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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기타 인문과학)의 영역 |
신학의 영역 |
이성의 (자연적) 빛에 의존하기에 인간의 이성으로써 알게 된 원리들을 사용. (물론 신의 자연적인 협력을 따르지만) 인간의 추리의 성과로서 결론을 내린다. |
은총의 빛에 의존한다. 신학자는 그의 이성을 확실히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 원리들을 권위나 신앙에 의해서 받아들인다. |
신의 존재와 그 세계창조 및 세계 내 제법칙과 사실은 철학의 대상으로 이성의 빛에 의해 충분히 탐구할 수 있다. |
그리스도교적 신앙이 안고 있는 본래의 신비, 즉 삼위일체설, 육화, 부활, 최종 심판과 같은 초자연적 진리는 철학적 탐구 영역에 속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은총에 빛에 의해서만 계시될 것으로 본다 |
하나의 정돈된 현실영역이 존재하며 우리는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토마스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
오직 신적 계시의 내용으로 삼고서 믿음을 통하여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 되는 것이다. |
철학자는 피조물로부터 신으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논증해야 한다. |
신학자는 우선 신이 그 자신을 계시하여 보여준 신의 관념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기에 신학에서의 자연적인 방법은 신 자신으로부터 피조물로 진행하는 것이다. |
철학자가 이해하는 원리들은 오로지 이성에만 의거한 것이고, 그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들도 이성의 자연적 빛으로써 이해할 수 있고 이해된 것이라는 점이다. |
신학자가 받아들이는 원리들은 계시된 것이고, 그가 고려하고 있는 대상들도 계시된 것이거나 또는 계시된 것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
이처럼 그는 철학과 신학의 고유한 영역을 구분하여 각각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것을 단순히 옆으로 배열된 연관성 없는 학문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 내에서 완성시키는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다. 그의 방향성은 다음의 명제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주는 은총은 피조물들이 지니고 있는 본성을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키는 것이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토마스는 은총과 자연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 원리를 이용해서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 더 나아가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지배하는 원리를 설명한다. 토마스가 자주 강조했듯이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는 두 개의 다른 진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계시와 철학
적 진리는 상호 경쟁적이지 않으며, 상호 보완적일 뿐이다. 그들 중 하나가 강화된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약화되기는커녕, 그 발전의 도움을 통해서 더욱 충만해 진다.
일차적으로 신학자인 토마스는 자신의 신학에서 이성이 지닌 가능성들을 사용하지만, 삼위일체론과 창조론, 그리스도론 등에서는 이성에게 명확한 한계를 설정한다. 그에 따르면 철학적 진리는 인간의 구원필요성의 관점에서 볼 때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한 진리만을 드러내기 때문에 전체적이고 궁극적인 진리인 그리스도교의 계시에 의해 보완되고 완성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매우 자주 인용함에도 불구하고 토마스에게서는 그 내용이 자주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형은 신학적인 관심에서 이루어진 수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핵심부에까지 다다른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질적인 규정, 그 특수한 작용과 가지성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 즉 그 내적인 형상이 수동적인 요소가 된다. 이 형상은 신의 창조적인 작용으로서 모든 유한자에게서 나타나는 존재와의 관계성에서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토마스는 이러한 자세를 견지하며 계시된 진리와 이성의 진리가 이분화된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될 때 등장하는 이성적 이해를 간과하는 신앙주의와 궁극적 진리를 거부하는 독단적 이성주의 모두를 극복하기 위한 초석을 놓았다. 『신학대전』의 나머지 610개 문제에서는 매우 개방적이면서도 진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러한 노력이 대단히 훌륭하게 집대성되어 있다.
신 존재의 증명
이 방대한 내용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그의 이름과 함께 항상 따라다니는 소위 "신 존재 증명"(다섯 가지 길, 『신학대전』제I부, 제2문제, 제3절)이다. 토마스는 제2문제에서 두 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그는 우선 우리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1절과 2절), 두 번째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다(3절).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가능성에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오류가 있다. 첫 번째 오류는 그 믿음이 "너무 강해서", 신의 실존이 그 자체로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자명한 진리라고 믿는 것이다.(1절) 두 번째 오류는 그 믿음이 "너무 약해서"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것은 우리가 신을 인식할 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는 이 두 가지 서로 상반된 의견들 사이에서 그 가운데를 취하여 "신이 존재한다"라는 문장이 그 자체로는 자명한 것이나 우리에게 있어서는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1절) 이곳에서 토마스는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존재증명'도 신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보았다고 판단해서 이를 비판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반드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밝힌다. 물론 신보다 먼저 존재하는 원인을 찾아내, 그 원인으로부터 결과(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신이 만들어낸 결과를 인식한 후에 이성적인 추론을 거쳐 원인의 존재를 확인하는 경험적인 방법으로는 가능하다. 바로 이 경험적인 증명이 제3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토마스는 신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 주는 첫 번째 사실을 세계 속에서 체험 가능한 운동 변화에서 찾고 있다. 첫째 길의 논증 구조가 다른 길에서도 반복되고 있으니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이며 매우 명백한 길은 운동변화에서 취해지는 길이다.
가. (1) 이 세계 안에는 어떤 것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확실하며 또 그 사실은 감각으로 확인된다.
나.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진다.
가) (2-A-1') 사실 어떤 것도 그것을 향해 움직여지는 것에 대해 가능 상태에 있지 않는 한 움직여 질 수 없다.
나) (2-A-1'') 움직여 주는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 있는 한 움직여 준다.
1) (2-A-1) = 즉 움직인다는 것은 어떤 것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시켜가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2) (2-A-2) 그런데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끌어 가는 것은 현실태에 있는 어떤 존재자에 의하지 않으면 될 수 없다.
