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화가가 듬뿍 묵향을 뿌려놓은 무등산 산자락 광주 역에 문인들이 찾아들었다. 을유년(2005년)을 보내며 남천의 초청으로 서울에 사는 백두대간 (김구선생 일대기) 소설 작가 김광한 과 수원에 사는 소정 백숙자, 대전에 사는 승당 조영자 여류 시인이다.
필자와 김광한 소설가와 형제의 우정으로 지내온 사이이며 소정과 승당은 한겨레문학 동인으로 지내온 사이이다.
광주에서 필자와 경당 이명란, 영월 김명선 여류시인이 영접하여 첨단 토방 음식점에서 토속음식 홍어 찜으로 해후하였다. 경당의 준비로 이루어진 만남에 우정을 다지고 곧장 1984년 2월 29일 광주 광산구 월계동 510번지에 건립된 무양사로 갔다.
인터넷 검색하여본 광주광역시문화재자료 제3호로 지정된 무양 사는 고려 인종 때의 어의 장경공 최사전(崔思全)을 주벽으로 그의 후손인 손암 최윤덕(孫菴崔允德), 금남 최부(錦南崔溥)와 문절공 유희춘(柳希春), 충렬공 나덕헌(羅德憲) 등 다섯 명을 배향한 서원이다. 1927년 탐진최씨 문중이 전국 유림의 호응을 얻어 세웠으며 광주의 옛 이름 '무진의 볕' 즉 무진지양(武珍之陽)에서 이름을 따지었다. 매년 음력 9월 6일 제향하고 있다.
강당인 이택당(以澤堂)의 좌우에 합의문과 일반적인 통용문으로 사용되는 합인문이 있다. 문 안에는 오른쪽에 성지재(誠之齋)와 왼쪽에 낙호재(樂乎齋)가 있으며, 높은 대지 위에 무양사(武陽詞)가 있다. 앞쪽의 삼오문 좌우측 문짝 위에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이다. 탐진최씨 문중에서는 서원의 교육기능을 살려 1945년 광산구쌍암동에 무량중학교(현 비아중학교)를 설립하였다. 배향된 인물을 살펴보니 고려 때부터 조선시대 훌륭한 인물로 추앙해야할 후대들의 자세라 할 수 있다.
나무는 바람 속에 흔들리며 살아가지만
바람은 나뭇가지 흔들어야 바람이다
속세는 인정해야만 더불어 존재하네.
탐진 최씨 문중에서 추앙한 사람들
월계동 무양사에 다섯 명 배향하니
해거름 나그네들이 흠모하러 찾아왔네.
-송병완, 월계동 무양사 時調시조 전문(2005.12.10작)
최사전 [崔思全, 1067~1139]
자 휼세(恤世). 시호 장경(莊景). 내의(內醫)로서 예종의 등에 난 부스럼을 가볍게 보고 치료하지 않은 죄로 2년 도형(徒刑)을 받았다. 소부소감(小府少監) ·군기소감(軍器少監)을 거쳐 1126년(인종4) 이자겸(李資謙)이 궁궐을 범하고 권세를 남용하자 인종과 협의, 자겸의 심복 척준경(拓俊京)을 설복, 그로 하여금 자겸을 제거케 하여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이 되었다. 이듬해 이부상서(吏部尙書) ·지도성사(知都省事)로서 수사공(守司空) ·좌복야(左僕射)가 더해졌고, 삼한후벽상곡신(三韓後壁上功臣), 뒤에 수태위(守太尉) ·주국(柱國)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최윤덕 [崔潤德, 1376~1445]
본관 통천(通川). 자 백수(伯修)·여화(汝和). 호 임곡(霖谷). 시호 정렬(貞烈). 음보(蔭補)로 기용되어 아버지와 함께 여러 싸움에서 공을 세워 부사직(副司直)이 되었다. 1402년(태종 2) 낭장(郞將) 등을 거쳐 1403년 대호군(大護軍),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 1410년 무과에 급제, 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내고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티무르[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 야인들의 준동을 막고 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 등을 지냈다.
1419년(세종 1) 의정부참찬으로서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가 되어 체찰사(體察使) 이종무(李從茂) 등과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했으며, 1421년 공조판서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가 되었다. 1428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1433년 다시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같은 해 군사 1만 5천 명을 이끌고 압록강 유역의 여연(閭延)에 침입한 여진족 이만주(李滿住)를 물리치고 우의정에 특진했다. 그 뒤 여연(閭延)·자성(慈城)· 무창(茂昌)· 우예(虞芮)에 4군을 설치하였다.
