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초등생들, 고교 ‘수학 정석’ 배워”… 돈ㆍ계급 대물림하는 빗장도시
[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 <1>빗장도시에 갇힌 아이들
“학원서 친구 자면 일부러 안 깨워요” 大入 경쟁 넘어 전쟁
교육열로 포장된 신분상승 욕망… 1등도 꼴찌도 좌절ㆍ열등감
지난달 대치동의 한 학원 입구(왼쪽 사진)에 성적 향상 사례가 게시돼 있다. 대치동에서 만난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기 중엔 4, 5개, 방학 때는 더 많이 학원을 다닌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정석(수학의 정석ㆍ고교 수학 참고서)을 배우는 동네.”
서울 대치동 학부모 이진경(41ㆍ가명)씨가 말하는 2020년 대치동의 ‘속도’다. 그는 “대치동에서는 ‘적당한 선행(先行)’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여기서는 ‘수학 상하(고1 과정)’공부하려고 학원에 가면 초등학교 5, 6학년이 가장 많아요. 중2 우리 딸도 지금 실력정석(고1 심화과정) 수업을 듣는데, 거의 다 초등학생이에요. 그 반에 초등학교 3학년도 3명이나 있는데, 그중 한 명은 심지어 잘한다는 거 아니겠어요?”
대입을 향해 미친 속도로 달리는 곳. 2020년 겨울, 대치동은 경주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는 이들의 끝이 보이지 않는 트랙이다. 교육과정보다 3, 4년이상 빠른 선행 학습의 이유는 결국 대입. 미리 배울수록 대입에서 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다. “아이를 대학에 보낸 선배 엄마들은 수학은 중학교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더 많이 하고 오라고 해요. 고등학교 오면 내신이다, 수능이다, 시간 없는데 어느 세월에 수학을 진도대로 배우고 앉아있냐면서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사거리에서 지하철 분당선 한티역 사이 1.5㎞ 거리. 이 일대를 지칭하는 명칭, 대치동 학원가에는 강남구 학원(2,279개)의 절반인 1,057개가 몰려 있다. ‘누구보다 뛰어난’ 타이틀을 획득하기 위해 너나 없이 달려나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치열한 사냥터. 그리고 ‘학벌’이라는 유령이 태어나 자라는 산실이기도 하다. 부유한 미래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카드로 여겨지는 학벌. 한국일보는 2020년 신년기획 시리즈 ‘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를 통해 공동체보다 개인의 ‘파편화된 이익과 행복’을 양분으로 덩치를 키워가고 나날이 폐쇄화되는 ‘학벌의 탄생지’ 대치동의 오늘을 조망하며 학벌이 부를 대물림하고 계층의 사다리를 끊어버리는 오랜 병폐를 치유할 대안을 모색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한 학원에서 학생들이 수업을 듣기 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다. 배우한 기자
◇성적 경쟁? 피 튀기는 ‘전쟁’
대치동은 사시사철 뜨겁다. 학원으로 빼곡히 들어찬 빌딩 속으로 쉴새 없이 사람들이 사라지고, 1층 카페는 학원 숙제를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붐빈다. 지나가는 학생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학기 중엔 학원 4, 5개, 방학 때는 더 많이”라는 답이 공식처럼 돌아오는 곳. 학원 수업이 끝나는 오후 10시에는 아이들을 데리러 온 부모들로 도로가 북새통을 이룬다. 학군 프리미엄으로 인근보다 집값이 수 억원 더 비싸도 부동산에는 대치동 입성을 바라는 부모들의 문의가 쇄도한다.
대치동 활황의 기저에는 자신의 학력과 부를 대물림 하려는 부모들의 욕망이 있다. 그래서 대치동에는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자식도 누리기를 바라는 중산층, 전문직 부모들이 유독 많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명문대, 의대 진학을 통한 성공이라는 대치동식 교육관에 부합하는 사람들이 대치동으로 몰려들고 있다”며 “대치동에는 그래서 자녀 대학에 집착할 필요 없는 청담동, 압구정 같은 ‘진짜 부자’들 보다는 자산이 적은 ‘애매한 부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대치동을 도시학에서 말하는 ‘빗장도시(Gated Community)’로 설명하기도 한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주택 가격이 너무 높으니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제한돼 있는데, 그 안에서 학력과 부를 재생산하고 있다”며 “대치동은 빗장도시의 대표적인 형태”라고 말했다.
대치동에서는 모두가 잠재적 경쟁자다. 누군가 성적이 오르면, 누군가는 떨어지고, 한 명이 붙으면 한 명이 떨어지는 법.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어떤 정보도 쉽게 발설하지 않는다.
대치동에서는 그러다 보니 친한 친구끼리도 ‘어디 학원 다녀?’라고 묻지 않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 큰 길가에 있는 대형 학원들과 달리, 학교별 내신에 특화된 알짜배기 학원들은 뒷골목에 숨겨져 있는 곳이 많아서다.
극심한 경쟁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회자될 정도다. 지난달 은마아파트 앞에서 만난 고등학교 1학년 박혜영(16ㆍ가명)양도 “특히 (강남 8학군에서도 내신 경쟁이 치열한) 숙명여고 학생들은 학원에서 프린트를 나눠주면 자신이 어떤 학원인지 모르게 하려고 학원 이름 적힌 맨 앞장을 뜯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함께 독서실을 가던 김지현(16ㆍ가명)양도 “학원에서 친구가 자면 일부러 안 깨우는 분위기”라고 거들었다. 대치동 미래탐구 학원의 정현두 입시센터장은 “여기서는 이번에 우리 애가 서울대, 연대를 갔다 하더라도 어디서 컨설팅, 지도를 받았는지 굳이 남들한테 안 알려준다”며 “우리 애가 반수(대학을 다니다 중간에 재수를 선택)해서 의대에 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남기 광주교대 교육학과 교수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고, 어느 대학을 가는지가 평생 월급의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에 엄청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라며 “승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대입은 경쟁을 넘어선 ‘교육전쟁’ 수준”이라고 정의했다.
