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로운 사람 요셉(마1:18-25)-2020.12.20
요셉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소식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소식 앞에서 요셉은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혔을까요? 자기 인생에 절체절명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당시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습은 정혼한 뒤에 일 년쯤 지나서 결혼을 하지요. 정혼하면 각자 자기 집에서 살다가 결혼하면 동거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혼도 결혼에 준하는 부부윤리를 요구합니다. 만일 정혼한 사람에게 부정함이 드러나면 결혼한 사람들과 똑같이 법적처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혼도 법적인 부부의 대의를 다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황당무계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 이것이 들통 나면 무슨 망신입니까!!! 둘 다 주변 사람들 부끄러워 어떻게 고개를 들고 살겠으며, 요셉은 부도덕한 마리아와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는 말씀이 주어졌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18절을 보면,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성령을 통하여 잉태된 것이 태안에서 발견되어졌다는 말입니다. 태안에 생명이 있었던 것이지요.
솔직히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하도 많이 들었고 배웠기에 어떤 거부감 없이 받아드려지지만 당시 요셉의 입장에서 성령잉태를 받아드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번도 성령으로 잉태함을 들어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의 실체도 알지 모르는 시대였으니까요. 참으로 요셉의 고뇌를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본 적이 없는 성령 잉태하심에 대하여 요셉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성경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19절).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운 사람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라거나 혹은 착하고 정직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의로운 자가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의로운 자라는 말이지요. 의로움의 기준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의로운 자라는 말이에요. 이른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자요, 하나님 나라의 의무를 감당하기에 충분한 자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말이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기에 적합한 자라는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짐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의 성품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지 못하면 아무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의로움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의로움을 두 가지 방편으로 나타내십니다. 하나는 율법을 통해서 나타내시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통해서 나타내시지요. 그것은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고, 복음에도 의가 들어 있다는 말씀이지요.
(1) 하나님은 당신의 의를 두 가지 방편으로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에도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당연히 율법도 하나님의 법이기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7장12절을 보십시오. 율법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레위기서18장5절은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율법도 지키면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산다는 것은 육신의 생명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인 생명을 두고 말씀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과연 천하 어떤 인간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은 선한 하나님의 계명이지만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습니다. 율법은 한두 가지 계명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모든 조항을 완전하게 다 지켜야 합니다. 만일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에 거치면 모든 율법을 깨뜨리는 것이에요.
예를 들어 백가지 율법의 계명 가운데 아흔아홉 가지를 다 지켰을지라도 한 가지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그 한 가지 계명으로 말미암아 모든 율법을 무너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야고보서2장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11절에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만일 당신이 간음은 하지 아니하였을지라도 살인을 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율법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도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서3장10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으로 인하여 의로워지는 사람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에요. 이른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이요, 영생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는 방법이지요. 성경은 그것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17절을 보겠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 나타난 의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율법에 나타난 의는 정죄하는 의요, 복음에 나타난 의는 구원하는 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죄하는 일에는 율법의 의가 옳고, 구원하는 일에는 복음에 나타난 의가 옳은 것입니다. 기능이 달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지키지도 못할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무능함과 부패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또 다른 은혜의 법을 통한 하나님의 의로움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기다린다는 말이에요. 복음을 통한 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로우심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의로움이 부어지는 것이에요. 오직 그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율법을 통해서는 당신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음을 아시고 다른 방법을 통한 의로우신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친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른바 천하 인간 중 아무도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길을 미리 준비해 두신 것이에요. 때문에 자기들의 열심과 수고를 통해 자발적으로는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은 또 다른 방편의 하나님의 의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고와 열심으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로움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은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철저히 자기붕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 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의 길을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 자기 붕괴를 겪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의로워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반드시 복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한 사람도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른바 복음을 통한 의로우심밖에는 없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 의로움은 어떤 의로움을 말하는 것일까요? 당시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감히 복음의 의를 주장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뜻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 집니다.
