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미국 캘리포니아주 서부 인구 : 77만 6733명(2000)
태평양 연안에서는 로스앤젤레스에 이은 제2의 대도시이다. 샌프란시스코만(灣)에 면한 천연의 양항(良港)으로, 골든게이트에서 남쪽 서안(西岸)에 위치한다. 시가는 반도의 북쪽 끝을 차지하며, 북쪽은 골든게이트 브리지(金門橋)에 의해서 대안(對岸)의 마린 반도(半島)에 이어지며, 동쪽은 샌프란시스코만을 넘어 오클랜드와 마주 보고 있다.
이 사이에는 길이 13.5km에 이르는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가 걸려 있다. 신흥도시 로스앤젤레스가 최근에 샌프란시스코를 앞지를 때까지는 오랫동안 태평양 연안 제1의 항구이었으며, 지금도 세계 유수의 항만 도시 및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시(市)의 기원은 1776년 에스파냐의 선교사들이 이곳에 전도기지(傳道基地)를 만든 것에서 비롯된다. 1746년 멕시코의 독립에 의해서 멕시코령(領)이 되었으나. 당시는 다만 모피 거래의 중심지에 불과했다. 1846년 미국해군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847년에 샌프란시스코로 개칭되었다. 이때까지도 이주자의 수는 겨우 800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샌프란시스코가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1848년 부근의 시에라네바다 산지에서 금광맥이 발견되어, 이른바 골드 러시 시대를 맞으면서부터이다. 당시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멀리 해외에서도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이곳의 인구도 단숨에 2만 5000명으로 급격한 증가를 보였다. 이로 인하여 한때는 살벌한 치안부재(治安不在)의 상황을 이루었으나 이 황금시대도 얼마 안가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러나 만내(灣內)의 지리적 입지 조건으로, 태평양 연안 최대의 무역항으로서 나날이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그 동안 대륙횡단철도·파나마운하(運河)의 개통 등 유리한 조건이 거듭되면서, 식품·식육·섬유 등 각종 공업도 발달하였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풍부한 농업지대와 새 공업 입지의 가능성에 착안하여, 동부와 중부의 사람들이 대거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것도 발전하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1936~1937년에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와 골든게이트 브리지가 완성되어 인근지역과의 교통이 원활해졌으며, 현재는 대도시권의 심장부를 이루며, 서부 지역의 경제·상공업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한다. 샌프란시스코항(港)은 국내뿐만 아니라 태평양 지역과 동양에 대한 바다의 문호로 개방되어, 인근지역에서 재배되는 농산물과 광석·식품, 각종 기계류를 주로 적출한다.
공로(空路)와 육로의 발달도 현저하며, 특히 최근에 개발된 BART(컴퓨터를 도입한 대량 고속철도)가 주목된다. 공업은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80km의 방사상 범위 내에 90개 이상의 공업단지가 점재하여 활기를 띠고 있으나 중공업보다 식품·식육가공·제당·금속·인쇄출판·제재·고무·섬유 등의 경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또한, 옛날부터 교육·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으며,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등 많은 대학과 연구소·문화시설이 있다. 안개와 골든게이트 브리지, 그리고 비탈길을 달리는 케이블카 등은 샌프란시스코시(市)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고 있다. 또 시가지 전체가 아름답고 조용하며, 여름에 서늘하고 겨울에 따뜻한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것과 아울러 경승지·오락시설 등이 갖추어져서 수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주요 관광대상은 골든게이트 브리지·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베이 브리지·차이나타운·골든게이트 공원(公園)·케이블카·어시장(魚市場)·시청사(市廳舍)·오페라 하우스 등이다. 샌프란시스코시는 세계 각처에서 많은 인종이 모여들어 동일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국제 도시이다.
특히 인구 5만 명을 넘는 차이나타운은 작은 중국을 형성하는 특이한 존재다. 1915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완성을 기념하는 대박람회가 개최되었으며, 1939~1940년에도 국제적인 대규모 박람회가 열렸다. 1945년에는 국제연합의 조직위원회가 열렸고, 1951년 9월에는 대일(對日) 강화조약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조인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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