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대부I ]
<대부>는 1972년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에 의해 175분짜리 대작으로 영화화되었습니다. 이 후 세계적인 대찬사를 받으며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주연상, 각색상을 수상하고 감독상과 조연상(3명)에 추천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영화에는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로버트 듀발, 제임스 칸, 그리고 다이안 키튼 등 유명배우들이 출연해 최고의 연기를 펼쳤습니다. 각색은 코폴라와 원작자 푸조의 공동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두 사람은 이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1974년에 <대부2>를 만들게 됩니다. <대부 돈 콜리오네>
<대부〉가 기획될 당시 영화화를 반대하는 마피아의 압력이 노골적으로 있었습니다. 마피아 보스 중의 하나인 조셉 콜럼보는 ‘이탈리아계 미국인 인권 연합’을 동원해 대규모 반대 집회를 개최하는 등 지속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니들 우리 얘기 영화로 만들면 죽어!’하며 협박을 한 것입니다. 실제로 파라마운트사에 폭파 장치까지 했다고 합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파라마운트사는 영화 속에서 마피아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않기로 하고 거액을 줘서 겨우 이들을 무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마피아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2편에 가서야 마피아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결국 제작자인 앨버트 루디가 영화 속에서 마피아란 칭호 대신 패밀리를 사용하기로 함으로써 문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갱스터 무비의 대표작인 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마피아라는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 건 그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만들어지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마피아들은 원래 일자무식쟁이들이 태반입니다. 정작 이들에게 영화는 좋은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소설은 까막눈이라 아예 못 읽으니 영화만 수십 번씩 보고 또 보면서 말론 브랜도와 알 파치노의 말, 동작, 얼굴 표정을 그대로 흉내 내면서 개폼들을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코폴라 감독이 비토 콜레오네 역으로 점찍은 말론 브랜도는 갖은 기행과 독선적인 태도 때문에 헐리우드의 제작자들이 꺼리던 배우였습니다. 더구나 영화 속의 콜리오네는 60대 노인인데, 40대에 불과한 말론 브랜도가 60대 노인을 연기해야 한다는 사실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브랜도는 즉흥적으로 비토의 모습이 불독을 연상시키는 얼굴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입안에 솜을 밀어 넣은 채 테스트를 받아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해 아카데미는 남우주연상으로 화답했지만, 정작 브랜도는 수상을 거부했고 대신 인디언 의상을 입은 인권운동가 사친 리틀페더가 나와 미국 인디언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는 브랜도의 의사를 전달해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오른편 : 대부 돈 콜리오네와 세아들>
<대부>는 이후 많은 아류 갱영화들을 산출해 냈고, 그 결과 할리우드 영화들에 갑자기 갱들이 미화되어 묘사되는 경향을 가져왔습니다. 또 이탈리아인들이 만들고 이탈리아인들이 주연한 영화들의 전성시대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는 정의와 불의의 구별이 모호해진 시대, 법이 힘없는 자들 편에 서지 않는 시대, 그리고 애곡된 미국의 꿈이 편만한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미국인들에게 강렬한 호소력을 갖고 다가왔던 보기 드문 작품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이민족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마피아 대부로 어떻게 자리 매김을 하는지를 서정미 넘치는 화면에 수려한 음악과 함께 영화<대부>는 장대하게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당시로는 신인에 불과한 코폴라의 꽉 짜인 연출로, 본격적인 TV시대의 개막으로 불황에 허덕이던 미국 영화계에 부활의 신호탄을 올린 화제작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나온 이후로 모든 갱스터 영화는 이것의 기준에 의해서 판단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 폭력단에 대한 것이라면 '유대인 대부' 중국의 지하세계에 대한 것이라면 '동양의 대부' 현대에 일어난다면 '현대의 대부'가 되는 등 이른바 '대부 신드롬'을 창조한 갱스터 영화의 기념비적 걸작이 된 것입니다. <대부>는 1972년 개봉되면서 미국 영화사상 최고의 흥행 수입 기록을 세웁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유지한 30년간 유지한 난공불락의 흥행기록을 단숨에 갱신한 것입니다.< 오른편 : 피투성이가 된 큰 아들, 제임스칸>
음악은 <태양은 가득히> 등의 명음악을 만든 영화음악의 거장 니노 로타가 담당하였습니다. 코폴라 감독은 처음에는 음악가인 아버지에게 맡길 예정이었으나 아버지에게서 마음에 드는 곡을 발견해 내지 못하자 公과 私를 분명히 하면서 니노 로타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래서 불후의 영화 음악 중의 하나인 <대부>의 음악이 탄생되었습니다. 코폴라 아버지의 작품들은 결혼식 피로연 시퀀스에서만 일부 사용되었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이 되고 나서 아주 곤경에 빠진 가수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프랭크 시나트라였습니다. 영화에서는 가수 자니 폰테인이 직접 출연하였는데 이 자니 폰테인 역이 실제로는 시나트라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동안 마피아 덕분에 연예계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다는 비난이 그를 몹씨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여론들 역시"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는 식으로 시나트라에게 우호적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작사인 파라마운트사가 <대부>를 개봉하면서 남긴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겨줍니다. <오른편 : 말론 브란도와 알 파치노>
"정치가는 이 영화에서 인간의 낌새를 터득하라. 그리고 사업가는 이 영화를 보고 현 사회를 배워라. 젊은이는 어버이와 자식 간의 애정을 보라. 여성은 뜨겁고 깊은 사랑의 진수를 만끽하라. 우리는 이 영화 한 편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
1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영화라는 것이 당시 세간의 평이었습니다.