가) (+) 그러나 같은 것이 같은 관점에서 동시에 현실태에 있으며 가능태에 있을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은 다른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3) (2-A-3) 따라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2-A)]
다.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라. (2-Bb)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
1) (2-Bb+) 그 이유는, [만일 움직이는 것의 무한한 소급이 인정된다면] 어떤 첫 움직이게 하는 자가 없게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떠한 다른 움직여 주는 자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 (3)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지만, 첫 움직이게 하는 자(第一動者)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토마스는 (1)에서 이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즉 운동변화를 발견한다고 말하는 데, 이는 장소적인 이동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을 일반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수한 운동들을 장소의 이동, 양의 증가와 감소, 성질의 변화, 실체의 변화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모든 운동은 어떤 것이 될 수 있는 가능태로부터 그 운동의 목적이 이루어진 현실태에 도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2-A) 그런데 움직이는 모든 것은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진다."라는 표현을 통해 토마스는 움직이는 모든 것은 운동의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인과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원인이 움직여지는 것 자체와는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캠프파이어를 위해 쌓여 있는 장작더미를 생각해 보자. 불에 탈 수 있는 나무는, 현실적으로 뜨거운 불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타고 있는 나무가 될 수 있다. 그 나무는 타기 전에는 불에 탈 수 있는 가능태이고, 타고 있다면 불에 타는 현실태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가능태이며 현실태일 수는 없다. 따라서 나무 장작이 쌓여 있는 가능상태에서 직접 현실태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무와는 다른 현실적인 불에 의해서만 장작더미들은 불에 탈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2-Ba) 그러므로 어떤 것이 그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그것이 움직인다면 그것 또한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하며 그것은 또 다른 것한테서 움직여져야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여기서 증명의 두 번째 부분인 "(2-Bb)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소급해 갈 수는 없다."고 덧붙인다. 우리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 Z를 Y가 움직이게 했고, 또 Y를 X가 움직이게 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올라 갈 경우 Z→Y→X→[…]→C→B→A와 같은 연속적인 계열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A를 첫 움직이게 하는 자(제1동자)라고 생각하면 B부터 Y까지는 모두 다른 것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따라서 다른 것을 움직이는 중간 동자(토마스의 표현에 따르면 제2동자)이다. 그러나 제1동자 A가 없다고 가정하면 B가 움직일 수 없고, 그렇다면 C도 움직여지지 않음으로써 그 이하의 모든 중간 동자와 최종적으로 움직여지는 Z까지 움직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무한 계열로 소급된다는 말은 제1동자가 없다는 말이므로 이 세계에는 움직이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대전제 (1)과 모순이 되므로 허용될 수 없다. 이렇게 해서 (3) "우리는 다른 어떤 것한테도 움직여지지 않지만, 첫 움직이게 하는 자(第一動者)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따르면 이 "부동의 제1동자"는 다른 것으로는 변화되지 않고, 모든 것을 움직여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가능태도 포함하고 있지 않는 순수 현실태이다. 토마스는 모든 사람이 이를 "신"이라고 이해한다는 설명을 부가함으로써 증명을 완성한다. 둘째 길과 셋째 길은 첫째 길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둘째 길에서는 움직이는 것이라는 일반적인 개념 대신에 능동인의 질서와 계열이라는 개념이 사용된다. (1) 우리는 이 세계 안에 수많은 능동인의 질서를 경험한다. 예컨대 아들은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받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존재도 할아버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첫째 길과의 차이점은 아들이 출생하는 "운동 변화"를 직접 보지 않더라도, 아들의 존재로부터 그 아들을 낳는 데 작용한 부모라는 원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자신이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닌 것처럼 (2-A) 이런 세계에서 어떤 것이 자기 자신의 능동인으로 발견되지도 않으며 또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2-B) 그런데 능동인들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할 수는 없다. 이 주장은 첫째 길에서의 운동을 원인으로만 바꾸어 놓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제1능동인을 인정해야 하며, (3') 이런 존재를 모든 사람은 신이라 부른다. 셋째 길은 (1) 우리가 사물 세계에서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생성소멸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경험적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전문적인 용어로 우연유(偶然有)라고 부르는 이 모든 것은 항상 존재할 수 없으며 어떤 때는 없는 것이다. 여기서 토마스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면 어떤 때에는 사물계에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들여온다. 모든 우연유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존재의 원인을 자신이 갖지 못하고 다른 어떤 것에 의해서 존재를 부여 받는 것(타자의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가 모두 우연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하면, 우연유는 스스로 존재할 수는 없으므로 사물계에 아무 것도 없었던 바로 그 순간 이후에는 어떤 것도 존재하기를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까지도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허위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가 우연유일 수만은 없고 어떤 필연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2) 그런데 모든 필연적인 것은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거나 혹은 갖지 않을 것이다. (2') 그런데 그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는 필연적인 것들의 계열에 있어서 무한히 소급되어 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벌써 능동인의 경우에서 증명된 바이다. (3) 따라서 우리는 자기 필연성의 원인을 다른 데에 갖지 않고 다른 것들에게 필연성의 원인이 되는 어떤 것, 즉 '그 자체로 필연적인 어떤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토마스는 '자체 필연유'를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첫째부터 셋째 길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토대로 신을 증명하고자 한 유대철학자 모세스 마이모니데스가 정리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후대 학자들은 이를 "우주론적인 증명"이라고 불렀다. 넷째 길은 사물들에게 다양한 정도로 존재하고 있는 특정한 속성들, 즉 선함, 참됨, 고상함 등으로부터 출발한다. (1) 우선 선함과 착함과 같은 (초월적) 속성들을 지니고 있는 사물들이 최고도로 있는 어떤 것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확정하고 있다. 이것과의 멀거나 가까운 정도에 따라서 그 속성들이 지니는 단계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최고의 것은 바로 그 속성들이 최고로 높은 단계로 그것에 속하는 존재자이고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존재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 그 다음에 그 최고도의 것이 자기에게 연관을 맺고 있는 속성들, 그러므로 그 존재의 측면에서 그 사물의 원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3) 결론적으로 그 최고도의 것이 세상 사물들의 최고의 존재 원인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 증명은 안셀무스의 『모놀로기온』에 나오는 세 번째 증명을 빌려온 것인데, 그 증명은 신플라톤주의적인 위계 질서에 근거한 것이었다. 다섯째 길은 즉 (1) 우리의 이성에 의해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에는 이성이 결여된 사물들이 목적에 알맞게 행동하고 있는 것을 경험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런 것은 자연사물들이 가장 좋은 것을 얻기 위해 항상 혹은 자주 같은 모양으로 작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우연에서가 아니라 어떤 의도에서부터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는 우주 안에서 매우 다양한 사물들이 그 자체의 선과 전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잘 조화 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례는 무식물계의 미소세계인 원자세계에서 광대한 천체계에 이르기까지 도처에서 볼 수 있으며 유기물의 세계인 식물계에서도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그뿐만 아니라 벌과 개미 등 동물의 습관과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신체구조계에서 이런 사례는 잘 나타난다. "(2) 그런데 인식을 갖지 않는 것들은 인식하며 깨닫는 어떤 존재에 의해 지휘되지 않으면 목적을 지향할 수가 없다. 이것은 마치 화살이 사수에 의해 지휘되는 것과 같다." 여기서는 목적인들을 이성에 부합하게 찾아 가는 행동들을 그 사물들을 초월하는 이성적인 원리와 연관 시킨다. 그것이 내재할 수도 있으리라는 또 다른 가능성은 그 사물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배제된다. "(3) 그러므로 모든 자연적 사물들을 목적에로 질서지어주는 어떤 이성적 존재가 있다. (3') 이런 존재를 우리는 신이라고 부른다." 이상에서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를 받아들여 구체적으로 실재하고 있는 사물들로부터 자신의 사고를 출발한다. 즉 세계 속에서 발견되는 운동 변화, 인과 관계, 우연적인 존재들, 완전성의 단계들, 목적인의 질서와 같은 사실들로부터 출발해서 제1동자, 제1원인, 필연적 존재, 최고 완전자, 최고 지성자 등의 개념에 도달하고 이를 신이라고 부른다. 즉 그는 실재하는 세계에서 출발하여 그 존재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 존재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탐구한다. 신존재 증명에서 더 나아가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과 가능태-현실태 이론을 더 깊은 근원까지 질문해 감으로써 존재와 본질의 구분에 도달했다. 우선 토마스는 이 구분을 통해 존재와 본질이 일치하는 필연적 존재인 신과 존재와 본질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우연적 존재인 피조물을 구별한다. 그 다음에 모든 존재 사물의 근거로서의 최고존재 혹은 자립적 존재자체(ipsum esse per se subsistens)를 탐구하는 데 자신의 온 힘을 기울인다. 그는 이 존재 자체에 대한 탐구를 그리스도교의 창조설과 연결시킴으로써 자신이 출발점으로 삼은 그리스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넘어선다. 즉 신이야 말로 각 사물에게 자신의 자유로운 창조를 통해서 존재를 부여하신 분이시다.
