맞다고 후손은 증언한다. 유교적 전통과 엄한 가풍의 한학자 집안에서 자랐다. 학산은 덕암서원과 기산서원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학산은 크면서 부친의 가르침에 반기를 들었다. 일제가 한국을 침탈하는 상황에서 사서삼경만을 붙들고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의 댕기머리를 잘랐다. 신학문을 하기 위해 학산은 집을 떠났다. 그때 그에게는 1916년 결혼한 아내 정길순이 있었다. 아들도 있었으나 그가 독립운동을 하려고 집을 비운 사이 부인이 질병으로 사망하였고, 어린 아들도 곧 병으로 죽었다.
고향에 돌아온 학산은, 1918년 조선국민회 보성지회 결성식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조선국민회는 목포 출신 서광조·강석봉 등이 1917년 3월 평양에서 장일환 등과 조직한 비밀결사로, 전남 출신들이 꽤 많이 가입되어 있다.
학산은 1924년 4월 1일 광주에 있는 전남공립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1923년 4월 16일 특과 50명, 강습과 50명의 정원으로 개교하였다가 1931년 폐교한 전남공립사범학교는 1938년 광주사범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다. 학산이 입학하였을 당시 전남공립사범학교는 특과 2∼3년, 강습과 6개월 ∼ 1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였다. 1924년 4월 입학한 학산이 1년 후인 1925년 3월 30일 조선공립보통학교 훈도 임명장을 받은 것을 보면 그가 강습과를 수료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산은 1925년 3월 31일부터 1934년 4월 27일까지 9년 동안 장흥 안양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교사)로 재직하며 많은 학생을 길러냈다.
학산은 이들 학생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였다.
“(학교가 일본인 교장과 경찰들의 감시 아래 있었기 때문에) 윤 선생님은 대놓고 수업 시간에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는 못했지만, 말로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역사를 강조하셨죠.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그 두 가지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장흥향교 전교 마상용의 회고
3. 민족의 참교육자, 은급(恩級)을 포기하다
그렇게 첫 부임지에서 민족혼을 강조하였던 학산은, 1934년 4월 보성군 회천면 회천공립보통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1년 후인 1935년 천포리에 신설된 천포간이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간이학교는 2년제 단기과정의 초등 교육기관이다. 회천보통학교에 부임한 학산은 천포리 학생들이 교육기회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음을 알고 방과 후에 동네 아이들을 마을 제각으로 모아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학산은 간이학교를 세워 비록 2년제 과정이긴 하였지만 공교육을 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마을 유지들을 찾아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마을 유지 임상현이 쾌척한 토지에다 학산이 출연한 논 300편까지 보태 1935년 천포간이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그는 이 학교 훈도를 자원하였다. 하지만 학교 건물은 1936년 폭풍으로 무너졌고, 이듬해 1937년 다시 건물이 세워지는 등 어려움의 연속이었으나 학산은 꿋꿋이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냈다.
학산이 천포간이학교에서 조선어 교육과 민족사 교육을 한다는 소문이 점차 퍼져나갔다. 이 무렵은 일제가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던 때로 학교에서는 조선어 교육을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학산은 조선어 교육과 민족사 교육을 하였다. 한글 교재를 없앴고 한글 공책도 사용하지 않았다. 철저히 칠판에 판서하고 지우기를 반복하였다. 공책에 기록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정보를 입수한 보성경찰서 경찰들이 감시하였다. 학산은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경찰의 방문 당일에는 학생들이 학교에 나오지 않도록 하여 관련 증거가 발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 그럼에도 우리말 교육과 우리 역사교육을 한다는 소문은 계속 퍼져나갔다.
당시 동아일보를 구독했던 학산은. 수업 시간에 김구와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들이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다. 교육 당국은 이런 학산을 더 이상 천포간이학교에 근무하게 놔두지 않았다. 학산은, 천포간이학교 개설 5년 만인 1939년 보성북공립심상소학교(보성초등학교)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천포 사람들은 학산의 공적을 기억하고자 기념비를 세웠다. 맨 첫머리의 글이 바로 이 기념비에 새겨진 글이다.
황국신민화 정책이 날로 심화되자 더 이상 공교육기관에서 민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학산은 부임한 지 1년이 채 안 된 1940년 1월 학교에 사표를 냈다. 평소 꿈꾸었던 민족 교육을 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일본 왕이 주는 은급(恩級)을 포기하였다. 은급은 15년 이상을 근무한 공직자에게 ‘천황이 그 공로를 치하한다’는 의미에서 주는 연금이었다.
