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역쿠데타의 성공 이후에 수하르토는 약 3년간 서서히 수카르노 세력을 숙청하면서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갔다. 결국 수카르노는 압력에 굴복하여 20년 정도 연하의 군부 지도자에게 대통령 자리를 양보하였고 이제 수하르트는 30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하게 된다.
같은 독재자이지만 좌파적인 색채를 약간 띄었던 수카르노와 달리 수하르토는 경제적인 이유인지 모르지만 서구 편에 섰다.
수카르노 시절의 경우에는 재정 적자와 인플레이션이 심했고 그의 노선이 노선인만큼 외부의 투자가 거의 없었다. 이제 서구식 모델을 도입하자 외부의 투자가 늘어나서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겉으로는 약간 펴이게 되었다.
그러지만 이런 경우에는 대개 후진국의 경우에는 해외 투자의 경우 부패의 통로를 경유하기가 쉽다. 남한 역시 박정희 시절 개발과 더불어 개발비 명목의 해외 유입 자금의 일정 부분이 항상 높으신 분의 호주머니에 흘러가곤 하였다.
수하르토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지위를 이용하여 정부의 계약의 일정 부문을 항상 뜯어내었고 권력을 쥔 군부도 예외도 아니었다. 당시 지역의 군부는 거의 지방에서 치외법권적인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만일 지역의 군부 세력이 쪼개져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주 큰 세력이 많았다면 인도네시아는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수하르토는 형식적인 선거를 걸쳐서 거듭 대통령을 연임하였고 말만 식민지에서 벗어났을 따름이지 지배층만 네덜란드에서 수하르토와 군부가 다스리는 국가로 만들었다.
그 결과 수하르토 치하에 30년이 끝날 무렵에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의 대표로 인식이 되었다. 이 경우는 재러드 다이아몬드도 이곳에 자주 방문했기 때문에 그 예를 수없이 보고 느끼고 있었다.
이 새로운 경찰국가이자 전제주의적인 국가는 예기치 않게 1998년에 붕괴가 된다.
그것은 이미 남한이 그 직전에 겪었던 IMF 사태와 시발점으로 아시아의 금융위기도 동남아 전체에 덥친 것이다. 인도네시아도 화폐 가치가 80%까지 폭락했고 경제가 급전 직하하자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77세로 이미 노쇠한 수하르토는 이 시국을 당시 강제로 제압할 힘을 잃었고 군부 역시 수하르토에 압력을 넣었다.
이에 수하르토의 30년 철권 통치는 끝내고 자유 선거가 최초로 실시되어 이후 인도네시아는 하비비 집권기의 혼란스러운 과도기를 거쳐 1999년에 자유선거가 실시되어, 압두라만 와힛이 첫 민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압두라만 와힛은 2001년 7월 23일 탄핵으로 파면되었으며, 부통령이자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가 대통령이 되어 와힛의 잔여 임기를 채웠다. 2004년에는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당선되었고 이후 재선에 성공했다.
witpo
인도네시아의 민주화 시위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