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佛國寺) / 사적 제502호
불국사 설경
1963년 3월 28일「사적 및 명승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21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제2조」 [별표1] 국가지정문화재의 지정기준에 따라 「사적 제502호」로 재분류.
1. 개관
신라 천년의 왕경(王京) 경주는 한국 불교문화가 집대성된 성지로 불린다. 경주는 곳곳에 불교문화 유적으로 가득 차 있어 불교 노천 박물관이다. 그 중 경주 불교유적의 백미(白眉)는 단연 불국사(佛國寺)다.
향토 출신 시인 박목월은 '불국사'를 이렇게 노래하였다.
불국사
박목월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달 안개
물 소리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범영루(泛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흰 달빛 내리는 어느 깊은 가을 밤, 엷은 안개가 드리워진 불국사의 자하문, 범영루의 신비스런 풍경을 대웅전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려다보고 계실 때,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무거운 적막을 깨뜨린다.
옛날의 불국사
불국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로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또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불국사 경내가 사적 제502호로 등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보 6점 보물 2점을 보유하고 있다. 이 외에도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유물 또한 국보 제126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또한 불국사는 이와 같이 외적인 화려함과 더불어 부처님의 화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세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열정적인 신앙의 완성체이다.
2. 불국사 창건의 사상적 배경
불국사의 사명(寺名)인 불국(佛國)은 '부처님의 나라'라는 뜻이다. 우리 중생들이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를 차안(此岸)이라 하고 부처님의 나라 불국토(佛國土)는 피안(彼岸)이다. 불국사는 불국토 즉 피안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갈망하는 신라인의 염원을 실현하고자 했던 사찰이다.
이와 같은 신라인들의 염원은 불국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에 잘 나타나 있다. 즉 불국사는 차안과 피안의 세계를 한 공간에 표현하면서 석축(石築)과 계단, 연못 등을 통해 두 세계를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꿈에 그리던 불국(佛國), 즉 피안의 세계 그 자체로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 아미타경(阿彌陀經)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이 땅에 구현해 놓은 사찰이다.
3. 불국사 창건의 역사
불국사 창건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기록으로는 불국사사적(佛國寺事蹟) ․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 ․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세 가지 서책이 있다.
『불국사사적』의 저자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一然) 스님으로 전하고 있다.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불국사에 대해서 가장 상세하고 권위 있는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19대 눌지왕 때 아도(我道)의 청으로 제일가람(第一伽藍) 흥륜사와 함께 제일선사(第一禪寺) 불국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가 아직 공인되기 이전이라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지고 말았다. 법흥왕 대에 와서 왕의 뜻으로 불국사 중창의 역사(役事)를 시작하게 되었고 진흥왕이 이것을 계승하여 역사를 마쳤다고 한다. 그 후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대대적인 역사가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불국사 고금창기
'불국사고금창기'에서는 창건을 법흥왕 15년(528년)이라 하고 왕의 어머니인 연제부인(迎帝夫人)이 출가하여 불국사를 세웠는데 법명이 법류(法流)였기 때문에 절의 이름을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또는 화엄불국사(華嚴佛國寺)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중창은 진흥왕 때 하였으며 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비구니가 되어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을 주조하여 불국사에 봉안하였음을 기록하고 경덕왕 때 김대성에 의해 중건되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삼국유사』는 불국사와 김대성에 관한 설화에서 "절에 전하는 기록에 말하기를 경덕왕(景德王)대의 재상인 대성(大城)이 불국사를 처음 세웠다"고 하여 위의 두 기록과는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대성은 신라 경덕왕 때 실재하던 인물로 벼슬이 중시(中侍)에 이르렀던 김대정(金大正)으로 추정된다.
4. 임진왜란 때의 참화와 복구
1910년대의 불국사
선조 26년(1593년) 5월 왜구가 침략해 노략질을 자행할 때 좌병사는 불국사 지장전 벽 사이에 활과 칼을 감추었다. 왜구 수십 명이 불국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둘러보다가 무기가 감추어진 것을 보고는 불을 질렀다. 장수사에서 난을 피하고 있던 담화(曇華)대사가 문도를 이끌고 달려왔지만, 화마는 대웅전, 극락전, 자하문을 제외한 2천여 칸의 건물을 삼켜버렸다. 금동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과 석교와 석탑 등은 다행히 불길의 화를 면했다. 김대성이 24년의 정성을 쏟아서 건설하고, 85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귀의처이자 자랑이었던 불국이 야만 왜구의 손에 의해 한순간 불타고만 것이다.