4. 우리나라 최초의 무상교육기관 양정원 설립
보성보통학교를 사직한 학산은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새로운 학교를 설립하였다. 바로 양정원(養正院)이다. 학산이 양정원을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보성의 부호 정해룡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늘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였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줄 민족교육의 도량을 세우는 데 두 사람은 뜻을 모았다. 정해룡은 2천여 평의 땅을 선뜻 희사하였고, 여기에 학산 자신이 모아온 전답 20마지기와 14년 봉직한 교원 퇴직금을 보탰다. 학산은 마침내 자기의 의지에 따른 자신의 교육을 실행할 기반을 갖게 되었다.
양정원의 설립 주체를 가지고 보성의 부호이며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민족주의자 봉강 정해룡과 학산 윤윤기 사이에 논란이 있다. 여러 증언을 종합해 보건대, 정해룡 선생의 재정적 후원과 학산의 출연이 더하여져 양정원이 세워졌음은 분명하고, 학교 운영은 학산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마침내 1940년 4월 12일 양정원 1기 입학생이 선발되었다. 무려 500명이 몰려왔다. 보성군 전역에서 학생이 왔으며, 장흥과 영암, 완도와 강진에서도 학생들이 왔다.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교문을 열어주었다.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는 무상교육이었다. 양정원의 무상교육 하나만으로도 학산은 한국의 교육사에 신기원을 연 교육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무상교육기관 양정원은 1947년 폐교될 때까지 2,000여 명의 학생들에게 민족혼을 심어주었다.
학산의 가르침을 제자들은 그대로 실행했다. 징병으로 끌려가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하였다. 제자 고영달의 증언이다.
<“나는 일제가 최후 발악을 한 1944년 봄에 징병에 끌려가 만주 관동군에 배속되었다.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5년 봄에 우리 부대를 일본 본토로 이동시켰다. 열차편으로 부산으로 가는 도중 대구 근처 오르막길에서 친구 한 사람과 같이 뛰어내려 탈출에 성공했다. 토굴 생활 4개월 만에 해방을 맞아 밝은 세상에 나왔다. 내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탈주를 하게 된 것은 친척의 권유와 양정원의 민족교육 덕택이다.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고 우리가 독립된다는 말을 몇 번 들었기에 결행한 것이다.”
1992년 4월 학산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양정원 터에 표석을 세웠다. 표석에는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무상교육을 편 배움터로 자주정신과 민족혼을 불러일으킨 유서 깊은 땅으로 길이 빛날 것”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5. 건국동맹결성에 참여한 독립운동가, 윤윤기
양정원에서 민족 교육을 펼쳤던 윤윤기는, 만주와 중국을 자주 오갔다. 임시정부 외무 차장과 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장건상, 조선의용대 정치부장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역임한 김성숙은 학산이 비밀리 중국을 다녀왔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학산이 지은 7편의 한시도 고국을 떠나 이국땅을 떠도는 사람의 애국심과 향수가 구구절절 배어난다. 그 가운데 한편인 ‘억보초병(憶步哨兵)’을 옮긴다.
보초병을 생각하며 憶步哨兵 |
독립운동가 학산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자신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독립군 병사의 심정과 기개가 느껴진다.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고 지켜보지 않고서는 쓸 수가 없는 시다. 따라서 학산은 중국 북부 지역에 있는 독립군 부대에 체류하면서 이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1938년 조직된 조선의용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운암 김성숙과 만났다는 것에서 짐작된다. 김성숙은 1940년 충칭 임시정부 시절 학산이 임시정부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학산의 아들 윤성식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조직되어 있던 동북항일연군이라는 설도 있다. 어떤 부대이건 함께 참여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글이다.
“조국의 흥망이 그대 두 어깨에 걸려 있으니/ 어찌 살아서 고국에 돌아갈 날을 생각하리”
라는 마지막 구절은 독립을 위해 자신을 조국에 바치겠다는 각오를 표현하고 있다.
국내외를 오가며 일제의 패망과 조국의 독립을 확신한 윤윤기는, 몽양 여운형이 주도하여 1944년 결성한 건국동맹에 참여했다. 기밀 유지를 위해 이름과 발언, 문서를 남기지 않았던 건국동맹이었기에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최기현이 1992년 양정원 표석 제막식 때 행한 축사에서 여운형과의 밀접한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윤윤기가 여운형을 만나러 갈 때 수행한 최기현은,
“해방 직후 서울에 가셔서 의정부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과 정사를 논의하셨습니다. 그리고 몽양 선생과 차기를 약속한 뒤 귀향하여 후진 양성에 매진하였습니다.”