왜냐면 요셉이 자칭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했다면 당연히 율법의 의로움을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성경의 기자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는 것으로 볼 때 분명히 율법을 초월한 의로운 사람을 말씀하는 것일 겁니다. 무엇보다도 그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준비된 사람이었음을 볼 때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은혜였으니까요. 만일 요셉이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그는 율법에 충실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는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이고 싶었겠지요. 이유야 어떻든지 율법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법대로 처리해야 하니까요.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자고 고발하던 무리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율법에 있는 조항대로 충실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와서 돌로 쳐 죽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은 나름대로 율법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에요. 왜냐면 율법은 죽이는 일에 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고, 복음은 살리는 일에 의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요셉을 접근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는 언뜻 율법의 의로움을 가진 자처럼 보입니다. 왜냐면 그는 복음의 대한 의로움을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에게 당신의 의로우심을 입혀주신 것이지요. 이른바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로운 자로 인정해주신 것이에요. 때문에 요셉은 복음의 의를 아는 사람이요,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2) 요셉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복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율법의 의로 말하면 요셉은 마리아의 임신을 폭로해야 맞습니다. 이른바 저를 드러내야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율법에 충실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가만히 끊고자 했습니다. 소리소문내지 않고 가만히 정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다른 핑계거리를 찾아서 파혼을 결정했을 것이라는 말이지요. 마리아에게 치명적인 부정한 것을 폭로치 않고 다른 문제를 가지고 조용히 정리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최소한 마리아는 살릴 수 있잖아요. 솔직히 이것 역시 쉽지 않는 결정이었을 것이지요.
특별히 남자 편에서 이것을 결정하기는 보통 사람 이상의 인격을 가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정혼한 후에 파혼이라는 것이 양가 모두에 좋지 않는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이라는 것이에요. 율법의 의로움으로는 충분히 마리아를 부정한 여인으로 고발하여 매장시켜 버릴 수 있거든요. 마리아를 죽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런 방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기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아프지만 그는 율법의 방식으로 마리아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에요.
그는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의 방식으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율법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통한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요셉은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의 방식으로 마리아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에요. 율법을 초월한 의로움은 당연히 복음에 나타난 의로움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은 복음을 통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요셉이 자기 스스로 의로운 사람은 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복음의 방식은 은혜의 방식입니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선물입니다. 그 선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선물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가 입혀지면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님의 의롭다하심을 입으면 의로운 자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지 못하면 불의한 자가 됩니다. 불의는 의로움의 반대적인 개념으로 죄인을 말합니다. 때문에 의인은 하나님의 자녀요, 불의한 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입어야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어서 의인이라는 말이 아니라 여전히 죄 중에 거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죄 없다 하심을 받은 자라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의롭다하시면 의인이요, 죄인이라고 하시면 죄인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의인과 죄인의 기준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죄인이지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죄에서 씻음 받고 고침 받고 용서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단어는 법정 용어입니다. 어떤 사람도 스스로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의로우심은 여겨주시는 은혜입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으면 절대 의로운 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거룩한 통로로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받아드리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셉의 믿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의롭게 하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준비된 영혼이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자기 의로움으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무도 받아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히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받아들이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당시 성령역사를 의심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영적인 풍성함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어떤 의구심도 갖지 아니하고 순종함을 보십시오. 그는 순전하게 성령잉태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애당초 요셉은 율법으로는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요셉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쓸데없는 착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분명히 요셉은 복음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의로운 사람으로 지명된 사람이요, 준비된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당연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입니다. 왜냐면 율법을 가지고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많은 설득이 필요했을 것이지요. 그리고 요셉은 금식기도를 통해 자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요셉도 생각이 착잡했을 것입니다. 성경도 요셉이 이 일을 생각했다고 말씀합니다(20절). 그러나 그는 주의 사자의 현몽을 통해 ‘다윗의 자손 요셉아 내 아내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는 음성을 듣고 단번에 받아드린 것입니다. 솔직히 받아드리기가 쉬웠을까요? 역사적으로 한번도 성령으로 사람이 임신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 그런 사실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만일 한번이라도 그런 사례가 있었다면 받아드리기가 어렵지 않았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잉태는 누가 들어도 황당할 수밖에 없는 소리잖아요. 그런데 요셉은 의심없이 받아드린 것이에요.
믿음은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것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이성이나 지성, 감정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믿어지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요. 에베소서2장8-9절을 보십시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한마디로 요셉이 마리아의 임신을 성령잉태로 수용하는 믿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되어진 것이라는 거지요.
그렇다면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로움이 아니라, 복음으로 나타난 의로움이라는 것이에요. 이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요셉을 당신의 역사를 이룰 의로운 사람으로 준비하셨다는 말입니다.
