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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열방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랑기쁨
아내는 탈북자였다.
(글쓴이 : 강호)
그녀를 만나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북한의 대량 탈북이 시작 되였던 1997년 9월 중순 이였다.
하루는 밭일을 나갔다가 점심 식사하러 집에 들어와 보니 집에 미모의 처녀가 와 있었다. 집에 계시던 아버지께 물어보니 북한에서 중국 친척을 찾으려고 강을 건너온 사람이란다. 일반 탈북자에 비하여 그녀는 깔끔한 운동복 차림 이였고, 훤칠한 키에 얼굴도 너무나 예뻤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그녀가 찾는 사람이 고모와 사촌 오빠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중국이 어려웠을 당시 북한을 방문한 친척들에게 부모님들이 많은 방조를 해줬었기에 찾기만 하면 얼마간의 도움이라도 받을 수 있단다. 나는 그녀가 들고 온 주소로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사촌 오빠를 찾을 수 있게 되여 기쁜 심정으로 자동차에 그녀를 태우고 친척집 마을로 갔다. 마을에 도착하여 친척을 확인하려고 그녀를 차에 남겨둔 채 내가 먼저 오빠 집에 들어갔다. 그녀가 일러 준대로 찾아오게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하였더니 자기네 친척이 맞는단다. 연 며칠을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싶어서 {지금 밖의 자동차에 당신의 사촌동생이 타고 있다.} 고 말하며 그녀를 부르려고 몸을 일으켜 문을 열려는데 옆에 있던 사촌오빠의 안사람이 { 동생이 왔다고 해도 도무지 도와줄 형편도 못되니 나보고 적당히 둘러 대여 북한에 돌려보내 달란다. } 어이가 없었다. 혈육이라고 믿고 도움 좀 받으려고 사선을 헤치고 찾아온 친척인데 아무리 형편이 안 되더라도 집안에 불러들여 회포라도 나눠야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적당히 둘려 대여 돌려보내 달라는 그들의 처사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밖으로 나와서 그녀에게 일의 자초지종을 말해줬더니 군에서 갓 제대했다는 그녀 또한 자존심이 만만치 않다, {중국이 어려울 때 부모님들이 많이도 도와 줬건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는 도와준다고 해도 자기가 안 받는다 } 면서 그냥 돌아가잔다.
그렇게 여러 날 고생 고생하여 찾았던 친척은 그녀가 집안에 들어가는 것 마저 거부하여 수고가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끝났고, 다시 그녀를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온 날 저녁 그녀가 나보고 인민폐 2 백 원 만 꾸어 달란다. 돈이 왜 필요한가고 묻는 말에 그녀는 북한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쌀을 비롯한 필요한 생필품들을 사드리고 다시 들어와 일해서 갚겠단다. 극심한 기근 속에서 가족을 살려보겠다는 일념으로 처녀 몸으로 사선을 헤치고 중국의 친척을 찾아 나선 그 기특한 용기에 감동 되여 나는 돈을 주었고, 밤에 두만강을 건네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그녀는 약속대로 다시 강을 넘어서 왔고, 집에서 농사일을 돕고 있던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가을걷이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가을철에 필요한 농기구를 수리하고 있는데 옆에서 잔손질을 도와주던 그녀가 새물새물 웃으면서 {오빠는 애인이 있냐고 묻는다.} 아직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나의 대답에 {부지런하고 손재간이 있는, 오빠 같은 사람과 결혼하는 여자는 행복하겠단다.} 그럼 순이 씨가 나랑 결혼하면 되겠네요? 라는 나의 농담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힌다. 얼굴도 예쁘고, 더욱이 착한 마음씨에 이미 반해있던 나였지만 북한에서 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어찌 보면 그녀가 먼저 나한테 데시 하는 것 이였다. 하지만 부모님이나 형제들의 반대가 심할 것은 당연지사, 그리고 중국 정부에서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한 탈북자와 인생을 기약한다는 것은 참으로 많은 난관을 헤쳐가야 되는 일인 만큼 신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해가는 공안단속
탈북자와의 혼인을 허락할 수 없다는 부모님과 형제들을 어렵사리 설복하고, 그녀와 일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 하고나서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연선 마을들에서는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죽이고, 싸움을 하는 등 탈북자들이 관여된 여러 가지 형사안건 소식들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중국 공안의 본격적인 탈북자 단속이 시작 되였다.
97년 늦가을의 어느 날, 힘든 하루 일을 끝내고 막 잠자리에 들었는데 밖에서 개 짖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우리 집 쪽을 향하여 들려온다. 공안의 탈북자 단속을 직감한 나는 급한 대로 이불장에라도 들어가 몸을 피하라고 그녀에게 말하는데, 그러다 잡히면 탈북자임을 자인 하는 꼴이니 당당히 중국인인양 자는 척 하겠단다. 문이 열리더니 총을 꼬나든 변방부대 군인 대 여섯 명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구들에 올라와 집안의 여기저기를 수색한다. 물론 이불장도 예외일수가 없었다, 내 말대로 이불장에 숨었더라면 꼼짝없이 잡혔을 것이라는 생각 속에, 금방 잠에서 깨여난 듯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으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다짜고짜로 숨겨둔 탈북자를 내 놓으란다. 내가 우리 집엔 탈북자가 없다고 말하자, 군인은 옆에 누워있는 그녀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유심히 살펴보더니 누군가고 묻는다, 얼마 안 있으면 결혼할 나의 애인이라는 대답에 앞으로 탈북자들이 건너오면 바로 변방부대에 신고하란다, 천만 다행이다. 그녀에게 중국말만 시켰어도 꼼짝없이 잡혔을 건데 다행이도 위기를 모면한 것이다. 당시 다른 탈북자들과는 달리 유달리 머리를 길게 길렀었고 키가 163cm 나 되는 그녀를 탈북자 일거라고 생각지 못한 그 병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군인들이 집에서 나가자 그녀는 참고 참았던 긴 한숨을 내 쉬며 십년감수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단다. 그날 우리 마을에서는 탈북자 다섯 명이나 단속에 걸렸고, 결국 난핑 세관을 통하여 북송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공안이나 변방대의 탈북자 단속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거의 집집마다 한두 명꼴로 있던 탈북자들은 태반이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단속이 덜한 내지로 들어가 버렸고, 남아있는 탈북자들은 밭에서 일을 하다가도 도로에 공안 차량이 보이기만 하여도 일손을 놓고 몸을 숨겼다가는 차가 지나가고 나서야 다시 나와서 일을 해야 했다. 탈북자들의 이런 심리를 알아차린 변방부대에서도 국경 순라를 도는 척, 몇 명씩 조를 무어 도보로 연선을 돌아다니다가도 불시에 농민들이 일하는 밭에 뛰 여 들어와서는 탈북자 단속을 하였다. 밤에도 도무지 집에서 발편잠을 잘 수가 없어 집 부근에 비밀 땅굴을 파거나 산속에 초막을 치고 낮에는 공안의 눈을 피해가며 밭일을 하고 저녁이 되면 밥만 먹고는 은신처에 숨어 있어야 했다. 참으로 힘들었다. 탈북자는 불법 도강을 했기에 피신을 한다지만 여자인 그녀를 긴긴밤 밖에서 혼자 있게 할 수가 없었던 나는 항시 그녀와 같이 피신을 했어야 했다. 늦은 가을밤 밖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고도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절실히 느꼈다. 가을 밤하늘의 별을 보며 간신히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 보면 머리에는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다니는 공안의 탈북자 단속을 계속하여 모면한다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나는 탈북자를 일군으로 둔 몇몇 마을 사람들과 함께 당시 변방부대에서 간사로 근무 하던 친구를 찾아가 단속이 있을 때면 정보를 제공 받기로 하고 얼마간의 돈을 건넸다. 그 후 당분간은 파출소나 변방부대에서 단속을 나와도 우리가 먼저 정보를 알고 탈북자들을 피신시킬 수가 있어서 그런대로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가 있었고, 그렇게 97년은 별 탈 없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돈벌이에 혈안이 된 경찰들
