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97
1월6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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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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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0Ld2L687Lw (김도연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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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역사상 전무후무한 예수님의 명설교!>
일주일이나 한 달에 걸친 침묵 피정에 참석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됩니다. 입이 근질근질해 몸살이 날 정도입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에 적응을 합니다. 나중에는 세상 편합니다. 그리고 피정이 끝나갈 즈음에는 피정 기간 동안 깨달은 바나 생각한 바가 많아집니다.
피정이 끝나고 대침묵이 해제되는 순간, 할 말이 참 많습니다. 피정을 통해 체험했던 은총이나 축복을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줄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한동안은 강론도 길어지고, 말이 많아집니다.
그런데 40일간의 광야 대침묵 피정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사뭇 다르십니다. 고향 나자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선포하시는데, 공생활 기간 동안 우리에게 건네실 말씀의 특징적인 면모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장황하거나 지루하지 않습니다. 미사여구를 늘어놓거나 잔뜩 포장하지도 않습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단순하고 명료합니다. 시원시원하고 역동적입니다. 말씀이 힘이 있고 살아 있어서, 청중의 폐부 속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갑니다. 눈물 흘리게 하고 가슴치게 합니다. 마침내 삶을 변화시킵니다.
나자렛 회당에 가득 찬 청중들을 예수님께서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까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신원과 사명을 적시해놓은 이사야 예언서 말씀을 낭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사야서 말씀을 듣고 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떤 설교(성경 해설)를 하실까,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회당에 있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선포하신 말씀에 대해 그분께서 1시간 동안, 아니면 적어도 한 30분간에 걸친 강론 말씀이 이어지겠지.’
그런데 예수님의 설교는 역사상 전무후무할 정도의 명설교였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짧고 간결했습니다. 또한 힘이 있었고 의미심장했습니다.
저같았더라도 고향 마을 사람들 앞에 금의환향했겠다, 감사의 인사도 전하고, 앞으로의 포부도 먼저 밝히고, 봉독한 이사야 예언서에 대한 명쾌하고 감동적인 해설을 덧붙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저 딱 한 마디만 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예언의 성취는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안에 하느님의 영이 머물고 계심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당신이 종말론적인 예언자요 하느님으로부터 도유된 분 곧 메시아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래로 인해 이제 구원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분을 구세주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은 이제부터 하느님 마음에 드는 해, 그분에게 흡족한 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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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Yka1l5jd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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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받아들일 귀를 뚫는다는 의미는?>
예수님은 광야에서 유혹을 물리치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라고 시작하는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을 읽으시고 이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서 실현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성령과 결합하여야 힘을 발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하십니다. 직역하면,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가득찼다”가 됩니다. 복음이 성령과 합쳐질 때 비로소 듣는 사람의 귀에 가득 차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광야에서 삼구의 유혹을 물리쳐 죄가 없는 사람에게 가득합니다. 성모님만큼 성령으로 가득하신 분이 없으셔서 성모님의 한 말씀이 엘리사벳을 성령으로 가득 차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소리만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나는 피를 흘릴 수밖에 없고 그 피가 섞인 말씀만이 누군가의 귀를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귀에 가득 차지 않는 말씀은 들리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림사 18동인’(1976)이란 오래된 영화가 있는데, 여기에서 모든 어려운 과정을 다 마치고 마지막 하는 것이 있는데 불붙은 화로를 가슴에 안아서 그 화로에 쓰인 글자와 그림이 몸에 새겨지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처럼 말씀만으로는 안 되고 불이 있어야 합니다. 화로가 말씀이라면 불이 성령이십니다. 이 성령으로 불타는 화로를 옮기는 이는 그 말씀이 자신 안에 새겨집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을 통해 나에게 말씀이 새겨질 때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십시오! 꼭 필요하다면 말도 하십시오.”