신에 대한 올바른 진술: 유비(analogia)개념
토마스는 전통으로부터 여러 개념을 받아들여 발전시켜 나갔지만, 그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개념 중의 하나는 '유비(analogia)'라는 개념이다. 유비란 한 단어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대상들에 관해서 완전히 꼭 같은 동일한 말뜻(一義的, univocatio)으로 언표되지 않고, 이름만 같고, 이름과 연결되어 있는 뜻이 완전히 다른 방식(多義的, aequivocatio)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중간적인 단어 사용방식을 의미한다.‘유비'의 어원을 이루는 희랍어 '아날로기아(ἀναλογία)'는 본래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개발되었던 수학적인 개념으로 셋 이상의 수의 관계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수학에서 사용되던 3항을 포함한 유비는 플라톤에 의해서 받아들여져 우주의 구성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유비가 학문적으로 발전하게 된 데 가장 크게 기여한 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에게서는 4항을 포함한 유비와 후대에 발전되게 될 다양한 형태의 근원이 발견된다. 그는 『범주론』첫 머리(Cat I,1)에서 동명동의어(일의성), 동명이의어(다의성), 파생어 등의 다양한 단어의 사용방식을 설명한다. 또한 『궤변론』의 한 부분에서는 다의성에 의해서 생겨날 수 있는 다양한 오류들을 관찰하는 가운데 ‘의도적인 다의성(aequivoca a consilio)’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Met IV,1-2)에서 '존재'라는 명칭이 일의적이거나 다의적으로 다양한 사물들에 사용되지 않고, ’하나와 관련된(pros-hen) 진술‘을 통해서 사용된다고 주장한다. 이 진술의 특징은 한 단어가 어떤 대상에게는 선차적으로 사용되고 다른 것들에게는 후차적으로 이 기본대상(제1유비자)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윤리학』(NE I,4)에서 교환정의와 분배정의를 설명할 때나 동물들의 관계를 설명할 때 비례적 유비(a:b ≒ c:d)라는 방식을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이 마지막의 비례적 유비만을 ‘아날로기아(ἀναλογία)’라고 불렀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의미가 점점 확장되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를 서방세계에 소개해 주었던 아랍의 철학자들 아비켄나, 알가젤리, 아베로에스 등에 의해서 서방 스콜라철학자들에게는 그 의미가 매우 넓어진 ‘유비’개념이 전수되었다. 중세에 들어와서 헤일즈의 알렉산더, 로저 베이컨 등 다양한 학자가 유비 개념을 사용했지만, 유비 개념에 학문적인 특별한 의의를 부여한 학자는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토마스는 아랍철학자들에 의해서 확장된 유비 개념, 즉 ‘하나와 관련된 진술’, 비례적 유비, 의도적인 다의성을 모두 포괄하는 넓은 의미로 유비개념을 사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 윤리학 분야에서 비례적 유비를 사용하는 것을 제외하면, 토마스 아퀴나스가 유비를 사용한 가장 중요한 분야는 하느님께 대한 진술이 어떻게 가능하며, 인간의 제한된 인식능력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에 의하면 피조물에게 사용하는 단어와 하느님께 사용하는 단어가 일의적이라면 하느님의 초월성이 위협을 받게되어 범신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만일 완전히 다의적이라면 하느님께 대해서 아무런 진술도 불가능해져 불가지론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토마스는 제3의 길로서 유비적인 방식이야말로 인간이 하느님께 대해서 올바로 진술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라고 제시했다.(STh I,13,5) 토마스는 계속해서 이 유비라는 진술방식에도 다양한 방식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끊임없이 더 적합한 방식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함을 강조했다.(STh I,13,6) 토마스의 전통을 따르는 많은 학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양한 저서에서 산발적으로 언급했던 내용들을 모아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토마스 자신은 유비 개념에 대한 저서를 저술하거나, 특정한 체계화에 노력한 적이 없지만 후대 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근거 정립을 위해 토마스가 즐겨 사용했던 분유(participatio)이론을 발전시켜 학설로 정립한 것이다. 이미 중세철학 융성기에 둔스 스코투스와 같은 학자가 존재의 유비성에 반대하여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한 바 있지만 존재의 유비이론은 토마스 사상을 추종하는 많은 학자에게 중요한 학문적 기반을 제공했다. 유비란 그 근원적인 의미에서 바라볼 때, 어떤 것을 인식하거나 형이상학적 근거를 찾는데 사용되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이라기보다 한 단어의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는 언어철학적인 개념이다. 유비개념은 바로 하느님께 대해 진술하고 학문적인 토론을 할 때, 인간의 언어가 지닌 근본적인 제약성을 지적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수단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시도한 바와 같이 언어의 제약성을 자각하면서도 그 부족한 점을 끊임없이 수정하면서 올바른 진술가능성을 새롭게 찾아나가려는 자세야말로 오랜 유비개념에 관한 토론의 역사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이다.
윤리학
토마스는 제II부에서 존재 자체로서의 신이 학문적 탐구뿐 아니라 인간 삶 전체의 목표라고 밝힌다. 모든 존재사물의 근원을 찾는 "제1철학 전체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신의 인식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신의 인식은 모든 인간 인식과 작용의 최종목적이다."(『대이교도대전』 III,25) 신의 인식은 단순히 지성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포괄하는 덕행의 실현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신학대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며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제II부에서만큼 "토마스가 자신의 체계화하는 재능을 빛나게 발휘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M. 바움가르트너) 그는 윤리학에서 특별히 풍부한 자료들을 손질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의 사상 중에서 그가 이용하지 않은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영역을 넘어서 그리스도교의 윤리와 그때까지 알려진 다른 사상가들의 윤리 사상마저 모두 포괄함으로써 “이 스콜라학자의 윤리학은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M. 비트만) 자신의 윤리학을 시작하며 인간의 최종 목적은 행복이라는 전통적인 통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개별적인 선은 의지를 일시적으로 만족시켜 줄 수는 있지만, 의지의 진정한 만족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복은 '보편적인 선'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보편적인 선이란 무엇인가? 토마스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선배학자들의 도움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최종 목적이 될 수 있는 후보들을 하나씩 검토한다. 우선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은 재물 속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재물은 단순히 목적에 대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편적 선은 필연적으로 궁극목적이기에 그 자체가 그보다 더한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감각적인 쾌락은 다만 육체를 만족시킬 뿐 전 인간을 완성하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것에 있을 수도 없다. 권력에 있을 수도 없다. 권력은 목적이라기보다는 원리이고, 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악을 위해서도 사용됨으로써 남용될 수 있는 것이기에 의지를 완전히 만족시키지도 못한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사변적 과학의 연구 속에도 있을 수 없다. 철학적 사변은 확실히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완전하게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자연적 지식은 감각적 경험에 유래한다. 그렇지만 사람은 궁극적 원인을 본래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열망하는데, 이것은 형이상학에 의해서 획득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토마스의 경우에는 완전한 행복 즉 궁극적 목적은 어떠한 피조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 즉 지복(至福)은 단지 우주의 근거이며 스스로가 최고의 무한한 선인 신의 본질을 직관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식과 사랑에 의해서 이 궁극적인 선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적인 피조물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은 이 세상에서의 인간적 행위에 대한 윤리학이었던 반면에, 토마스는 내세에서만 얻어질 수 있는 '지복직관'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윤리학을 전개해 나갔다. 비록 신 이외의 선은 행복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지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수 있다.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을 지라도, 윤리학에 내세와 신의 직관을 도입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는 관련이 없다.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들을 통해서 추구해 나가야 하므로 어떤 행위를 통해서 지복에 이를 수 있는지 인간 행위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마스는 먼저 반사적인 행동과 같은 '인간의 행위(actus hominis)'와 이성적인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부터 생겨나는 행위, 즉 ‘인간적 행위(actus humana)’를 구분하고 후자만이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행위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행위는 인간의 '의지'에서 생겨나며, 그리고 이 의지의 대상은 선이다. 윤리적 행위의 일차적인 조건으로는 주관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서 봉사활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것과 같이, 비록 선한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다른 목적에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베푸는 행위는 결코 선한 행위일 수 없다. 그런데 토마스는 악한 의지를 지녔다면 악한 행위가 되지만, 의지가 선하려면 선한 의도만으로는 안 되고 이성이 제시한 선한 대상을 바르게 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윤리적 행위를 위해서는 주관적인 기준인 의도의 선함만이 아니라 선한 대상을 식별하는 객관적 기준이 필요하다. 토마스는 우선 사변적 학문의 영역에서 이성의 제일 원리인 모순율이 있는 것처럼, 도덕의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악은 피하라"라는 윤리의 제일 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원리에서 제시된 객관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토마스는 자연법(lex naturalis) 사상 안에서 찾는다.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및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윤리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 자연법을 토마스는 “이성적인 피조물 측에서 신의 법칙에 관여하는 것”(I-II,91,2)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의 도덕률이 이성에 의해서 언명되고 명령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이라고 불린다. 