1998년 봄, 그녀가 우리 집에 온지도 벌써 반년을 넘기고 있다. 5월의 어느 날 아침, 며칠 전 형님네가 새로 산 오토바이를 빌려 타고 시내에가 농약을 사가지고 돌아오던 중, 막, 마을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데 멀리 하얀색 승용차가 길옆에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다. 전날 내린 비 때문에 포장이 되지 않은 도로는 아침까지만 하여도 다니기가 괜찮았지만 그사이 여러 대의 차량들이 지나다닌 듯 땅에 바퀴 자리가 패일정도로 길이 질퍽하다. 행여 새 오토바이에 흙탕물이라도 튕길라 조심스레 승용차 옆을 지나려는데 어느새 차에서 내린 건장한 사내 몇 명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엉거주춤 오토바이를 멈추고 웬일이냐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중의 한 사내가 형사경찰대 명찰을 내 보이며 { x xx 너는 체포 되였어, }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내가 무엇 때문에 체포됐다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원인을 물어보니 상세한 것은 형사경찰대에 가서 조사받으라며 한명이 내 오토바이를 뺏어 타고 앞에서 달리고, 하얀색 승용차에 강제로 나를 태운다. 차안에는 이미 이들에게 붙들린 마을의 한 친구가 타고 있었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궁금했는데 원인 제공자가 있었던 것 이였다. 나는 차가 달리는 동안 내가 체포될만한 어떤 일을 했던 지를 꼼꼼히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농 망기 때 강을 넘어온 그녀를 비롯한 몇 명의 탈북자한테 일당을 주며 일을 시킨 것을 빼고는 아무것도 떠오르는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집에는 그녀가 있지 않는가?
이러저런 생각 속에 차는 어느새 형사경찰 대대에 도착하였고, 나는 사람들에게 끌려서 비 여 있는 한 방에 들어갔다. 탕 하고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더니 뚱뚱한 사람이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며 노실하면 관대하게 형벌이라도 줄여줄 수도 있으니 지금부터 네가 지은 죄를 모두 자백하란다. 무엇을 어떻게 자백하라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 죄도 지은 것이 없다는 내 말에 뚱보는 옆에 있던 두툼한 진술서 책을 가리키며 이안에 네가 국경연선에서 지은 죄목들이 가득하단다. 어이가 없다. 연길에서 회사에 출근하다가 부모님이 농사일을 도와달라고 해서 시골에 나온 지가 채 2년도 안되는데 내가 국경연선에서 책 하나를 무을 정도로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다고 무작정 몰아 부치다니, 공안들이 흔히 사용한다는 수문띄우기 {넘겨짚기}임을 짐작한 나는 죽어도 지은 죄가 없다고 잡아뗐다. 순간, 뚱보의 곰 발통 같은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하여 날아온다. 무의식간에 고개를 돌리며 피했더니 이번엔 피했다고 몇 명이 모여들어서 발로차고 주먹으로 때린다. 한참을 정신없이 구타하면서 강제로 자백을 받아내려던 경찰들은 어느 정도 맥이 진했는지 이런 악종은 처음 본다며 이번엔 오토바이를 무슨 돈으로 샀는지 말하란다. 형님네가 농사수입으로 구입한 것이라는 나의 대답에 어처구니없게도 {지금까지 조사해보니 당신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이 증명 되였단다. 하지만 형님이 오토바이를 어떤 돈으로 샀는지를 조사해야 하니깐 그때까지 오토바이는 몰수한다} 며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란다. 사람을 무작정 구타한 것이 조사였다며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뻔뻔스러운 경찰들이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농사일 때문에 북한 일군을 집에 두고 있는 나로서는 그들과 시시비비를 따질 수도 없는 노릇 이였으므로 형님네 오토바이만이라도 돌려달라고 했지만 그들은 형님이 내려와서 정당한 수입으로 구매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돌려줄 수 없다며 이번엔 오히려 내 존재가 귀찮다는 듯이 방에서 강제로 밀어낸다. 뭐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꼭 벌금을 받아내겠다는 속셈이다.
당시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공안기관들에서는 탈북자 단속을 자기들이 개인 주머니를 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연선 마을들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을 귀찮게 굴었다. 그러다가 가끔, 당지 공안기관과 맞다 들려서 영역 다툼을 하는 일도 자주 생기곤 하였다.
인생에 은인을 만나다.
시골에 사는 주제에 새 오토바이를 탔다는 이유로 형사경찰들에게 끌려가 반 주검이 되도록 얻어맞고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여기저기 매 맞은 상처들이 질근질근 아파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숭선, 남평 으로 갈라지는 3거리를 지나 오르막을 향하여 올라가는데 이젠 다리까지 후들거려서 더 이상 걷기조차 힘들다. 한참을 주저앉아 쉬면서 가끔씩 지나가는 차들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 보아도 초라한 내 꼴을 보고는 세워주는 차량도 없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걸으려고 일어서는데 멀리서 은빛색의 승용차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시도해볼 심산으로 이번엔 아예 길 가운데 들어서서 두 팔을 벌려서 차를 막았다. 찌~익 하고 제동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는 기사의 고함소리가 내 귀청을 찢는다. 차만 탈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에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던 기사는 나의 딱한 사정이야기를 듣더니만 "숭선 쪽에 가려면 이 길로 가는 것이 맞 냐" 고 목소리를 낮추며 묻는다. 처음으로 숭선 쪽에 가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내가 웃으면서 나를 태워주면 길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니 타라고 한다. 정말이지 살 것만 같았다. 내가 차문을 열고 뒤 좌석에 올라타고 보니 차안에는 이미 50대의 신사가 타고 있었다. 길을 가르쳐 주면서 기사님과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가끔 한마디씩 던지는 신사분의 말투가 왠지 남달랐다. 본인은 연별말투를 쓰느라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한국인임을 대번에 알아보았다. 당시 탈북자들에 대한 한국인들이 관심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는 차에서 내리면서 {혹시 탈북자들을 만나고 싶다면 아무 때라도 찾아오라}고 말하며 도로에서 집을 가르쳐주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후 내가 공안에 잡혔던 어처구니없던 상황을 형님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말해주었고. 비록 시골에 살지만 정부나 공안부문에서 한자리하는 동창생들이 많았던 형님은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며,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고 오토바이 찾으러 형사경찰대에 간단다.