1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604년(선조37년)부터 복구가 시작되어 150년 동안 복구와 중수의 불사가 계속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다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오늘날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5. 불국의 세계에 이르기 까지
사찰은 평지나 석굴의 형태로 있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산 속에 있다. 그러나 그냥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건너는 다리 하나, 우리가 지나가는 문(門) 하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흔히 절에 들어서기 위해서 극락교를 지나 일주문(一柱門), 금강문(金剛門), 천왕문(天王門), 불이문(不二門)을 지나게 되는데 이를 산문(山門)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을 삼문(三門)이라고도 한다.
이 곳 불국사는 일주문을 지나 반야교를 건넌 후 천왕문을 통과하고 자하문을 지나 대웅전으로, 또 안양문을 지나 극락전에 이르도록 되어 있다.
1) 일주문(一柱門)
불국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이다.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땅인 진리의 터전으로 들어서는 첫 관문인 것이다.
일주문에는 '○○산 ○○사'라는 그 산사의 이름이 걸린다. 또 일주문의 좌우 기둥에는 그 사찰의 위치나 품격 즉 사격(寺格)을 나타내는 주련(柱聯)이 걸리기도 한다. 불국사 일주문은 예외적으로 '佛國寺'라고 단순하게 절의 이름만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이 일주문은 1973년 중창 당시 새로 세워진 문으로 조선시대 양식의 맞배지붕에 한 칸 문이다.
일주문이라고 해서 글자 그대로 기둥 한 개로 된 문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기둥의 숫자가 대개 두 개 혹은 네 개로 되어 있는데 한 줄로 늘어서 있기 때문에 일주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직선상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린 것은 일심(一心)을 의미한다. 분별심을 버리고 한마음으로 이 문을 통과해서 부처님께로 다가오라는 의미이다. 신도들은 일주문에서 합장 반배(半拜)의 절을 올리고 들어와야 한다.
2) 반야교(般若橋)
반야교
일주문을 지나면 아름답게 조성된 연못을 만나게 된다. 1973년 불국사를 복원하면서 '안압지'를 참고로 하여 조성된 연못이다. 이 연못을 건너는 무지개 다리가 바로 반야교이다. 이 다리는 수미산 초입에 들어서는 중생들이 가파른 수미산(須彌山)을 오르는 고행을 체험하라는 의미에서 약간 둥글게 만들었다.
'반야(般若)'란 만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고 불법을 꿰뚫는 지혜, 즉 온갖 망상에서 벗어나 존재의 참모습을 앎으로써 성불에 이르게 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반야교를 건너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3) 천왕문
천왕문
호법신장인 사천왕이 지키는 문이 천왕문이다. 사천왕은 원래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천왕천에 있는 천신이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복하여 불법을 지키는 신장이 된 이들이다. 천왕문 안에 각 신장이 지키는 위치는 사찰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법당 쪽에서 볼 때 왼쪽 안으로부터 시계 방향으로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순이다.
그리고 이들은 각각 보검(寶劍), 비파, 용과 여의주, 보탑(寶塔)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지물(持物)이 모두 일정한 것은 아니나 다문천왕이 보탑을 들고 있는 점은 거의 예외가 없다.
사천왕들은 발밑에 무서운 악귀나 마귀를 밟고 있는데, 이를 생령좌 또는 마구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찰에서 이 마구니는 추풍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에는 갑옷을 입은 오랑캐, 남쪽지방에는 왜구이다. 이곳 천왕문에서 사천왕이 밟고 있는 마구니 역시 훈도시를 걸치고 있는 왜구이다. 불력(佛力)으로 외세를 몰아내겠다는 조상들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천왕문은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기에 이 문 밖은 천하(天下)가 되고 문 안쪽으로는 천상(天上)이 되는 것이다.