(3) 하나님의 일군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우심을 입은 자입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데려왔습니다(24절). 다만 아들을 낳기까지는 동침치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톨릭에서 주장하는 마리아의 종신처녀설(평생동정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않았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고,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의 동생들이 출산되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지요.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입니다(마13:55). 성경은 그들이 목수의 아들이요, 모친은 마리아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우리는 마리아를 우상화시키려는 무모한 작업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서를 보면 기자들이 예수님의 모친 되는 마리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부친되는 요셉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마리아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직접 자기 태안으로 모셔드리는 축복의 주인공인 것은 분명합니다. 비록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지만. 하지만 요셉은 법적으로는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가 맞지만 실제적으로는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지요. 세상말로 피한방울 섟이지 않는 사람이지요. 그래서 성경에 요셉의 기사가 마리아의 기사보다 적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마리아를 찬양하거나 우상화 작업을 하는 것은 절대 안됩니다.
사실 요셉도 인간적인 모든 고뇌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가문의 영광스런 인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역할로 말하자면 요셉도 마리아 못지않게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지요. 어쩌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을 받아드리는 것보다 요셉이 받아드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마리아는 직접 자기 몸의 변화를 경험한 여인이잖아요.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스스로 체험했잖아요. 그런 차원으로 볼 때 마리아가 성령잉태를 받아드리는 것보다 요셉이 성령잉태를 수용하는 것이 훨씬 더 큰 믿음을 요구했을는지 모른다는 말이지요.
물론 하나님이 요셉을 의롭게 하사 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님이 요셉을 믿어주신 것이지요. 다만 우리는 요셉의 인격이 출중해서 하나님이 쓰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요셉으로 하여금 의로운 인격으로 조성하셔서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쓰시기로 예비된 영혼이었다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영혼이었던 겁니다. 20절을 보면, “...다윗의 자손 요셉아”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다윗의 혈통에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통로로 하나님이 요셉을 이미 준비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이로 볼 때 요셉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요셉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복음 안에서 나타난 의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되어진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요셉을 통하여 배울 점은 있습니다. 요셉은 너그러운 인품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맑은 영혼을 가진 자였다는 말이지요. 솔직히 맑은 영혼을 갖지 못하면 마리아의 임신을 가만히 끊고자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못된 인격을 가진 자라면 동네방네 떠들고 난리를 쳤을 것입니다. 혹은 음탕한 여인이라고 정죄했을는지 모릅니다. 심하게는 마리아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복수의 칼을 품고 살았을는지도 모르지요. 요즘같이 비상식적인 일들이 많은 세대에는 더욱 끔찍한 일들을 상상해 볼 수 있겠지요. 때문에 하나님의 쓰심에도 분명한 기준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물론 우리가 인격자이기에 쓰신다는 말은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 인격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요셉처럼 고상한 인격을 가지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훨씬 쉽고 편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쓰시는 것은 아니거든요.
요셉은 분명히 보통 사람들보다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자임이 확실합니다. 오늘날 인격 없는 사람들도 많고, 성숙하지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이 쓰실만한 인격을 갖추는 것도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요셉은 자기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에 따라 경건하게 살아가던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비록 율법일지라도 나름대로 신앙의 바탕이 잘 교육되고 훈련되어져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주의 사자의 현몽을 통해 성령잉태 사실이 통보되어도 의심없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요셉은 율법으로나마 잘 훈련되어진 인물이라는 거예요.
다만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비록 율법으로 교육을 받거나 훈련을 받을지라도 바르게 받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율법을 잘 공부하고 잘 훈련받으면 반드시 복음을 영접하기가 수월합니다. 아니 율법을 바르게 교육받고 훈련받으면 반드시 복음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주는 기능이고 학습효과이지요.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거에요. 그런데 율법을 잘못 공부하거나 잘못 훈련을 받으면 문제가 되지요. 한마디로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거예요.
한마디로 율법주의자는 율법을 잘못 배우고 훈련받은 것이지요. 하지만 율법은 배우면 배울수록, 알면 알수록 율법을 벗어버리고 복음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지요. 율법은 복음의 뿌리와 같아요. 율법을 모르면 복음을 알 수 없고, 율법으로 하지 않으면 복음을 영접할 수 없는 것이에요. 그런 차원에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율법도 잘 배우고 잘 훈련받아야 한다는 말이에요. 잘못 받으니까 사고를 치고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지요. 바르게 받으면 절대 율법을 통과해서 복음을 영접하게 됩니다. 그게 정상이에요.
아마도 요셉은 그동안 율법으로 바르게 양육을 받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때가 되어 복음이 주어짐으로 지체 없이 복음을 수용한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의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에요.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요셉이 먼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의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요셉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요셉을 의도적으로 칭찬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린 결론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사람인지라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히 깨닫고 요셉과 같이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위하여 쓰임 받는 일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