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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9. 미사 해설 – 시작 예식 (4) 참회에 대해서 ①
미사 시작 예식 : 입당 – 성호경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
다섯 번째, 참회입니다. 시작 예식 중, 참회 예절은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이 스스로의 부족함을 깨닫고, 알게 된 자신의 죄를 마음을 다해 주님께 고백함으로써 용서를 청하도록 인도하는 예식입니다. 시작 예식 중 이러한 참회는 우리가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51항에서는 “참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참회하도록 권고한다. 이 참회 예식은 짧은 침묵 시간을 가진 뒤 공동체 전체가 고백 기도를 바친 다음, 사제가 하는 사죄경으로 끝난다. 그러나 이 사죄경이 고해성사의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
눈여겨 살펴볼 부분은 사제의 참회 권고 이후, 사제는 바로 기도에 들어가지 않고, 반드시 짧은 침묵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미사 경본에서는 분명히 “거룩한 침묵”의 때를 정해두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닌 하느님을 만나는 거룩한 시간이라 하여 “거룩한 침묵”이라고도 말합니다. 미사 안에서 신자들이 침묵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데, 각 예식에 따른 거룩한 침묵의 목적은 각기 다르게 적용됩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45항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거룩한 침묵은 거행의 한 부분이므로 제때에 지켜야 한다. 침묵은 각각의 거행에서 이루어지는 순간마다 그 성격이 다르다. 참회 행위와 기도의 초대 다음에 하는 침묵은 저마다 자기 내면을 성찰하도록 도와주고, 독서와 강론 다음에 하는 침묵은 들은 것을 잠깐 묵상하게 하며, 영성체 후에 하는 침묵은 마음속으로 하느님께 찬미 기도를 바치도록 이끈다.”
이 지침에 따르면, 참회 예절 중에 잠깐의 침묵은 자신을 되돌아보아 보기 위해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신자들은 침묵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부터 참회 예식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느님과 반대되는 모든 행위에 대해 성찰하며, 성찰된 부족함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도록 인도하였습니다. 즉, 참회의 목적은 하느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따라 시작 예식 중 참회 예식은 공동체에 소속된 나를 하느님께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고, 나의 부족함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자비와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특히 ”모두 함께 고백 기도를 바친다.”고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능동적으로 이 예식에 참여함은 예식을 뛰어넘어, 우리 스스로가 참된 회개로 나아가는 데 중요한 예절이기도 합니다. 다음 시간에도 참회에 대한 미사 해설이 계속됩니다. [2022년 9월 4일(다해) 연중 제23주일 대전주보 4면, 윤진우 세례자요한 신부(사목국 차장)]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20. 미사 해설 – 시작 예식 (5) 참회에 대해서 ②
시작 예식 중 참회 예절은 총 3가지 양식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 형제 여러분, 구원의 신비를 합당하게 거행하기 위하여 우리 죄를 반성합시다.
잠깐 침묵한다. 그 다음에 모두 함께 고백 기도를 바친다.
사제의 사죄가 이어진다.
+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 아멘
첫째 양식은 공동 고백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기도문에서 드러나듯, 하느님에게뿐만 아니라 형제들에게도 자신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과 공동체를 향한 참회가 명확히 드러나는 양식입니다. 아울러, 서로를 위해 빌어주는 “전구”(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는 야고보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 양식은 사제와 공동체가 서로 화답하는 짧은 교송으로 이루어진 참회 예식입니다. 셋째 양식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환호와 탄원으로 이루어진 참회 예절입니다. 이 양식의 특징은 셋째 양식을 할 경우, 자비송은 생략된다는 점입니다.