그런데 오늘 복음 바로 뒤에서 그 성령으로 충만한 말씀을 들은 이들의 반응은 처음엔 이랬습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 하지만 곧이어서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말하자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라는 말씀에 잔뜩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 끝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십니다. 말씀이 그들 안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 묵상을 할 때 말씀의 뜻을 깨달으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말씀이 아무리 내 귀에 가득히 차도 귀가 뚫리지 않으면 그 말씀이 내 속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귀가 뚫린다는 말은 그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종이 풀려날 수 있지만, 주인의 종으로 평생 남고 싶다면 주인이 그 종의 귀를 뚫었습니다.(탈출 21,1-6 참조) 그리스도의 종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귀가 뚫린 것이 아니고 아무리 말씀이 충만하게 주어져도 그 말씀의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아무리 묵상을 하려 해도 그 말씀의 뜻이 잘 다가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의 피와 함께 오는데 우리가 피를 흘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무브 투 헤븐’은 배다른 형과 동생의 긴 화해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이혼한 어머니와 형은 잘 살고 있었지만, 이복동생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형은 이복동생을 고아원에 가지 않게 하려고 빼내 오려 합니다. 하지만 동생이 좋아하는 나이키 신발을 사러 갔다가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으로 며칠 동안 갇혀 동생을 만나지 못합니다. 동생은 화장실도 가지 않고 약속장소인 시골 역에서 사흘이나 형을 기다리다가 결국엔 싸움꾼으로 성장하여 감옥까지 가게 됩니다.
동생이 출소하던 그날 형이 자기 아들을 돌봐달라는 조건으로 형의 집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형과 형수는 암으로 죽은 상태였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오지 않던 형이 미웠지만, 재산이 탐나서 조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갑니다.
조카는 지적 장애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약속을 지키지 못한 괴로움에 매년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만 되면 그 역을 방문했었고, 동생과 함께 타고 싶었던 놀이기구를 아들을 태워주며 동생을 그리워했다는 것, 그리고 삼풍 백화점에서 자신에게 주려고 꼭 껴안고 있었던 나이키 신발까지 알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보며 그는 형의 사랑한다는 말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지금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그분 앞에 무릎 꿇으려는 마음을 가지기 전까지는 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당신의 말씀이 또 다른 이들에게 흘러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 말씀으로 죽지 않으려는 사람은 그래서 아무리 묵상을 해도 ‘자기 생각 정리’밖에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은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은 그분의 말씀이 나에게 새겨져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 깨달음은 아주 짧고 강렬하고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나를 말씀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귀가 그분의 말씀에 뚫려있는지 먼저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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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4-22 :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 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 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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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예수님>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온갖 억압에서 해방되어 참된 자유를 얻어 누리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즉 우리에게 그 해방과 참된 자유를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은 '억압받는 이들'의 예입니다. 가난, 질병, 전쟁, 독재 정치, 박해 등은 우리를 심각하게 억압하는 것들인데, 사실 그런 것들은 우리가 힘을 합쳐서 노력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가장 큰 억압은 ‘죄’와 ‘죽음’이고, 그것은 ‘하느님의 힘’으로만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러나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이는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로마 5,20ㄴ-21)
‘주님의 은혜로운 해’는, 표현으로는 구약시대의 ‘희년’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메시아 시대’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써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메시아 시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향해서 나아가는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당신의 사명을 밝히신 다음에,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메시아 시대를 선포하시는 순간에 곧바로 메시아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법령을 선포하는 순간에 그 법령의 효력이 발생되는 것과 같습니다. 노예 해방을 선포하는 순간에 모든 노예가 자유인의 신분을 얻게 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성경의 ‘메시아에 관한 예언들’은 더 이상 예언이 아니고 ‘현재의 일’에 관한 말씀이 되었습니다. 예언을 통해서 주어진 약속들이 실현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메시아 시대 선포는 해방 선포이고 구원 선포입니다. 말하자면, 인류를 가두고 있는 감옥 문을 열어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해방을 선포하시는 순간에 감옥의 문이 열린 것인데, 이제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일입니다. 또는 감옥의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셨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고 감옥 밖으로 나가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할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감옥 안에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옥의 안이 밖보다 더 좋다고 주장하면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참된 자유를 얻으려면, 우선 먼저 자기가 감옥 안에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열쇠를 받아서 자물쇠를 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는 열쇠, 즉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를 믿고 받아들여야 ‘영혼의 참된 자유’를 얻어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요한 8,33)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노예 해방 선포를 듣지 않습니다. (못 듣는 것이 아니라 안 듣는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시대 말에 노비제도를 폐지했을 때,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냥 계속 노비로 살겠다고 자청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유를 주어도 종으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종’이 되면 구원받을 길이 막혀버립니다. (죄를 짓는다고 다 ‘죄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죄의 종’이 됩니다.) ‘죄의 종’이 된 사람들은, 회개해서 구원과 자유를 얻는 것보다 죄 속에서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버지의 집’에(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는 치료제와 같습니다.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자유를 거부하고 노비로 사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구원과 자유를 거부하고 ‘죄의 종’으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정말로 좋아서 그런 것일까? 