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14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서 열린 제71회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미국 대표로 참가한 [알보니 가브리엘](R’Bonney Gabriel)이 금관을 썼다.
그녀는 참가 나이 제한인 28세였다. 그녀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라는 말로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인가]라는 말은 프리모 레비(Primo Levi)가 쓴 소설
[Se Non Ora, Quando?] (IF NOT NOW, WHEN)라는 책 제목이다.
이 소설은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뒤 동유럽을 전전했던 자신의 경험과 친구로부터 들은
동유럽의 유태인 빨치산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토대로 쓴 자전적 소설이다.
그런데 이 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이 말은 거슬러 올라가면 랍비 힐렐이 남긴 유명한 질문이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은 보수파와 개혁파 두 파(派)로 나뉘어져 있었다.
보수파는 모세의 율법(토라)를 그대로 지키려는 전통적인 종교관을 고수하려는 샴마이 현자(賢者)를 따르는
세력이었고, 개혁파는 현자 힐렐을 따르는 세력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현자(賢者)라고 불린 사람들은 율법을 상세히 연구하고 해석하여
일상생활에 필요한 말씀을 찾아 적용하던 율법의 권위자들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5세기 전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무너진 야훼성전제의와 전통을 정비하고 복구했던
사제들과 지식인들의 의회였던 ‘크네셋 하그돌라(최고회의)’의 후예를 자처했다.
유대교에서는 기원전 5세기-기원후 1세기까지를 [현자들의 세기]라고 부른다.
현자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전수하는 권한이
모세→여호수아→원로→예언자→ 최고회의 의원들에게 있으며 최고회의 의원들의 후예가 바로 자신들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현자들의 전승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으며
이들 바리새인 교사들이 랍비로 불리며 1세기 중반부터 랍비 중심의 유대교를 형성했다.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현자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이 [선조들의 어록]이란 책인데
매우 짧고 간명한 문장으로 현자들의 지혜를 담은 지혜의 보고(寶庫)이다.
이 책은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배우고 가르치고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를 가르치고 있다.
그 중에 개혁파 바리새인의 스승이었던 현자 힐렐이 율법공부에 대해 이런 질문을 남겨놓았다.
[내가 나를 위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위하느냐?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한다면 내가 무엇이냐?
지금이 아니면 언제냐?]
힐렐 현자는 이 세 가지 자문(自問)을 통해서 율법공부의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고 있다.
힐렐의 첫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려준다.
율법을 공부하는 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남을 위해서 하거나,
남이 나를 위해서 대신 공부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 이 모든 일은 대체 누구를 위해서 하는 일인가?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다.
예수님을 믿어 [나 자신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가운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을 망각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교회에 ‘나가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헌금하거나 봉사하는 것을 교회나
혹은 이웃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성경공부에 참여하고 전도에 나서는 것을
교회를 위한 수고나 희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감사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모든 게 감사하지만 남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생색을 낼 수밖에 없다.
힐렐의 두 번째 이 질문은 율법공부의 목적이 다만 자신만을 위한 목적에 머물러서는 안 됨을 가르치고 있다.
자신을 위하되 자신에게 갇히지 말고 자신을 넘어서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7-8)
교회가 기복적인 무속신앙과 결별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교회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목적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에 허다한 기복신앙의 하나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무속, 주술, 미신, 우상숭배는 자신의 영화와 복을
염원하고 기원하는 것에 머물러 있다. 교회는 나를 위하되 나를 넘어서는 삶을 가르치고 있다.
나를 넘어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힐렐의 마지막 이 질문은 율법공부를 지금 하지 않으면서 뒤로 미루는 것은 결국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힐렐은 [선조들의 어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 여유가 있으면 공부하겠다고 말하지 마라. 아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내일이 틀림없이 주어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내일은 사람이 알 수 없는 하나님께 속한 날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잠27:1)
때문에 다음에 성서공부 하지, 나중에 전도하지, 다음에 기도하지, 나중에 예배 드리지, 다음에 교회 가지 하며
오늘 할 믿음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영영 그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이 힐렐 현자의 가르침이다.
[보라 지금이야말로 은혜의 때요,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고후6:2)]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