천왕과 그들이 수호하는 방위 및 지물
천왕 |
방위 |
지물 |
색깔 (피부색) |
비고 |
지국천왕 (持國天王) |
동 |
비파 |
청색 |
지물은 일정하지 않으나 다문천왕은 보탑을 들고 있다. |
증장천왕 (增長天王) |
남 |
보검(칼) |
적색 | |
광목천왕 (廣目天王) |
서 |
용, 여의주 |
백색 | |
다문천왕 (多聞天王) |
북 |
보탑 |
흑색 |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4) 부도전(浮屠殿)
부도전
부도전이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물을 모셔놓은 곳이다. 불국사 부도전은 천왕문과 해탈교 사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불국사는 역사가 오랜 사찰로 부도가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현재 사찰 내에 있는 것은 부도전에 옛 부도 6기와 최근에 조성된 3기가 있다. 이 부도전 아래로 불국사 주지를 역임하고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지낸 월산 대종사의 웅장한 부도와 탑비가 있다. 비로전 마당에도 1기의 부도(광학부도로 추정)가 있으며, 사찰 외곽에도 확인되지 않은 부도가 소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5) 해탈교(解脫橋)
해탈교
천왕문을 지나면 자그마한 다리가 있다. 해탈의 경계에 든다는 의미를 가진 해탈교이다. 해탈(解脫)이란 번뇌의 얽매임에서 풀리고 미혹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본디 열반과 같이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 목적이다.
해탈교는 반야교와 달리 수평으로 조성되어 있다. 수미산 정상이 가까워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행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의미에서 편하게 건널 수 있도록 조성했을 것이다. 이 다리는 복원공사를 하면서 새로 만든 다리이다.
6) 불이문(不二門)
불이문은 진리를 상징하는 문으로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 또는 극락문이라고도 한다. 해탈을 하고자 하는 구도자가 천왕문을 지나 수미산에 오르면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 위에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있다. 불이(不二)란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요, 세속과 부처의 세계, 선악, 유무, 깨끗함과 더러움 등 상대적 개념이 모두 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이 불이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나라인 불국정토, 즉 법당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불국사에는 자하문과 안양문이 불이문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곳 불국사는 동쪽 출입문이 일주문이고, 서쪽 출입문이 불이문으로 되어있다.
자하문
안양문
7) 구품연지(九品蓮池)
청운교와 백운교, 연화교와 칠보교 앞에 구품연지(九品蓮池)라고 하는 큰 연못이 있었다.
구품연지(九品蓮池)는 동서 39.5m, 남북 25.5m 정도의 크기로 타원형 연못으로 못의 깊이는 2-3m이며 못의 안쪽은 자연석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연지(蓮池)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174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그 후 어떤 연유(緣由)로 인해 연지(蓮池)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 나무가 심어져 이처럼 크게 자란 것으로 추정된다.
구품연지(九品蓮池)의 수원지는 토함산 정상에서 발원한 지하수가 불국사 무설전 옹벽 아래에서 솟아나오고, 대웅전 밑으로 만들어진 물길(水口)을 따라 “범영루”와 “자하문” 중간에 보이는 수구(水口)와 지금의 해탈교가 있는 수로를 통해 “구품연지(九品蓮池)”에 물이 공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품연지는 서방 극락정토를 모방하여 만들었으며, 줄여서 연지(蓮池)라고도 한다. 서방 극락정토를 묘사한 '관무량수경'에는 “극락정토에는 연꽃이 피어 있는 큰 연못이 있다. 물은 맑고 깨끗하여 바닥이 들여다보이고, 꽃들은 황금빛으로 빛난다. 극락정토의 성중(聲衆)들은 이 연지에 둘러앉아 설법을 듣는다.”고 적혀 있다. 극락을 연화장(蓮華藏) 세계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위 경전에 따르면 극락정토에 태어난 사람은 그 선근(善根)이나 이승에서 쌓은 공덕이나 성격이나 행위에 따라 태어나서 받는 과보는 아홉 가지(九品) 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극락왕생의 단계라고 한다.
사찰 내에 이와 같이 극락세계의 상징인 구품연지를 조성하는 것은 극락정토의 성중들이 연지에서 설법을 듣는 모습을 나타내는 의미를 가진다.
