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오피니언
그리스, 튀르키예, 그리고 한국의 포퓰리즘[오늘과 내일/박중현]
박중현 논설위원
입력 2023-05-24 21:30업데이트 2023-05-25 01:33
유권자들이 바꾼 두 나라의 운명 포퓰리즘이 실패해야 나라가 산다 |
#. 2015년 그리스 총선에서 41세 훈남 정치인 알렉시스 치프라스가 급진좌파연합(시리자)을 이끌고 승리하자 아테네 청년들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몰려들어 환호했다. 돈 좀 빌려줬다는 이유로 그리스인에게 긴축과 개혁을 압박하는 유럽연합(EU)의 지긋지긋한 굴레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치프라스가 벗겨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국민이 원하는 건 뭐든지 주라”던 1980년대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향수도 여전했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제일 존경한다는 치프라스 총리는 그리스인들을 행복했던 시절로 되돌려줄 적임자였다.
압력에 굴복하느니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던 치프라스 총리의 결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국가파산의 기로에서 결국 EU 채권단의 요구를 받아들여 연금을 깎고, 공무원 수와 연봉을 삭감해야 했다. 지지층은 실망했고 2019년 총선에서 정권은 우파 신민주주의당(신민당)으로 넘어갔다.
신민당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총리는 무상의료 폐기, 연금 추가 삭감 등 개혁과 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여 2021, 2022년에 8.4%, 5.9%의 고속성장을 이뤄냈다. 지난 주말 치러진 총선에서 치프라스는 최저임금 14% 인상, 주당 근로시간 35시간으로 단축 등 자극적 공약을 다시 내걸고 정권 탈환에 도전했지만 더블스코어 차이로 미초타키스에게 패배했다.
#.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리스와 튀르키예는 한국과 일본만큼 뿌리 깊은 앙숙이다. 그리스 총선 1주일 전 튀르키예에선 대선이 치러졌다. 20년간 집권한 철권 통치자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1위였지만 과반이 안 돼 28일 2위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공화인민당 대표와 결선투표를 치르는데 에르도안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작년 말만 해도 에르도안은 패색이 짙었다. 경제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해괴한 통화정책이 문제였다.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을 잡으려고 금리를 올릴 때 그는 “금리를 낮춰야 물가가 내린다”는 터무니없는 지론을 관철하려고 금리를 계속 낮췄고, 말 안 듣는 중앙은행 총재들을 갈아 치웠다. 결과는 작년 86%의 물가 상승률, 사상 최저 수준의 리라화 가치였다.
하지만 그에겐 히든카드가 있었다. 작년 말 에르도안은 남성 60세, 여성 58세이던 은퇴 및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을 폐지해 225만 명이 곧바로 은퇴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했다. 흑해 가스전에서 나오는 천연가스는 모든 가정에 무료로 공급하기로 했다. 선거 5일 전 공공부문 최저임금도 한꺼번에 45% 올렸다. 그의 재집권이 유력해지자 튀르키예 주가는 폭락했다.
#. 한국의 역대 경제정책 가운데 에르도안의 통화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대표적 정책이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이다. 임금을 올리면 저절로 성장이 된다는 소주성을 놓고 주류 경제학자들은 ‘족보가 없는 정책’이라고 했다. ‘유럽의 병자’였던 그리스의 수출, 성장률을 되살린 원인으로 12년 전보다도 낮은 최저임금이 꼽힌다. 한국에선 2018∼2022년 5년간 최저임금이 41.6% 올랐는데 성장엔 보탬이 안 되고 일자리 질만 나빠졌다. 200%가 넘던 그리스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하락하고 있는데, 한국은 나랏빚 증가 속도가 제일 빠른 나라 중 하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정치권의 포퓰리즘 경쟁에 재갈을 물릴 재정준칙이 없는 나라는 한국과 튀르키예뿐이다.
그리스의 포퓰리즘은 실패했지만 그 덕에 나라는 살아나고 있다. 튀르키예의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성공적인데 나라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포퓰리즘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자세가 두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내년 4월 총선에서 한국인은 어느 쪽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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