[ 마피아의 역사 ]
마피아라는 뜻은 "기업형 범죄조직" 이라는 의미로 이탈리아가 발상지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기업형 범죄조직을 마피아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본 마피아=야쿠자, 중국마피아=삼합회 이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즉 미국 마피아라고 해서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마피아가 아니라 미국의 기업형 범죄조직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범죄조직 유형에 따라서 카르텔, 갱스터, 프리즌 갱으로 나뉘기도 합니다.
마피아는 이탈리아가 발상지로 시칠리아 지역 비밀결사를 근원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시칠리아는 장구한 세월동안 외세의 침략을 여러 번 받으면서 사회가 혼란스럽다보니 법과 질서를 따르지 않은 운둔 세력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주민들에게 정의로운 세력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 마피아의 어원
마피아란 말의 어원은 1282년 ‘시칠리아 만종 사건(당시 지배계급인 프랑스인들에게 시칠리아인들이 대든 사건)’을 둘러싸고 시칠리아 기사들이 “Morte Alla Francia Italia Anela(프랑스인들을 죽이자)”라는 구호를 외쳤다고 합니다. 바로 이 구호의 이니셜 ‘MAFIA’를 따서 마피아가 되었다고 하는데 한편으로는 지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밖에 마피아의 어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는 지역 관리에게 딸이 유린당한 한 어머니가 시칠리아 방언인 ‘내 딸아!’에 해당하는 ‘Ma Fia!’를 외치고 돌아다녔고, 그 관리를 비밀 결사 조직이 혼내줬기 때문에 ‘마피아Mafia’가 됐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어원은 확실치 않습니다.
시칠리아 사람들은 오랜 시절 핍박의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무수히 많은 타지 사람들(그리스, 로마, 사라센, 노르만, 스페인, 프랑스 등)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지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시대 때 그랬던 것처럼 정부, 경찰 등을 전혀 믿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보호하기위해 자체적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조직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듯 점차 변질돼 갔습니다. 처음에는 시칠리아 사람들을 도와주던 비밀 결사 조직에서 오히려 등을 처먹는 기생충이 된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시칠리아 사람들은 정부보다는 마피아를 더 신뢰했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마피아는 전국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당시 이탈리아의 미국 이민 붐이 일어나면서 마피아는 미국으로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나 무솔리니가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파쇼정권 시절에는 군과 경찰을 총동원해 마피아를 철저하게 때려 부수는 바람에 마피아들은 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중앙정부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미국의 마피아 규모는 부쩍 커집니다.
* 마피아 역사의 시작
현대 미국 마피아의 생성지는 뉴욕의 이탈리안 이민자 빈민가였습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 시작된 뉴욕 거주 시칠리아 출신 범죄조직을 지역 거주민들은 검은손(Black Hand)이라 불렀습니다.
20세기로 넘어오는 시기에 뉴욕의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거주지역인 이스트사이드에서 시칠리안 범죄조직인 파이브 포인츠 갱(Five Points Gang)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같은 지역의 유대인 갱단과도 자주 싸움질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칠리아 범죄조직이 부상하기 시작하면서 브루클린에서는 나폴리 출신의 범죄조직인 니어폴리탄 캐모라, 시카고에서는 이태리 조직폭력배들이 불러디 나인틴(Bloody 19)이라 불리기도 할 정도로 미국 전역으로 이탈리아 이민 범죄조직이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1920년 1월 17일, 근대 민주국가에서 보기 힘든 상황이 미국에서 일어났는데 바로 금주령이었습니다. 수정헌법 제 18조가 발효되며 미국 내에서 술을 제조, 판매, 유통하는 모든 것이 불법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이 금주령은 1933년까지 무려 12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이런 법령이 생겨난 것은 공중의 도덕성 회복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었습니다.