8) 축대(石壇)와 석교(石橋)
불국사는 산지 가람을 이루고 있어 높은 축대로서 그 아래와 위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축대의 위는 불국(佛國)의 세계이고 그 아래는 아직 그기에 이르지 못한 사바의 세계를 의미한다. 이 축대의 멋은 소박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돌의 자연미와 크고 작은 돌을 함께 섞어 개체의 다양성을 나타냄으로 통일과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축대 아래의 크고 작은 돌을 구름에 비유하여 불국 즉 피안의 세계가 구름 위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특히 자연석 위에 인공으로 깎은 장대석에 그랭이질을 하였기 때문에 천여 년의 세월을 버틸 수 있었다고도 한다.
축대
불국세계의 높이를 상징함과 동시에 굳셈을 상징하는 축대의 위에는 경루와 범영루를 만들어서 한없이 높은 하늘을 향하여 번져 가는 묘음(妙音)의 위력을 나타내었다. 이 축대의 동쪽에는 대웅전을 향하는 청운교와 백운교가 있고 그 서쪽에는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연화교와 칠보교의 두 쌍의 다리가 놓여있다.
9)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 / 국보 제23호
청운교 백운교와 자하문
국보 제23호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과거에는 스님만이 출입하던 곳이다. 그래서 중생이 다니던 연화교 ․ 칠보교와는 달리 계단이 높고 가파르다. 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만큼 어렵고 힘든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계단의 수가 아래 17개, 위쪽이 16개로 이를 합하면 33이 된다. 이 다리를 지나 만나게 되는 자하문을 들어서면 수미산의 꼭대기인 도리천(忉利天)이다. '도리'는 산스크리트어로 33의 음사(音寫)이며 도리천은 삼십삼천(三十三天)으로 의역한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須彌山:Sumeru)의 정상에 있으며 제석천(帝釋天:Indra)의 천궁(天宮)이 있다. 사방에 봉우리가 있으며, 그 봉우리마다 8천이 있기 때문에 제석천과 합하여 33천이 된다.
청운교 백운교의 33개 계단을 오르는 것은 바로 도리천에 이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것이 청운교이고 어느 것이 백운교인가는 책마다 다르게 나온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위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文人)인 박종(朴琮, 1735∼1793)은 『동경기행(東京紀行)』에서 위가 청운, 아래가 백운이라고 했지만 아래 계단이 끝나면서 무지개 다리 모양의 돌이 깔려 있는 부분이 백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끝나면서 자하문 문턱에 다리를 가설하듯 돌을 깐 것이 청운교라고 했다. 문화재청 자료와 불국사 경내에 있는 안내문에는 위쪽이 청운교이고 아래쪽이 백운교라고 되어 있다.
서쪽 편에 있는 연화교 칠보교는 연화문이 있는 아래쪽이 연화교이고 7개의 계단으로 된 위쪽이 칠보교이다. 그렇다면 청운교 백운교도 아래가 청운교이고 위쪽이 백운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10) 자하문(紫霞門)
청운교 ․ 백운교를 지나면 부처님 세계의 관문에 해당하는 자하문에 이르게 된다. 자하(紫霞)란 '붉은 안개'란 뜻으로 "부처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색 광명이 안개처럼 서려 있다."는 뜻과 이 문을 지나면 "대 진리의 세계가 열린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자하문은 다른 사찰의 경우에는 누각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해인사의 구광루, 기림사의 진남루, 동화사의 봉서루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 사찰에 따라서는 누각 대신에 불이문을 두기도 한다.
11) 좌경루(左經樓)
좌경루
축대의 동편에는 좌경루가 있었으나 조선 말에 완전히 없어졌던 것을 1973년 복원했다. 경루는 경전을 보존하던 곳으로 생각되지만 원래의 구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지금은 목어(木魚)와 운판(雲版)이 걸려 있다.
좌경루의 석주는 발굴조사시 출토된 석재 부재를 복원한 것으로 팔정도(八正道)를 상징하는 팔각기둥 중앙에 연꽃을 새긴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다.
12) 범영루(泛影樓)
범영루
범영루는 처음에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리었다. 수미산 모양의 팔각정상에 누(樓)를 짓고 백팔번뇌를 안은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에서 108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범영루는 임진왜란 대 소실된 것을 그 후에 중건하였으나 1973년 복원 불사 때 회랑과 맞지 않음을 이유로 헐어버리고 다시 지은 것이다.