가르쳐 주는 이가 없어서 모르고 있는 것은 죄가 아닌데,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어도 듣지 않고, 그 길을 거부하는 것은 죄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멸망을 향해서 가는 ‘어리석음’ 자체가 죄입니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마음 편하게 살아도, ‘멸망의 문’ 앞에 서면, 그때에는 후회하게 될 것이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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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가기 위해서 비행기 표를 예약했습니다. 공항에 가서 발권을 하려하니, 예약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제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어야 하는데, 제주에서 서울로 오는 비행기를 예매했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급하게 표를 사니 십만 원 정도 비용이 들었습니다. 자매님이 돈이 아까워서 속상해 하니, 남편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왜 마음을 상하고 그러나.’ 남편의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지만 모든 것을 돈을 기준으로 생각했던 자신을 돌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십만 원은 잊어버리고, 남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돈이 삶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가의 정책도 예산이 중요합니다. 제가 일하는 신문사도 재정이 중요합니다. 가정에서도 돈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요양원으로 미사를 가거나, 가정으로 봉성체를 가면 거동이 불편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달에 한번 주님을 모시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100세 되신 어르신이 주님을 모시는데 마치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은 결코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 얼마나 희생했는지, 얼마나 기도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저도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상하거나, 원망한 적도 있습니다. 24년 전에 한국에는 IMF가 있었고, 저와 저의 가정에도 파도가 몰아쳤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습니다.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가족들은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면 돈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들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에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이 대화하지 않기 때문에, 성사의 열정이 식어가기 때문에, 복음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멀리 떨어진 가족들에게 안부 전화하는 것, 어려운 이웃의 짐을 들어 주는 것, 처음 사제서품을 받은 그 열정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2022년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 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고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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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령에 이끌려”(루카 4,1) 광야로 가신 예수님께서 사십 일 동안 악마의 유혹을 이기시고,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이사 61,1)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성령’을 자주 언급하며, 예수님 활동의 힘(근원)이 성령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은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고, 이들을 치유하시려고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주님의 은혜로운 해”, 곧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짧은 말씀은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 말씀이 ‘오늘’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복음은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선포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지금 그리고 여기’에 실현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의 복음 선포와 사랑의 실천이 무엇보다 먼저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을 향할 수 있도록 성령의 은혜를 청합시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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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 선포는 그 자체로 ‘이미’ 와 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보여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선포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긴밀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의 고유한 사명이고,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분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오늘 독서인 요한 1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별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모든 이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선포에 따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이기에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려면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중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겹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있고, 이 믿음은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얻게 된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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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창환 다니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의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시작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성령의 힘’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홀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늘 하느님과 함께 하시는 분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장차 예수님께서 어떤 활동을 하실 것인지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어른이 된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회당에 다니셨습니다. 회당에서는 기도를 바치고, 일반적으로 율법과 예언서들을 읽고 설명하였습니다. 성경을 읽고 설명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교육을 받은 공동체 구성원들이나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방문객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를 받아들고, 이사야서 61장 1,2절과 35장 5절과 58장 6절을 섞어서 읽고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대목은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양살이에서 돌아왔어도 가련한 처지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어려운 생활을 개선하고 복원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다른 왕들이나 사제들처럼 올리브유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직접 기름 부음을 받으시면서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루카가 복음을 선포하는 대상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서, 통치자들의 야욕으로 궁핍해지고 허약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처한 상황과 처지는 한마디로 소외입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자유를 상실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안팎으로 끊임없이 짓눌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명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가져다 주고, 사람들을 소외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구출해 내고 자유롭게 하는 활동을 펼치시는 데 있습니다.