그날 오후, 맞아서 아픈 몸 때문에 밭에 일도 못 나가고 집에 누워 쉬고 있는데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문을 열고 보니 오전에 나를 태워주셨던 기사님과 신사분이 문 앞에 서있다. 일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들리셨다며 매 맞은 곳은 괜찮냐며 물어보는 신사분의 손에는 과일꾸러미가 들려있다. 신세는 내가졌는데, 정말이지 송구스러웠다. 구들에 올라오신 두 사람은 내 몸의 상처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죄 없는 사람을 어찌 이렇게 때릴 수가 있냐며 혀를 끌끌 찬다. 나는 나 때문에 일도 못나가고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그녀를 그분들에게 소개시켜 드렸다. 신사 분은 한참을 그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참으로 남남북녀란 말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미인이라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고향을 떠나와 참으로 고생이 많다며 인민폐 8백 원을 그녀 손에 쥐여 준다. 하지만 난생 처음으로 한국 사람을 접하는 그녀는 극구 사양하며 내 눈치만 살핀다. 내가 받아도 괜찮다고 말해서야 고맙다며 겨우 돈을 받은 그녀는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을 북한에서 알면 처벌을 면할 수 없다며 그래도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에 신사 분은 매 맞은 데는 몸보신이 최고라며 닭이라도 사다가 영양 보충을 하라며 또 2백 원을 내놓으셨다. 그날 우리 마을 앞 두만강까지 구경하신 한국 신사 분은 몸 조리 잘하라는 말과 함께 기회가 되면 함께 찾아오라며 명함 장을 남기시고 떠나가셨다. 그분을 알게 된 것은 그 후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이 되었다.
도시로의 이주
99년 봄부터 북한의 식량난이 더욱더 심해지면서 또다시 연선 마을들엔 탈북자 수가 늘어났다. 이전에는 이삼십 대가 그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젠 7곱살 먹은 애로부터 시작하여 늙은이에 이르기까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어려운 사람들은 다 넘어오는가 싶을 정도다. 그만큼 북한의 힘든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시 탈북자들을 통하여 들은 바에 의하면 북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란다. 일일이 관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가마니 같은 것에 시체를 싸서 매장할 정도라고 했으니.....
3월의 어느 날 아침, 아침상을 차려놓고 식사를 하려는데 불현듯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그때 마침 화장실에 나갔던 그녀는 군인들한테 쫓기는 마을의 탈북자들과 맜다들게 되었고, 쫓아오는 군인들을 보고 놀란 나머지 무의식중에 도망가는 다른 탈북자들과 함께 무작정 뛰었다. 결국 얼마를 못가서 논밭에서 포위망에 든 그녀를 비롯한 탈북자들은 전부 잡혔고, 그날 우리 마을에서만 십여 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변방 대 차에 실려서 끌려갔다. 그녀가 잡혔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나는 자전거를 타고 향 소재지에 있는 변방부대에 가서 간사였던 친구를 찾아보았지만 그때 그는 이미 전근가고 없었다. 다른 간부들을 찾아서 사정을 해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 다발적으로 여러 마을들을 습격하다 보니 그날 오전에만 수십 명의 탈북자가 잡혔었고 변방 짬에는 그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하여 벌써 현성에 있는 변방지대로 이송을 하였다고 한다. 변방지대에 이송 되였으니 어쩔 수없이 중조 세관을 통하여 북송될 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결국 그녀가 북한에서 하루빨리 풀려나서 돌아오기만 기다리는 수밖에는 별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도강으로 다니는 탈북자를 통하여 그녀가 잡혔다는 소식을 무산에 있는 그녀 가족에 알렸고, 그들은 내가 보내준 돈과 그녀가 몸에 지니고 있던 돈으로 해당기관과 사업하여 다행이도 쉽게 풀려났고, 얼마 후 또다시 강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왔다. 당시 그녀는 만약에 있을 상황에 대비한다며 한국 신사분이 주었던 8백 원을 미화로 바꾼 후 비닐에 작게 말아서 항시 몸에 간직하고 있었는데 북송전날 몰래 삼켰었다고 한다. 북한에 북송된 후 기회를 보아 배변으로 나온 돈을 면담을 왔던 언니에게 건넬 수가 있었고, 그녀가 빨리 풀려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변방대나 공안 기관의 단속은 끝날 줄 모르고 점점 더 기세 사나왔다. 간혹 단속이 되었다가도 군관들에게 몇 천 원씩 현금을 주고 현장에서 구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일 년 농사 수입이 인민폐 만원도 될 가 말 가 했던 당시 엄청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가 아마 늦가을쯤으로 생각된다. 더는 이대로 연선에서 살수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와 토의하고 가을걷이가 끝나자 집에 있던 경운기에 쌀 몇 자루와 필요한 물건들을 싣고 이른 새벽에 연길로 떠났다. 그날은 날씨도 엄청 매서웠다. 추운 날씨 때문인지 도로에 설치된 탈북자 단속초소들은 텅텅 비어 있었고, 다행이도 무사통과를 할 수가 있었다. 위험 구간들을 지나서 투도시내에 진입하여 길거리 식당 옆에 차를 멈추고 식사를 하고 나오니 웬걸 경운기가 시동이 안 걸린다. 다행이 식당 옆이라 잠깐씩이라도 들어가 몸을 녹일 수 있으니 망정이지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한 시간 정도를 애쓴 끝에 수리가 끝나서 다시 출발할 수가 있었고, 거의 10여 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저녁 늦게 연길에 도착 하여 누님 네 집에 행장을 풀었고, 우리 두 사람의 몸은 얼대로 얼어서 거의 동태가 되기 직전 이였다. 그 후 우리는 누님 네 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지다가 부근에 자그마한 세집을 얻어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연길에서
연길은 30여만 명이 모여서 사는 조선족들의 수부 도시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던 시골보다는 모든 면에서 활력이 넘쳤다. 여기저기 상가들이 즐비하고 특히 노래방이나 안마방은 골목마다 있을 정도다. 인구가 많은 만큼, 시골에서처럼 한밤중 개 짖는 소리와 공안 차량들에 더 이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었고, 더욱이는 밖에서 잠을 자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길을 가다가 경찰을 마주쳐도 두렵지가 않단다. 탈북자 단속 때문에 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아야 했던 시골 생활에 비하여 우리의 연길 생활은 정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였다. 우리는 활력이 넘치는 2000년의 새해를 연길에서 시작하였다.
