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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수원]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제1독서 이사 55,1-3
† 제2독서 로마 8,35.37-39
† 복음 마태 14,13-21
오늘 전례
▦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에서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만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증을 풀어
주며 세상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가시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값을 치를 수도 없는 이러한 선물을 주님께서는
거저 주신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자애에 깊이 감사하며 사랑의 선물인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초대를 전해 준다. 목마른 이들을 물가로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돈이 없는 이들도 술과 젖을 살 수 있으며,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은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자애로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을 고백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제2독서).
★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보시고 가여운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록 사랑을
베푸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에게 익숙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복음을 오늘 다시 듣습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구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길을 보여 주신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남은 조각’이라는
말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은 퍽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가득
차다’에서 파생된 명사 ‘충만’(pleroma)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이
자주 강조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은총의 충만, 곧 차고 넘치는
은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대개 ‘남은 조각’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은
우리의 고통과 분열된 자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조각이나 파편에서 시작하는 것,
이는 지상에서 지속되는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서간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는 이는 거울에 비친
세상에서, 조각과 파편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감합니다.
보잘것없는 남은 빵 조각이 주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담아 친히 축복하신 구원의 양식을 반영하듯이, 조각나고 상처
받은 우리 각자의 삶은 주님께서 선사하신 충만한 구원을 비추어 줍니다.
남은 빵 조각이 광주리에 모였을 때, 그 빵 조각은 충만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도 부서진 각자의 삶이 만나고 모일 때 우리의 삶은
주님의 생명을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구원 은총의 작지만
빛나는 표징임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성체성사를 닮는
삶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14,13-21
며칠 전 새벽,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당황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한쪽 눈이 떠지질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러지? 왜 눈이 안 떠지지?’하면서
욕실의 거울 앞에 섰습니다. 거울을 통해서 바라 본 저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더군요. 한쪽 눈이 거의 감길 정도 퉁퉁 부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부어 있는 부위를 자세히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바로
눈 밑을 모기한테 물렸더군요.
모기한테 물리면 불편하기는 해도 사는데 있어서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눈 밑은 달랐습니다. 많이 부어 있다 보니 만나는
사람마다 묻습니다.
“아니, 눈이 왜 그래요? 사고 났었어요?”
눈이 엄청나게 부어서 사물을 보는데 초점이 잘 맞지 않습니다. 또한 말 할
때에도 불편해서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생각에 사람들의 시선도 잘 맞추지 못합니다.
겨우 모기한테 물렸을 따름인데, 제 삶에 큰 불편함을 가져다줍니다. 작은
벌레 하나일 뿐인데도 말이지요.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깨닫습니다. 그 작은 것 하나가 내
삶 전체를 흔들어 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의 일은 큰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작은 것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행하셨고,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일상의
삶 안에서 주어지는 자그마한 사랑의 일에 있어서 소홀히 하지 않는
충실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 지는 기적도 그렇지요. 주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놀라운 기적, 즉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작은 봉헌물을 가지고 큰 기적을 만드신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황에서 이루신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외딴
곳이었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하느님의 큰
영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 명령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었는데, 설마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었을까요? 내어 놓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겠지요. 자기 것을 기꺼이 내어
놓은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반응을 주님께서는
그다지 신경 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너무 작다’고 불평을 쏟지도
않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기쁘게 내어놓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시고 모두를 만족시킬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는 주님의 명령에 곧바로 응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의 적은 봉헌으로도 커다란 일을
행하십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의 발자취를 보라. 그들이 걸어온 길은 고난과 자기
희생의 길이었다. 자기를 희생할 줄 아는 사람만이 위대해질 수 있는
법이다(G.E. 레싱).
나쁜 본보기도 필요하다.
우리 곁에는 참 좋은 본보기가 많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정말로
존경스럽고 사랑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본보기를 따르기란 참
쉽지 않더군요. 성인 성녀의 삶을 보면서 그들처럼 살아야 하는데 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나와는 딴 세상에 사시는 분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본보기를 제대로 따르지 못했습니다.