‘은총의 해’는 이스라엘 백성이 50년 마다 경축한 희년을 말합니다. 희년이 제정된 목적은, 어떤 이유로든 빚을 지게 되어 가족의 소유와 자유까지도 상실한 모든 사람에게 떳떳한 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땅을 원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권리를 무상으로 되찾아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도록 규정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이사야서에 기록된 말씀을 읽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제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룩하신 일들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시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시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그분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하며 특히 소외되고 가난하며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의 삶이 그렇듯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참된 사랑을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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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최정훈 스테파노 신부님]
새로운 한해가 시작된지 벌써 몇일이 지나버렸습니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하신 결심들이 모두 잘 이루어지고 있으신지요. 혹 작심삼일이라는 말처럼 벌써 그 약속들을 깨어버린 것은 아닌지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한 약속들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그 약속들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으면 합니다.
어떤 사람이 겪었던 이야기를 하나 들려 드릴까합니다.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그는 사업에 실패한 후, 57세나 된 나이에 일거리를 찾아 타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시내의 빌딩 건축현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동료들과 뒷골목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빌딩 거리에 있는 작지만 고급스런 식당이었습니다. 식당에 들어선 순간, 그들은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한 식당은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그들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홀에 자리가 없어서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종업원은 재빨리 흙투성이인 그들의 신발을 보이지 않는 곳에 치워 버렸습니다.
기가 죽어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고개를 떨구고 머뭇거리고 있던 그들 앞으로 주문한 식사가 나왔습니다. 그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회사원 차림의 여성이 일어서더니 식탁 위 물주전자의 물을 따라 그들 자리에 놓아주며, 살짝 수줍은 듯 미소 지으며 “물 드세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같이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오던 그의 마음을 얼마나 따스하게 어루만져준 친절이었는지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 1963년 6월에 ‘가능한 친절이라면 모두 함께’라는 표어로 시작한 “작은 친절 운동”의 이야기 중의 한 글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께선 고향인 나자렛에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시는 모습을 들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이 적혀 있는 말씀을 읽으시고 그 말씀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 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2000년 전 주님께서 선포하신 이 은총의 말씀이 우리들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선 우리들에게 은총을 주셨는데, 우리들의 삶은 아직까지 은총보다는 미움과 절망이 가득한 듯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총의 세상은 그렇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이야기에서처럼 작은 친절 하나 하나가 모여서 주님께서 선포하신 은총과 사랑이 충만해 질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작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작은 사랑이 모여 주님께선 선포하신 은총의 해를 이루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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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하나된 사랑!>
우리의 신앙이 맹목적, 형식적, 광신적인 신앙이 되어서는 안되고, 매우 '구체적인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선포하시는 말씀의 핵심 메시지는 '우리의 신앙이 아주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먼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루카4,14-22ㄱ)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이 선포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며, 또한 우리가 살아야 할 구체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그리고 오늘 독서(1요한4,19-5,4)에서, 사도 요한도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4,20)
하느님을 사랑하겠다는 사람들은 그 숫자가 크지는 않다하더라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개인이기주의' 때문은 아닌지?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힘인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된 사랑'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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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영께서 나를 통해서>
루카 4,14-22ㄱ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주님의 영께서 나를 통해서>
가난한 벗들이
눈에 밟히는 까닭은
빼앗긴 벗들이
마음에 아린 까닭은
짓밟힌 벗들에게
손을 내미는 까닭은
내가 착해서도 아니요
내가 곧아서도 아니요
내 위에 내리시는
주님의 영께서
내 안에 머무시는
주님의 영께서
나를 이끄시는
