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춘톈(公甜甜) - 반짝반짝 빛나는 羃䍠 :一帽以蔽体 ——昙花一现的羃䍦
출처: '대중고고고' 저자: 龚甜甜 출처: 중국 고고학 소스 : 동북아역사문물연구원
羃䍠(mì lí)는 독특한 고대 모자 장식으로 거의 500년 동안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고대 복식은 보존이 쉽지 않아 羃䍠의 구체적인 이미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90년 당나라 연비 묘소 벽화에서 羃䍠 이미지를 들고 있는 시녀의 발견은 羃䍠를 이해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합니다.
羃䍠3~8세기에 유행한 여행용 모자 장식으로 주로 용모와 신체를 가리는 데 사용되며, 문자 기록은 진나라 때 처음 등장하여 유행 초기에는 남녀 모두 착용할 수 있었지만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다가 당나라 이후에는 제도에서 폐기되었다.
명나라 이후 양신, 팡이지, 선종원, 양치, 저우시바오 등의 학자들이 羃䍠의 이미지에 대해 특별히 논의했지만 물리적 자료의 뒷받침이 부족하여 당시 羃䍠의 구체적인 이미지에 대한 논의는 문서 기록에 국한되었습니다.
역사의 원류 羃䍠는 羃䍠, 羃 울타리 또는 羃䍥를 작성합니다. 羃'라는 단어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 '멱' 또는 '멱'이 사용되며, 이는 물품을 덮는 대형 수건을 나타냅니다.
주대에는 멱인(幂人)이라는 직책을 두어 공건(共巾)을 관장하고 그 복물을 사용하였다. 소야광복(小尔廣服) : "대건(大巾)은 멱(幂)이라고 한다. "<주례·천관·멱인>에는 "멱인장공건멱. 제례는 소포와 건건으로 8존, 캔버스, 건건으로 6의, 모든 왕건은 黼입니다.
䍠 받아 㒿, 백모도. 羃그리고 가장 먼저 두 가지 품목, 즉 수건과 백모를 나타냅니다. 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羃䍠'라는 글자가 조합되어 나타났다. 《진서·사이전》에 토곡혼의 남자 복장을 기록하면서 "그 남자는 긴 치마를 입고 모자를 쓰거나 羃䍠를 쓴다.
"서북지방은 모래바람이 많이 불고 일조량이 강해 토곡혼 남자는 모자나 羃䍠를 긴 치마와 함께 착용해 햇빛을 차단하고 모래바람을 피할 수 있다.
수나라 때 羃䍠투구혼의 상류층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으며 여전히 남성이 착용했습니다. 수서·서역전'의 '토곡혼' 조목은 '왕공은 귀인이 羃䍠를 많이 착용하고 부인의 치마 저고리로 머리를 땋고 진주조개를 달았다.
"이 시기 서북지방의 토곡혼착의 羃䍠 외에도 서남지방의 소수민족과 중원지방의 한인들이 羃䍠를 착용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羃䍠가 동으로, 남쪽으로 전파된 결과였다.
《수서·부국전》의 《부국》 조목은 촉군 북서쪽 2천리의 가량이(嘉良夷)에서 "그 속성은 가죽을 모자로 하고 모양이 화발처럼 둥글거나 羃䍠를 착용한다. "진대 토곡혼 남자가 모자나 羃䍠를 복식에 맞춰 입는 것과 흡사하다.
수나라 중원 지역에서도 羃䍠 착용이 유행해야 합니다. 수나라 초 한왕 양량(楊谅)의 모반을 평정하는 전쟁에서 "화위포주자사(和和为州刺史)로, 양량(楊谅)은 병사를 시켜 부인복을 입고 羃䍠를 착용하고 성 안으로 들어갔다. "수나라 포주(蒲州, 지금의 산서성 영제)에서 여성들이 착용한 羃䍠가 일상복일 때만 병사들이 羃䍠를 착용해 남장을 할 수 있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羃䍠가 특히 유행하여 궁중의 기마인과 왕공의 집에서 유행하여 《구당서·여복지》: "무덕·정관할 때 궁인의 기마자는 제·수의 구제(舊制)에 따라 羃䍠를 많이 썼으며, 비록 융이(戎夷)에서 나왔지만 온몸이 막혀 길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왕공의 집도 이와 같은 제도입니다.
▲ 연비 묘소 羃䍠 시녀는 북제에서 당나라까지 羃䍠를 착용하는 것이 유행했으며 이는 중원 왕조의 여론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중원 왕조의 부흥과 재건을 위한 주례이기도 합니다.
'예기·내칙'은 "여자는 밖에 나가면 반드시 그 얼굴을 가린다. 당유숙의 대당신어에는 무덕, 정관의 대에 궁인 기마자는 주례에 따라 羃䍠를 많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통적인 예제가 羃䍠의 제도화에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당 고종 영휘(650~655) 이후 무측천의 정치적 지위가 공고해지고 여성의 자의식이 높아짐에 따라 '전신장폐'를 착용한 羃䍠는 여성의 미적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으며, 부인들은 '행차할 때 모두 휘장을 쓰고 치마를 목까지 끌며 점차 엷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이때의 羃䍠더 이상 여성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에 당 고종 이치는 전통 예제를 지키기 위해 휘장 착용이 "경솔하고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칙금단을 내렸다.
