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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의 글은 소생이 관계하는곳에 올린글인데 글쎄 어여삐 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아니 어쩜 이런곳에 이렇게 화려한 비경이 숨어있었다니 정말 놀랍다”
한국엠포르산악회의 국토종주자오선등반대가 1973년 3월 11일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에서 가평군
설악면쪽을 향해 조그만 무명봉을 돌아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대원전원이 절로 탄성을 질렀다.
그런데 지도상에는 산봉우리가 이름조차 표기되어있지 않았고 또 서울에서 그리 멀지도않은곳에
이정도의 수려한 조망, 울창한숲, 맑은물이 흐르는 깊은계곡이라면 어느정도 산악계에 소문이
났어야 되었지만 금시초문이었으며, 근처 마을의 촌로(村老)들에게 물어봐도 그저 앞산 또는
뒷산 정도로 명명하며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는 무명봉이었다. 그러면서 등반대가 산행을 마치고
상경하여 지도출판사를 비롯 다방면으로 수소문하였으나 그누구도 이산에 대하여 아는자가
없어서 그때 종주대 운행대장이던 고(故) 김지련씨가 등반대에 홍일점으로 참가하였던 여대원
진유명(晉有明 당시 27세)의 이름으로 후원사이던 일간스포츠에 개재하여 기사화한 계기로
“유명산(有明山)862m”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당시 유행하였던 산악안내등반팀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입소문이 나게되어 어떤때는
다섯 대의 버스가 동시에 “유명산” 명패를 달고 시발지인 서울운동장을 출발하는둥 정말
이름그대로 한때 문전성시를 이루게되었다.
그러기전 엠포르산악회는 한국중심부를 관통하는 “국토중앙부 직선종주”를 하기로 계획하고
남쪽인 순천(順天)에서 북쪽 후주고읍(厚州古邑)까지 약 764 km를 다음과 같이 종주하려고
하고 일간스포츠의 후원으로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972년 순천 --- 세천 163 km
1973년 세천 --- 가평 162 km
통일후 가평 --- 함흥 239 km
통일후 함흥 --- 후주고읍 199 km
한편 당시는 “국토종주 3천리” 라고 1968년 7월 10일 대한산악연맹이 주관하여 국토통일에의 의지로
제주산악회 참여로 최남단 마라도에서 시작 1972년 8월 28일 민통선 최북단 향로봉을 끝으로 총연장
1732 km의 종주를 마쳤고 그러자 각단위산악회에서는 제각각 태백산맥 또는 소백산맥 종주등
가히 종주등반을 하는것이 대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너도나도 참여하는 백두대간종주의
옛날판인 셈이다.
“세규야 이번 토요일 뭐할 거야?” “아니 누나 물어볼 필요가 있겠수?... 그건 그렇고 이번주는 왜?
인수봉 안올꺼요?” “아니 그런뜻이 아니라 내가 얼마전에 애기했잖아... 어쩌구 저쩌구....”
“예? 그일이라면 이제 그만 됬으니 딴데가서 알아보슈........”
진유명누나가 산에미쳐 나돌아 다니는 본인이 조금은 안되어 보였던지 벌써 두 번이나 나에게
요즘으로치면 소개팅 비슷한것을을 시켜줬는데 뭐 인연이 안될라고 그러는지 전혀 본인의
취향이 아니었고(마찬가지로 상대편도 그렇게 생각했을것으로 사료됨) 나또한 한가하게
시내에서 아가씨 팔장끼고 극장구경에 통키타 카페에서 생맥주나 마실정도로 나태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지금생각해도 자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진짜 퀸카(?)라고 우기는 누나에게 그러면 백운산장까지 올라오라 해보슈
한 것이 정말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꽤나 쑥스럽지만 그아가씨
뭐 얼마나 사랑에 고갈을 느꼈으면 어설픈 꼬임에 빠져 그 높은곳까지 올라왔는지
이해할수없을뿐더러 내친김에 인수봉 기존B코스를 두레박하여 올라가기까지 하였다.
(옛날 시골의 우물물을 퍼올리려면 두레박을 이용하였듯이 한마디로 초보자를 줄로묶어
위에서 무지막지하게 끌어당겨 올라가는 등반방식을 말하는우리들끼리의 은어) 어쨌거나
올라간것까지는 좋다고 치지만 내려가는것 또한 만만치 않을터 우리같은 선수(?)도 조금은
뒷머리가 뜨거운 그무시무시한 Over-hang 코스를 그것도 “S”자 하강을 하였으니 그날
그아가씨 아마 모르긴해도 지옥문고리 한쪽은 잡아봤다고 생각되며 나중에 그녀 친구를
통해 풍문으로 들은바에 의하면 뭐 표현하긴 쑥스럽지만 오줌까지 지렸다나 어쩠다나....