주님의 영께서
쉼 없이
나를 깨우시어
작은 몸과 마음으로
당신을 따르려는
나를 통해서
몸소 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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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종종 뉴스나 방송에서 이상한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자녀를 학대하고, 가정에서 폭력을 가하고,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어떻게 부모가 되어서 저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그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첫 번째 사람이지만 부족한 면이 너무 많았습니다. 하와는 귀가 얇고 즉흥적이라 유혹에 쉽게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궁지에 몰렸을 때 남 탓이나 하는 유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그들의 장남인 카인은 어떤가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앞뒤 사정 재지 않고 죄부터 저지르고, 또 책임을 지기보다 발뺌부터 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우리의 원조가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음을 묵상합니다. 유혹에 너무나 쉽게 넘어가고, 남의 탓은 또 얼마나 많이 하고 있습니까? 온갖 핑계를 대면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식으로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내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근본적으로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 우리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천 년 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구원 시대가 당신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선포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으로 이사야서 61장을 인용한 것은 바야흐로 그분께서 잡혀간 이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음을 나타냅니다. 즉,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나라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61장은 메시아의 종말론적 구원에 관한 예언이며, 마침내 ‘주님의 은혜로운 해’에 예수님의 전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날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군중에게 말씀하시지요.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희년은 단 일회적인 사건만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서 세상에 실천해나갈 때, 구원의 시작이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우리 구원도 가까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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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만남>
가까이에 있다고 친한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만원 버스를 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많아 꼼짝없이 붙어 있어야만 합니다. 이 인연으로 대화를 나눠서 친해질까요? 아닙니다. 정말로 가까이에 있음에도 서로의 거리는 엄청나게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말 부부로 사는 신혼부부가 있습니다. 직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까이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은 가까운 마음 때문입니다.
공간적으로 가까이에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 안에서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진정으로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은 우리 모두를 위한 가장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공간적 만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인 만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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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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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 삶의 중심은 하느님이시다”
잠깨자 저절로 떠오른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God is Love’, 영어 말마디의 느낌도 산뜻합니다. 더불어 떠오른 수도원 초창기 플라스틱 세수 대야 바닥에 쓰여져 있던 영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Life is Beautiful’, ‘삶은 아름다워라’, 이 영어 말마디 역시 산뜻한 느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사랑 수행에 전념할 때 아름다운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진다'라는 옛 대중가요 가사도 있듯이 사랑은 아름다움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잠깨어 문밖을 나서면 맨먼저 바라보는, 일년 내내 볼 수 있는 '늘 거기 그 자리’의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불암산입니다. 북두칠성의 나이는 평균 5억년(태양은 50억년), 거리는 평균 빛의 속도로 80광년이라 하니 인류가 있기전 아득한 옛날에 생겼음을 깨닫습니다. 아마 불암산 역사도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옛날일 것입니다. 이들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참으로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분이시겠고, 이에 비해 인간은 얼마나 덧없는, 유한有限한 곧 사라질 점點같은 존재인지요!
나이에 관계 없이 영원하신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신망애信望愛의 영혼은 참으로 건강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어제도 이런 60대 노년의 묵동 성당 레지오 팀 자매 네 분이 저를 찾았습니다. 매해 한번씩 꼭 찾는 분들입니다. 제 대표적 기도문 ‘1.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와 ‘2.행복기도’를 읽기를 청했고 두 분 자매는 ‘1.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읽는 도중 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습니다.
