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자 (1941- ): 인기 탤런트,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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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패티 김, 1938- ): 인기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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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대 김혜자 (패티 김) / 김성태 (수필가, 번역문학가)
1941년 생의 배우이자 TV 탤런트인 김혜자와 1938년 생인 가수 패티 김은 본명이 한자마저 金惠子로 똑 같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자 연예인들임에는 이론이 없다. 더욱이 이들은 실제로 손주까지 둔 할머니가 되어서도 각자 제 분야에서의 존재가치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62년 정혜선, 태현실과 함께 KBS 탤런트 공채 1기 출신으로 TV 드라마 <전원일기>, <사랑이 뭐길래>, <엄마가 뿔났다> 등으로 국민 어머니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자리매김한 탤런트 김혜자는 미군정청 시절 고위관직을 한 인텔리 아버지와 군산 거부의 딸인 어머니 사이의 남부러울 것 없는 환경에 서 자랐다. 또한 경기여중고와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 중퇴) 출신이라는 좋은 학력도 갖추었다. 10년 후배인 가수 양희은과 함께 경기여고 출신 연예인들의 대표 주자이다.
그녀는 안톤 체홉의 단편 소설 <귀여운 여인>에 나오는 올랜카 처럼 어느 대상에 몰입하는 배우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몰입 대상은 물론 작품에 대한 연기이다. 평소에는 여린 마음의 그녀이지만 극중에서 동료배우를 구타할 시 지나치게 몰입하여 싸이코란 놀림을 받은 적도 있다 한다.
영화에는 뜸한 편이지만 출연하는 영화마다 대성공을 하였다. 첫 출연은 김수용 감독의 <만추, 1981년> 로서 당시 그녀의 나이가 44세였다. 더군다나 이 첫 번째 출연 영화에서 덜커덕 마닐라 국제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타기 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도 좋았다는 평도 있었다. 또 윤인호 감독의 <마요네즈, 2000년>에서는 최진실의 덜 떨어진 엄마 역의 능청스러운 연기 를 펼치면서 관객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 주었다.
2009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출품된 봉준호 감독의 <마더, 2009년>에서는 극한상황에 처한 저능아 아들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펼치는 독한 엄마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연기의 신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2009년 아시아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탔다. 당시 남우주연상은 <8인의 의인> 에서 걸인 무술고수로 나온 인기절정의 중국배우 여명이었다.
영화배우 김혜자의 진정한 가치는 그녀가 빈민구호 단체인 <월드비젼>의 친선대사로 활동하면서 제3세계 고아 및 빈민들을 위한 구호활동을 하는데 있다. 기독교 권사이면서도 30년 이상이나 줄담배를 피우던 그녀가 지금은 담배조차 끊고 아프리카, 동남아, 북한, 아프가니스탄으로 등 몸소 봉사활동을 실천하고 있다. 가히 한국의 오드리 헵번으로 불리워도 손색이 없을만 하다.
또한 2004년 3월에는 그녀가 10년 이상 행한 이런 활동을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라는 제목의 책으로도 출간하여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호소력 있는 책 제목은 영남대학교의 박홍규 교수가 2002년 출간한 프란시스코 페레 평전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말라> 라는 제목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래서 김혜자 책의 출판사 <오래된미래> 는 박교수와 출판사 <우물이있는집> 측에 사과를 해야 했다. 스페인의 자유교육주의자였으나 억울하게 처형당한 프란시스코 페레가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비록 표절 파문을 일으키긴 했어도 김혜자의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는 구호활동의 중요성을 일깨운 큰 공이 있다.
이제 가수 패티 김 이야기를 해 보자. 2010년 4월 23일 금요일 저녁 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는 개관 20주년 특별공연으로 백건우의 피아노 독주회가 개최되고 있었다. 관객석에는 머리가 새하얀 걸출한 남녀 스타가 함께 하고 있었으니 한 사람은 영화배우 강신성일이고 한사람은 패티 김이었다.