세 가지 양식 이후에 사제는 사죄경을 바침으로써 참회 예식을 마무리 짓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51항에 의하면 “이 사죄경이 고해 성사의 효과를 내지는 않는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곧 참회 예절 안의 사죄경과 고해성사 안의 사죄경은 분명한 차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8. 미사 해설 – 시작 예식 (3) 교우들과의 인사에 대해서
미사 시작 예식 : 입당 – 성호경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
네 번째, 인사입니다. 성호경 후에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인사를 합니다. <로마 미사 경본>에서는 시작 예식 중 인사 방식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2. 이어서 사제는 팔을 벌리며 교우들에게 인사한다.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2코린 13,13)
+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갈라 1,3)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2테살 3,16)
- 주교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대신에 첫인사로 이렇게 말한다.
+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3. 사제나 부제 또는 다른 봉사자는 그날 미사의 뜻을 신자들에게 짤막하게 풀이할 수 있다.
미사 안에서의 이러한 인사는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성사적 인사입니다. 이 인사는 신자들에게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선포함과 동시에 신자들의 응답으로 함께 모인 교회의 신비를 완성시키도록 인도합니다. 인사를 통해 미사에 함께하는 이들이 하나임을 인식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느끼며, 나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 교회가 일치되어 이 거룩한 만찬을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제가 인사할 때, 신자들은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라고 응답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고,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께서 불러주신 초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로마 미사 경본 총 지침 50항 참조). 사제는 세 가지 양식 중에 하나를 골라 인사할 수 있습니다. 세 가지 양식은 모두 바오로 서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여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인용된 성경 구절은 각 인사말 뒤에 표기해 두었습니다.
<로마 미사 경본> 2018년 새 한국어판에 의하면, 기존에 “또한 사제와 함께”라는 응답에서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로 변경되었습니다. 이 부분은 라틴어 원문(Et cum sp䟚ritu[영] tuo)을 그대로 번역함으로써, “또한 사제와 함께”에서 “영과 함께”를 추가하게 되었습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8월 15일)
교회는 8월 15일을 성모 승천 대축일로 지냅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성모 승천을 성대하게 기념하게 됐는지 확실치 않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승천에 관한 기록은 신약 성경과 초대 교회 문헌 어느 곳에도 명확하게 언급돼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 역사학자들은 교회가 4세기께부터 이 축일을 지내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교회가 성모 승천을 공적으로 기념한 것은 5세기 초 예루살렘 교회가 8월 15일 성모를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축일로 지내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그 후 교회는 6세기께 이 축일을 ‘성모 안식 축일(Dormitio)’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순교자들과 성인들을 그들의 선종일에 맞춰 기념하던 관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성모 마리아가 하늘나라에 올림을 받아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있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성모 안식 축일’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후 승모 승천 대축일은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대축일(12월 8일) 등과 함께 교회 전례력에서 성모 마리아를 특별히 기념하는 대축일 중 하나로 지켜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성모 승천이 가톨릭교회의 믿을 교리로 공식 선포된 것은 불과 72년 전의 일입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 1일 교황 비오 12세(재위 1939∼1958년)가 “원죄에 물들지 않고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지상의 생애를 마치신 뒤 영혼과 육신이 함께 천상의 영광에로 들어 올림 받으셨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된 진리”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티없이 깨끗하신 동정녀께서 조금도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으며 지상 생활을 마치신 후에, 영혼과 육신이 천상 영광으로 부르심을 받으시어, 주님으로부터 천지의 모후로 추대 받으셨다(「교회 헌장」 59항)”며 성모 승천 교리를 교회의 정통 교리로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면서까지 마리아에게 각별한 영예와 공경을 바치는 이유는 마리아가 구세사에서 수행한 탁월한 역할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동정녀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아들을 낳으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예’라고 순명함으로써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성부의 뜻과 성자의 구속 사업과 성령의 모든 활동에 전적으로 따르고 참여함으로써 교회를 위하여 신앙과 사랑의 모범(「가톨릭교회 교리서」 967항)”이 된 것입니다. 