그렇지만 그런데로 청춘사업은 진행이 잘되어 그후에 시내에서 만나 차도 마시고
(차보다는 주로 소주집에나 다닌걸로 기억된다) 하여 보았지만 역시 등산이 빠진
내생활은 무미건조하였으며 옛날 신라의 김유신장군이 모처로 향하는 말의 목을벤
일화를 높이들어 산으로 되돌아갔는바 힘들고 땀흘리는 과정을 싫어하는 그녀와는
자연히 멀어지게되었다. 그렇지만 그런그녀도 이젠 돐잔치 마치고 손주들 재롱속에서
곱게 늙어가고 있으리라....
그건그렇고 이런얘기 어떻게 이렇게 함부로 쉽게 할수있냐고? 이건 벌써 40년까지는
아니지만 삼십년 하고도 수년이 훌쩍지난 이야기이며 또 지금 안식구 만나기 훨씬전
이었으며 또 아무일도 없었는데 뭘 어쩌라고.....
각설하고 여성회원 받지않는 우리산악회지만 누나는 우리의 특별회원(?) 으로서
(나이차이가 아주 많이나서 누나가 아닌 누님이었다) 특히 우리가 벽등반하러
올라갈시 Base-camp에서 짐돌이 역할을 많이 하여주었었고(그당시 도난사건이
자주 발생하여 부상자나 후배 한두명이 꼭 camp에서 불침번을 서야만했었다)
또 등반을 마치고 굼주린 배를 움켜쥐고 내려오는 우리들에게 식사준비까지
하여주는등 자상하게 모두를 대해 주었었다.
그러다가 1983년의 어느날 미국에 사는 친지의 초청을 받았다하여 우이동
“원주상회”에서 조촐한 송별식한 다음 며칠후 김포공항에서 잘다녀온다는
전화한통후 지금까지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다. 그후 다방면으로 수소문하여
보았지만 생사조차 확인되지않고있어 답답할뿐이다.
그건 그렇고 갑자기 생뚱맡게 삼류순애보까지 이야기하며 별 영양가 없는
헛소리를 해대는 이유가 뭐냐구? 그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얼마전 유명산 등산간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그 근방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마유산(馬遊山) 산이름 되찾기 운동” 이라는 조금은 긴이름의 제목하에
산의 유래를 나열하고 따라서 지금이라도 잘못된 산이름을 수정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적어놓은글을 읽게되었다. 그에따르면 본래 유명산은 무명봉이
아니라 산위에서 말을 길러 말들이 뛰어놀았다는 마유산(馬遊山)이며 이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또 산경표(山經表)에도
馬遊山이란 지명과 함께 楊根北二十里라고 적혀있다한다 (이건 사실이다 본인
도 이미 오래전부터 익히 이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개명운동까지
할줄은 꿈에도 몰랐다) 따라서 “유명산(有明山)이라고 잘못이름지어진 것은 불과
40여년밖에 되지않았는바 지금이라도 옛지명을 회복하여야할 당위성은 있지만
많은사람이 이미 그렇게 알고있고 표지판, 지도등에 이미 유명산으로 표기되어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이라도 늦지않았으니 한걸음 한걸음 고쳐나가자 하였다.
우리는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 오랬동안 알고 있었고 또 학교에서 교육받아왔던
태백산맥, 소백산맥 낭림산맥등 일본의 지질학자 小藤文次郞(고토 분지로)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와서 지질조사 및 측량등을 한후 나름대로 국제분류법에 의거
분류한 “산맥론” 에 의하여 1903년 조선의산악론에 논문으로 발표된후 불과 얼마전까지
학교 교과서등에도 실려 있을뿐만 아니라 어쩌면 전국민이 그렇게 알고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이론으로 적립한 대간(大幹) 정간(正幹) 또 정맥(正脈)과는 과학적인 분류가
틀렸으며 이방법은 우리의 바람과는 관계없이 그냥 세계에서 널리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분류법이다,
하지만 이는 일본인이 우리의 민족문화 전통을 말살 또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것이었다라는
소수의 국수주의(國粹主義)자들의 어쩌면 황당한 이론에 의하여 얼마전부터 평가절하
정도가 아니라 아예 퇴출되어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더 늦으면 안된다하여 잊혀진
뿌리찾기 노력등에 의하여 단칼에 “백두대간(白頭大幹)” 옛지명을 순식간에 회복
하였을뿐만 아니라 대대적으로 홍보되고 또 종주등반이 이루어지고 있지않은가?