대신 좋은 본보기보다는 나쁜 본보기를 따라할 때가 많았지요. 나쁜
본보기는 세속적이며 물질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감각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한 유혹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나쁜 본보기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솔직히 저는 좋은 본보기보다 나쁜 본보기를 따라 하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좋은 본보기는 너무나 엄청나서 그냥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나쁜 본보기는 저도 모르게 따르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절대로 안 돼.’라는 생각으로 올바른 길로 들어서기
때문이지요.
삶 전체가 은총이며 축복임을 깨닫게 됩니다. 매 순간이 주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삶이 의미 없을까요? 단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나의 속 좁은 마음은 아닐까요? 세상에 완전히 틀린 것은
없습니다. 고장 난 시계조차도 하루에 두 번은 제대로 된 시간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 인쳔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여러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우리가 말하는 사랑이 확신에 이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제 2 독서 묵상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8,3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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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 시절, 이 말씀을 대하게 될 때, 순수한 가슴에 전율을 느끼기도
했고, 반면, 바오로 사도는 어떻게 저런 확신에 이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핏 보면, 이 구절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 말은 바오로 사도가 가지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떼어낼 수 없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묘사하기 위해서,
나쁜 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좋은 힘마저도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방해할 수 없다고 말을 합니다. 대단한 확신입니다.
여러분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요? 사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후,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그분을 전했고, 그러다가
그분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지요.
속된 표현으로 예수님께 미친 삶이었고 죽음이었습니다.
바오로의 확신에 찬 고백은 바오로 사도 혼자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했으리라 봅니다. 분명 그분의 도우심이 있었음을 의심치 않습니다.
목숨을 걸기에 가장 가치가 있고 행복한 길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셨음이 분명합니다.
참 많은 것을 앞에 놓고 무엇을 취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길인가를
갈등하며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늘 유혹은 존재하고, 그 유혹을 뿌리치기 힘든 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사실 유혹이라는 말 자체는 뿌리치기 힘들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겠지요.
어쩌면 묶여있는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확신에 찬 사랑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 우리의 삶입니다.
하지만 변할 수 없는 진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만이 우리가 제대로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고백이 확신에 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기에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당신께서 보여주시는 사랑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서울] 연중 제18주일
2014년 가해 8월3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14,13-21
교황님의 한국 방문이 10일 정도 남았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의 방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교황님의 방한을 3번 맞이하는
영광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1984년 성인이 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입니다. 저는
당시 신학과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103위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여의도
광장에서 안내를 했었고, 교황님께서 신학교엘 방문해서 미사를
봉헌하셨을 때 저는 통로 쪽에 자리를 했었기 때문에 교황님의 제의가 제
곁을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을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났던 것처럼, 저는 교황님의
제의가 제 곁을 지나가는 순간 무척 기뻤습니다. 벌써 30년이 지난
일입니다.
그때 교황방한의 주제는 ‘이 땅에 빛을’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은 이
땅에 빛이 되었고, 그 빛은 많은 순교자들을 통해서 드러났으며, 우리들은
바로 빛으로 증거한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빛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막아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등불은 밝게 빛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황님 방한 이후 신앙의 빛은
더욱 밝아져서 매 10년에 신자가 100만 명씩 늘어났습니다. 당시에 예비자
교리반은 마치 학원의 강의 같았습니다. 저도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제가
학원 선생 같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두 번째 교황님의 방한은 1989년 제 44차 세계 성체 대회 때 입니다. 저는
군대를 제대 한 후 신학교에 복학을 했습니다. 세계 성체 대회를 준비하는
측에서는 ‘통역 봉사자’를 뽑았습니다. 저는 통역 봉사를 신청했고, 통역
봉사 요원으로 함께 하였습니다. 서강대학교에서 영어 등급 시험을
보았습니다. 그 뒤 저는 성체 대회기간 동안 괌에서 온 순례단을
안내하였습니다. ‘대주교님, 신부님, 수녀님, 신자들’과 함께 성체대회기간
동안 함께 하였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매일 외출을 허락받았습니다.
여의도 광장, 올림픽 경기장, 명동 성당 등으로 안내를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제게는 큰 영광이었습니다.
당시 성체대회의 주제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평화를 빕니다.’라고 하셨습니다. 평화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두가 밥을 배부르게 먹는 것입니다. 억울한 이가
없는 것입니다. 원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진복팔단’에서 잘 표현하셨습니다.