운좋게도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본 내가 패티 김을 가까이 보았을 시 영락없는 할머니였다. 살이 빠져 튀어나 보이는 광대뼈 사이로 눈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여성전용 피트니스 센터를 운영하며 매일 운동을 한다는 그녀는 어디 갔을까? 어깨도 꾸부정하고 다리를 절룩이고 있었으며 강신성일에 의지하여 벌벌 떨듯이 걷고 있었다. 나와 악수한 손도 차갑고 힘이 없었다.
의문은 이튿날 수성아트피아에서 개최된 데뷔 52주년 기념 “Passion, 패티김은 열정이다” 라는 제목의 전국순회 공연장에서 풀렸다. 최근 발목을 다쳐 준비한 예쁜 하이힐을 신지 못한다며 빨간 구두를 보여주며 아쉬어 하였다. 그러나 프로는 일단 무대에 올라서면 사람이 바뀌는 법. 한국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과 뉴욕 카네기 홀에서 노래부른 공연의 달인 패티 김이다. 첫 곡 <빠숀> (Passion) 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무대 천정으로부터 등장한 그녀는 연방 흥겨운 춤까지 곁들이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미친갱이 할마시 아이가? 가슴이 살짝 파인 의상까지 선보였다. 누가 그녀를 73세의 할머니라 부르겠나? 그리곤 관객들을 향하여 저는 아직 38세 정도 밖에 안되었으니 여러분들은 모두 오늘 저의 기를 흠뻑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10대, 20대만 고함지르란 법이 있나요. 여러분들도 마음껏 소리지르고 스트레스 확 푸세요 라고 외쳤다. 도대체 전날밤의 아픈 모습은 어디 갔나? 열정적인 공연만이 다가 아니다. 그녀의 공연에는 아예 팜플렛도 없었다. 대신 스타에 대한 무언가의 정보나 기념품을 갖고자 하는 팬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새로 나온 CD의 구매를 유도하면서 장사꾼으로서의 재능까지 여지없이 발휘하였다.
패티는 김정택 단장이 이끄는 16인조 밴드와 함께 약 20여 곡을 부르면서 3벌의 의상과 함께 2시간의 공연을 중간 휴식 없이 정확히 소화하였다. ‘가 을을 남기고 간 사랑’ ‘초우’ ‘가시나무새’ ‘이별’ ‘사랑하는 친구’ 등 자신의 신구히트곡은 물론 ‘람디담디담’ 과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온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 조용필의 ‘모나리자’ 등도 그녀 특유의 가창력으로 훌륭하게 표현하였다. 개인적으론 ‘빛과 그리고 그림자’ ‘4월이 가면’ ‘사랑은 생명의 꽃’ 등 그녀 자신의 히트곡을 더 불렀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지만.
‘사랑하는 마리아’ 는 아예 관객들과 공동 리사이틀한 셈이고, ‘서울의 찬가’ 의 2절은 아름다운 대구에서 살으렵니다 하며 지역 관객과의 호응을 극대화하였다. 2차례의 드레스 체인징 시간에 보여준 영상이나 “Till" 같은 음악도 공연의 완성도를 드높여 주었다.
가수 패티 김 (Patti Kim) 은 중앙여고를 졸업하였으나 대학 공부는 하기 싫고 좋아하는 노래나 하겠다며 일찍이 연예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춘기 시절 국악으로 소리를 틔운 그녀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미 8군에 쇼단을 공급하는 원효로의 한국연예흥행주식회사 대표이자 트럼펫 연주자인 김양순에게 발탁되어 미 8군에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녀는 말하자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여 성공한 사람의 전형을 보여준 셈이다.
가수 김혜자의 원래 예명은 린다 김이었다. 이양호 전 국방장관 등과 염문을 뿌린 모 무기 로비스트의 이름도 린다 김이었지. 그러나 김혜자는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의 전설적인 스탠다드 팝 가수 패티 페이지 (Patti Page, 1927년 ~ ) 를 좋아하여 패티 김이라고 예명을 바꾸었다. 첫 남편 길옥윤도 1927년생이었지. <테네시 왈츠>, <체인징 파트너즈> 등의 수많은 명곡을 남긴 패티 페이지와 패티 김은 용모도 비숫하고 창법도 비슷하다. 그러나 패티 페이지의 목소리가 좀 더 부드럽고 패티 김의 목소리는 약간 더 강인한 느낌을 준다. 패티 김은 이런 자신의 개성과 장점을 잘 살려 한국 최고의 팝 발라드 가수라는 독보적인 지위를 구축하였다.
