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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12월 6일 함경남도 영흥군(永興郡) 고령면(古寧面) 연동리(連洞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도호(道號)는 소래(笑來)다. 별호(別號)는 몰나(沒那) 혹은 불폐(不吠)고, 법명은 마루진이다. 동학도인 부친 김교화(金敎和)의 보살핌을 받다가 4살 되던 1892년 종백부 김교언(金敎彦)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입양에 따른 정신적 충격과 가난에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17세에 가장으로서 서당 훈장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예언서·술서(術書) 등을 폭넓게 익히면서 당대의 사회 모순을 인식하고 종교적인 구도(求道)를 통한 개혁을 고민하였다. 그러던 중 1907년 9월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토국민신보(討國民新報)」라는 사설을 읽고 민족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당하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이 체결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에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가 친일적인 노조를 펴자 이를 비판한 글이다.
그 동안 일제 침략의 주구로만 치부하였던 ‘신학문’에 대한 인식을 전환하고 계몽주의자로 탈바꿈하였다. 1908년 서당을 연명학교(鍊明學校)로 개조하여 50여 명의 청년과 아동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나아가 근대적 사회 개혁을 위해 1909년 천도교에 입교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당시 천도교가 반일진회 운동과 함께 ‘보국안민(輔國安民)’, ‘광제창생(廣濟蒼生)’의 기치 아래 사회 개혁에 적극 나서던 때였다.
서울에 올라온 뒤 『천도교월보』에 교리 해설에 관한 글을 싣는가 하면, 일진회가 ‘합방청원서’를 제출하자 「토일진회(討一進會)」라는 글을 신문에 기고하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그렇지만 경술국치 이후 자신의 이상과 달라진 천도교 지도층의 무기력한 태도와 처신에 실망하여 1910년 가을 무렵 낙향하였다.
그 뒤 새로운 세계관 확립에 애쓴 결과 1911년 자신의 우주관을 정립한 『천기대경(天機大經)』을 저술하였다. 이를 토대로 '대공화무국(大共和無國)'이란 새로운 철학 이론을 만들고, 젊은 천도교인 중심의 비밀조직 ‘2·1결의단’을 결성한 뒤 천도교단의 개혁에 직접 나섰다. 서울로 올라와 ‘천도교청년강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천도교 개혁의 필요성과 방법을 설득하였다. 하지만 교단의 배척을 받아 출교 당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2·1결의단’을 확대시켜 ‘천도교신인회(天道敎新人會)’를 조직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했지만, 이것마저 천도교 측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1912년 산속으로 들어가 극원 철학을 정립하고, 1913년 1월 1일을 기하여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사용하며 원종(元宗)이란 신종교를 창립하였다. 원종의 교리는 봉건적인 정치·사회·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일제의 억압을 타파하여 새 질서·새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혁명적 사상을 담고 있었다. 따라서 원종주의자들을 육성하여 자신의 사상을 널리 전파한다면 독립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고향에서 첫 법회를 연 뒤에 함경도·평안도 일대에서 포교하고 서울로 올라가 전법(傳法) 활동을 펼쳤으나, 천도교 측의 방해와 일제의 탄압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1914년 봄, 신도 윤인중(尹仁中)·김전(金田) 등과 함께 북간도 훈춘(琿春)으로 피신하였다. 북간도에는 15만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여 원종 포교에 적합한 곳이었다. 우선 훈춘에서 가장 세력이 큰 ‘기독교우회(基督敎友會)’ 등과 연대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지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1915년 원종 교도들을 이끌고 북간도와 서간도 접경 지역인 백두산록의 안투현(安圖縣) 도전동(道田洞)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도전학원을 세워 원종 교도의 교육에 힘을 쏟으며 역량을 키우고자 했지만 너무나 궁벽한 곳이었다. 1916년 봄, 한인들이 제법 많이 모여 사는 북간도 안투현 북구(北溝)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첫 법회총사를 열고 북구학원(北溝學院)을 설립하는 등 안정을 찾아가는 듯 했으나 중국 관헌에게 모든 기밀서류를 압수당하고 추방되었다. 만몽조약이 체결되어 중국이 한인들에 대한 단속과 통제를 강화하던 때였다.
1916년 여름, 대종교 교주 김교헌(金敎獻)이 한때 머물렀던 서간도 창바이현(長白縣) 덕수(德水)로 갔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원종교 본부인 법회총사(法會總司)를 열고 ‘인재 규합, 항일 운동 단체 조직, 투사 양성’ 등을 목표로 삼았다. 건원학원(建元學院), 덕수학원(德水學院) 등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고, 땅을 개간하면서 원종촌(元宗村) 건설에 힘을 기울였다.