이 때 그는 무관이 재상이 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상소, 극구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6년 중추원영사(中樞院領事)에 임명되었다. 1445년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최부 [崔府, 1370~1452]
본관 전주(全州). 자 수지(受之). 시호 정간(靖簡). 고려 말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지내다가, 조선 개국 후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외직(外職)에 나갔으나 고과(考課) 때마다 성적이 출중하여 1405년(태종 5) 의정부 사인(士人)이 제수되었다. 그 후 승정원 동부대언(同副代言)을 지내고 21년(세종 3) 경기도관찰사, 1423년 예조참판과 황해도관찰사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1439년 공조판서, 이듬해 좌참찬에 승진, 이어 이조 ·공조 판서를 지냈다
유희춘 [柳希春, 1513~1577]
본관 선산(善山). 자 인중(仁仲). 호 미암(眉巖). 시호 문절(文節). 여류문인 송덕봉(宋德峯)의 남편. 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으로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4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다음 수찬 ·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547년 벽서(壁書)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면되어 직강(直講) 겸 지제교(知製敎)에 재등용되었다. 이어 대사성 ·부제학 ·전라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75년(선조 8)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眉巖日記)》 《속위변(續諱辨)》 《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시서석의(詩書釋義)》 《헌근록(獻芹錄)》 《역대요록(歷代要錄)》 《강목고이(綱目考異)》 등의 저서를 남겼다. 좌찬성에 추증되어 담양(潭陽)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茂長)의 충현사(忠賢祠),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되었다. 2005년에 설계가 완료되고 2006년에 착공될 미암 기념관 건립이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에 추진되고 담양향토문화 연구회에서 미암 일기를 번역하자 2005년 해남 향토문화에서 송덕봉 문집을 번역을 완료하여 발행을 추진하고 있다.
나덕헌 [羅德憲, 1573~1640]
본관 나주. 자 헌지(憲之). 호 장암(壯巖). 시호 충렬(忠烈).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 2년 뒤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을 도와 안현(鞍峴) 싸움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원종(振武原從)의 훈공을 받았다. 사신으로 여러 차례 후금(後金)의 심양(瀋陽)에 다녀왔다. 1628년 봉산군수가 되고, 1631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지낼 때 덕천(德川)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635년 창성부사(昌城府使)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지내고, 이듬해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다.
그때 후금의 태종이 황제를 자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자 이에 항거, 하례(賀禮)를 거부하다 매를 맞고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國書)를 가지고 돌아왔다. 국서에 황제라 칭한 내용이 있어,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글을 받아왔다 하여 척화론자(斥和論者)들로부터 논핵을 받았다. 김상헌(金尙憲)의 진언으로 간신히 극형을 면하고, 백마성(白馬城)에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앞서 심양에 갔을 때 후금의 태종에게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죄를 용서받고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에 특진되었다. 1639년 사임하고 나주로 돌아갔다.
월계동 장고분 (기념물 20호) 보고 담양으로 갔다. 담양 호수를 돌아보고 금성면 소재지에서 된장국으로 저녁 식사 후 파라다이스 모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다음날 일찍이 전북 순창군 강천사로 가서 충장로 음식점에서 메기탕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전국에서 모여든 등산객에 끼여 오장군 폭포와 벼랑의 고드름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강천사를 노래하였다.
벼랑에 고드름
송병완
초가 삼 칸에
새마을에 새벽종 울리고
호박초롱 향기나
두메산골에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고
인심마저 떠나가
산사 계곡에
찾아 오고가는 등산객
멋진 향기 퍼지고
벼랑에 고드름
한겨울 뻗어버린 물방울
향수에 녹아 내려
2005.12.11 강천계곡에서
김광한 백숙자 조영자 김명선과
담양 송강정에 올라 잠시 정송강 사미인곡을 생각하면서, 광주 북구에서 점심을 하고 내년에 마나자고 약속하고 고속버스로 떠나갔다. 남천 따라 우정 따라~ 2004년 11월 19일 만남으로 지은 시에서,
“바람은 조화에서 윤회로 일어나고
선비는 대쪽같은 정의로 태어나니
담양의 시가사문학 대나무 정신이라“
-송병완, 대 바람 부는 담양 선비고을에서 時調 전문
“2004년 11월 18일 정오 48분 광주역 광장 아름다운 우정의 선비들! 함박웃음을 터트리니 광장에 서있는 푸른 소나무 국화향기 취해 겨울로 가는 여울목에 남천의 가슴은 뛰고 뛰어 사이버에서 윙크하고 보이지 않는 가슴을 맞대며 별처럼 보낸 지난 세월!
보고픈 그리움에 호남 땅 찾아온 선남선녀 시인들! 꿈속에 빠져드는 아름다운 추억
서울에서 서울 신문기자 30여년 남북경협으로 남북을 오고가는 시인 도송 송병훈 선생 백범 일대기를 그린 백두대간의 김광한 소설가, 초막이며 송랑, 김재란 시인, 안개이며 우희 홍정희시인 초면인 송화 홍현 시인, 안산에서 송운 이금순 시인, 수원에서 스마일이며 소정 백숙자 시인 대전에서 조아라 시인 광주역을 뒤로하고 서있는 그리운 사람들!