그리니 본인생각에는 우리의 누리꾼들의 거대한힘은 그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길” 이란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게 아니라 여러사람이 지나감에 의하여
“길”이 되었듯이 그옛날 지명보다 현재의 지명이 더 인지도가 있으면(전에것이
나쁘다는 뜻이아님) 뭐 궂이 바꿀것까지야 있으리오마는 나는 두렵다 우리의
누리꾼들의 거대한힘을....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고치라 (智過必改), 또 잘못이
있으면 고치기를 주저하지말라 (過則勿憚改) 라는 옛성현의 말씀을 그들은 꼭
지켜 낼것이라고 보기에......
그렇게되면 유명산(有明山) 이란 고유명사는 지도상에서 아니 우리의 뇌리에서
영원히 퇴출될것이며 그에 맞춰 “진유명(晉有明)과 여러해동안 같이한 나의
그 많던 추억도 한순간에 사라질것임을.......
인수봉 대슬랩을 오른후 기존B코스 스타트지점인 소나무에서
좌로부터 000, 진유명, 장세규(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백운산장에서 선잠 자다가 나왔다. 이영구님이 시내에서 안주거리 좋은것 가져왔다하여...
좌로부터 장세규, 진유명, 이준, 이영구(백운산장주)
인수봉 정상에서 , 제일 좌측이 진유명
인수봉 정상에서, 좌측 본인 옆이 진유명, 끝 백바가지는 은주엄마(조누나)
진유명 생일날 그녀의양수리집에서 좌로부터 조선애, 이준, 진유명, 김정규, 변기태, 장세규 진유명 누나와는 가슴찡한 에피소드가있다. 1978년인지 9년인지 기억이 흐릿하지만 충북 제천산악회의 김주일, 김정석, 허영호 등이 우리를 그들의 나와바리인 희양산(羲陽山 - 충북 괴산군 연풍면/경북 문경군 가은읍 소재 봉암사(鳳巖寺)주산으로서 인수봉을 빼닮은 화강암이 미끈하게 뻗어있는 암벽등반의 요람지 격이지만 봉암사에서 현재 입산을 통제 하고 있다) 으로 초청, 같이 등반을 하게되었었다. (허영호는 당시만해도 변방의 일개 산꾼에 불과하였으나 그후 MT.Makalu를 시작으로 거벽등반에 성공하고 내친김에 남북극을 탐험하는등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그의 이름이 올라있는걸로 알고 있다) 당시 5개조 정도로 나누어 등반을 하였는데 본인은 자일파트너 동료 이준(李俊)군과 가야시마(萱島高雄- 日本 大阪白陵山岳會 - 인수봉에 등반와 백운산장에 채류중 우리가 이산에 간다니 덩달아 친구따라 강남왔다) 3인이 등반을 하였는데 좀더 어려운코스를 선정(밑에서 루트 파인팅할 때 눈에 확들어오는 코스가 있었다) 하여 등반하였는데 초행길이고 또 개척등반인 관계상 무지무지 고생하고 마실물도 다 떨어진 상태에서 쫄쫄 굶은체 헤드램프도 준비안된 상태에서 기다싶이 하여 새벽 3시경에 캠프지로 겨우 돌아올수 있었다. 다들 등반을 끝내고 소주한잔씩 하면서 우리를 기다리던 타 대원들은 피곤함에 하나둘 모두 골아떨어졌는데 누나혼자 애가 타서 주먹밥을 만들어 우리를 찾아 나섰는데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뻔도 했지만 천신만고 끝에 조우하여 목마른 입에 다급히 주먹밥을 밀어넣다 모두 토해버리고 말았었다. 그렇지만 그 주먹밥은 내생애에서 아직도 잊지못할 만찬으로 나의 뇌리에 남아있다.
첫댓글 그대는 청춘을 산에서 보내 지금의 도량을 쌓았구려. 이름하여 산사나이!
세련되 보이고 이쁜 아가씨였던 것 같은데 왜 심사가 맘에 안들었나요....
세월 거슬러 올라가 사진엔 없던 상황들이 한컷 한컷 눈에 보이는 듯하네요
아하! 유명산의 전설이 이렇게 탄생 되었구나
오랫만에 긴 글을읽어보았네~옛날 결혼한지 얼ㅇ아안되어서 자네 집 에서 등산장비본 기억이 나네~ 늘 건강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