범영루의 석주는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이런 석주의 모양에 대해 수미산을 상징한다는 해석과 구름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있다.
범영루는 『불국사고금창기』에 수미범종각이라 불렀다는 기록처럼 수미산 위 도리천(忉利天)에서 범종(梵鐘)이 울려 퍼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냈다고 할 수 있으며, 자하문부터는 천계(天界), 즉 하늘나라인 만큼 구름 위에 떠 있는 누각(樓閣)을 표현한 것이다.
팔각주의 단순한 모양을 하고 있는 좌경루의 석주와 아주 복잡한 모양을 하고 있는 범영루의 석주로 인해 자하문을 중심으로 볼 때 좌우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불국사의 좌우대칭구조가 비대칭 속의 대칭으로 되어 있는 3차원 구조임을 이해하지 못한데 기인하는 것이다.
회랑(回廊)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단순한 팔각 모양을 한 좌경루 석주 위에는 화려한 다보탑이 자리하고 있고, 복잡한 모양을 한 범영루 석주 위에는 간결한 석가탑이 자리하고 있다.
눈에 드러나게 좌우를 같게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회랑으로 슬쩍 숨겨두고 이와 같이 조화를 부리는 것은 심안(心眼)의 미학(美學)없이는 이룰 수 있는 균형미의 절정이라 할 것이다.
13) 연화교(蓮花橋)와 칠보교(七寶橋) / 국보 제22호
연화교 칠보교와 안양문
연화교와 칠보교는 국보 제22호로 일반 중생이 다니던 곳이다.
아래쪽에 있는 계단에 연꽃이 새겨져 있어 연화교라고 한다. 연꽃 문양이 심하게 마모가 되어 약간의 흔적만 보이지만 위에서 내려다보면 위쪽 홍예 부분에 선명한 연꽃 문양을 볼 수 있다. 10개의 계단으로 된 연화교는 아미타불의 48대원의 18번째인 '십년왕생(十年往生)'을 상징하는 것이다. 십년왕생이란 부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라도 임종 전에 신심(信心)과 환희심(歡喜心)을 내어 '나무아미타불'을 10번만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쪽 계단은 칠보교이다. '칠보'는 경전에 따라 그 종류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무량수경》에서는 금· 은· 파리· 마노· 거거· 유리· 산호를 이르고, 《묘법연화경》에서는 산호와 유리 대신 진주· 매괴를 넣는다. 그러나 보통은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7가지 보석, 즉 금· 은· 청옥· 수정· 진주· 마노· 호박을 가리킨다.
극락에 있는 연못과 그 주변은 이들 7가지 보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정토신앙 경전을 마련한 쿠샨왕조 시대의 화려한 보석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14) 안양문(安養門)
연화교와 칠보교를 지나면 안양문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을 통과하면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극락전(極樂殿)이 있다. 극락세계는 칠보로 장식되어 있고 연꽃으로 된 꽃비가 내린다고 한다.
안양(安養)이란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쉬게 한다"는 뜻으로 극락세계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현재의 안양문은 1960년에 중건한 건물로 고려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강릉 객사문과 도갑사 해탈문을 참고로 하여 지었다고 한다.
6. 불국사의 가람배치
불국사의 가람배치
가람배치는 불교의 세계와 부처의 가르침을 도상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종교적 배경과 당시 궁궐에 버금가는 최고의 건축으로서 엄격한 권위를 표출하고자 하는 사회적 배경, 그리고 자연지세에 어울리게 건물을 배치한 지리적 배경에 따라 구성 배치된다. 불국사 가람배치도 이러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즉, 신라인이 그린 불국의 이상적인 피안 세계를 크게 3세계로 구성하였으니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석가불의 세계, 극락전에 모신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 가장 높은 곳에서 불국을 총괄하는 비로자나불이 계시는 비로전의 영역이 그것이다.