아들 예수가 그랬듯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순명하고, 평생 하느님의 뜻만을 따라 살며 구원 사업에 협력한 점을 인정해 교회는 성모에게 특별한 영예를 드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우리의 거룩한 어머니로 공경한다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뜻을 찾는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서로 사랑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라고 권고하시고, 또 사사로운 이익이나 욕망에서 벗어나 모든 인류가 가진 바를 나누고 살아가는 참다운 섬김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내 것’, ‘나를 위해 남겨 둔 몫’을 찾기보다 ‘너의 몫’을 챙겨주는 따뜻한 사랑을 실천할 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23) 미사의 영성 : 복음 - 기쁜소식 I
우리는 살아가며 언제 행복하다고 느낄까요? 가족들과 오랜만에 함께 모여 따뜻한 저녁 식사를 할 때... 긴 시간 마음속에 머물러있던 원망과 미움을 훌훌 털고 이제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용서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무언가에 열중해서 열심히 일하다 문득 쳐다본 저녁노을이 너무 아름답다 느낄 때... 아마도 이렇게 삶의 순간들 속에서 선물처럼 주어지는 시간에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평소에 우리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 원하는 무언가를 꼭 이뤄야 하고, 또 무언가를 꼭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보다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으로 내 삶에 대한 목마름을 늘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무언가 간절히 원하던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리고 원하던 무언가를 이뤘을 때 그 순간은 너무나 행복하다고 느끼지만, 그 행복감이 사실 오래가지 못함을 깨닫곤 합니다. 원하던 것이 이뤄지면 내 삶이 금방 나아질 것이라고 믿었는데 삶은 여전히 나에게 힘겨움으로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 얼굴을 가진 어려움들은 그 모습만 바꾼 채 또다시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행복’은 단지 외적인 조건의 충족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에게는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이뤄지는 행복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행복을 찾고 느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내적인 기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가지는 좋은 느낌과 감정이 ‘즐거움’이라면, 내적인 풍요로움으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은 ‘기쁨’입니다. 즐거움은 외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바뀌면 사라지지만,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쁨은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이뤄지며, 오히려 기쁨은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들고, 다시금 그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무엇보다 그러한 내적인 기쁨을 하느님을 통해 찾는 사람들입니다. 내 삶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 사랑이 앞으로의 내 삶에도 함께하시리라는 희망 안에서 위로와 기쁨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삶의 무게 속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말씀이 되신 하느님께서 사랑의 이름으로 찾아오십니다.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시고, 억눌린 이들을 일으키시며, 슬퍼하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기쁜 소식’으로 오십니다. 요한복음서는 이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전례와 미사의 영성 (24) 미사의 영성 : 복음 - 기쁜소식 II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과연 어디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혼자만의 여행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분들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경치 좋은 곳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실 때 기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소중하고 기쁜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진정으로 기쁨을 느끼는 순간들은 나의 오랜 고민,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미움과 분노, 그리고 지난 시간 나를 나답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망과 불평들이 사라지는 순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삶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삶을 살아갈 희망을 느낄 때 참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갑게도 신앙인들은 이런 순간들을 선물처럼 선사받습니다. 바로 미사 때 복음이 선포되는 순간입니다. 복음을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소식이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한 응답, 그리고 내 삶의 오랜 고민과 어려움에 대한 해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이 세상 삶이 전부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 우리는 이 세상 너머를 생각하며 살아갈 ‘새로운 시선’을 선물받습니다. 