원래부터 신교도가 주를 이루는 사회였기 때문에 음주에 대한 부분은 식민지시대부터 문제가 되어 왔었고 1657년에는 메사추세츠 법원이 럼, 브랜디, 와인 등 알콜 도수가 높은 술에 대한 판매를 금지시킨 일도 있어 금주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슬람 국가같이 전통적으로 금주를 해온 미국이 아니기에 법령에 반대하는 단체도 나오고 국민들 역시 강제로 규제를 하는 것에 대해 탐탁치않게 생각했습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술이라는 것이 스스로 끊는 것도 힘든데 법으로 못 마시게 한다고 포기할 것은 아니라 불법양조가 기승을 부리고 암암리에 유통이 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금주령 기간 동안 주류 불법유통으로 적발된 케이스가 90만 건에 달했고 이런 불법유통에 관여한 것은 정치인들과 범죄조직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금을 확보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되어버려 이 시기를 맞아 이탈리안 범죄조직은 급속히 성장하게 됩니다. <오른편 : 술을 부어 버리는 단속반들>
미국이 금주령시대를 맞은 1920년대 초반, 상기한 바와 같이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인 무솔리니의 정부가 국가를 장악하자 수많은 이태리인들이 조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 길에 오르게 됩니다. 마피아들 역시 무솔리니 정권의 대대적인 소탕령으로 인해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처하자 시칠리아를 떠나 미국행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무솔리니의 집권은 미국의 아메리칸 마피아의 초석을 다지게 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이탈리아인들은 미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그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범죄조직에 가입을 하게 되고 자연적으로 범죄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결국 점차 범죄조직이 비대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탈리안 범죄조직들은 떼돈을 벌 수 있는 이 불법 주류제조와 유통에 손을 대고 그 수익은 전통적인 범죄였던 보호명목의 갈취, 도박, 매춘사업을 훨씬 능가하며 조직의 주 수입원이 되어갑니다.
결국 미국의 금주령은 아메리칸 마피아를 탄생시키는 온상이 되면서 역사적으로 악수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법으로 술을 못 마시게 한다는 발상 자체가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의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심한 차원으로 그친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에 커다란 해악을 끼친 악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주법으로 돈이 쉽게 벌어지자 미국 대도시의 이탈리안 범죄조직은 자금력을 확보해 명실상부한 패밀리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이렇게 세를 불리기 시작한 이탈리안 범죄조직들은 도처에서 자신들이나 다른 민족의 범죄조직과 충돌을 빚게 되고 서로 간에 피 터지는 폭력전쟁이 시작됩니다.
뉴욕에서는 프랭키 예일이 이끄는 이탈리안 조직이 아일랜드 갱 조직인 어메리칸 와잇 핸드와 전쟁을 벌였고 시카고에서는 알 카포네와 그의 조직이 역시 아일랜드 갱 조직인 노스 사이드 갱단과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또 뉴욕에서는 1920년대 내내 조 마세리아 조직과 살바토레 마라자노 조직이 같은 이탈리안이지만 세력다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전쟁을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이라고 하는데 1931년 마세리아가 살해되며 살바토레 마라자노의 승리로 끝을 맺습니다.
그는 뉴욕을 다섯 패밀리로 나누어 분쟁을 해결하고 자신이 그 모든 패밀리의 최고 보스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여기서부터 진정한 미국 마피아가 시작되는 시점이고 살바토레 마라자노는 첫 번째 마피아 대부로 기록됩니다. <오른편 : 알 카포네>
하지만 이런 마라자노를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웬만해서는 한번쯤 이름을 들어본 럭키 루치아노였습니다. 그는 원래 마라자노와 전쟁을 벌였던 마세리아 조직의 일원이었는데 마라자노쪽으로 붙어 마세리아 살해를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곧 마자리노도 살해하면서 조직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윽고 럭키 루치아노는 최고 자리에 오르고 평의회를 창설하면서 루치아노는 명실상부한 미국 마피아계의 최고 보스로 등극합니다. 이 평의회는 영역 다툼 등 조직 간의 분쟁을 해결하고, 마피아의 이권 사업정책 등을 세웁니다. 다시 말해 미국 내에 자기들만의 왕국 하나를 건설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 왕국을 저희들끼리 ‘라 코사 노스 트라La Cosa Nostra(this thing of ours)’ 라고 부릅니다.