7. 대웅전(大雄殿) 영역
1) 석가탑(釋迦塔) / 국보 제21호
석가탑
석가탑 각 부분의 명칭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시는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올린 석탑으로 신라석탑의 완성형이라고 할 수 있는 탑이다. 기단부나 탑신부에 아무런 조각이 없어 간결하고 장중하며, 각 부분의 비례가 적절하여 균형이 잡히고 지극히 안정된 느낌을 준다. 목조탑파의 형식을 답습하였던 신라초기의 석탑들과는 달리 완전한 신라식 석탑의 전형을 보여주는 탑이다.
이 석가탑은 창건 이후 원형을 잘 보존하여 왔으나, 1966년 도굴범에 의해 탑이 훼손되어 그 해 탑신부를 해체하여 복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제3층 탑신(塔身)의 상면 중앙부에 뚫린 둘레 50cm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일련의 사리장치유물(국보 제126호)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장치
그 중 현재 탑에서 분리되어 보관되는 것으로는, 금동제사리외함(金銅製舍利外函) · 은제사리외합(銀製舍利外盒) · 은제사리내합(銀製舍利內盒:높이 6.5cm, 지름 5cm) ·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 금동방형사리합(金銅方形舍利盒) · 경옥제곱은옥[硬玉製曲玉] · 청동제비천상(靑銅製飛天像) · 동경(銅鏡) 등이 있고, 그 외에 묵서명방형지속(墨書銘方形紙束)이 있다.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용기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 유물
그 밖에 이 유물 중에서 직접 사리 용기(容器)로 쓴 파리제사리병(玻璃製舍利甁) · 향목제 장경사리소병(長頸舍利小甁) · 은제소대(銀製小臺) · 금제소합(金製小盒) 등이 사리가 든 채로 모조된 사리 장치(裝置)와 함께 탑 안에 들어 있었다.
그 중 학자들 간에 다소의 논란이 있으나 세계 최고의 목판본인 무구정광다라니경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출토 당시의 묵서지편
석가탑 주위의 지면에는 네 모퉁이와 각 변의 중앙에 아름다운 연꽃을 조각한 8개의 연대(蓮臺)를 배치하고 연대 사이에 2개의 장방형 돌로 연결하여 탑구(塔區)를 설정하여 놓았는데 이것이 불국사 고금창기에서 말하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坐)이다. 팔방금강좌는 청정한 성역인 탑의 구역을 표시한 것으로 각각의 연꽃은 보살(菩薩)로 모두 8명의 보살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협시하는 것이라고도 하고 또는 팔부신중이 석가모니 부처님을 호위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석가탑 주위의 팔방금강좌
2) 다보탑(多寶塔) / 국보 제20호
다보탑
다보탑 각 부분의 명칭
다보탑은 국보 제20호로 원래 이름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住證明塔)이라고 하며 법화경 '견보탑품'에 조성 근거를 두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정(寶淨)나라에 계시던 다보여래부처님께서 서원(誓願)하시기를 '내가 만약 성불하였다가 열반한 뒤에 시방의 국토에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하는 데가 있으면, 나의 탑이 그 경전을 듣기 위하여 그 앞에 솟아올라 증명하면서 거룩하다고 찬탄하리라'고 하신데서 유래하고 있다.
이 탑은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 형태의 석재를 목조 건축물처럼 짜 맞춘 것으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하고 독창적인 탑이다. 탑신의 석재 조각에는 연화(蓮花) 외에 죽절(竹節)의 기둥, 개석을 받드는 난초꽃 모양의 받침, 그리고 국화 모양의 받침돌, 개석의 구석에 붙은 매화 모양의 장식 등이 있는데, 이를 도교(道敎)에서 말하는 매(梅) ․ 난(蘭) ․ 국(菊) ․ 죽(竹)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1 925년 일제에 의해 전면 해체 ․ 복원하였는데 아무런 보고서도 남기지 않았으며 특히 탑 속의 사리장엄구의 행방이 알려져 있지 않다. 기단 위에 있던 4마리의 사자도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3) 대웅전(大雄殿)
대웅전
대웅전은 임진왜란 후 효종 10년에 재건되었다가 다시 100년 후인 영조41년(1765년)에 천룡사의 스님인 채원(采遠)이 중창하였다.
건축을 하는데 한 조각의 철물도 쓰지 않고 완전하게 조립식으로 얽어 만든 목조 건물이다. 토축으로 단을 쌓아 그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4면에 돌계단이 있고 좌우는 회랑으로 통한다.