대치동에서는 학원 등록조차 쉽지 않다. 밤샘 줄서기에는 가족이 총동원된다. 박혜영양은 “이번에도 E국어 수업 들으려고 친구 오빠가 접수 시작 전날 오전부터 줄 섰는데, 번호 표가 88번이었다고 하더라”라고 전했다. 초등학생 전문 수학 학원인 H학원도 입학 시험 때마다 1,000여명씩 몰리기로 유명하다. 이곳은 1년에 두 차례 치러지는 입학 시험에 붙어야 다닐 수 있다. 이 학원 졸업생 학부모 김모(45)씨는 “초등학생을 둔 대치동 부모들 사이에선 H학원 시험을 통과해야 ‘수학 좀 하는 애’라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학원도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대치동 유명 학원에서 상담실장을 했던 한 학부모는 “각 학교 전교 1~3등은 그 엄마들한테 학원에서 먼저 연락해 등록시켜 주는 우선 예약제가 있다”며 “걔네가 우리 학원 다니면 홍보도 되고, 성적 잘 나올 가능성도 높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대치동 학원은 철저한 레벨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아이들끼리 학원 반(레벨)으로 우열을 가리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띈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의 기폭제가 된 것도 수학 학원인 G학원에서 쌍둥이가 속해 있던 반이었다. G학원은 실력에 따라 1~6반으로 나뉜다. 숙명여고 졸업생 학부모 조모(49)씨는 “쌍둥이가 G학원 낮은 수준 반이었는데, 이 동네 부모라면 그 반 애들은 절대 숙명여고 전교 1등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강남 3구 학원·대치동 학원 수. 강준구 기자
◇“과학고 떨어져서…” 실패 그 후
대치동 아이들은 학원에서, 학교에서, 수시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1등은 1등대로, 꼴등은 꼴등대로, 아이들은 좌절감과 열등감에 짓눌린다.
특히 고입에서 한 차례 실패한 아이들은 열여섯, 열다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쓴맛을 본다. 지난해 말, 대치동에서 만난 중학교 3학년 이대현(15ㆍ가명)군은 자신이 지금 “방황 중”이라고 했다. 상반기에 치른 과학고, 영재고 입시에서 모두 탈락해서다. 이군은 “대학을 잘 가면 되긴 하지만 약간 화나긴 해요”라고 심정을 전했다. 이군은 계속 ‘못할 것 같다’ ‘안될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꿈은 수학자요. 그런데 안 될 것 같아요. 과학고 떨어져서 능력이 안 돼 못 할 것 같아요. 이미 한 번 뒤처졌잖아요.”
이과 선호도가 월등히 높은 대치동에서는 영재고, 과학고 입시 열기가 대입을 방불케 한다. 이들 학교가 원하는 대학을 가기에 보다 수월하다는 인식에서다. 대치동에서 25년째 입시 지도를 하고 있는 이소연 스터디브릭스 원장은 “영재고 들어가는 순간, 거기서 버티기만 해도 어느 정도 대학이 보장된다, 대입이 어느 정도 끝났다고 생각한다”며 “휘문중(남중) 3분의 1 정도는 영재고 준비를 한다”고 설명했다. 영재고, 과학고 입시에 실패하면 ‘공부 시킨 게 아깝다’며 전혀 다른 방향인 외고, 국제고로 틀어 진학시키는 부모들도 있다고 이 원장은 귀띔했다.
대치동의 이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은 무기력함을 강하게 표출하기도 한다. 학원조차 쉽게 들어갈 수 없는 동네에서 뒷줄로 밀린 학생들은 꿈꾸는 법조차 잊은 듯했다.
지난달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단대부고 3학년 김민준(18ㆍ가명), 박준호(18ㆍ가명)군은 이곳에서 학원을 5, 6개 다니지만 특별히 가고 싶은 대학도, 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했다. 김군과 박군 모두 고등학교 1학년 때 다른 지역에서 은마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박군은 “저희가 중위권이라 ‘인서울만 하자’ ‘인서울이면 좋다’하는 생각 뿐”이라며 “꿈 생각 보다는 학교, 학원 가는 게 먼저”라고 했다.
상위권 학생도 대치동의 속도가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이날 대치동에서 만난 한영외고 3학년 이은영(18ㆍ가명)양은 “도태되지 않으려고 대학에 간다”고 했다. 이양은 “대학도 못 가면 인간 구실 못 한다고 배우잖아요. 뭔가 다른 세계를, 공부를 잘 못해도 잘 살 수 있는 세계를 볼 수가 없어요. 학교에서도 너 공부 못해도 잘 살 수 있다는 얘기를 안 해주고요.”
오랜 기간 대학 하나만을 목표로 전력 질주해온 아이들은 실패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대치동의 고1 학부모 정유진(49ㆍ가명)씨는 “대치동에서는 3수까지 하는 애들이 많고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돼서 아무것도 안 하는 애들, 혼자 나와서 사는 애들이 주변에 많다”고 말했다. 대치동의 여러 학교가 대학진학률 40%를 밑돈다. 휘문고의 2019학년도 대학진학률은 36.1%에 그친다.
정씨는 “얼마 전 우리도 아이가 ‘2년 동안 이렇게 쉬지 않고 공부할 생각하면 힘들다’는 말에 탈(脫)대치를 고민했다”며 “어마어마한 학원비를 내면서 애들 성적이 그만큼 나오지 않으면 모든 사람이 불행해지는 게 이 동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