이 말은 이 왕국에서 우리끼리 치고받고, 죽이고 살리고, 뺐고 빼앗기고 하는 거니까 ‘니들은 참견 마!’라는 의미입니다. 영화에서도 바로 이 평의회가 등장합니다. 비토 콜리오네(말론 브랜도분)의 아들 마이클 콜리오네(알 파치노 분)는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시칠리아로 도망가는데, 비토는 아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평의회를 소집합니다. 전국 마피아대부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평의회는 범죄 신디케이트로 거듭나고 패밀리간의 평화가 시작되며 이후 마피아는 성장가도를 달리기 시작합니다. 20세기 중반까지 마피아는 뉴욕에 기반을 둔 다섯개 패밀리를 제외하고 26개 도시에 위원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각 패밀리는 서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며 각각의 영역에 대한 통제권과 독점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두목이었던 마라자노나 마세리아와 달리 루치아노가 이끄는 젊은 마피아는 유대인 범죄 신디케이트나 다른 민족의 범죄단체들과도 협력을 하여 더 큰 수익을 창출해 나가게 됩니다.
비록 배신을 하고, 자신의 보스를 죽인 인물이지만 루치아노는 구시대와 달리 범죄단체를 기업경영 하듯이 효율적으로 이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후 1933년 금주령이 해제되며 다시 주류제조와 판매가 합법화 되자 마피아는 수입원이 줄며 자금을 확보하는 다양한 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전통적인 사업인 불법도박장 운영, 고리대금업, 보호명목 갈취와 함께 마약거래, 노동조합 결성으로 노동분쟁 배후조정 등 분야를 넓혀나가게 됩니다.
머리가 비상한 루치아노도 결국 법망을 피하지 못하고 잡혀 들어갑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는 것을 돕는 대가로(루치아노는 시칠리아 마피아와도 연줄이 닿아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감옥에서 풀어주고 망명을 허락합니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그는 거기서 잘 먹고 잘살다가 미국의 한 영화 제작자를 만난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덜컥 죽어버렸습니다. 본인 일대기를 영화로 만들자는 거였는데 너무 떨렸든지 아니면 너무 감동이 벅차서 죽었는지 모릅니다.
20세기 중반에 들어와 마피아들은 봉제노동조합과 부두노동조합 등과 건설, 철거, 폐기물 관리, 트럭, 해변, 의류사업 등 수익성 좋은 합법적 기업에 손을 뻗치고 노동조합 파업을 유도하고 입찰에 관여하는 등 광범위한 범위로 사업을 확장을 하게 됩니다. 뉴욕시의 대부분 건설 프로젝트는 다섯 패밀리의 승인 없이는 수행할 수 없었고 항구나 하역에 관련된 모든 부분에서 마피아는 조합원을 장악하였습니다. <오른편 : 럭키 루치아노>
마피아 세계에서 회계의 귀신이라고 소문났던 유대인 랜스키가 있었습니다. 그는 쿠바에 카지노를 열고 마피아는 쿠바산 설탕과 럼주 무역에도 관여하게 됩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회계 등 머리 쓰는 일에는 도사들입니다. 랜스키는 러시아 태생이지만 루치아노의 동료로 전국적 범죄 신디케이트를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뉴욕, 플로리다, 아이오와, 네바다의 라스베이거스까지 방대한 도박 제국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이렇게 마피아가 여러 분야로 세를 불려나갔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의 FBI를 비롯한 수사당국은 이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범죄 사실로 기소를 하려해도 증인을 협박하고 법 집행에 관련된 기관의 사람들을 매수를 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마피아가 전국적 범죄조직이라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른편 : 랜스키>
그러나 새미 그라바노라는 마피아 조직원이 1991년 FBI에 협조를 하면서 마피아 전체 조직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새미는 뉴욕 5대 패밀리중 하나인 감비노 패밀리의 부두목으로 그 세계에서 막강한 위치의 한사람이었고 수많은 살인사건의 배후조정으로 기소가 되었었습니다. FBI는 두목을 잡는데 협조를 하면 새미의 기소에 대한 것은 전부 면제해주기로 하고 그를 증언대에 세우게 됩니다. 새미의 증언으로 감비노 패밀리의 보스였던 죤 가티는 종신형을 살게 됩니다. 결국 새미는 FBI의 내부고발자의 효시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새미를 필두로 패밀리를 배신하고 증언을 하는 수십 명의 조직원들이 계속 등장하면서 마피아의 세력은 급속도로 약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밖에 마피아의 세력을 약화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이탈리안 이민들이 세대를 이어오며 급격히 미국인으로 동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마피아 조직의 신세대들은 그들의 커뮤니티에 안주하기보다 주류사회로 들어가 미국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조직원을 구하는 것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마피아는 폭넓은 불법적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살인, 협박, 부정부패, 도박, 합법을 가장한 기업 진출, 노동착취, 고리대금과 세금포탈, 주식조작, 돈세탁 등이 그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습니다. <오른편 : 새미 그라바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한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