원종촌을 건설한 뒤에는 농촌 중심의 공동 생산, 공동 분배하는 다복식(多福式) 정책을 실천해 나갔다. 자신이 꿈꾸던 무국시대(無國時代)를 이루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경제제도 개혁을 통해 국가·민족 간의 불평등이 해소되고 개인의 개성과 자유가 존중되는 민주주의 사회(소공화)에서 국제분쟁이 해소되면서 정치적으로 세계가 하나의 국가가 되는 단계(대공화)를 거쳐 무국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1917년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년여 동안 회령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창바이현 왕가동(王哥洞)에 활동 거점을 마련하고 왕가학원(王哥學院)을 설립하는 등 북간도와 서간도 일대를 돌며 원종 교도를 늘려나갔다. 점차 재만 한인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단체 통합운동이 전개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안투현으로 옮겨가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마적을 만나 한 달 동안 구금되었다가 덕수로 되돌아왔다.
1920년 5월 허룽현(和龍縣) 장인강(長仁岡)에 가서 총사를 열고 200여 명의 청년들을 모아 안투현 흥도자(興道子)에서 대진단을 조직하였다. 대진단은 발해의 다른 이름으로 ‘겨레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대진단은 만세운동의 비폭력 투쟁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해 10월에 일어난 ‘경신참변’ 때 장인강의 원종 총사가 불타버렸고 대진단 관련 문서들이 발각되면서 일본군에 붙잡혀 천보산(天寶山)으로 끌려갔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대진단 본부는 와해되었지만 서간도 창바이현 16도구에 있던 대진단 지단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던 군비총단·태극단·흥업단·광복단 제1,2결사대 등과 연합하여 대한국민단을 결성하였다.
1921년 가을, 원종의 근거지를 북간도 허룽현 삼도구 일대 원화동(元化洞)으로 옮겼다. 원종 총사를 설치하고 지방 법회를 대폭 강화하여 내수동(內水洞) 등 5개 지역에 지방 법회를 총 13개소로 늘렸다. 또한 경신참변 때 파괴된 학교들을 재건하여 입포강학원, 이두구학원, 경신학원 등 30여개 학교를 설립하였다. 학교를 통해 원종을 전파하고 충실한 교인과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다.
1921년 12월 안투현에 파견된 청년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일본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아 교도 김준·김현묵·홍참봉 등 10여 명과 함께 다시 붙잡혔다. 용정 일본총영사관에서 3년간 중국재류금지명령을 받고 고향인 연동으로 축출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로 들어왔지만, 원종의 국내 조직을 활성화시켜 지방 법회 8개소를 만들고 연흥의숙 등 5개 학원을 설립하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이 조직한 원산청년회와 연대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고향에 머무르고 있을 때 북간도에서는 공산주의에 동요되어 변절하는 교도들이 속출하였고 장티푸스까지 유행하여 많은 원종 교도들이 희생되었다. 원종촌이 해체될 위기에 처하자 국내에 있으면서 경리원 신설, 총사대 건축, 건원중학과 만종학원(萬宗學院) 창립 등의 3대 법훈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당시 간도의 대흉년으로 법훈은 바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다만 간부들이 조직을 재정비하고 포교와 학교 감독에 힘을 쏟았다.
1925년 초, 북간도로 돌아온 뒤 원화동에서 평강벌 개척리로 이전하여 새롭게 총사 건물을 짓고, 중앙본사와 지방법회로 조직을 개편하여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계몽운동 차원에서 『새바람』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순회 강연과 연극 활동도 펼쳤다. 나아가 종우회(宗友會)와 여성종우회(女性宗友會) 등을 조직하여 교우들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그 결과 허룽현·안투현·창바이현 등지에 설립된 지방법회 수가 20여 개로 늘어났고, 신도 또한 5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만종학원과 건원중학교를 설립하여 원종주의자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즈음 원종은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만청년동맹(東滿靑年同盟) 등 공산주의 단체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았다. 공산주의 단체들이 시시때때로 원종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준다며 포섭하곤 하였다. 이러한 유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만종학원과 건원중학을 합쳐 고등교육기관 농대학원을 설립하고, 교육방침을 민중주의로 바꿨다. 하지만 1927년경 원종 교단의 분열로 신도 상당수가 공산주의로 돌아서고 말았다. 교단의 종우회를 종우총연맹(宗友總聯盟)으로 확대·개편하고 반공주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7년 3월경 일본 경찰에게 개척리 원종총본사의 석판인쇄기, 『새바람』 잡지, 각종 서적 등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신도 6명과 함께 또 다시 붙잡혔다. 서울로 이송되어 서대문경찰서에 수감되었다. 1927년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방면되었다. 그 틈에 동만청년연맹의 공작에 의해 원종교도 상당수가 공산당원이 되었다.