안에는 정면으로 수미단(須彌壇)이 있고 그 위에 목조삼존불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여래를 가운데 모시고 그 좌우에는 미륵보살과 갈라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삼존불의 좌우에는 흙으로 빚은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두 제자가 있고 동쪽에는 옥돌로 만들어진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4) 무설전(無說殿)
무설전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무설전은 불국사 여러 건물 가운데 제일 먼저 건립되었다. 670년에 이 건물을 짓고 문무왕은 의상과 그의 제자 오진 ․ 표훈 등 몇 명의 대덕(大德)에게 '화엄경'의 강론을 맡게 하였다. 1593년 임진왜란 때에 불탄 뒤 1708년 중건하여 1910년까지 보존하였으나, 그 뒤 허물어진 채 방치되어오다가 1972년 복원하였다.
무설전은 경론을 강술하는 장소로 설법을 위한 강당으로만 사용한다. 무설전이란 이름을 붙인 까닭은 진리의 본질, 불교의 오묘함은 말을 통하여 드러나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다.
무설전 안에는 지장왕보살로 추앙받고 있는 김교각 스님의 조상(彫像)을 모시고 있다. 김교각 스님은 신라 33대 성덕왕의 아드님으로 출가하여 24세 때인 719년 당나라에 건너가서 구화산 일대에서 75년 동안 수행 및 교화를 하시다가 99세 때 입적하였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은 처음부터 김지장(金地藏)으로 불릴 정도로 지장 신앙이 깊었다고 한다.
김교각 스님 조상
김교각 스님이 입적하실 때 유언하신 대로 시신을 안좌시킨 석함을 3년 후에 열어보니 살아계신 보습 그대로 생생하여 모든 승도들이 지장보살의 시현(示顯)으로 우러러 보고 육신탑(肉身塔, 지장탑)을 세워 모신 것이 오늘날 ‘구화산 지장도량의 시초가 되었는데 1,200여년이 지난 오늘가지도 참배객이 줄을 잇고 있다고 한다.
5) 대웅전 영역 건축의 수리적 조화
불국사 대웅전 영역의 수리적 조화
불국사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가람 일곽의 평면 계획에 어떤 기준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일본인 요네다 미요지이었다.
그는 불국사 일곽을 조형함에 있어 지할(地割)이라고 일컫는 기준단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점을 실제 측량을 통하여 입증하려고 하였다. 그의 이런 노력의 성과는 유고집인 "조선상대 건축의 연구" 중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고, 그 요지는 대략 아래와 같다.
불국사 가람의 실측치를 비교해보니 당시에 사용된 당척(唐尺)1척은 0.980125곡척(曲尺)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와 같은 당척을 기준으로 하여 불국사 일곽을 실측해본 결과, 동서 양 탑의 중심거리는 86당척이며, 이를 2등분한 43당척이 불국사의 평면 기준길이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즉, 이 길이로써 동서 탑심(東西 塔心)으로부터 동서의 회랑 위치를 측정하면 회랑 바깥쪽 기둥중심(柱心)에 일치하고, 남쪽 회랑 바깥쪽 기둥 중심을 기점으로 하여 43당척씩 접어가다가 그 일치점을 북쪽에서 찾으면 약 3촌(寸)의 차이를 두고 무설전의 앞쪽 두번째 기둥선과 만나고, 이는 또한 북쪽 회랑의 안쪽 기둥중심 위치와도 일치한다.
이를 대웅전 영역에서 보면, 회랑의 가로면 길이는 43당척의 4배가 되고, 회랑의 세로면 길이는 43당척의 5배가 되어 전체적으로 4:5의 직사각형을 이룬다. 그리고 자하문의 도리간은 17.2당척으로 이는 기준길이인 43당척의 3분의 2에 일치하고, 무설전의 보간 1칸의 기둥거리 12.15당척은 43당척을 한 변으로 한 정방형의 대각선 길이의 5분의 1에 해당한다.
대웅전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직사각형을 상정할 때 그 윗변의 중심점을 꼭지점으로 하여, 그 직사각형의 아랫쪽 꼭지점을 잇는 선을 그으면, 그 선은 남쪽 회랑의 각 꼭지점에 일치한다.