하지만 공안의 단속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대신 시골보다 몇 갑절 들어가는 생계비는 가득이나 형편이 어려웠던 우리에게 치명적 이였다.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만 했고, 급한 대로 얼마동안은 매형이 운전하는 여객버스에서 차장으로 일할 수 있었다. 아침이면 연길 서 시장에서 팔도 방향으로 가는 손님들을 목이 터져라 불러서 태우고 출발하면 종착역까지 가는데 1시간가량이 소요된다. 다시 돌아올 때도 같은 방법으로 연길방향으로 오는 사람을 태우고 서 시장까지 돌아온다. 꼭 같은 일을 하루에 5~6번 정도 반복 하고나면 목이 아프고 기운이 하나도 없지만 모든 것을 나만 믿고 따라주는 그녀를 생각하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만은 기뻤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깐, 어느 날 이른 아침, 습관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서 집에서 20여m 떨어진 공중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세수를 하고 있는데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엉겁결에 문을 열고 보니 형사경찰이 서있다. 가슴이 섬뜩한 순간이다. 한쪽에선 탈북자인 그녀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다, 침착해야 했다. {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고 } 중국어로 묻자 공작 증을 꺼내 보이던 경찰관이 이번엔 나의 신분증을 보여 달란다. 내가 옷걸이에 걸려있는 웃옷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찾아서 보여주자 누워있는 저 여인은 누군가고 물으며 그녀의 신분증도 보여 달란다. 당황함을 보여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나의 아내라고 말하며, 한국 수속 때문에 호적부를 비롯한 그녀의 모든 증명서류들이 여행사에 가 있다고 그럴듯하게 꾸며대자 시골에서 왔으면 될수록 빨리 짠쭈쩡 ( 임시거주 증 ) 을 만들라며, 별다른 말이 없다. 그리고 요즘 사천 쪽에서 나온 한족들이 부근 민가에 들어가 도둑질 하는 일이 많은데 외출할 때 문 단속을 잘하란다. 오늘 우리 집에 온 것도 화장실이 급하여 세수도 못하고 나갔던 내 모습이 사천의 한족같이 수상히 보여서 신분 확인 차 따라온 것이라며 웃는다. 경찰이 나간 후에도 그녀는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지도 모르고 잘만 자고 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새벽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니 얼굴이 백지장같이 변하면서 {이젠 경찰의 단속 같은 것은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라 기뻐했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하면서 무척이나 놀랜다. 나는 내가 일을 나간 후에는 누군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 하면서 오늘일은 나 때문에 생긴 일이니 앞으로 너무 걱정 말라고 그녀를 위안해 주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시골에 있는 친구 동생의 신분증을 빌려 가지고 지역 파출소에 가서 그녀의 임시거주 증을 만들 수 가 있었다.
그렇게 3개월간 연길에서 생활을 해보니 수입보다는 지출이 많았다. 누님 네도 영업이 잘 안 되였던지 버스를 다른 사람한테 팔았다. 그나마 생기던 수입원마저도 끊긴 상황이다. 당분간은 시골에서 가지고 들어온 돈으로 생계를 해결할 수 있으나 장구지책은 아니다. 나는 체면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며 명함 장을 주셨던 한국 사장님을 찾아가서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다.
첫 번째 시도
참으로 고마우신 신사분의 배려로 나는 그분이 경영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가 있었다. 한중 합자 침직 회사를 운영하시는 사장님은 혈육들이 모두 북한에 있는 관계로 탈북자 아내와 살고 있는 나를 특별히 배려해 주셨고, 나는 그곳에서 기계를 다루는 요령을 습득하여 기술자가 되었다, 손바느질 일감이 많은 침직 회사라 사장님은 직원들한테 말하여 아내한테도 일감을 주셨다. 덕분에 집에서 그녀가 바느질로 버는 수입은 거의 매달 오백 원 정도, 나의 노임 1500원을 합치면 우리 두 사람이 연길에서 살아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렇게 우리는 우연으로 만난 사장님의 배려 속에서 몇 년 동안은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낼 수가 있었고, 2001년 초여름, 우리한테는 사랑하는 아들도 태여 났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들을 볼 때면 가정의 소중함과 함께 행복을 느끼면서도 가끔가다 들려오는 탈북자들의 북송 소식은 항상 내 마음속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것은 탈북자인 아내가 혹시라도 경찰에 단속 되여 북송되는 경우 아들한테 상처로 돌아올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환상이 되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군 했기 때문 이였다. 많은 고심 끝에 나는 아내를 한국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대한민국에 가서 국적을 취득하여 탈북자가 아닌 합법적인 사람으로 당당히 아들 곁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엄마가 되게 하고 싶어서였다.
2003년 7월 나는 알고 지내던 교회 전도사님의 소개로 한국 입국에 성공하고 브로커 일을 하다는 한 철호 라는 사람을 만났고, 북경주재 한국 영사관에 안전하게 진입 시켜준다는 그를 믿고 아내를 북경에 들여보냈다. 하지만 10여일이 지나도록 들려오는 소식은 몇 번 정도 진입을 시도하려고 영사관 주변까지 갔지만 경비가 삼엄하여 돌아서 군 했다는 말뿐이다. 느낌이 썩 좋지 않음을 직감한 나는 아내한테 {돌아와 다른 방법을 찾자.}고 권유했다. 하지만 아내는 이미 떠난 걸음이니 좀만 더 기다려 보잔다. 며칠 뒤, 아내와의 전화연계가 안 된다. 혹여 진입에 성공하여 연계가 끊긴 것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전도사님한테 물어보니 자기도 연계가 안 된다며, 걱정 되여 죽을 지경이란다. 좋은 소식이 오기를 고대하며 기다리는 수밖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로부터 며칠 뒤, 오전 일을 마치고 피곤하여 잠깐 누웠는데 소르르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북한으로 가는 그녀를 바래준다며 택시를 타고 연선으로 나가고 있는데 소변이 마려워 차를 세웠다, 택시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던 순간 나는 눈에 들어온 광경에 놀라 소리를 질렀다. "승훈이 엄마야~ ~, 빨리 내려서 저기 좀 봐, 하늘에 용들이 있어," 남쪽하늘 뭉게구름들 속에서 형태가 분명한 예닐곱 마리의 청용들이 서로 뒤엉켜서 타래 치며 싸우고 있었다. 그처럼 선명하게 용들이 싸우는 모습을 본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구경을 마치고 다시 출발하려는데 이번엔 용들이 택시 바로 앞까지 내려와 우리의 갈 길을 막아선다, 택시는 아무리 가려고 해도 제자리에서 뱅뱅 맴돌 뿐 도저히 앞으로 나갈 줄 모른다.
한참을 꿈속에서 헤매던 나는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여났다. 나의 온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있었다. 전화기를 열어보니 모를 번호다. "여보세요?" 하는 나의 첫마디에 "쌘성, 칭원? "으로 시작된 그쪽 전화 내용은 대략 이렇다. x x x 가 네 씨펄이{와이프} 맞냐? 네 와이프를 비롯한 탈북자 16명이 중-몽 국경을 넘다가 내몽고 알 랜 이란 곳에서 전원이 변방부대에 잡혔고 지금 변방 대 구치소에 감금 되었다, 그런데 네 씨펄이 탈북자임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만약 네 와이프가 중국 사람이 틀림없다면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호적등본과 신분증 등본을 팩스로 넣어 달란다, 중국국적 소유자임이 증명된다면 어느 정도 벌금만 내면 구출할 수 있다며 팩스 번호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는다.