인간 생활에 편리한 규정들을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직접 자연법에 속하지는 않을지라도 어떤 유용한 것을 덧붙이거나 더 이상 실행되고 있지 않는 어떤 규정들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변화가 자연법에 속해 있는 무엇의 제거를 의미한다면, 자연법은 변화될 수 없다.(I-II,94,5) 인간이 만든 ‘인정법(人定法)’은 이러한 자연법에 어긋나면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런데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하등의 초월적인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토마스의 답변은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연법도 그 뿌리를 신적인 영원법에 두고 있을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목적인이기는 했지만, 제1작용인도 아니고 최고의 범형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토마스처럼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자신의 섭리에 따라 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신의 예지는 인간의 행위를 선한 목적으로 향하도록 이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토마스는 이렇게 신 안에 있는 예지가 영원법을 구성하며, 이것이 자연법의 원천이라고 주장했다. 자연법이나 영원법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토마스는 영원법이 본래 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신의 지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더 나아가 사실상 사람은 영원한 행복이라는 목적에로 규정되어 있고, 그 지복은 인간의 자연적 능력의 한도를 넘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법과 인정법 외에 사람은 또 신의 힘으로 주어진 영원법에 의해서 궁극 목적으로 인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런 영원법에 기초한 자연법 사상은 외부에서 인간을 통제하는 타율적인 윤리체계 아니라 인간이 지닌 이성에 의거하므로 자율적인 윤리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자연법이 적용되었을 때 법정 역할을 하게 되는 '양심(conscientia)'에 대한 강조에서 잘 드러난다. 각 개인은 자신 안에 도덕률의 최고 원리가 되는 '영혼의 불꽃'(또는 신데레시스)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도덕의 원리가 구체적인 경우들에 적용될 때 양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양심을 통해 개인의 의지가 객관적인 자연법과 조화를 이룰 때 인간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윤리가 자율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올바른 양심을 형성할 책임에 대한 언급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성장 배경이나 성장 이후의 환경에 따라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곡된 양심의 대표적인 형태로는 ‘완고한 양심’과 ‘이완된 양심’을 들 수 있다.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 밑에서 자랐거나 어렸을 때부터 집단생활의 엄격한 규칙에 의해서 통제되었던 사람은 조그만 실수와 규칙의 위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됨으로써 많은 상황에서 부자유스러운 행동을 하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나름대로 설정한 규칙을 타인에게도 강요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부모들의 무관심 속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 자랐거나, 사회의 기본적인 규칙마저도 무시되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은 윤리적으로 마땅히 지탄을 받아야할 행위를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이렇게 왜곡된 형태의 양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양심에 따른 행동’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지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책임도 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이처럼 다양한 기준들을 모두 포괄하는 윤리적인 판단을 매순간 내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작은 사안까지 자신의 의도가 선한지, 자연법과는 부합하는지, 양심의 거리낌이 없는지 등을 판단하며 결정하려다가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고 노이로제 증상을 보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판단을 돕는 것이 바로 토마스가 매우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 '덕(virtus)'에 관한 이론이다. 토마스는 덕을 하나의 습성으로 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따라, 인간의 덕은 인간 고유의 능력 즉 이성적 능력을 완전하게 만드는 작용적 습성이라고 규정하고, 지성적 덕과 윤리적 덕으로 구분한다. 덕 있는 습성은 선량한 행위들로써 형성되고 같은 목적을 위한 계속적인 행위의 수행을 용이하게 한다. 그는 다양한 윤리덕들을 언급한 후에 이 윤리덕들은 플라톤이 제시한 사추덕(四樞德)으로 집약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즉 이성의 규범인 '지혜', 의지의 규범인 '정의', 탐욕적 욕구의 규범인 '절제', 분노의 규범인 '용기'가 그것이다. 이에 덧붙여 아리스토텔레스가 과도와 부족의 극단을 피하기 위해 제시한 중용의 중요성도 받아들여진다. 도덕적 덕의 대상은 영혼의 욕망 부분에 있는 이성의 규칙과의 적합을 확보하거나 조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론에 따르다 보면 그리스도교의 초본성적인 덕, 이를테면 정욕을 외면하는 순결, 물욕을 거스르는 청빈, 명예욕을 무시하는 순종과 같은 덕을 변호하기가 힘들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만일 순결이 신의 부르심에 따라서, 그리고 초자연적인 목적에서 고찰된다면, 순결은 신에 의해서 조명된 이성의 규칙에 일치해 있으며, 그것은 중용에 어긋나지 않는 것으로 고찰될 수 있다. 그렇지만 만일 순결이 미신이나 허영심에서 고찰된다면, 그것은 지나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덕은 어떤 상황과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극단으로 보일 수도 있고, 다른 상황과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중용으로 보일 수 있다. 이렇게 그는 그리스 시대로부터 전승되어온 사추덕과 중용에 대한 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여기에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3가지의 신학적인 덕을 첨가하였다. 『신학대전』전체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제II부 제2편에서 토마스는 신학적인 3가지 덕과 플라톤에게서 유래하는 4주덕을 중심으로 이와 관련된 악습 및 덕의 실천에 관한 문제들을 매우 상세하게 다룬다. 여기에 기술되는 내용은 그 분량과 상세함은 물론 균형 잡힌 사고에서 역사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토마스는 이런 윤리학적인 노력이 완성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신으로 나아가는 길이 되어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사랑(제III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인간이 참된 도덕적 인간으로 성장해 가기 위해서는 위에서 제시된 다양한 기준 중에서 하나만을 만족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개별 행동의 결정에서만이 아니라 올바른 양심 형성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자연법과 덕을 통해 제시된 바로 객관적인 선의 기준들이다. 그렇다고 객관적인 선에 대한 강조가 구체적인 삶의 다양성이 무시된 획일적인 법칙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 토마스는 부수적이라고 평가하기는 했지만 윤리적인 판단에서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에 들어와서 각광을 받았던 ‘상황 윤리’나 ‘실존 윤리’가 올바로 지적했듯이 개개인이 지닌 인격적 독자성을 인정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각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을 성숙시켜 주는 윤리적 행위란 단순한 일반 법칙의 적용이 아니라, 각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을 객관적인 선의 기준에 따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를 고려해서 자신의 양심 안에서 신중하게 결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런 윤리적인 판단이 지속적으로 옳게 내려질 때, 각 개인은 ‘덕’이 있는 인간, 도덕적인 인간으로 성숙해 갈 것이다.
현자의 직무
《대(對)이교도 대전》모두(冒頭)의 장들에서, 성 토마스는 이전에 자신이 삶의 목표로 대단히 간직했던 지혜의 이념을 제시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지혜는 질서와 관련되어 다. 이것은 실천적인 과업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 질 수 있고, 거기서 현자는 타자들을 통제하고 그들을 바람직한 목적으로 돌림으로써 질서를 가져오는 사람이다. 국가의 통치자, 군대의 지휘관, 그리고 건축물의 건축가가 실례들이다. 동일한 것이 이론적인 지식의 영역에도 해당되는데, 여기서 현자는 인간사(人間事)에 질서를 창조하는 대신에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고 관상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이제 이러한 질서는 우주가 향하고 있는 목적을 모르고는 이해될 수 없으며, 이 목적은 그것의 기원, 즉 하느님과 동일하다. 하느님이 지성이고, 지성에 의해 의도된 목적이나 선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따라 정해져 있다고도 말해질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자는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성 토마스는 자신의 삶에 대한 목표를 성 힐러리(St. Hilary)의 말(그것은 철저하게 아우구스티누스적이다)보다 더 잘 표현하는 말을 찾을 수 없었다.: “ 나는 이것을 내 삶의 주된 본분으로서 내가 하느님에게 빚지고 있으며, 나의 모든 말과 감각이 그분에 대해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지혜를 하느님에 대한 관상으로 정향할 때, 성 토마스는 교부들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자들의 발자취도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일철학을 신학, 즉 하느님에 대한 연구라고 부르지 않았는가? 그는 또한 신학을 진리, 특히 우주의 첫째 원인인 신적 진리에 대한 학문으로 기술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자연 이성에 의해서만 하느님을 인식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에 있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철학에 의해 증명된 하느님에 대한 진리들뿐만 아니라 이성의 힘들을 능가하고 계시를 통해서만 알려지는 진리들에도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는 인간 이성을 완전히 능가하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그러한 진지들에 한정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그분에 대해 이성 하나로도 도달 가능한 몇 가지 진지들을 계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느님은 철학에서도 증명 가능한 그분의 바로 그 실존을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았는가? 성 토마스는 이것이 탁월하게 적절하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이성만으로도 하느님에 대한 어떤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형이상학자들이 될 능력, 여가, 그리고 흥미를 갖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궁극적으로 이러한 고매한 상태를 획득하는 이들도 그들의 청년기ㅡ형이상학에 어울리지 않는 시기ㅡ에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인 진리를 확신할 절박한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형이상학자들이 되었더라도, 그들은 신앙에 의해 주어진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이 없다면 여전히 오류로 전락할지 모른다.