『구당서·여복지』에는 "함형 2년(671년)에 '백관가구, 함예사류(咸禮士流)'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그 길 사이에 어찌 장애물이 없겠느냐. 최근에 휘장을 많이 쓰고 羃䍠를 버리고, 일찍이 차를 타지 않고, 처마를 타지 마라. 그러나 당시 여성들은 서로 휘장모자를 쓰며 금지로 제한할 수 없는 트렌드를 형성했다.
휘장이 보편적으로 유행하면서 羃䍠궁금(宮禁)의 이완으로 쇠퇴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구당서·여복지》(舊唐書·여복지) : "측천후(则天後) 휘장이 성행하고 羃䍠점점 잠잠해졌다.
중종이 즉위하고 궁궐의 금지가 느슨해졌으며, 공인과 사인은 羃䍠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신당서·오행일'에도 '당나라 초에는 궁인이 말을 탄 자가 주구의에 따라 羃䍠를 짓고 온몸을 가렸으며, 영휘 후에는 휘장을 쓰고 치마와 목을 시용하여 비교적 얕게 드러났으며, 신룡말에 이르러 羃䍠가 끊어지면 모두 부인의 예사의 징조이다.
이로써 羃䍠당나라의 예제에서 공식적으로 제거된 것은 단순히 무측천 집권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 당나라 부녀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진 것을 반영할 수 있다. 천보연간(742~756)에는 羃䍠가 서민의 환영을 받지 못하자 羃䍠와 휘장을 쓰고 다니며 놀림을 받았다.
탕리화는 '외손자 최씨와의 두 자녀 서신'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중년 시절 '서경시에 가면 모자가 없고 밍크모자도 없다. 남자는 소매에 코를 가리고 여자는 스카프를 두른다.
휘장과 羃䍠가 있는 곳에는 기와 바위가 닿을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羃䍠전통적인 옷에서 탈피할 것을 예고합니다.
북서쪽에 처음 등장한 羃䍠는 착용방식이 점차 내전되면서 진나라 이후 일부 시문에도 여러 차례 등장했는데, 처음에는 '羃䍥' 또는 '멱력'을 썼고, 대부분 羃䍠와 같은 모양의 자연경관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묘사 대상은 절벽 위의 작은 폭포, 여라초, 야생연기 등이다.
수경주·온수'는 '애벽의 작은 물 羃䍥은 종종 미끄럼을 타거나 눈이 부슬부슬 끓고 끝없이 춥고 개울과 계곡을 나누며 진과 물이 서로 통한다. "남조 제왕융은 영녀라(咏女羅)에 "멱력여라초(幂历女羅草)는 소나무 가지를 뻗는다. 노란색과 녹색을 띠며 바람에 휩쓸려 늘어진다.
"당나라 시인 두루회(豆魯會)는 '등락유원회고(登樂遊原會古)'라는 시에서 "멱䍥 들연기가 피어오르니 푸른 하늘은 아득하다. 羃䍠고대 문인에 의해 시문이 도입되면서 시적이 부각됐을 뿐 아니라 사물의 구체적인 형상도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당나라 이후 羃䍠는 비록 여복제도는 없어졌지만 민간에서 간혹 보였고, 북송의 매요신도 《장사립수주사리》에 "자신은 말 箠를 사서 부인을 위해 羃䍠를 마련하라. 남송 육유관화'에는 황금낙마가 길을 비추고 자신을 보호하며 羃䍠 해당화를 구경한다. "청조익의 '제주방배면미인도(題周方背面美人圖)'라는 시에서 "비파반차면(琵琶半遮面)도 없고, 羃䍠 전차면(全罩面)도 아니다.
" 羃䍠이미지 특징인 구당서는 당나라 초 이밀과 당 고조 이연의 전쟁에서도 용사들이 羃䍠로 얼굴과 무기를 가린 채 남장을 하고 도림현사에 혼입해 국지전 승리에 큰 역할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 중 '간은 수십 명의 용맹한 사람들이 부인의 옷을 입고 羃䍠를 쓰고 칼과 치마 밑에 숨어서 처첩으로 속여 도림현사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장도치마 밑'은 고대에는 하의를 '치마'라고 불렀고, 모자챙 주위에 늘어뜨린 얇은 망사를 '치마'라고 불렀지만, 羃䍠전신이 가린 특성상 용사가 칼을 숨기는 것도 羃䍠수치마 밑에 있어야 했다.
▲ 투루판 아스타나 187호분 출토 휘장모자 채색 여기용 당 고종 이치는 함형 2년 휘장모자 단절을 명하고 백관(百官)에서 羃䍠 착용을 재개했다.