평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와 함께하고, 굶주린 이와 함께 하고,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체 대회 이후 탄생한 것은 ‘한 마음 한 몸 운동
본부’입니다. 교회는 이 운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웃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5000명을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것처럼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북한 동포에게도, 우리
사회의 그늘진 곳에도, 지구촌의 슬픔과 아픔이 있는 곳에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제 저는 세 번째 교황님의 방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 번의
교황방한은 신학생으로 맞이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교황방한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30년 동안 저도 많이 변했고, 한국교회도
많이 변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영성 신심 분과’입니다. 1984년도에는
신학교의 복도를 지키고 있었고, 1989년도에는 통역 봉사를 하던 제가
이제는 교황님 방한을 준비하는 한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크신 은총입니다.
이번 교황님의 방한 주제는 ‘일어나 비추어라’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이번
방한을 통해서 3가지 큰일을 하십니다. 첫 번째는 ‘아시아 청년
대회’입니다. 이례적으로 교황님께서는 아시아 청년 대회에 참석하시면서
한국 교회가 아시아의 복음화에 앞장 서 주시기를 요청하리라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는 선교의 열정으로 아시아는 물론 세계의 복음화에 함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124위 복자’에 대한 시복식입니다. 이 또한
이례적인 일입니다. 교황님께서는 선교사 없이 시작된 한국교회가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십니다. 순교자들의 영성이 세속화된
교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넣어 주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세 번째는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미사’입니다. 대한민국은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교황님께서는 평화의 사도이십니다. 교황님의 방한으로
대립과 갈등, 분열과 다툼의 시대가 지나가고 상생과 화합, 평화와 통일의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가 아시아의 앞길을 밝히는
횃불이 되어서 주님의 복음화를 향해 힘차게 일어나 비추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복음 : 마태오 14,13-21
<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패치 아담스’라는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감동적인 스토리를 담고 있습니다.
패치 아담스는 본래 ‘헌터 아담스’였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나
아버지까지 잃은 헌터는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 자살기도를 합니다.
삶의 목적도 없고 살아갈 자신감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이 미수에 그치자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치료를 받게
됩니다. 거기서 정신적 스승을 만나게 되는데 이름은 아서라고 합니다.
아서는 손가락 네 개를 펼쳐 보이며 몇 개로 보이냐고 묻습니다. 사람들은
다들 네 개라고 말하지만 그는 여덟 개라고 합니다. 모두 아서가 그래서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서는 그들보고 미쳤다고 합니다. 헌터는 어느
날 밤에 아서를 찾아가 그 질문의 의미를 묻습니다. 아서는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 너머에 있는 것을 보라고 말합니다.
헌터는 눈의 초점을 손가락이 아닌 아서의 얼굴에 맞추었더니 손가락이
여덟 개로 보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그 문제에만
매달려있지 그 본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서에게 깨달음을 얻은 헌터는 자신과 함께 지내는 루디를
다람쥐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다람쥐가 무서워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루디에게 의사와 간호사들은 무력을 쓰려고 합니다. 정신병원은
상담과 약물로 치료를 하는 곳이니 당연한 일입니다. 즉,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헌터는 그런 의사와 간호사들이 매우
불친절하게 보입니다. 아서는 작대기로 총을 만들어 루디가 보는 앞에서
다람쥐들을 소탕합니다. 루디는 헌터의 총에서 뿜어져 나오는 총탄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다람쥐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매우 흡족해합니다.