그리스도교인으로서, 성 토마스는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접근에서 계시는 물론 자연 이성도 이용했다. 그는 자연 이성과 철학이 자신이 믿었던 것을 더 잘 이해하는 데뿐만 아니라 성서의 권위를 수용하지 않는 이도교들의 오류들을 논박하는 데도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진리가 자연 이성에 의해 알려지든지 계시에 의해서만 알려지든지 간에, 신학, 즉 성스러운 교설의 학문ㅡ성 토마스가 선호했던 용어를 쓰자면ㅡ은 하느님에 대한 모든 진리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그에게 신학이 성스러운 교설의 내용을 모조리 망라하지는 않는다. 성 토마스의 눈으로 우리가 이러한 학문의 지평들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그의 뛰어난 두 권의 신학 저작들, 즉 《대(對)이도교 대전》과《신학 대전》을 단지 대강 훑어보기만 하면 된다. 이 저작들에는 철학적이고 심지어 과학적인 정보와 증명들로 완벽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신학자로서 성 토마스의 저작에 공헌하고 신학의 목적에도 이바지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들을 신학의 일부분으로 간주했다.
신학이 현실적으로 계시 되었거나 계시로부터 연역 가능한 진리들만을 포괄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신학에 대한 좀 더 제한된 견해에 익숙하다. 그러나 성 토마스의 관점은 전혀 달랐다. 그에게는, 만약 자연 이성이 계시에 대한 이해나 옹호에 공헌할 수 있다면, 자연 이성의 어떤 진리도 신학에 포함될 수 있다. 그것이 현실적으로 계시되지(revelatum )않은지 몰라도, 만약 그것이 계시와 관련되어 있다면 그것은 계시 가능한(revelablie)것으로 신학의 형식적인 대상에 포섭되며 그 학문의 일부분이다.
성 토마스의 천직은 신학자의 그것이었지만, 그가 그것을 이해했던 바와 같이 그의 소명의 완성은 집중적인 철학적 탐구를 필요로 했다. 그는 몇 편의 짧은 철학 논문들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장편의 주석서들도 저술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신학 연구들을 보조하기 위해서였다. 게다가 그의 가장 독창적이고 심오한 철학 관념들은 그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주석서들이 아니라 그의 신학 저술들에서 발견된다. 오늘날“토마스 철학”(Thomistic philosophy)이라 불리는 것은 그가 합리적으로 증명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의 신학적인 맥락으로부터 취해졌던 성 토마스 신학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성 토마스를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우리는 그는 신앙을 철학 연구들의 장애물로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철학하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필요 불가결한 도움이라고 생각했다.
성 토마스의 신학에 나타난 합리적인 진리와 계시된 진리의 혼합이 그의 지성 안에서 철학과 신학의 방법들 간의 어떤 혼란은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리스인들과 아랍인들로부터 철학과 합리적 증명의 본성을 배웠고, 특히 하느님에 관한 그러한 증명의 한계들에 대해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한계들은, 《대(對)이도교 대전》에서 가장 뚜렷하게 보여질 수 있는데, 그것의 처음 세 권은 인간 이성으로 접근 가능한 하느님과 피조물들에 대한 진리들에 할애되고, 네 번째 책은 신앙에 의해서만 유지되는 성육화, 삼위일체, 그리고 성사들에 대한 진리들에 관한 것이다. 성 토마스의 나머지 다른 신학 저작들과 철학 저작들처럼, 이 저작은 풍부한 철학적인 분석들과 탐구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계시된 진리에 관한 그와 같은 탐구의 한계뿐만 아니라 그가 그것에 대해 마음속에 품었던 바에 대한 명석한 관념도 형성할 수 있다. 특히, 그는 감각들에 의해 공급되고 그것들 가운데 첫 번째가 존재인 원리들의 빛에서 분석된 자료들에서 철학이 출발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철학자는 자신의 탐구의 끝에서만 존재의 첫째 원인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해 일정한 지식을 획득한다. 이와 달리, 신학자는 계시에 의해 제공된 하느님에 관한 자료들에서 시작하고, 그것들이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고 그분에 관해 설명하는 한에서만 피조물들을 고려한다.
하느님의 존재
《신학 대전》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다섯 가지 방법들은 그의 신학에서 성 토마스의 철학에 대한 사용과 관련하여 훌륭한 실례를 제공한다. 이러한 증명들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각각의 증명은 고대나 중세 시대의 철학자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는 자신의 생각대로 이것들을 변형시켜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아랍철학자들의 하느님이 실존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하느님의 실존으로 안내했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첫 번째이고 가장 명백한 방법은 운동으로부터이다. 일부 사물들이 운동 중에 있다는 것은 뚜렷하다. 움직여지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짐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운동 중에 있는 존재는 그 존재가 향해서 움직이는 그것에 관하여는 가능태(potency)에 있고, 존재는 그것이 현실태(act)에 있는 한 움직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운동이란 가능태에서 현실태로의 어떤 것의 변형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실태에 있는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존재도 가능태에서 현실태로 이행될 수 없다. 예를 들어, 가능적으로 뜨거운 나무는 불과 같이 현실적으로 뜨거운 어떤 것에 의해서만 현실적으로 뜨거워질 수 있다. 처음 볼 때 살아 있는 존재들의 자기 운동들은 이러한 규칙에 대한 예외처럼 보이지만,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해 보면 우리는 자기 운동들이 부분들을 갖고 있으며, 부분들 가운데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를 움직인다는 것은 안다. 운동의 원인 그 자체가 움직여지면, 그것은 어떤 다른 운동자에 의해 움직여짐에 틀림없고, 다음으로 그 다른 운동자는 또 다른 것에 의해 움직여지고, 등이다. 그러나 운동자들의 무한한 계열은 있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어떤 제일운동자도 없게 될 것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다른 운동자들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팡이는 그것이 손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에서만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행적 운동자들은 그덧들이 제일운동자에 의해 움직여지는 한에서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에 의해서도 움직여지지 않는 운동의 첫째 원인이 있고, 이것을 모두가 하느님으로 이해한다.
두 번째 방법은 우리 주변의 세계에 결과들을 산출하는 능동 원인들이 있다는 관찰에서 출발한다. 어떤 것이든지 그 자체의 능동 원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능동 원인은 본성상 그것의 결과보다 앞서, 어떤 것도 그것 자체보다 앞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능동 원인은 또 다른 것을 미리 가정하고, 다음으로 그것은 또 다른 것을 미리 가정하고, 등이다. 그러나 완전성의 위계 질서 안에 배열된 능동 원인의 계열은 무한 퇴행이 불가능한데, 왜냐하면 중간적인 능동 원인들은 그것들의 바로 그 인과성에 대해 첫째 원인데 의존하기 때문이다. 첫째 원인이 없다면, 중간의 어떤 원인들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가 관찰하는 결과들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최초의 능동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고,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이라 부른다.