연비는 함형 3년(672)에 당 태종 소릉(昭陵)을 부장하였는데, 이 묘는 이치가 조서를 내려 조성한 것으로 묘와 시설은 당시의 예제를 따라야 한다.
1990년 고고학적 발굴로 연비의 묘 전실인 북벽 서쪽 방에서 羃䍠 여시도가 출토되었다.
이미지 분석에 따르면 羃䍠는 시녀가 무덤 주인을 모시기 위해 착용한 것으로, 시녀는 양팔 앞에 사발 모양의 검은색 둥근 모자를 들고 챙에 실크 직물을 연결해 매듭을 지어 시녀의 다리까지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시녀가 들고 있던 둥근 챙 연결사 직물은 할인되어 구부러졌지만 시녀의 다리까지 내려오는 羃䍠의 특징에 따라 '전신을 가리는' 것이 당나라 초기에 유행한 羃䍠이다.
▲ 당 '명황행촉도'의 일부 羃䍠온몸을 가리는 역할을 하면서도 문양이나 장신구로 장식하기도 했다. 남조 양오균의 《화소세마자현고의》의 여섯 곡 중 하나는 "羃䍥푸른 봉황새에 매달려 흰 뭉치를 구불구불 흔들다. "시문에 羃䍠에 청봉 문양이 새겨져 있다.
수나라의 종실 진왕 양준(楊俊)은 사랑하는 비(妃)를 위해 羃䍠를 지나치게 장식하여 羃䍠가 착용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하였다. 《북사·수종실제왕·진왕준전》에 "(양)준은 교묘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 羃䍠는 사물이 잘 보이도록 들어올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매요신의 '막상이녀'에는 "맨손 搴羃䍠, 여섬명춘이. " 문헌 기록과 실물 자료 분석을 종합하면 羃䍠는 모자와 얇고 부드러운 건백의 두 부분으로 합성되어 늘어진 건백을 치마라고 하며 면적이 넓어 위에서 아래로 관통하여 얼굴과 신체 대부분을 가릴 수 있으며 羃䍠는 반투명하여 말을 타고 다닐 때 앞을 투시할 수 있고, 사물을 잘 볼 때 손으로 들어올릴 수 있으며, 치마에 '현청봉'과 '장식칠보'와 같이 장식이 가능하다.
▲ 휘장효과도 당나라 무측천(武则天) 통치시대부터 부인들이 행차할 때 휘장을 사용했다. 커튼은 羃䍠의 번잡함을 극복하고 유행한 것으로 짧고 가벼우며 목까지만 길어 얼굴도 살짝 드러나게 하는 특징이 있다.
커튼의 후드 스커트는 망사로 만들어져 시스루 기능도 있다. 1972년 신장 투루판 아스타나 187호 탕시저우(唐西州) 시대 무덤에서 잔채색 기마녀 진흙용 2점이 출토된 뒤 도용 및 모치마(四周裙·사방 실크스크린)를 복원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중 기마여용(馬女俑) 1점은 꽃무늬 블라우스에 파란색 외투, 검은색 무늬가 그려진 긴 치마를 입고 있다. 뾰족 구두를 신다. 머리에는 원추형 커튼이 있고 모자챙에는 눈썹, 눈, 입, 코가 약간 보이고 모자 스커트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노란색 실크 메쉬가 있습니다.
이것은 유행하는 시대의 휘장 모자의 실제 모습입니다. 羃䍠서진시대 서북의 소수민족에서 기원하여 북제로 제도화되었으며 수나라를 거쳐 마침내 당나라 중종시대에 이르렀다.
발전 과정에서 중원 전통 문화와 점차 결합하여 중원 예제에 부합하는 복식을 형성하여 위진 이래 '후문화'와 유가 문화가 지속적으로 융합된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였다.
초기에는 햇빛과 모래를 가리는 실용적인 기능이 있었지만 점차 여자가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고 보호하는 예절 제약으로 바뀌었습니다. 당나라 이전에는 羃䍠가 주로 문헌 기록에 존재했지만 구체적인 이미지는 보이지 않았으며 때로는 남자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 초기의 여인들은 羃䍠를 착용하는 것이 일종의 여복 제도와 사회 풍조로서 전대를 훨씬 능가했습니다. 당나라 중종 이후 거의 5세기 동안 유행했던 羃䍠는 고대 여복 제도에서 철수했습니다. 휘장은 수나라 때 나타나기 시작하여 羃䍠와 병행하여 사용되었습니다.
우측천 시대의 커튼은 '목까지 치마 끌기'와 편리한 외출 및 착용의 장점으로 '전신을 가리기'를 빠르게 대체했으며 예의 범절의 의미가 강한 羃䍠. 당 현종 때 둘 다 개방적이어서 '화려한 옷차림'이 가능한 호모(胡帽)로 대체됐다.
이러한 변화는 당나라 여성의 미적 취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당나라 사회의 모습을 반영합니다.
분류:고고학 연구
본문 라벨: 羃䍠 휘장모자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