미움과 분노가 얼마나 자기 자신을 메마르게 만드는지 깨달으며, 하느님 안에서 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나를 나답게 살아가게 함을 아는 ‘새로운 지혜’를 배웁니다. 그리고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인간적 힘겨움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계신 예수님을 통해 그 모든 것들을 이겨낼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또한 발견합니다. 가, 나, 다해의 3년 주기 안에서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통해 전해지는 복음은 이렇게 내 삶에 ‘새로운 시선’과 ‘새로운 지혜’와 ‘새로운 희망’을 건넵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신비에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 깨닫고, 그 깨달음을 살아감으로써 우리 삶의 또 다른 ‘파스카 신비’를 이뤄 갑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 세상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듣기 좋은 이야기나 처세술이 아닙니다. 또한 수필집이나 에세이 등에 나오는 것처럼 말랑말랑하고 위로를 주는 듯한 이야기와도 다릅니다. 복음은 진정 내 영혼의 기쁜 소식이며,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과 기쁨입니다(로마 6,22-23 참조). 미사 때 우리는 그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설레는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때 복음은 내 삶으로 들어와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살아가라고, 메마른 영혼의 생명을 다시 꽃피우라고 초대합니다. 복음은 하느님 안에서의 기쁨을 다시 살아가라는 초대장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복음을 듣고 기쁨에 넘쳐 응답합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25) 미사의 영성 : 복음 - 기쁜소식 III
우리는 미사 때 우리의 구원에 대한 기쁜 소식, 즉 복음을 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 기쁜 소식을 내 삶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모습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과 관련하여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 방식을 들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들음은 자신에게 말 건네진 것에 대해 스스로를 소집하는 모습이며, 주의를 기울이며 따르는 모습이 됩니다(E. Kettering, Nähe, Das Denken Martin Heideggers, Neske, 1987 참조). 그러하기에 진정으로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로 무언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통하여 듣는 모습입니다. 또한 그럴 때 우리는 그 들음이 이해의 차원을 넘어 깨달음의 차원으로 넘어감을 느끼게 됩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과 존재로 들을 때, 그 들음은 깨달음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아, 그렇구나. 이 말씀이야말로 힘겨운 내 삶에 진정 필요한 가르침이고 진리이구나....’ 이렇게 깨달을 수 있을 때 우리는 그 이야기가 나에게 진정 ‘기쁨’으로 다가옴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 참된 믿음이 조금씩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바오로 사도께서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진다고 우리에게 가르쳤듯이 말입니다.
두 번째로 기쁜 소식을 ‘살아간다는 것’과 관련하여 진정으로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제 그 깨달음을 살아갑니다. 아니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마치 규칙적인 운동을 통해 건강이 회복됨을 절실히 깨달은 사람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운동하고자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기쁜 소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제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에게만 기쁜 것은 참으로 기쁜 것이 아닙니다. 나는 기쁜데 함께 있는 다른 누군가가 아직 슬픔에 잠겨 있다면 그 기쁨을 정말 기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간직한 기쁨을 다른 이들과 나눌 수 있고, 그 기쁨이 모두의 것이 되도록 만들 수 있을 때 그 기쁨은 행복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기쁜 소식을 듣고 깨달으며 그 깨달은 바를 살아가는 사람은 스스로가 살아 있는 또 다른 복음서가 되어 갑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이루는 모든 순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삶 속에 써내려 가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인은 자신의 삶이 하나의 기도가 되게 하듯,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기쁜 소식으로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알아야 하는 미사] 17. 미사 해설 – 시작 예식 (2) 제대 인사와 십자성호에 대해서
미사 시작 예식 : 입당(입당성가/제대 인사) – 성호경 - 인사 – 참회 – 자비송 – 대영광송 – 본기도