세 번째 방법은 일부 존재들이 생성하고 소멸한다는 명백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바꿔 말하자면, 존재들이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이제 가능적인 것은 그것이 실존한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사실상 모든 존재들이 단지 가능적이기만 하다면, 어떤 것도 현실적으로 실존하지 않을 것이다. 일부의 가능 존재들이 실존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원인으로서 어떤 필연적인 존재의 실존을 알려준다. 이러한 필연적인 존재는 또 다른 필연적인 존재에 의해 원인 지어지거나 또는 그것이 원인 지어지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고 필연적인 존재들의 무한한 계열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자체로 필연적이고 그것의 필연성이 원인 지어지지 않는 존재가 있음에 틀림없다. 이것을 모두가 하느님이라 부른다.
하느님에게로 가는 네 번째 방법은 사물들에 나타난 완전성의 정도(degrees)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존재들이 더 선하다거나 덜 선하다고 하고, 이것은 진리나 숭고함 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물들이 어떤 최대를 다양한 정도로 모방한다고 하는 한에서만 그것들이 더 또는 덜하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가장 참되고 최상이고 그리고 가장 숭고한 최고도의 존재가 있음에 틀림없는데,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진리를 최고도로 소유하는 것이 최대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의 상대적인 완전성들을 갖고 있는 다른 모든 존재들의 원인인 이러한 가장 숭고하고 가장 왕전한 존재를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다섯 번째 방법은 우주의 질서에 토대를 두고 있다. 자연물들이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일정한 목적을 위해 활동한다. 이것은 자연물들이 동일한 방식으로 규칙적인 활동을 통해 동일한 결과를 성취한다는 사실로부터 명백하다. 화살이 궁사에 ml해 방향이 정해지는 것처럼, 이것은 우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물체들이 움직이는 대로 활동하도록 그것들을 통제하는 지성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자연물들을 그것들의 목적으로 정향시키는 어떤 지적인 존재가 있으며, 이것을 우리는 하느님이라 부른다.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성 토마스의 다섯 가지 방법들은 제각기 상이한 출발점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 모두는 동일한 구조를 보인다. 무엇보다도 각각이 감각 세계에 대한 경험적인 관찰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정신이 하느님의 존재로 상승하게 되는 실존적인 토대를 갖는다. 둘째로, 각각의 증명은 그 증명의 출발점인 감각적 존재들의 궁극적인 원인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인과성의 관념을 사용한다. 성 토마스는 인과성 관념을 감각 경험에서 파생된 것으로 간주한다. 정신은 우리가 감각들에 의해 제공된 경험적인 자료들에 적용시키는 인과성이라는 본유적인 원리를 구비하고 있지 않다. 사실상 그는 우리에게 운동하는 어떤 것이라든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그는 운동 중인 존재가 그것의 운동의 종착지에 대해 가능적이라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처리한다. 그 종착지에 관해 현실태에 이르기 위하여, 그것은 이미 현실태에 있는 어떤 존재에 의해 움직여져야 한다.
성 토마스는 증명될 두 번째 논점이 운동자들이나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불가능성이라고 계속한다. 시간에서 하나가 나머지 다른 하나를 계기(繼起)하기 때문에, 동일 지평에서의 원인들의 무한한 계열의 가능성을 그가 부정하지 않는 것이 언급되어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아들을 낳고, 이번에는 그 아들이 그 자신의 아들을 낳고, 등이다.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는 인간 이성으로 우주의 영원한 지속을 반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이러한 가정에서 다양한 종 안의 개별자들의 무한한 계열은 가능할 것이다. 성 토마스의 하느님의 존재 증명은 우주의 영속(永續)을 가정한다 하더라도 타당하다. 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원인들의 계열의 무한성은 그것의 구성원들이 완전성의 위계질서 안에 배열되는 것이고, 따라서 하위 원인들은 상위 원인들의 도구들이고, 모든 것이 동시에 하나의 결과를 산출하는데 이바지하게 된다. 도구의 인과성은 첫째 원인에 의존하기 때문에(지팡이는 손에 의해 움직여질 때만 어떤 결과의 원인이 된다). 만약 모든 원인들이 도구적이라면, 그것들은 어떤 결과도 야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도구적 원인들을 넘어서, 이차적인 원인들의 인과성과 그것들의 결과들을 설명할 절대적으로 첫 번째인 원인이 있음에 틀림없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
하느님에게로 가는 상술한 방법들 각각은 그분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어떤 것을 덧붙여 준다. 그분은 제일운동자로서, 부동하고 불변하며, 결과적으로 그분은 수동적이지도 않고 물질적이지도 않다.. 첫째 원인으로서, 그분은 그분 자신은 원인이 없지만 다른 존재들의 원인이 되는 무제한의 힘을 본래부터 갖고 있다. 첫 번째 필연적 존재로서, 그분은 자신의 실존을 다른 어떤 것에서도 획득하지 않고, 그분 자신을 통해 실존한다. 최고의 왕전자로서, 그분은 최고도로 존재, 진리, 그리고 신성이다. 우주의 질서 원인으로서, 그분은 우주의 지적인 관리자이고 공급자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그분의 본질을 간파해서 구분인 바(what he is)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하지 않는다. 성 토마스는 현생에서 우리가 부정적인 진술과 피조물들과 그분의 관계를 통해서만 하느님을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하느님은 전적으로 왕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에 대한 불완전성, 가령 변화, 수동성, 그리고 복합을 함축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부인할 수 있다. 우리는 따라서 그분에ㅐ게 부동성, 완전한 현실성, 그리고 절대적 단순성을 돌릴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지식 말고도, 우리는 피조물들과의 유비를 통해 그분을 인식할 수 있다. 하느님의 결과들로서, 피조물들은 유사성이 아주 근소하다고 해도 그분과 약간의 유사성을 지녀야 한다. 좀 더 완전한 방식이라고 해도, 우리는 결과 안에 실존하는 것이 그것의 원인 안에 선재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완전성들 가운데 두 가지의 종류들이 피조물들에서 발견된다. 일부는 그것들의 바로 그 본성에 의해 결함이나 한계를 내포한다; 가령, 인간성과 동물성 우리가 하느님이 우리의 지성의 “빛”(light)이라거나 그분이 에덴 동산을 “거닐었다”(walked) 고 말할 때처럼, 이것들은 그것들의 고유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은유적으로만 하느님에게 귀속될 수 있다. 피조물들의 다른 완전성들은 절대적이고, 어떤 결함이나 한계도 함축하지 않는다; 예컨대, 지혜, 존재, 그리고 선성. 그것들이 하느님 안에서 좀 더 완전한 방식으로 실존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하느님은 물론이고 피조물들 안에도 현존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이 최ㅗ로 선하고, 완전하고, 하나이고, 지적이고, 자유롭고, 그리고 권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적인 선성이나 완전성 그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분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그분의 피조물들의 속성들이 그것들의 존재에 비례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하느님의 선성과 여타 속성들이 그분의 존재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말할 때, 우리는 신적인 존재가 무한하게 우리의 이해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왜냐하면 신적 존재는 무한하지만 창조된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말해지고 이루어졌을 때, 하느님과 피조물들 간의 유비에 대한 우리의 판단들은 하느님 그분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개념을 산출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하는 것과 그분의 본질(what he is) 사이의 무한한 심연 때문에, 성 토마스는 다음에서 디오니시우스와 일치한다. “신적 실재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모든 개념들을 초월한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그가 자신이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인간은 하느님에 대한 지식의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성 토마스에 의해 확립된 하느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부정적 속성들 가운데 하나는 신적 단순성, 즉 하느님 안에서의 모든 복합의 부재이다. 이것은 복합물은 갖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들 중 하나는 가능적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이라는 사실로부터 도출된다. 더 나아가 복합물의 요소들은 그것들의 결합에 관해서는 가능적이고, 그래서 그것들을 결합시킬 원인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느님은 완전히 현실적이고 원인이 없다는 것이 보여져 왔다. 따라서 그분은 복합존재가 아니다.