이어 요즘 즐겨 바치는 세 번째 대표 기도문인 ‘3. 2022년 새해 소원’이라는 기도문도 함께 읽은 후, 휴대폰에 하늘과 불암산의 수도원 로고도 붙여드리고,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회 모토도 설명해 드리고, 십자가 고상 밑에서 사진을 찍어 드리니 모두 만족하고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이어 성전에서 수사님들과 함께 낮기도후 떠나니 제 마음 역시 흡족했습니다.
마음 같에서는 ‘2022년 새해 소원’이라는 기도를 또 인용하고 싶지만, 너무 자주 인용했고 또 길어 생략하지만, 늘 읽어도 새롭고 좋기에 아마 언젠가 적절하다 싶으면 인용할까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하느님 체험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적 사랑 체험이 하느님 체험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사랑을 체험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입니다. 계속되는 요한 1서의 사랑 예찬禮讚이 참 기분 좋습니다. 말씀이 너무 평이하고 간명하며 공감이 갑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마음을 감동케 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진위는 이웃 형제 사랑으로 검증됩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 형제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실 형제사랑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형제 사랑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신비주의가 있다면 거짓이요 환상이자 착각일뿐입니다. 이래서 형제애의 교회공동체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하느님 사랑 체험의 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인생은 모두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에 평생 재학중인 학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사야 말씀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심을 전광석화, 벼락같이 깨달은 예수님이심이 분명합니다. 참으로 불가의 오도송悟道頌과 같은 깨달음의 말씀 같고, 삼국지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 같은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소명召命과 사명使命을 깨달으므로 자기의 신원을 새롭게 발견한 것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은 사랑이심이 환히 드러나는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1.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시고, 2.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3.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4.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5.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날도 여전히 현실성을 띠는 우리를 격발激發케 하는 감동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오늘 미사를 통해 흡사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우리를 온갖 내외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시어 복음 선포의 일꾼이자 영적 승리의 전사로 세상에 파견하시는 주님같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이겨놓은 영적 전쟁의 승리에 참여하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대목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제 온갖 압제의 시스템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이 구원받은 존재로서 예수님과 함께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우리가 싸워 이기는 영적전쟁이 아니라 이미 이겨 놓은 주님의 영적승리에 참여하는 우리들입니다. 요한복음의 다음 말씀에서 이를 확인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요한 사가의 오늘 제1독서 마지막 말씀도 우리의 사기를 충천케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비결은 형제애의 실천과 하느님 믿음에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하느님의 자녀들인 형제 사랑은 전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말 그대로 형제애의 실천을 통한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 자유롭게 해방시키시어 당신 복음 선포의 일꾼으로, 영적 승리의 용사勇士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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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BJq8HF7K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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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인간의 말과
인간의
뼈 사이에
주님의 말씀이
있다.
말씀과
기쁜소식은
둘로 나뉘지
않는다.
말씀에
한없이 아프고
말씀에 한없이
기쁜 우리들이다.
말씀이
우리를 업고
걸어가신다.
주님 말씀은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진다.
우리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할
말씀이다.
듣는 법을
먼저 배우는
은총의
시간이다.
들어야
담을 수 있고
들어야
이룰 수 있다.
주님 말씀을
들으며
말씀을
닮아간다.
공현은
우리의
경청으로
신앙고백이
된다.
말씀은
경청의
신비로 오늘을
새롭게 한다.
말씀으로
자라나는
오늘이다.
말씀의 눈물이
말씀의 열매가
된다.
말씀은
다른 곳이 아닌
우리 삶의
자리이다.
말씀으로
완성되는
경청의
여정이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우리 가운데에서
진정 듣고
있는지를
다시금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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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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