몽고에 가다
그녀는 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까? 참으로 기막히고 답답할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탈북자임을 인정하지 말고 중국인이라고 우기라고 시켜준 내 말을 그녀가 따라준 것이다.} 그녀를 구출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찾아볼 시간을 벌수 있는 현실이 오히려 고마울 뿐이다. 나는 그녀의 신분증명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다.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누구의 신분을 빌려야지 공안들을 믿을 수 있게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때 다시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는 내 사색을 중단시켰다. "승훈이 아빰까?" 그녀의 목소리다. 북경에 있을 때 돌아서라는 내 말만 들었더라도 오늘 같은 일은 생기지 않았을 거라며 잠시나마 그녀를 원망하던 내 마음과는 달리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앓지는 않았씀까? . . . . 속 많이 태워드려서 정말 미안 함다." 휴~우, 미안한줄 알면 잡히지나 말던가.
그녀는 군인들한테 사정을 하여 통화를 하게 되었다면서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영사관 진입을 결국 포기한 브로커가 몽고 국경을 넘는다며 길잡이를 해줄 조선족 노인네 한분을 데려오더니 인원을 두 조로 나누고 선발 조를 몽고에 보냈단다. 몽고 초원에 도착한 선발 조는 노인네가 이끄는 대로 초원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결국 양이나 말들이 멀리 도망가지 못하도록 설치한 목장용 철조망 십여 개를 넘고는 국경을 넘어선 것으로 착각하고 쉬고 있다가 이를 수상히 여긴 초목 민에 의해 변방부대에 신고 되여 잡히게 되었고, 북경에서 선발조의 소식만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몽고 변방대의 연락을 받은 북경 공안에 단속 되여 몽고까지 이송 되었단다. 그녀는 울먹이면서 승훈이 아빠가 시켜 준대로 임시거주 증에 있는 이름을 대고 중국인이라고 우기고 있다며 빨리 와서 구해달란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부랴부랴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고마운 친구와 그 동생의 도움으로 호적 등본과 신분증 등본을 손에 쥔 나는 부랴부랴 우체국에 달려가 팩스로 몽고공안에 부쳐주었고, 그로부터 두 시간 뒤, 다시 울리는 핸드폰을 받아보니, 당신 씨펄{와이프}의 신분이 증명 되였으니 벌금 1만 5천원을 가지고 와서 데려가란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뱉어진다. 구출에 실패했을 경우 아들애가 받을 상처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했던 나에게 참 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들애가 다니는 유치원에 전화하여 며칠 동안만 맡아달라고 부탁한 후 몽고에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먼저 친구들에게 부탁하여 부족한 돈을 마련하였고, 기차역에 가서 북경 행 기차표 두 장을 샀다. 그것은 이번 루트를 소개했던 자신이 미안하다며 함께 몽고까지 가주겠다고 선뜻이 나선 교회 전도사님의 부탁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다음날 북경에 도착한 우리는 몽고 우멍까지 가는 기차표를 마련해 놓고는 일의 상황을 좀 더 파악해볼 심산으로 중국공안에 체포된 브로커 남편을 구출한다며 한국에서 들어온 한 철호 씨의 와이프를 만나러 그녀가 묵고 있는 민박으로 갔다. 한 철호 씨의 와이프는 세 살 난 아들애를 데리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공안 측에서 브로커인 남편은 한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탈북자들과는 다른 지역에 감금하고 있으며 석방을 시키려면 많은 돈을 준비해야 한단다. 그녀는 급하게 돈이 필요 한만큼 자기가 직접 한국행을 바라는 탈북자를 모집한다며 나보고 몽고에서 와이프를 구출하면 이번엔 자기를 믿고 한국에 보내 보란다. 어이가 없다.
당신도 원래는 같은 탈북자로서 16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이 당신 남편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 북송될 위기에 처해있는 형편에서 남편을 구하겠다고 또다시 탈북자들을 상대로 승산도 없는 모험을 하겠다는 그녀가 왠지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고마운 간수소장님
기차로 우멍에 도착한 우리는 또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그녀가 구금되어 있는 얼랜을 향하여 떠났다. 가없이 펼쳐진 몽고초원은 참으로 넓기도 했다. 포장이 안 된 도로여서인지 택시는 꽁무니에 시뿌연 먼지를 일구며 다섯 시간을 달려서야 밤늦게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오전, 나는 가지고 간 돈 중에서 4천 2백 원만 꺼 내여 지갑에 넣고 나머지는 전도사님께 맡긴후 택시를 잡아타고 변방부대에 갔다. 변방부대에 도착하여 찾아온 이유를 말하자 한 군인이 간수소장 사무실로 나를 안내한다. 소장 사무실은 감방 바로 옆에 위치해 있었는데 마당에서는 열다섯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자기 동생인 듯한 대여섯 살짜리 아이와 함께 뛰 여 놀고 있었다. 생김으로 보아 당지 애들은 아닌 것 같았다. 군인에게 물으니 당신 씨펄이랑 같이 잡혀 들어온 애들인데 엄마는 감방 안에 있고 애들은 불쌍해서 밖에서 활동을 시킨다고 했다. 북송 후 발생할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하여서는 전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애들은 그저 신나게만 놀고 있다. 그때, 감방 철창사이로 몇 명의 아주머니들이 얼굴을 드러내며 나를 부른다. "아저씨, 누구 데리러 왔슴까? " 내가 와이프의 이름을 대자 승훈이 엄마는 정말 좋겠다며 이곳에서 나가면 자기들 집에 소식 좀 전해달란다.
간수소장 사무실에는 통역하는 아가씨를 비롯하여 몇 명의 군인들이 있었다. 그중 몸집 좋은 사람에게 나를 데리고 간 경비병은 이분이 간수소장이라고 일러주고는 나가 버린다.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어딘가 전화를 하던 소장은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라며 먼저 와이프 얼굴이라도 보라고 사람을 시켜서 그녀를 데려왔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그녀는 얼굴이 많이 수척해 있었다. 와이프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어깨에 몇 개의 별을 박은 변방부대 대대장이라는 사람이 들어왔다. 간수소장은 비교도 안될 만큼 뚱뚱한 사람이다. 와이프를 감방에 돌려보내고 나서 대대장은 가지고온 벌금을 내놓으란다. 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당신들이 요구하는 액수만큼 준비를 못했다며 지갑을 털어 4200원을 건네자 대대장은 자기들이 요구한 액수에서 단 한 푼이라도 골면 사람을 석방할 수 없다며 내가 메고 간 배낭에 돈을 쑤셔 넣더니 밖에다 홱 던져버리며 돌아가란다. 사정을 해봐도 아무 쓸모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여관에 있는 전도사님한테 가서 모자라는 부분을 가지고 와야겠다는 생각에 사무실을 나와서 한참을 걷고 있는데 뒤에서 간수소장이 급하게 쫓아오며 부른다. {아무리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그냥 돌아가면 와이프는 어떻게 할 것이냐? 좀 더 사정이라도 해 봤어야지,} 하며 나를 나무라던 소장은 자기가 들어가 대대장과 말해보겠다며 돈을 달랜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놀랍게도 소장이 와이프를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당신 씨펄이 탈북자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당신이 능력이 좋아 신분을 증명할 수 있게 서류들을 보내온 만큼 나도 도와주고 싶다. 두 사람 사이에 귀여운 아이도 있다는데 돌아가면 다시는 이런 위험한 시도는 하지 말고 꼭 행복하게 잘 살아라 } 며 소장은 한족인 대대장과 달리 자기는 몽고족인데 조선족과 몽고족은 예로부터 우애가 깊은 사이라며 갈 때 차비에 보태라고 2백 원을 내손에 쥐여 준다. 앞뒤 집 사이도 서로 몰라라 하며 살아가는 지금 세월에 예전에 가까웠던 민족이라며 자기 일처럼 발 벗고 도움을 주는 이분이 나는 너무나 고마웠다.