성 토마스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다양한 결론들을 이끌어 낸다. 무엇보다도 신적 존재는 질료와 형상으로도 그리고 실체와 우유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 더욱이 하느님의 단순성 때문에, 그분은 그분의 본질과 동일하다. 이 점에서 그분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인간성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성을 본질로 소유하지만, 그는 개별자로서 자기에게 속하는 다른 특징들을 갖는다. 이것은 하느님과 달리 인간이 복합 존재임을 함축한다.
한층 더 중요한 결론은 하느님의 본질과 존재(esse)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말에 따르면, “존재”(being)라는 낱말은 현실태(act)를 나타내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물은 그것이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태에 있기 때문에 있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서, 만약 신적 본질이 그것의 존재 이외의 다른 것이라면, 하느님 안에는 본질과 존재의 복합이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그분의 본질은 그분의 존재에 가능적이게 된다. 하느님은 순수 현실태이기 때문에, 그분은 순수 존재여야 하고, 그분의 본질은 존재 자체(Being itself)임에 틀림없다.
성 토마스 사상의 결말은 우리를 존재 또는 실존(existing)의 순수 현실태로서의 하느님 관념으로 안내한다. 그는 성서에 e의해 확증된 다름의 주목할 만한 결론을 발견한다. 그는 성서에 의해 확증된 다음의 주목할 만한 결론을 발견한다: 하느님의 본질이 그분의 존재라는 “숭고한 진리”(subline truth)는 하느님이 그 족장에게 그분의 고유한 이름,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Am(《출애굽기》3:14)를 말했을 때, 하느님 자신에 의해 모세에게 계시되었다. 하느님은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 (He Who Is)라고 부르면서, 그분의 본질이 존재자체라고 계시했는데, 왜냐하면 이름들은 본질들 또는 본성들을 지시하려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신명(神名)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우리를 성 토마스의 존재 관념으로 안내하는데, 그것은 실재에 대한 그의 형이상학적 견해의 바로 그 중심에 놓여있다. 존재의 중요성은 아마도 성서의 동일 본문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과 대조될 때 가장 극명하게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스스로 있는 자”라는 신명은 하느님이 불변하고 영원하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존재를 불면성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성 토마스에게 존재는 그것에 의해서 어떤 것이 실존하게 되는 현실태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이 그분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본질이 존재 또는 실존의 순수 현실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꿔 말해서, 하느님은 순수 실존적 현실태(pure existential act) 또는 순수 실존(pure existence)이다. 피조물들의 본질들은 그것들에 의해 피조물들을 실존하게 하는 현실태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피조물들과 하느님은 다르다; 피조물들은 그것들의 존재의 현실태들과 다른 본질들을 갖는다.
순수 실존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개념은 앞서 아비첸나, 마이모니데스, 그리고 기욤 도베르뉴에 의해 논의 되었지만, 그것은 성 토마스의 저작들에서 가장 완전한 표현을 발견한다. 성 토마스는 하느님에 대한 실존적 견해의 중요성들을 충분히 평가하고 존재의 현실태를 모든 실재의 중심적인 특성으로 이해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우리는 성 토마스가 하느님이 존재의 현실태 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느님의 품위를 실추시키고 있는지에 대해 궁금할지도 모른다. 존재 이외에 생명과 지성 같은 다른 완전성들이 있지 않는가 그리고 단순히 있는 것보다는 살아있고 이해한다는 것이 더 완전하지 않는가? 그러나 성 토마스는 살아 있고 이해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 안에 포함된 존재의 방식(ways of being)이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살아있는 것의 생명은 단지 그것의 존재이다: vivere viventibus est esse. 사실상 “존재”는 모든 용어들 가운데 가장 풍요롭고 포괄적인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완전성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존재 자체라고 말하는 것은 그분이 전적으로 완전하다거나 그분의 왕전성에 한계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식과 진리
성 토마스는 《영적 피조물에 관하여 On Spiritual Creatures》라는 논문에서, 인식 문제와 관련하여 짧은 역사를 제공하고 그 주제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다. 그에 따르면, 일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지식을 물리적 우주에 대한 감각 지각으로 제한하였고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그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했다. 그들은 이것에 대해 두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1] 감각적인 대상들은 어떤 공정된 인식의 대상도 제공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2] 인간은 동일대상에 대해 다르게 판단하고, 우리에게는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를 가늠할 수 있는 어떤 기준도 없다. 깨어 있거나 잠들어 있는 인간, 건강하거나 병든 인간 가운데, 누구의 감각 지각들이 옳은지를 우리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물리적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는 이러한 회의주의적 태도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관심을 윤리학으로 전환했다. 그의 제자 플라톤은 감각 지식에 대한 이와 같은 불신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서 지식의 확실성을 확립하는 길을 발견했다. 그는 질료적 세계로부터 분리된 지적인 인식의 불변하는 대상인 이데아들의 존재를 가정했다. 그는 또한 인간이 감각들보다 우월한 인식의 힘들인 정신이나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지성을 통해 우리는 진리를 인식하지만, 시각이 가시적 태양에 의해 조명되는 것처럼, 우리가 상위의 가시적인 빛에 의 조명될 때만 그렇다. 계속해서 성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가톨릭 신앙이 허락했던 범위 안에서 플라톤을 따랐다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와 신앙이 충돌했던 곳에서, 그는 플라톤 철학을 신앙과 일치되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분리된 형상들 대신에, 그는 신적지성 안에 이데아들이 있고 우리는 신적인 빛에 의해 조명된 우리의 정신에 미친 이러한 이데아들의 영향을 통해 진리는 판단한다고 주장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입장에 대해 이러한 정확한 기술을 한 후에, 성 토마스는 자기 자신의 것으로 채택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이어서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른 방식으로 인식의 확실성을 확립했다. 첫째로, 그는 감각 대상들 안에 안정된 어떤 것이 있다고 제시했다. 이것들은 순수 변화도 아니고 흐름도 아니다. 변화가 있는 곳마다. 변하는 안정된 실재가 있다. 실체들은 우유적인 방식들로ㅡ예컨대, 크기의 증감에 의해ㅡ변화하지만 실체들은 그것들의 실체에서는 항구적으로 머문다. 실체들은 또한 실체적인 변화를 겪지만, 변화의 처음과 끝에는 안정된 실체가 있다. 그 결과로 감각적 실체들 안에는 변화는 물론 안정성도 있고, 이러한 안정적인 요소는 감각적 실체들에 대한 일정한 지식의 기초로서 기능한다.
둘째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들이 그것들의 고유한 대상들을 올바르게 판단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즉, 시각이 색채를 지각하는 것처럼, 직접적이고 일차적으로 지각된 것들. 감각 세계의 안정성은 심지어 감각 지식도 진리의 척도를 지닌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정상적인 여건들 하에서 감각들은 그것들의 고유한 대상들에 관해 오류를 범하지 않지만, 그것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대상들, 가령 물체의 크기나 운동에 관해서는 기만당할 수도 있다. 감각들은 실존과 실체 같은 우유적으로(per accidens) 지각된 대상들에 관해서 훨씬 더 많은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이러한 후자의 대상들은 감각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서 이해되는 것이다. 단지 감각들의 고유한 대상들이 실존하는 실체들의 성질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감각들에 포섭된다.
