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미국의 게임기획자 제이슨 앨런(Jason M. Allen)이 ‘콜로라도 주립박람회’에 출품한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이란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다. 앨런이 선보인 이 작품은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이미지로 변환시켜주는 ‘미드저니’(Midjourney)라는 인공지능(AI) 프로그램으로 생성한 것이었다.
논란이 된 제이슨 앨런의 <스페이스 오페라 극장>
이에 대해 전문가들의 입장이 갈렸다. 붓질 한번 없이 제작한 그림을 예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쪽과 ‘기계 학습 시대’(machine learning Age)의 예술생산 도구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촉구하는 쪽이 충돌한 것이다.
미술사 연구는 문화의 시각적 산물을 연구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인공지능 예술은 우리 시대 미술사에서 그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그렇다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모든 예술이 자동으로 좋은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인공지능 그림들은 디지털 프린터로 출력하기 때문에 인쇄물의 속성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는 아직 초보 단계라고 위안 삼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는 사건이 일어났다. 네덜란드 은행이 기획한 <Next Rembrandt> 프로젝트에선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인물의 특징’을 생성한 렘브란트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였다.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렘브란트 자화상
프로젝트팀은 2D의 한계를 풀기 위해 캔버스, 레이어(Layer), 브러시 스트로크(Brush Stroke)의 세 가지 레이어를 결합시켰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기존 그림을 재현하도록 특별히 고안된 고급 맞춤형 3D 프린터를 이용하여 모두 13개 단계에 나누어 진짜 그림처럼 치밀한 채색과정을 거쳤다. 앞의 어설픔을 거뜬히 넘어서는 시도였다.
두 사례에서 보듯이 인공지능을 이용한 그림은 꿈이 현실화된 듯한 환상을 일으킨다. 이런 시도들은 “새롭다” 또는 “흥미롭다”라는 반응과 함께 과연 “그것도 예술인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인공지능 그림이 ‘예술’이 될 수 있을까?”라는 문제부터 논의해보자. 전통적인 예술의 개념으로 보면 예술은 제작자가 직접 미적, 예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얻은 결과물을 예술로 보았으나 이는 현대에 들어와 더 동의를 얻기 어렵게 되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레디메이드', 칼 안드레(Carl Andre)의 '오브제', 앤디 워홀(Andy Warhol)의 ‘브릴로박스’ 등 기존의 방식만으로는 예술을 정의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조지 디키(Jeorge Dickie)는 ‘예술제도론’(institutional theory of art)을 주장했는데, 즉 예술이 되려면 ‘인공품’이나 ‘자연물’을 어떤 물리적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예술가에 의해 선택되어 전시회라는 새로운 맥락에 놓이면 자격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물체가 감상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상의 후보’라는 잠재적 가능성을 얻게 되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개량된 주장을 펼쳤다. 이 주장은 작품의 성격과 특질보다는 분류적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인공지능 그림 역시 예술로 편입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지만, 작품의 내용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은 ‘반쪽’ 규정에 불과하다.
인공지능 그림이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형식적 요건의 차원이 아닌 심층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 중에 ‘생성형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utral Networks)을 이용한 기술이 있다. 이것은 생성자 신경망과 분류자 신경망이 서로 평가하고 경쟁하고 보완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한다. 이 행위는 마치 예술가가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을 자평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과정을 연상시킨다. 이 단계를 지나 등장한 기술이 ‘창의적 적대 신경망’(Creative Adversarial Neutral Networks)이다. 여기서는 앞서 말한 ‘생성적 적대 신경망’처럼 두 신경망이 서로 경쟁하게끔 만들어져 있되 ‘창의성’이 추가된다. 김정희에 따르면, “여기서 창의성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예술작품을 학습하여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예술작품이 아닌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나와 있다. 인공지능 그림이 화가의 그림처럼 ‘새로운 양식’ 및 ‘창의성’을 갖추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시도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만들 수 있지만, 예술을 의미 있게 하는 인간의 감정과 경험의 깊이와 사유가 결여되어 있다. 인공지능으로 생성된 그림이 알고리즘과 데이터 분석의 산물이라면, 인간의 예술작품은 그들의 상상력, 창의력 및 개인 표현의 산물이다. 거기에는 한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고 이해했으며 바라보고 있는지 압축되어 있다.
우리 눈앞에 두 유형의 그림이 있다고 치자. 하나는 인간의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이 생성한 그림이다. 두 그림은 외견상 아무런 차이도 없다. 오히려 인공지능 그림이 더 우수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가치판단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그림과 인공지능 그림의 차이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인간이 제작한 작품과 고도의 기술로 생성된 인공지능 그림은 본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미술품 감정가들이 진짜와 위작의 차이를 구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참고로 삼는 것이 있다. 그들은 원작자가 그렸나, 모작자가 그렸나가 작품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는다. 일단 진위가 가려지면 모작자의 그림은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인공신경망에 의한 인공지능 그림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다. 그것은 레퍼런스, 알고리즘,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통계 도표’와 같은 것이다. 인공지능 그림이 아무리 완벽해 보이더라도 그 한계를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 예술의 의미는 인간이 창조주의 창조성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을 때 상상력과 창조력을 선사 받은 인간의 작품인가 아닌가, 그 상상력과 창의성을 얼마나 선하고 아름답게 사용하는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