고마움의 표시로 나는 그분에게 드릴 담배 몇 보루와 마당에서 뛰어놀던 북한 아이들에게 줄 식품을 샀다. 와이프만 구출하여 데리고 가기엔 썩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나는 소장에게 담배를 건네며 부식품만은 꼭 내 손으로 북한 애들에게 전해주고 싶다고 사정을 했다.
한국 영사를 만나다.
그렇게 나는 인민폐 4천원으로 그녀를 구출하고 전도사님이랑 연길로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와서도 몽골 변방부대 구류장 마당에서 뛰놀던 철부지 애들과 감방 창가에 매달려 부러운 듯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던 탈북자들 모습이 도무지 머릿속에서 잊혀 지지가 않는다.
결국 나는 북경에 있는 한국 영사관에 전화를 하기로 했다. 오 영사라는 분과 통화를 하면서 내몽고 변방부대에 감금되어 있는 15명 탈북자들의 사연을 설명하며 구출해줄 것을 요청했고, 영사는 자기들도 이미 알고 있는 일로써 노력은 해 보았으나 외교문제가 걸린 사안이라서 북송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단다. 그러면서 그는 당신은 와이프를 구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참견을 하냐고 덧붙인다. 한국 기도로 북송되면 처형까지도 받을 수 있는 북한의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중국과의 외교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영사의 목소리가 얄밉기 그지없다. 그 후 나는 며칠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는 영사를 귀찮게 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전화를 받던 영사가 {선생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만나보고 싶단다.} 와이프 구출에 성공한 나였지만 몽골변방부대에서 초조하게 북송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탈북자들에게 한줄기 도움이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음날 나는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택시를 탔을 때, 한국과 북한을 동일 국가로 생각했던 택시기사가 한국영사관으로 가달라는 나를 북한 영사관 앞에 내려놓아 당황했던 기억이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아무튼 한국 영사관 앞에 도착하여 영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정문을 바라보니 참으로 가관이다. 영사관 정문을 지키는 중국 보안대에서는 골칫거리인 탈북자들의 영사관 진입을 막아볼 심산으로 정문에 십여 미터 정도의 갈지자 모양의 오불꼬불한 통로를 만들어서 영사관에 일보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그곳을 통과 하면서 신분확인을 받게끔 만들었고, 영사관 담 벽 위에는 얼기설기 철조망이 설치 되여 있었다.
한참 후 사십대 중반의 건장한 사나이가 영사관 작은 철문을 열고 나한테로 왔다. 오영사라며 자기소개를 한 그는 나를 데리고 영사관 옆에 있는 인공 늪으로 간다. 그곳에서 거닐며 나는 와이프를 구출하게 된 경위와 몽고에 남아있는 탈북자들이 북송될 경우 일반 탈북자와는 비교도 안 될 엄벌을 받는다는 것 들을 루루이 설명하면서, 집을 떠나기 전 와이프가 영사님 앞으로 쓴 편지를 전했다. 처음에 영사님은 돈 봉투를 건네는 줄 알고 받기를 거부했다. 내가 봉투에서 속지를 꺼내 보이며 [이번에 구출된 나의 와이프가 몽고에 남아있는 탈북자들을 대신하여 쓴 영사님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입니다. ] 고 말해서야 영사는 편지를 받아서 읽어본다. 세장이나 되는 편지를 다 읽은 영사는 마치 감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탈북자들을 눈앞에 보는 것만 같다며 가슴이 아프단다. 하지만 브로커는 한국국적 취득자인 만큼 영사관에서 나서서 북송되지 않게 해줄 수 있으나 탈북자들은 중국정부에서 난민으로 인정을 하지 않는 한 영사관에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부분이 아니란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탈북자들에게 집단난민촌을 만들어 주거나, 영주권을 부여하는 문제들을 중국정부와 협의 중에 있는데 늦어도 2년 안으로는 일이 성사될 것이라며 다시는 와이프를 한국에 보내지 말란다.
영사님의 말대로 탈북자들이 지금처럼 외국공관에 진입하지 않아도 되고, 중국 공안에 단속 받을 필요도 없이 중국 땅에서 활개 치며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과연 올까? 몽고에 있는 탈북자들의 북송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는 것일까? 등, 등. 기차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은 온통 그런 생각뿐 이였다.
두 번째 시도
2004년 9월 중순, 교회 전도사님으로부터 탈북자들을 한국에 보내주는 정확한 단체를 알게 되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정착에 성공한 탈북자들이 꾸린 단체로서 지금까지 몇 번에 걸쳐 수많은 탈북자들을 영사관에 진입시키는데 성공한 조직이라나, 한국 영사님의 말만 믿고, 탈북자들이 난민지위를 인정받고 가슴 펴고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었던 나는 다시 한 번 더 와이프를 한국에 보내보기로 하였다.
이번엔 정확한 루트이니 믿어도 좋다는 전도사님의 말을 그대로 믿었던 나는 4살 난 아들애까지 딸려서 보내기로 생각하고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심양으로 갔고,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전도사님에게 그들을 인계하고는 급하게 연길에 돌아왔다.
당시 러시아 출장 일정이 잡혀있던 나는 다음날, 흙용 강성 수분 하를 거쳐서 러시아로 들어갔다. 수분하--우쑤리스크 행 열차는 국제열차여서 그런지 거의 기어가는 수준 이였다.
저녁 늦게야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호텔에 도착하여 행장을 풀고 하루의 긴 여독을 풀려고 자리에 누웠으나 몇 달 전 몽고 공안에서 있었던 일들이 눈앞에 생생히 떠오르며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번엔 아들애까지 딸려서 보냈으니 꼭 무사히 영사관 진입에 성공해야 할터인데....이런저런 생각으로 밤잠을 설치고 아침을 먹으려고 식당으로 갔지만 역시 마음이 불안하여 도무지 밥술을 뜰 수가 없다. 속 시원히 전화라도 해봐야지 안 되겠다. 긴 신호음에 이어 놀라지 말고 침착하라며 거의 저음상태로 들려오는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오히려 나를 긴장시킨다.