라고 증언하였다. 역시 여운형 아래에서 활동했던 시인 이기형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학산은 건국동맹에서 호남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분이었다. 건국동맹의 호남조직 책임자는 황태성씨로 알려져 있으나 황태성의 고향 및 연고는 경북 대구지방이며 그곳에서 주로 활동했다. 호남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학산이었다.”
영암 출신으로 전남 독립운동의 토대를 구축한 유혁 또한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참여하였다. 경기도 양주에 김용기가 세운 농군학교는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한 여운형의 비밀 아지트였다. 이곳에 결성된 농민동맹은 사실상 비밀결사였다. 유혁이 해방 직후 전남건국준비위원회 결성을 주도한 것도 견국동맹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해방 정국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한 여운형의 정치노선을 따른 윤윤기는, 1945년 9월 7일 미군 상륙을 앞두고 오세창, 송진우, 김성수 등 330여 명이 연서한 ‘국민대회준비취지서’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보성군 인민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7년에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결성한 시국대책협의회에도 참여했다.
한편 학산은 1946년 보성중하교 설립 추진위원장 및 사친회장을 맡았다. 하루바삐 해방 조국의 공교육을 일으키고자 하는 염원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6년 10월 1일 보성중학교가 개교하였다. 이제 양정원의 시대적 소명은 끝났다. 학산은 1947년 2월 24일 양정원의 문을 닫았다. 학생 및 학습 기자제, 벚나무, 자료 등 일체를 회천서국민학교에 기증하였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국군과 경찰은 대대적으로 죄익 소탕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 무고한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당시 보성 일대는 ‘낮에는 군경, 밤에는 산사람’들이 장악하는 등 국군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치열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다. 민족교육을 하고 좌, 우를 넘어 통일국가를 꿈꾸었던 윤윤기는 어느 날 좌익으로 공격받고 있었다. 심지어 보성 경찰은 양정원 건물이 빨치산의 은신처로 이용된다면서 학산을 비롯한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양정원 건물은 좌익의 소굴이라 하여 불태워졌다.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1950년 7월 21일, 윤윤기는 보성경찰서로 불려갔다. 아마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다음 날인 7월 22일, 보성경찰서에서 불과 6km 떨어진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의 고갯길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필자의 고향 집 건너편 마을 뒤편이다. 당시 보성경찰서 서장은 일제 강점기 악명 높은 고등계 형사 이봉하였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윤윤기는 악질 친일 경찰 출신 경찰서장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슬픈 현대사의 아이러니다. 아들 윤호철과 동생 윤점성은 학산의 시신을 찾아냈다. 학산의 시신은 굵은 철사로 상체와 두 팔이 묶여 있었고, 하체도 발목이 결박당해 있었다. 예리한 총검으로 찌른 듯, 몸통에는 깊은 자상이 여러 곳에 나 있었다. 입은 양쪽으로 귀밑까지 찢어졌고 코도 찢겨나갔다. 이는 모두 부서진 상태였다.
학산이 학살된 지 53년이 지난 2003년, 학살 현장인 미력면 고개에서 학산 윤윤기 선생 학살 현장 및 추모 위령제가 열렸다. 이날이 있기까지 유족들에게는 서러움과 통한의 시간이었다. 또한 독립유공자 서훈 문제도 풀어야 한다. 국가보훈처는 몽양 여운형을 2005년 독립유공자로 서훈했다. 또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47명도 서훈을 받았다. 그런데 학산은 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을 수 없는가? 학산의 유족들은 “학산이 지식과 직위, 재산을 전부 내놓았고, 오직 민족교육·반일저항운동·통일정부 수립에 목숨까지 바친 애국지사임을 국가와 국민이 정당하게 평가해 주고, 억울한 죽음의 진상이 밝혀지기를 희망한다”고 하소연하였다. 하루빨리 학산의 업적이 재평가되어 독립유공자 서훈이 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도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2013년 10월 22일, 광주교육대학교에서는 학산의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흉상에는 ‘민족교육의 선각자 학산 윤윤기’라고 새겨져 있다. 학생들의 가슴에 민족혼을 불러일으켰던 그의 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후학들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부모를 기리는 차녀의 효심 |
필자와 면담하고 있는 차녀 윤종순 |
1) 필자는 전남교육청에서 간행한 『독립운동가 교사가 되다』(2022)에서 윤윤기의 삶을 다루었다. 이후 2023년 여름 팔순이 넘은 둘째 딸 윤종순 선생을 만났다. 딸은 억울하게 죽은 부친의 신원을 애타게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 작은 방에는 윤윤기 부부의 위패를 모셔놓고 매일 상식을 하고 있는 효녀의 안타까움이 가득하였다. 필자에게 부친의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해달라고 여러 차례 당부하였다.
글쓴이 박해현
초당대 글로벌화학기계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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