호남의 여류시인 경당이며 심성, 이명란 시인, 일죽이고 영월인 김명선 시인, 문병란 시인의 사사 수학하는 창평 채윤기 군 다정한 손길에 따스한 우정을 주고받아 자가용 두 대로 무등산 그때 그 산장으로 가 선비 모습에서 만산의 홍엽은 산천에서 붉게 타오르고 가슴마저 활활 타올라 소반에 둘러 앉아 닭다리 뜯어가며 잎새주로 주거니 받거니 만추의 까르르 웃음 터진 그때 그 산장!
문학의 즐거움 제1회 시낭송 추진한 전남대학교 영문학 교수이며 희곡 작가인 김영관 시인, 사이버 문학의 즐거움 전국회장 직 맡아 특유한 미소가 혜안에 떠날 줄 몰라 찾아온 시인들 얼마나 보고 싶었던 그리움이야 단풍사이로 무등산 천황봉 바람 안고
어깨를 비비며 원효사 오르니 선남선녀들이 붉은 낙엽 되어 쏟아져 눈가에 사랑이 매료되어 가쁜 숨은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송정리에서 내려 택시로 달려온 송산 시인 원효사 회암정에서 만나 고색으로 버려진 탑 구경하고 한턱을 쏘고 김영관 교수와 함께 떠나간 경당 아름다운 그녀에게 모두는 손을 흔들고 가사문학의 산실인 담양으로 가면서 호남의 상징 평범한 무등산에서 일소 일 소! 추억의 말뚝을 박고 소나무 숲을 지나 먼발치로 충장사 김덕령 의병장 바라보고 나주목사 김윤재와 송강 정철의 만남인 환벽당 놓치고 목전에 가사문학관 앞을 지나 타이어 타는 냄새로 가슴조이며 연천리 산음동 독수정 오르니 자미는 깊은 잠에 빠져있어 시인 묵객들은 할말을 잊었어라. 담양 남면 농협에 들려 잎새주 매실주 사들고경상재 넘어가니 정암 조광조과 넘어가는 고개라 비록개혁하지 못하고 저승 간 선비로 추앙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가암리 청촌 마을 입구에 카페에서 봉을 맞은
문인들의 입가에 쓴 맛! 시인의 가슴을 달콤하게 할 줄이랴 무릉도원에서 호강이라 할까 아니면 지나치게 누려 황당한 제동이라 세상사는 모습이라
해는 저물어 향수에 냉갈이 펄펄 마을을 휘감아 아궁이 장작개비 넣고 훨훨 불 집혀
아랫목에서 당신과 고것이나 하면서 별 속으로 갈거나 김영관 시인 집에 당도하니 주인 없는 객들이 서방 각시 되어 조아라 밥쌀 담그고 송운은 저녁지어, 남천은 술잔 기우리니문인들의 밤은 깊어가 집주인 나타나 저는 영송 김영관입니다. 야간 강의 빨리 끝내고 돌아온 집주인에게 양주로 선물 주는 도송 송병훈 이잔 저잔 걸치고 마당으로 동내 방내 별보고 꿈속으로 밤새 마음 조였다는 조아라 이불 덮어준 아스라한 느낌에 새벽닭 울음소리에 일어나 어제 밤 태워버린 불덩이 일으켜 쓰레기 긁어모아 태우고 태워 이른 조반 들고 소쇄원으로 가서 대나무 노래하여 산수유 불러 세워 하서 48영 구경이라 광풍 각에서 물레방아 사연,아름다운 소쇄원에 감탄하고 안개를 뚫고 담양 읍으로 달려 전국에서 유일의 가로수 거리 붉게 타오른 메다스쿼이야 찍고 박고 찍어 모습 새기며 탄성 지르고 대나무가 줄지어선 금성산성 주차장에 주차하고소나무 사이사이 대나무 심어 최형식 군수 죽광(竹狂)이라 이천골 오사할 욕소리 전우치 둔갑술 이야기 하다보니 보국문 올랐더니 웅장한 성곽 충용 문에서 아름다운 산성에 취해 추월산 아래 담양호수 안개에 가려 담양들에 비닐 꽃이 활짝 피었구나 줄지어 오른 등산객 초입에서 대나무 차 부르며 월산 머루랑 다래 랑으로가 버섯 죽에 백화차 마시고 죽녹원 대밭에서 녹차 꽃에 반해서 관방천 구름다리 거닐어 대 바람 부는 담양 선비고을에 아름다운 추억을 간직하였어라“
첫댓글 즐겁고 뜻깊은 날 보내셨군요. 부럽습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향하여 추구하는 삶이 아름다움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