그리고 화장실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헌터는 팔짝 뛰며 기쁨의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헌터 아담스는 이제 패치 아담스라는 별명을 가집니다. 패치(Patch)는
‘상처를 치유하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합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고 삶의 의미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늦은 나이에 의대에 입학하게 됩니다. 아담스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데도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3학년이 되기 전에
환자를 만나서는 안 되는 규칙이 있는데도 그는 환자들을 만나고 이야기
해주고 들어주며 웃겨줍니다. 아기들에게는 우스운 복장을 하고 쇼를
하기도 하고, 스파게티에 목욕을 하고 싶다고 하는 할머니에게는
스파게티로 목욕도 시켜줍니다. 그들의 마음이 치유되면 육체적인 병도
더 빠르게 낫는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시골 농장을 개조해 무료로 환자들을 돌보아줍니다. 의사가
되기 전까지 진료행위를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비밀리에 하게 된 것인데
학교에 발각이 되어 퇴학조치가 내려집니다. 또한 자신의 환자 중 하나가
자신의 여자 친구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패치 아담스는
절망에 빠져 다 놓아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디선가 날아온 나비 한
마리가 마치 죽은 자신의 여자 친구처럼 자신을 위로해주고 힘을 주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는 주립의학협회에 자신의 퇴학을 철회해 달라고 제소합니다.
그리고 그의 연설을 통해 의사는 성적과 권위가 아닌 사람을 대하는
친밀함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협회는 그가 교칙을 어기기는
했지만 좋은 열정과 성적을 인정하여 그의 퇴학을 철회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 후 12년간 패치는 의료행위를 계속했고, 1만 5천 이상의 환자에게
무류 치료는 물론, 어떤 의료 사고도 일으킨 적도 없다. 패치는 버지니아
서부에 땅을 구입, 현제 게준트하이트(Gesundheit) 병원을 건설 중에
있다. 현재까지 1천여 명에 이르는 의사들이 그와 합류하기 위해 대기
중에 있다.”
오늘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바로 이와 같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주려고
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통해서 그들을 배불리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만약 제대에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우리에게 당신 살과 피로써 되돌려
주시겠습니까? 무엇을 만들려면 ‘재료’가 필요한데, 그 재료가 우리들이
이웃들을 위해 나누고 싶어 기꺼이 내어놓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의
내어놓음, 즉 봉헌이 없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기적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내어놓음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꾸,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줄 마음이 바로 기적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내어줄 것이 없다고 합니다. 혹은 능력 밖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들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물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이 시키는 대로 나누어 주는 시늉이라도 했으면 바로
기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된다는 데 우리는 안 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것을 잊고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겸손과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전 세계 사람들을 배불리고도 남을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세상이 굶주리는 것은 바로 겸손하지도 믿음도 없는 나의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 안에는 주기 싫거나 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어머니는 자녀에게 더 줄 수 있습니다.
자신의 피나 살까지도 찢어서 먹여 살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주게 되고 주다보면 줄 수 없는 것까지 주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사랑에서 나온 성사입니다. 우리를 먹이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처지인데 당신은 우리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사랑을 지니고
계셨기에 당신 한 분의 살로 세상 모든 이를 먹일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호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케이티라는 여인은 쌍둥이를 임신한
행복한 엄마였습니다. 2010년 3월 마침내 쌍둥이 남매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는 태어난 지 20분 만에 사망했습니다. 아이의 심장이
멎었습니다. 27주 만에 태어나 몸무게가 1Kg도 안 나가던 아이는 그렇게
엄마 곁을 떠났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안아 ... 봐도 ... 될까요?”
엄마는 환자복을 벗고 축 쳐진 아기를 가슴에 안았습니다.
“엄마의 체온이 느껴지니? 엄마는 너를 많이 사랑한단다.”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순간 아기의 멎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망진단이 내려진 2시간 뒤 아기는 눈을 뜨고 작은
손을 뻗어 엄마의 손가락을 잡았습니다.
엄마의 사랑과 체온이 아기의 멎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줄 것이 있습니다. 다만 체온이라도 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기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며 계속 우리 등을 떠밀고 있습니다.
‘나는 줄 것이 없어요.’라며 언제까지 버티시겠습니까?
‘내가 가진 것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이것으로도 온
세상을 배불리시고도 남는 능력을 지니신 분입니다. 제 모든 것을 당신과
이웃들에게 내어줍니다.’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고 싶기 때문에 갖게 됩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하면 새로운 생명이
창조되는 엄청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직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기를
결혼하기 이전부터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서로를 사랑하여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려는 사랑의 마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알고 보면 기적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행복한 삶 -재미있는 천국-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이사55,1-3 로마8,35.37-39 마태14,13-21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14,13-21
행복한 삶 -재미있는 천국-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우리의 행복지수는 얼마나 될까요?