북경하고 전화연결이 안 되여 속을 태우던 전도사님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늘아침 KBS 뉴스를 보다가 북경 시교의 아파트에 은신 중이던 탈북자 60여명이 중국 공안에 단속 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며, 아마 이번에도 일이 잘못된 것 같다며 미안 해 한다. 순간,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전도사님과 어떻게 전화를 끓었는지도 모를 정도다. 오로지 머릿속에는 {공안에 붙들렸다면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는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는 생각뿐이다.
그로부터 이틀 뒤 불안한 마음에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중국에 있는 둘째 형님에게 전화를 하여 승훈이 엄마한테서 무슨 소식 온 것이 없냐고 물으니, 형님은 단통 {어떻게 바보처럼 그렇게 위험한 일에 아이까지 딸려 보낼 수 있었냐며 제정신이었냐}고 화부터 내신다. 사연인즉, 승훈이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북경에서 단속된 60 여 명의 탈북자들은 당일 밤중으로 단동 변방부대에 호송 되였고, 아이가 딸렸거나, 연세가 많은 노인네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 사람들이 다음날 바로 북송 되였단다, 승훈이 엄마는 승훈이가 중국국적 소유자라서 가족에서 아이 데리러 오면 그때 북송한다며 3일내에 들어와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아이까지 딸려서 북송시킨다고 하더란다. 네 살 밖에 안 되는 승훈이가 엄마와 함께 북송될 경우 중국 씨종자를 데리고 나왔다고 북한 보위부나 구류장에서 이간 이하의 천대를 받아야할 승훈이 엄마나. 승훈이에게 있어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타국에 있는 관계로 손 한번 못 써보고 그녀가 북송되는 것을 현실로 인정해야만 하는 내가 너무나 한탄스러웠다. 나는 형님에게 수고스러운 대로 전도사님과 같이 단동에 가서 승훈이 만이라도 데려와 달라고 부탁하며 혹시라도 승훈이 엄마와 면담이 된다면 북송 후 그 어떤 경우에도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말고 여차여차 해서 잡혔다고 말하라고 일러주고는 전화를 끓었다.
그 후, 8일간의 체류기간을 거의 8년 만 큼이나 길게 보내고 러시아를 떠나 연길 기차역을 나오니 둘째 형님이 승훈이를 데리고 마중 나와 있었다. 아빠를 만나서 반갑다며 뛰여 오던 승훈이가 순간 멈춰서더니 차렷 자세로 거수경례를 붙인다. 아들애의 돌발적인 행동에 의아해 하는 나를 보던 형님이 아빠 엄마를 잘 만난 덕분에 애가 변방부대에서 참 좋은걸 배웠더라며 단동에서 애를 데리고 나오는데 {이젠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이 자기는 어떻게 사냐며}승훈이가 많이도 울더란다. 4살 난 아들한테 내가 너무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그날 집에 간 나는 승훈이를 재워놓고 참으로 많이도 울었다. 와이프하나 안전하게 한국에 못 보내고 북송 당하게 만든 무능한 나를 원망하며 울었고, 엄마와 떨어진 4살 난 아들한테 미안해서 울고, 울고 또 울고 . . . . .
또 한 번의 구출작전
이번엔 중국이 아닌 북한을 상대로 또다시 그녀의 구출 작전을 세워야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하여 가까스로 북한에 있는 그녀 형제들에게 그녀의 북송 소식을 전해주고 신의주에서 무산에 이송 되는대로 될수록 빨리 손을 쓰라며 돈까지 보내주고는 이젠 구출할 수 있을 거라며 어느 정도 안심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형님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나를 놀래게 하였다. 평소 미국의 R FA 방송을 즐겨듣던 형님은 북한에서 이번에 북송된 60여명의 탈북자들을 생화무기 실험대상으로 한다는 소식을 어제 밤들었다며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냐며 안타까워한다.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 내 몸이 땅으로 잦아드는 느낌이다. 만약, 형님이 들은 방송이 사실일 경우 그녀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승훈이는 영영 엄마 없는 아이가 된다는 말이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란 아들이 {다른 집 탈북자 엄마들은 잘만 한국에 가서 가족을 데려다가 행복하게 사는데 아빠는 왜 엄마의 북송을 막지 못하고 죽게 내버려 두었냐?}고 물으면 그때는 뭐라고 대답한단 말인가, 그 생각을 하니 불현듯 머리가 어지러워지면서 까무러칠 것만 같다. 아이에게 하루라도 빨리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당당한 엄마를 만들어 주고 싶었던 내 조급함이 결국 그녀를 이 지경에 몰아넣은 것 이였다.
하지만, 그녀가 북송 되였다는 사실 외에 아직 아무것도 확인된 것이 없는 만큼 맥을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앞으로 아들애에게 덜 미안하려면 당장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할 형편인 나는 또다시 유치원에 아들애를 맡기고는 두만강 연선에 나갔고, 며칠 동안 친구 집에 머물면서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북한 경비대 군인과 사업한 끝에 두만강 가에서 그녀의 언니를 만나는데 성공 하였다. 언니는 내가 보낸 소식을 받고 동생이 무산에 이송 되여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나 아직도 소식이 없어 속이타서 죽겠다며, 와이프하나 제대로 못 건사하는 나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본다. 나는 준비했던 돈을 건네주며 동생이 그 어떤 경우에도 한국행을 시도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말아야 살아날 수 있으니 내 말을 꼭 동생에게 전해주라고 다시 한 번 부탁하였다.
그로부터 십여 일 뒤, 북한에 있는 그녀의 언니한테서 기쁜 소식이 날아왔다. {동생이 무산에 이송 되였으니 밥을 나르라}는 군 보위부의 통지를 받고 동생을 만날 수 있었는데 다 행이도 그녀가 한국 기도를 견결히 부인하여 정치범 수용소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단다. 앞으로 노동단련 대에 나온 후 사람을 찾아서 뒷돈을 쓰면 구출할 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킨다. 휴우~~ 또다시 긴 한숨, 그녀를 구출할 수 있다는 언니의 그 말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미국의 RFA의 방송소식에 불안하던 마음에 어느 정도 평온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후, 간신히 보위부에서 풀려나고, 노동단련 대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그녀는 형제들이 불철주야 노력한 끝에 다행이도 풀려났다며 어느 날 전화가 왔다. "잘 있슴까? . . . .승훈이가 보고 싶어 죽겠슴다"며 시작된 그녀의 전화는 끝날 줄 모른다. 돈을 주기로 하고 힘들게 전화기를 빌려가지고 산에 올라와서 전화한다는 그녀는 하루라도 빨리 강을 넘어오고 싶으나 노동단련 대에서 풀려 난지 얼마 안 되다보니 주변의 감시가 엄청 심하다며 당분간은 움직이기 어려울 것 같단다. 아무려면 어쩌랴, 그녀를 조금 늦게 만나야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아쉽지만 그래도 살아서 승훈이 옆에 다시 올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어딘가? 나는 그녀에게 절대로 서뿔리 움직이느라 하지 말고 최대한 침착하라고 일러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뜻하지 않은 시련
그렇게 몇 개월간 두만강을 건널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가끔씩 전화하던 그녀는 2005년 7월에 드디어 무사히 강을 넘어서 연길에 들어왔고, 갈라졌던 우리가족은 10개월 만에야 다시 모일수가 있었다. 연길에서 승훈이를 끌어안고 슬피도 울던 그녀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북송당한 후 북한에서 아마 평생의 고생을 다 겪은 것 같다는 그녀는 다시는 한국에 가지 않겠다며 정색한다. 나도 더는 그런 모험을 시키면서까지 또다시 아내에게 한국행을 시도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그런 마음과는 달리 수시로 들이 닥치는 공안의 탈북자 단속은 중국 땅에서 우리를 시름 놓고 살수 없게 하였다.