두 번째, 입당 예식에 포함된 “사제의 제대 인사” 부분입니다. 사제는 제단에 올라, 허리를 굽혀 제대에 입을 맞추거나 깊은 절을 합니다. 이미 여러분들께서 아시는 바대로 “제대”는 미사의 중심 장소로서 성찬 전례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들어 올려지시고, 무덤에 묻히신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미사를 시작하기 전에 사제가 제대에 인사하는 이유는 미사의 제정자이며 대제관이신 주님께 가장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위 또한 사제에게만 맡겨진 행위가 아닌 공동체를 대표하는 제사장으로서 제대에 예를 표하는 것이므로, 우리 또한 사제의 이 행위에 마음을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전례 안에서 이뤄지는 입맞춤, 무릎 절 등의 인사를 깊은 절로 대신하기로 정하고, 이를 따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십자성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미사 전례에 참여하면서 처음과 끝에 하는 행동은 “십자성호”입니다. 십자성호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임을 드러내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십자성호는 축복의 표시로서 2세기경부터 자신과 이웃, 또는 물건을 축복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우리가 미사를 시작하며 바치는 십자성호를 당연하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이 행위는 13세기부터 미사를 시작하면서 “십자성호”를 그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세례 때를 기억하며 세례와 성체성사를 연결시키는 중요한 상징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써 구원을 주시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음을 드러내며, 나아가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을 지니신다는 삼위일체 신앙을 고백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십자성호를 사제와 함께 표현함으로써 참석한 이들이 미사에 초대되었으며, 서로 간에 그리스도를 통한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미사 전례가 시작될 때 자랑스럽게 큰 목소리와 큰 행동으로 하는 십자성호는 준성사에 준하는 가치를 지녔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 흔하고, 가장 짧지만, 가장 중요한 이 십자성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갈라 6,14 참조)”의 말씀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의 말씀이 온전히 드러나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즉, 시작 예식 중 십자성호는 하느님과 우리가 하나 되어 거룩한 만찬을 시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례와 미사의 영성 (22) 미사의 영성 : 설렘(알렐루야)
‘우리가 살면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을 언제 느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합니다. 나도 모르게 얼굴과 손에 주름이 늘어갈 때 느낀다는 분도 계시고, 어느 날 문득 자녀나 손자들이 훌쩍 커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 ‘아...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고 느낀다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나이 듦과 더불어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나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삶에서 설렘이 조금씩 사라져 갈 때입니다.
우리의 지난 모습을 가만히 돌아보면 세월이 흘러가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내 삶에서 호기심도, 그리고 설렘도 사라짐을 깨닫게 됩니다. 가령 어렸을 때는 여행이나 소풍 가기 전날 들뜨고 설레는 마음에 뜬눈으로 잠자리에서 뒤척였던 모습도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갈수록 어릴 적 그런 설렘의 모습은 조금씩 사라지고, 필요한 물품 준비나 교통편 마련 등 현실적인 이유로 먼저 고민하게 되는 우리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아주 어렸을 때는 자기보다 더 큰 덩치의 과자 부스러기를 들고 줄 맞춰 지나가는 개미들에 대해 놀라워하며 한참을 쳐다보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런 것들에 이젠 놀라워하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내 삶의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보다 더 큰 무게로 다가오는 삶의 힘겨움을 짊어진 채, 지친 모습으로 세상에 줄 맞춰 걸어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삶을 살아가면서 설렐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삶의 또 다른 축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설렘을 우리는 특별히 미사 안에서 체험하게 됩니다. 삶 속에 마주치는 어둠과 뜻하지 않은 삶의 상황들 속에서 무엇이 바른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삶의 희망과 기쁨이 되어 줄 말씀이 들려옵니다.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 말 그대로 ‘기쁜 소식’이 슬픔과 삶의 고통에 지쳐 있는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기에 우리는 이제 잃어버린 설렘을 다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쁜 소식에 대한 설렘을 “알렐루야”를 통해 노래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의미의 “알렐루야”는 ‘하느님으로 인해 이제 설레는 삶을 다시 살아가라’는 초대의 다른 말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초대 앞에 모든 이들은 설렘과 기쁨으로 가득 차 일어서서 ‘주님을 환영하고 찬양하며, 그분에 대한 믿음을 고백’(미사 경본 총 지침 62항 참조)합니다.
그리고 이제 지금 여기서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집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나, 삶의 순간들 속에서 그 기쁜 소식에 대한 설렘을 마음 가득 안고 이렇게 외칩니다. “알렐루야(Allelu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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