소유와 비례하는 행복은 아닐 겁니다. 세계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다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얼마전 읽은 기사가 생각납니다.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비유였습니다. 스칸디나반도의
사회보장이 잘 된 나라가 단조로운 일상의 '재미없는 천국'이라면,
고달프기 짝이 없는 삶이지만 역동성이 넘치는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
이라는 데, 필자는 한 술 더떠 이제 '재미마저 사라진 지옥'이 된 한국이라
했습니다.
과연 '재미있는 천국'의 행복한 삶은 불가능하겠는지요.
가능합니다. 바로 하느님을 통해서입니다.
근원적인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하느님이 행복의 원천임을 증거하는 성서 구절은 끝이 없습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당신만이 나의 행복이십니다.'
'주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곳 당신뿐이옵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둔 사람!' 등 끝이 없습니다.
오늘은 '행복한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오늘 2독서 로마서에서 착안했습니다. 행복의 첫 조건입니다.
막연한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합니다.
말씀을 사랑합니다. 전례를, 미사를, 성무일도를 사랑합니다.
자연을 사랑합니다. 인생을 사랑합니다.
예술을 사랑합니다. 진리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사랑합니다.
이런 모든 사랑이 하느님 사랑에 이르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우리 역시 하느님 사랑을 체험합니다.
바오로처럼 우리는 하느님과 떨어질 수 없는 운명의 사랑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의 확신에 넘치는 고백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바로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 사랑에 깊이 연결되어있는지
깨닫습니다. 이런 사랑의 체험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고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로 만듭니다.
둘째,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오늘 1독서인 이사야에서 착안했습니다. 행복의 둘째 조건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행복의 둘 째 조건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사랑하여 이렇게 주님께 나아와 미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궁극에 갈 곳은 사랑의 주님뿐입니다.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를 당신 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목마른 자들아, 오너라.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서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우리를 초대하시는 생명의 원천이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근원적 목마름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다음 말씀은 그대로 행복을 잃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헛된 힘을 낭비하고 있는지요. 구구절절 가슴을 치는 호소력있는
말씀입니다.
'오너라', '들어라', '살리라'로 요약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 와서 그의 말씀을 들을 때 비로소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말씀이요 그대로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주님께 와서 주님을 말씀을 들으면서 영육이 살아나는 미사시간입니다.
마태복음을 통한 주님의 말씀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주님께 나아갈 때 안식이요 행복입니다.
주님을 떠나선 참된 행복도 없습니다.
셋째,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착안했습니다. 행복의 셋째 조건입니다.
오늘 마태복음은 그대로 성체성사, 미사의 원리와 은총을 가리킵니다.
저에게 유독 마음에 와 닿은 다음 구절입니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무엇보다 찬미의 사람이셨습니다. 온갖 정성과 사랑을 다해
하늘 은총을 바라면서 하느님께 드린 예수님의 찬미가 감동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드린 하느님 찬미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키고 군중들을 감동시켰습니다.
혹자는 감동한 군중들이 지니고 있던 양식을 나눔으로 모두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고 이 기적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믿음의 표현이, 희망의 표현이 찬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찬미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하느님 찬미입니다.
찬미를 통한 위로요 치유입니다. 슬픔이, 아픔이, 절망이 밀려올 때 이
모두를 찬미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즉시 슬픔은 기쁨으로, 아픔은 치유로, 절망은 희망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뀝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 찬미의 놀라운 은총입니다. 하여 우리 종교를
찬미의 종교라 하고 우리 믿는 이를 찬미의 사람이라 합니다.
특히 하느님 찬미를 전업으로 하는 '찬미의 사람'인 수도자에겐 하느님
찬미는 절대적입니다.
말 그대로 찬미의 사랑, 찬미의 만남, 찬미의 기적,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입니다. 믿는 이들에겐 늘 일상화되어 있어야하는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의 응답이 기적이요 풍성한 은총입니다.
바로 오늘 영성체송, 지혜서 말씀은 복음은 물론 성체성사의 은총을 잘
요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 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주님은 연중 제18주일,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1.주님을 사랑하십시오.
2.주님께 나아가십시오.