한국행을 아예 포기하고 연길에서 살아갈 생각으로 아파트를 구입하고 집 장식을 하던 어느 날, 예전에 한국 삼촌을 찾을 때 나의 도움을 받았던 순철이라는 애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삼촌하고 연계가 안 되여 혼자 힘으로 찾아보려고 여기저기 수소문 하며 용정, 왕청, 연길 등지를 헤매며 다녔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라며, 있을 데가 없으니 도와달라는} 는 그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너무나 처량했다. 사실 심양에서 사업하는 한국 삼촌은 몇 번의 도움에도 자립을 못하고 계속해서 자기만 바라보는 북한 친척에게 질린 나머지 더 이상 도움을 주고 싶지 않다며 연락처를 바꿔버렸던 것이다. 사장의 부탁으로 새 전화번호를 가르쳐줄 수 없었던 나는 노천에서 고생할 그 애에게 미안했고, 그런 마음에 여관방이라도 안배해 줄 생각으로 약속장소에 나갔던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아도 벌써 나와 있어야할 그 순철 이는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해보니 몇 분만 기다리면 도착한다며 부근의 상점에 들어가서 기다려 달란다. 그 애에 대해 아무 의심도 없었던 나는 8월의 무더위를 식힐 생각으로 옆에 있는 개인 상점에서 음료수 한 병을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고, 얼마 후 그 애는 몇 명의 건장한 사내들을 달고 들어왔다. 미처 손을 써볼 새도 없이 상점 안에서 공안들에 의해 붙들린 나는 곧바로 주공안국 형사경찰대에 호송 되였다. 어떻게 자기를 도와 한국의 삼촌까지 찾아준 사람한테 이런 비굴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나이가 어리다고 해도 순철이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한참 후 형사경찰대 심문 실 철제의자에 강제로 앉혀진 내 손목과 발목엔 서슬 푸른 수갑이 채워졌고, 몇 명의 경찰들이 심문 석에 앉는다. 그중 한 경찰이 말한다." 당신이 지금 앉아있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아는가? 전문적으로 살인범만 앉는 곳이란 말이야. " {뭔가 잘못 걸려도 한참 잘못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순간, 나는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공안에서 아무리 잘못짚은 것이라도 살인에 관계된 일이라면 풀려나기까지는 엄청난 시련을 각오해야 될 듯싶었다.}
몇 번 정도 상냥한 말투로 왜 사람을 죽였냐며 물어보던 경찰들은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한결같은 내말에 구타를 시작한다. 구두 발에 채워서 철제 의자가 넘어지면 또다시 일으켜 세우고는 때린다. 주먹에 맞고 발에 채워서 이리저리 넘어 지다보니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수갑은 더 이상 조여들지도 않는다. 어찌나 맞았던지 여기 저기 시퍼렇게 멍이 들었고 바닥에는 핏 자국이 선명하다. 이러다가는 맞아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반 주검이 되도록 얻어터지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한 경찰이 누군지 모를 사회사람 두 명을 데리고 내 앞에 나타났다. 한참을 내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또다시 경찰을 따라서 나간다. {저 사람들의 행동은 무슨 뜻이지?}
그 후 한참동안 심문 실에 혼자 남겨진 나는 방금 전 들어왔던 두 명의 뜻 모를 행동에 대하여 분석해 보기 시작했다.{ 그렇지, 머리를 저었다는 것은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뜻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이 사건현장을 목격한 증인들일 것이다.} 다행이도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다시 잡혀온 아내
십여 분 뒤, 심문실문이 열리며 경찰관 한명이 나한테로 오더니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수갑을 벗겨준다. 수갑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꽉 조여 있던 손목과 발목은 피가 통하며 팅팅 부어오른다. 어떤 종류의 살인 안건인지는 모르나 그나마 현장에 증인이 있었다는 것에 오히려 내가 고마운 현실이다. 경찰관은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미안했다고 나를 위로해 준다.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흥안 촌인가 하는 곳에서 순철이를 비롯한 탈북자 세 명이 주민 집에 뛰여 들어 돈을 강탈하다가 이를 거절한 주인을 살해 했는데 두 명은 도주를 하고 순철이만 잡혔단다. 동범 자를 추궁하던 경찰들은 순철이를 심문하던 중, 순철이의 핸드폰을 조회 하다가 내 번호를 알게 되었고, 이들은 내가 탈북자들과 같이 사람을 죽인 것으로 오인했다는 것이다.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콧등을 깬다더니 내가 그 꼴이다. 그런데 이때 또다시 심문실 문이 열리더니 생각밖에도 승훈이 엄마가 경찰한테 밀려서 들어온다. 아~~아 미칠 지경이다.
다행이 풀려나는가 싶었는데 이건 또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순철이를 통하여 와이프가 탈북자란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경찰들은 몰수했던 나의 신분증에서 우리 집 주소를 알게 되었고, 내가 살인 사건에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벌금이라도 받아낼 심산으로 와이프를 연행해왔던 것이다. 정말이지 그런 경찰들이 비열해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그날 나는 벌금 만 오천 원을 내고서야 와이프를 데리고 집에 올수가 있었다. 이미 집 주소까지 알게 된 공안에서는 탈북자 단속이 있을 때마다 찾아와서는 눈을 감아주는 대신 벌금을 내라는 일들이 그 후에도 수차례나 있었다.
경찰들한테 이런 형식으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던지 어느 날 와이프는 또다시 한국행을 시도해 보겠단다.
결국 나는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한국행에 성공한 한 탈북자와 전화통화를 하여 믿을만한 브로커를 소개 받았고 2006년 가을에 아내가 무사히 몽고국경을 넘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끝
첫댓글 전도사님 안녕하세요?^^다음에 글 올리실때에는 글자크기가 좀 컸으면 더 좋겠습니다.나이를 먹으니 작은 글 읽기가...^^*전도사님을 위하여 늘 기도합니다.마라나타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눈물없이는 읽을수없는 글입니다.
무사히 한국에 오셔서 잘 지내고 계시겠죠? 북한동포들과 탈북자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읽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또 나의 삶이 감사하기도 하고요...
꼭 한국에 오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아 그래도 성공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한국에서 평안히 잘 지내는 제가 해야 할 일이 뭘까 생각하게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감사 하네요....순간 순간 주님의 인도로 편히 살게됌을 ~ 감사 합니다..감사합니다
좋은 간증 너무 감사합니다..덕분에 탈북자 동지들의 북한내 상황이 피부에 와닿게 어떤지 알게 되었습니다...너무나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