셋째로, 감각적인 세계Dhk 감각적 인식에 관한 애초의 견해들을 바로잡은 후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적인 인식에 대한 참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가 감각 세계 밖에 실존하는 이데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동 지성의 빛ㅡ그것에 의해 감각 대상들로부터 우리의 관념들을 추상하는 힘ㅡ에 의해서 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베로에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술을 모든 인간이 동일한 능동 지성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성 토마스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경험에도 배치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편자를 추상하고 우리가 원할 때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자신의 인식을 갖는 것과 똑같이, 인간은 제각기 자신의 능동 지성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능동 지성이란 무엇인가? 성 토마스의 견해에서, 능동 지성은 창조되지 않은 빛에 관계된 유사성으로서 하느님에 의해 우리의 영혼 안에 창조된 지적인 빛에 다름 아니다. 성 토마스는 따라서 우리의 인식이 신적 조명의 결과로서만 가능하다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의견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우리의 인식하는 창조된 빛의 본성을 능동 지성이라고 정확하게 설명했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것은 신적 조명이 우리의 본유적인 지적인 힘들에 추가된 특수한 도는 유사 특수한 신적 영향이었다는 당시의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에게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천사들은 또한 그들이 창조될 때 사물들에 대한 본유적인 지식을 갖는 정도로 신적인 빛에 참여한다. 성 토마스는 천사들의 지성들을 채색된 화폭이나 가지적 형상들을 비추는 거울에 비유한다. 그러나 인간 지성은 신적인 빛에 완벽하게 참여하지 않는다. 인간 지성이 존재하게 될 때, 그것은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와 같다. 지성은 인식할 힘은 있지만, 그것 자체만으로 그것은 대상들이 전혀 없다. 따라서 그것 자체 밑으로 내려가서 감각 세계에서 대상들을 찾아내야 한다.
감각 지각은 그 결과로 우리의 인식의 필연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감각 지각은 인식의 목표가 아니다. 감각들은 그것들의 대상들로 개별 감각 사물들을 갖는데, 그것들은 내면적인 감각들의 〔표상(phantasms)으로 불리는〕유사성에 의해 재현된다. 보편자를 특수자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이러한 유사성들에서 가지적 본성들을 추상하는 것이 능동 지성의 기능이다; 이를테면, 개별 인간들의 특수한 특징들로부터의 인간의 본성.
따라서 개별자로부터 분리된 보편자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는 적절한 지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서 성 토마스는 이것을 “가능 지성”이라 부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만물의 형상들을 받아들이는 가능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 지성은 두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첫째, 가능 지성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 대상들로부터 추상된 본질들을 포착하여 그것들에 대한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한다. 둘째, 가능 지성은 그렇게 포착된 대상들에 관해 우리가 판단을 내리 수 있도록 한다. 이상은 인간의 두 가지 기본적인 지적 작용들이고, 그것들은 창조된 존재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인 본질과 존재(esse)에 대응한다. 첫 번째 작용은 사물들의 본질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본질들을 파악하고 그것들에 대한 개념들을 형성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본질보다 더 많은 것이 실재 안에 있다; 바로 그것의 중심에 실존의 현실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물들의 실존을 파악하는 심화된 작용이 요구되고, 성 토마스에 따르면 이것은 판단(judgment이다.
판단에 대한 실존적 함축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의 실존을 단언하는 “소크라테스는 실존한다.”라는 유형의 판단에서 가장 분명하다. 여타의 판단들에서 실존 또는 실존의 어떤 양태에 대한 언급은 명확성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존한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라는 주장은 소크라테스 안에 “인간성”이라는 형상의 현실적인 실존을 표현한다.
성 토마스의 인식론은 결과적으로 그의 존재 관념과 밀접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일한 것이 그의 진리론에 대해서도 말해질 수 있다. 자신의 동시대인들처럼, 그는 진리를 지성과 사물의 일치(adaequatio intellectus et rei)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일치는 지성과 그것의 대상과의 동화 작용에 의해서 야기되는데, 그것은 두 가지 국면에서 발생한다. 첫 번째 국면에서 지성에는 사물들의 본질들에 의해 정보가 주어지고, 지성은 본질들을 지성 자체 안에서 이해함으로써 본질들을 그것 자체의 것으로 만든다. 두 번째 국면에서 지성은 대상의 바로 그 실존과 관련된 판단에 의해 그것의 대상과 좀 더 완전하게 동화된다. 있는 것은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고 판단할 때 지성은 참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진리는 결과적으로 판단의 속성이며, 진리는 사물들의 본질보다는 실존(esse)에 더 많은 토대를 두고 있다.
여기에서 설명된 진리는 실존하는 대상들에 대한 사변적 판단들의 진리이다. 우리는 또한 수행될 행위들이나 제작될 대상들에 대한 실천적인(practical) 판단들도 내린다. 우리는 계산서를 지불해야 하거나 어떤 집을 건축해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판단들은 실존하는 것들이 아니라 실존하게 되는 행위들과 목적들에 관계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진리는 존재와 지성의 일치가 아니라 지성과 올바른 욕망과의 일치에 놓여있다. 참된 실천적인 판단을 위해 지성은 적합한 수단들을 통해 적절한 목표로 인간을 기울게 하는 인간의 의지와 일치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 질서에서 지성은 존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그것의 선에 대한 타고난 경향성에 의해서 지배된다.
결론
훌륭한 예술가들처럼 위대한 철학자들은 자신들의 동시대인들보다 워낙 뛰어났기 때문에, 당대에는 거의 이해되지 못하거나 진가를 인정받지 못할 것 같다. 산맥위로 솟아오른 봉우리처럼, 그들의 진정한 능력은 그들이 멀리서 보여질 때만 눈에 들어온다. 그것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13세기에 그는 신학은 물론 철학에 대해서도 대단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그는 그것보다 더 빈번하게 오해되고 비판받았다. 사실상, 그의 이론들 중 일부는 파리와 옥스퍼드에서 교회의 권위들에 의해 정식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언젠가 신학자와 그리스도교 철학자로서 그가 교회에서 갖게 될 유일무이한 지위를 누구도 예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스콜라 학자들의 모든 저작들 가운데서 형제 토마스의 저작들이 20세기에 그렇게 폭넓게 읽히리라고는 아무도 예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그의 과학적 관념들과 스콜라주의적 문체에도 불구하고, 그가 영속적인 가치를 지닌 진리를 표현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증거는 있을 수 없다. 중세 학자들 가운데서 시간이란 우유들을 극복하고 영원히 진리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는 교성을 모든 시대에 전달하는 능력에 있어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만이 그에게 필적한다. 토마스 철학이 매우 빈번하게 오해되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토마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긴밀한 친화 관계이다. 토마스의 철학은 때때로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제시되어 왔고,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정화되었으며, 그리스도교 교설과 조화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토마스주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 첫째, 그것은 토마스주의를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다수의 비아리스토텔레스적 영향들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자로서 전례가 없는 자로 간주했고, 그에게서 철학의 방법과 자기 자신의 사상으로 구체화시켰던 수많은 이론들을 배웠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사실상 당시에 알려진 모든 철학 문헌과 신학 문헌에도 의존했다. 토마스의 종합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물론,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그리고 아랍과 유태철학의 요소들도 현존한다.
둘째로, 토마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동일시는 성 토마스의 철학자로서의 독창성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단순히 당대의 신플라톤주의를 채택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 토마스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그가 그것을 발견했던 대로 인수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철학자들을 계시된 진리의 빛 가운데서 크게 변형시켰으며,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철학들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독특하게 창조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 관념에 대한 성 토마스의 변형에서 보다 명백한 곳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우선적으로 형상으로 보았지만, 성 토마스는 존재를 주로 실존의 현실태로 이해했다. 존재는 우리의 모든 개념들 가운데 첫 번째이고 여타의 모든 것이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변형은 광범위한 중요성들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성 토마스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관념 때문에, 그의 하느님, 우주와 하느님의 인과적 관계, 인간과 인간의 인식에 대한 교설은 사상의 초창기 방식으로부터의 뚜렷한 탈주를 돋보이게 한다. 일반적으로, 그는 다수의 그리스와 중세철학자들에게 공통적인 형상주의적(formalist) 관점에서보다는 오히려 실존적(existential) 관점에서 철학적인 문제들에 접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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