3.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이런 주님의 원론적 행복 3계명에 덧붙여, 어제 읽은(한겨레2014.8.2.일자
1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구체적 행복10계명을 소개합니다.
1. 내 방식의 삶을 살되, 타인도 자신의 삶을 살게 두자.
2. 마음을 타인에게 열자.
3. 조용히 전진하자.
4. 살며 여유를 찾자(식사 때 TV끄기 등)
5. 일요일은 가족과 함께 쉬자.
6. 젊은 세대에 가치 있는 일자리를 만들어 줄 혁신적 방법을 찾자.
7. 자연을 존중하고 돌보자.
8. 부정적 태도를 돌보자.
9. 개종시키려 하지말자.
10. 평화를 위해 행동하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당신을 사랑하여 당신께 나아 와 당신을
찬미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수도회]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14,13-21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날, 아니 조만간 우리가 직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한평생 그려왔던 곳, 그리워했던
곳, 갈망했던 하느님 나라이기에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 알량한 교리와 성경지식, 제 보잘 것 없는 신앙 체험이지만 총동원해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유한했던 이 지상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결핍이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원 없이 채워지는 곳...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안에
온전히 치유되고 바로 서게 되는 은혜로운 장소.
언젠가 한 특별한 수도공동체를 방문하고 제 나름대로 큰 충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흔적, 예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정다감한 어머니처럼 자상한 책임자 수녀님을 중심으로 능동적이고
협조적인 구성원 수녀님들의 조화와 화합이 거의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들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서로 섬기고 헌신하니 거기서 무슨 명령이나
순명, 회헌회칙이나 특별한 요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봉사를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도 깊은 신뢰심과
편안함, 행복함과 가족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자원봉사자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나누려고 방문하느라 공동체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본당 공동체, 보편 교회
공동체에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 각 구성원의 끝도 없는
자기 비움, 자기 낮춤, 헌신과 내어놓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그 배경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물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모퉁이에 군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작은 내어놓음-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아주 작은 선행과 봉사, 내어놓음을
기뻐하십니다. 그 작은 우리들의 내어놓음을 기반으로 엄청난 당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하늘의 도움이 더 크다 믿고파요.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 14,13-21
하늘의 도움이 더 크다 믿고파요.
많은 하객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며 많은 지출을 할 때가있습니다.
아무나 오는 하객 중 남자가 5천 정도면 여자나 애들은 더 많을 수
있습니다. 신기한 걸 구경할 때는 어린이들이 오히려 어른들보다는
많을 게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돈 돈 하며 세상 모든 일에서 너무나
돈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돈 돈 하지 않으시면서 이
많은 사람의 식사를 치렀습니다. 그러니 세상일 돈만이 해결한다고
믿지 말고 하늘의 도움이 더 크다 믿고파요.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마태오 14,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수도회] 충만함[단상]
2014년 가해 8월3일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와서 먹어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3
제2독서
<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5.37-39
복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연중 제18주일(2014년 8월 3일) 충만함
해도 저물어가고 인가도 없는 외딴 곳에서 헤매는 군중을 보시고 예수님은
마음이 움직이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마음이 없는 행동은 거짓입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행동은 사랑의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하게 됩니다. 겨우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장정만도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나
남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눈 앞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립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눈에 보이는 것에 가려 숨어있는 충만함을 직시하게 됩니다.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다른 말로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만 집착하지 않고 현실을 넘어 미래의 완성을
내다보는 원동력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는 달리 지극히 근시안적입니다.
“군중을 돌려보내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십니다.
주일은 무엇보다도 ‘먹는 날’입니다. 그것도 맛있게 배불리 먹는 날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라도 주일은 잘 먹습니다.
우리만 잘 먹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마음을 간절히 바라는 이웃에게
가서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나눠주어야 합니다. 오늘도 국회와
광화문에서 곡기를 끊고 진상 규명에 배고파 하는 세월호 유가족과
안산에서 진도 팽목항을 거쳐 지금은 대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희생
학생의 두 아버지와 누나가 생각나는 주일입니다. 그들도 주님의 충만함을
함께 느끼길 오늘 주일 미사 때 기도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인영균 끌레멘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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