그녀의 첫 데뷔곡은 이른바 최고의 무드 음악으로 불리우는 <Till> 이었다. 이 곡은 원래 1957년 프랑스 작곡가 샤를 당베르 (Charles Danvers) 와 작사가 삐에르 뷔이쏭(Pierre Buisson) 에 의해 만들어져서 이탈리아 출신의 여가수, 댄서, 배우인 카테리나 발렌테 (Caterina Valente) 가 불렀다. 그러나 막상 유명해지기로는 영화 러브 스토리의 주제가 <Where Do I Begin> 의 명 작사가인 미국의 칼 시그만 (Carl Sigman) 이 영어로 작사하고 캐나다 가수 퍼시 페이스 (Percy Faith) 가 노래부르면서부터다.
이후 앤디 윌리암스, 톰 죤스, 셜리 베씨 등이 잇따라 부르면서 미국 팝송의 고전처럼 된 <Till> 은 박곡가 박춘석이 <사랑의 맹세> 라는 제목으로 번역, 편곡하여 맨 먼저는 그가 사랑했던 백일희에게 준 곡이었다. 백일희라는 이름은 미국 가수 페기 리 (Peggy Lee) 에게서 따왔다고 한다. 그러나 패티는 이와 상관없이 춘석을 추모하는 TV 방송 프로에서 사회자 임성훈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 예정에 없는 노래를 불러 올드 팬들의 향수를 달래주기도 하였다. 백일희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이해연의 동생, 즉 김영순의 처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연안부두를 부른 김트리오의 부친이기도 하다.
패티는 노래는 자신의 운명이라고 하였다. 가수에게 노래는 자기의 운명이지 누가 그걸 모르나? 필요도 없는 말씀이다. 그녀는 훌륭한 작곡가들을 만나는 등 자신에겐 행운도 따랐음을 실토하였다. 노래에 대한 욕심도 많았다. 마음에 드는 곡이 있으면 작곡가에게 그 곡을 달라고 조르기도 하였다. 선약 이 있었기에 결국은 최희준에게 넘어간 길옥윤 작곡의 <빛과 그리고 그림자> 같은 곡이 그 예이다. 패티는 길옥윤과의 결혼과 이혼에서도 주도적인 자세로 임했었다. 그리곤 지금은 자신의 가수 생활을 이해해 주는 이태리인 남편을 두고 있다. 한때 모 재벌회사 C 회장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또 다른 인기가수 B 씨는 패티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C 회장과 정사를 벌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였다. C 회장은 최근 미스코리아 겸 방송인 출신의 네 번째 부인 J 씨와도 이혼했다.
키가 168Cm 인 패티는 이효리가 얼굴은 자기보다 이쁠지는 몰라도 몸매만큼은 과거 자신의 빅 S 라인보다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내노라하는 연예인이 다 출연한 강호동의 <무릎팍도사> 토크 쇼에도 품격이 떨어진다면서 거절한 적이 있단다. 이 모두 패티의 도도하면서도 주체적인 삶의 모습, 정열적인 자세의 일면들이라고 이해해주고 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마돈나처럼 몇 번씩이나 스캔들을 되풀이하는 이들도 많다. 패티 김! 그대는 누구보다도 감정이 풍부한 딴따라가 아니신가? 어디 한 번 100세가 넘도록 노래하고 스캔들도 열 번이라도 일으켜 보시지. 그리하여 노인들에게도 청춘은 살아 있다, 정열은 남았다라는 희망을 갖게해 주 시지 않겠소? 패티 김! 노장들의 우상! 미치광이 할망구여, 영원하라! 팍팍!
*대구 청율아트홀에서 매월 개최되는 낭만주의 영시 특강의 후원자이자친구인 김성태
대표(그랜드 아츠 코퍼레이션)의수필 「김혜자 대 김혜자 (패티 김)」을 올립니다. 이 글을 보내준 김 대표에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