개척리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 소식들을 접하고 서둘러 종법회의를 소집하였지만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결국 원종 중심의 독시주의를 접고 ‘방향 대전환’을 통해 민족적 통일전선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통일전선이란 모든 독립운동단체들을 해체한 뒤에 개인 자격으로 새로운 단일 단체를 만들어 무장 투쟁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 가을, 닝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에 원종 근거지를 두고 독립군과 독립운동단체의 규합을 위해 ‘조선민사(朝鮮民社)’를 세웠다. 영고탑은 일제의 통제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1920년대 북만 민족운동의 근거지였다. 남만·북만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김좌진(金佐鎭)·윤세복(尹世復) 등을 만나 단일 전선을 협의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독자적으로 민족해방계획을 수행하기로 결심하였다.
1929년 봄, 노야령(老爺嶺) 팔도하자(八道河子)에 근거지를 정하고 황무지를 개척하여 원종의 근거지인 어복촌(魚腹村)을 건설해 나갔다. 어복촌에서는 농사를 포함한 모든 노동은 농대(働隊)를 편성하여 공동으로 수행하고 분배는 배급카드제로 운영되었다. 공동체 안에 청년단·소년단·장녀단·부녀단을 조직하여 교육과 군사 훈련을 함께 받도록 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준비하였다. 우선 대일(對日) 전투 총지휘부인 진우회(震友會)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조선혁명지도처를 두었다. 전 농우동맹(儂友同盟)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한편 이평림(李平林)을 하얼빈에 파견하여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동만주에는 조남호를 파견하여 각 지방 법회와 국내에 연락하여 청년들을 모집하고, 한인 만주 이민자들을 끌어 모으고자 하였다.
1932년 3월,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한국독립군은 중국군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항일무장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이때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의 왕덕림(王德林) 부대와 항일공동전선을 펼치고자 하였다. 먼저 헤이룽쟝성(黑龍江省) 뚱닝현(東寧縣)의 길림구국군 총사령부에 김대용(金大用) 등 4명을 파견하여 연합전선을 펼치도록 하였다. 이들은 소련에서 만주로 넘어 온 강국모(姜國模) 부대와 손을 잡고 공동전선을 구축하였으며, 뚱닝현 지역 기독교 단체들의 호응을 얻어 전선에 가담시켰을 뿐만 아니라 뚱닝현과 불야구 지방의 한인 청년들을 대거 모집하였다.
1933년 1월, 최후의 거점인 뚱닝현으로 일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원종 교도의 부대와 길림구국군은 격렬히 싸웠다. 그러나 전선이 붕괴되어 길림구국군은 극도의 혼란 속에 만소국경 밀림지대로 총퇴각하였고, 원종 부대는 노흑산 방면으로 퇴각하던 중 일부가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한편, 1933년 2월 지청천(池靑天)이 이끄는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제14단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경박호(鏡泊湖) 전투에서 승리하고 동경성을 점령한 뒤 일본군·만주국군과의 일전을 준비하였다. 이때 지청천의 제의에 평소 비축했던 물자와 신골(申矻)·안태진(安泰振) 등 장병 제1진 50여 명을 보내주었다.
1933년 3월 이광(李光)이 이끄는 길림구국군의 공산군 부대가 어복촌에 나타났다. 길림구국군 내부에는 창군 초기부터 상당수의 한·중 공산주의자들이 침투해 있었다. 회유·협박하면서 자신들에게 협조할 것을 종용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의 지휘를 받는 자들이라며 끝내 거절하였다. 그 뒤에 들어온 이욱(李旭)이 이끄는 길림구국군에게 간부들과 함께 체포·감금되었다. 고문을 받으며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조직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지만 끝내 이를 거부하였다. 결국 1933년 3월 24일 죽임을 당하였다.
저술로는 『나의 40년』, 『천기대경(天機大經)』, 『대종원부경(大宗元符經)』, 『도경(道經)』, 『소래집(笑來集)』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