특히, 놀라운 것은 대웅전의 앞쪽 계단 첫째부분의 중앙을 중심으로 하여 동탑의 중심을 반지름으로 하는 원으로 그으면, 그 원은 서탑의 중심을 지나고, 바로 대웅전을 이루는 직사각형의 윗변의 중심점을 지난다.
이러한 지할(地割)은 동서 양탑의 기준길이가 된다. 즉, 석가탑과 다보탑의 하층 기단대석의 폭은 43당척의 3분의 1인 14.6당척에 가깝다. 이러한 지할관계는 43당척을 기준길이를 하여 삼각형과 원형을 이루면서 양 탑과 회랑, 무설전의 위치와 크기를 결정하였다고 보여진다.
또한, 석가탑의 크기는 바로 대웅전의 크기에 정확하게 비례관계를 이루도록 건축되었다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대웅전의 보간 총길이인 52.8당척의 10분의 1인 5.28당척이 바로 석가탑 제1층 탑신의 하부 폭에 일치하고, 대웅전의 도리간 총길이 46.8당척의 10분의 1인 4.68당척이 석가탑의 1층 탑신부 높이인 것이다.
그리고 요네다 미요지가 발견한 바와 같이 석가탑의 1층 탑신의 하부 폭과 높이가 바로 대웅전의 보간, 도리간 길이의 10분의 1로써 결정되었다는 것은, 헬레니즘 시대의 비트루비우스가 그의 저서 『건축사』에서 말한 균제 비례와 같다.
비트루비우스는 건축에서 강도와 실용성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중요하며, 건축의 아름다움은 건물 치수들이 적당한 균제 비례를 이룰 때라고 보았다. 사실 균제 비례는 인체의 치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턱에서 이마 끝까지의 안면은 신장의 10분의 1이고, 손목에서 중지 아랫선까지의 손바닥은 팔 길이의 10분의 1이 된다. 비트루비우스는 인체가 이처럼 전체적으로 비례에 맞추어 만들어졌으므로, 건축도 이러한 균제 비례를 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가 "아름답다", "조화롭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 바로 이 비라고 한다.
8. 극락전(極樂殿) 영역
1) 극락전
극락전
아미타불을 보신 법당이 사찰의 주된 전각일 경우에는 극락보전(極樂寶殿) ․ 보광명전(寶光明殿) ․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하는데 이곳 불국사와 같이 부속 전각일 경우에는 극락전(極樂殿)이라고 하며 아미타전(阿彌陀殿) ․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에 계시면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부처님으로 무량수불(無量壽佛) 또는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끝이 없어 백천억 불국토를 비춘다고 하여 무량광불이라 하고, 수명 또한 끝이 없이 백천억 겁으로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하여 무량수불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 앞에는 탑이 없다. 그 이유는 아미타불은 열반에 드신 적이 없기 때문에 불사리를 모신 탑을 조성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극락전은 임진왜란 대 불타버린 것을 영조 26년(1750년)에 중창하였으며, 1925년 일제 때 다시 중수한 전각이다.
이 전각 안에 모셔진 금동아미타불(국보 제21호)은 『삼국사기』와 최치원의 찬기에 의하면 비로전의 비로자나불과 함께 진흥왕 때 왕의 모후 지소부인을 위해 주조한 것이라고 하나, 김대성에 의해 불국사가 중창될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 큰 육계(肉髻)가 솟아있고 풍만한 얼굴과 높은 코에 두 눈은 정안(正眼) 정시(正視)를 하고 자비와 위엄이 넘치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사를 왼쪽 어깨에 걸친 편단우견을 하고 수인은 중품중생인이다.
2) 극락전 벽화
불국사는 어느 사찰과는 달리 전각 안팎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은데 유일하게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도'와 '반야용선도', '선녀도'가 그려져 있다.
이곳 극락전에는 좌우에 협시보살을 두지 않고 주불(主佛)인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다. 그 대신 중앙에 아미타불과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아미타삼존도 후불탱화가 있다.
아미타불에게는 자비문(慈悲門)과 지혜문(智慧門)이 있는데, 이 가운데 관음은 자비문을, 대세지는 지혜문을 각각 표시함으로써 이 양대 보살이 불교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대표하는 보살이라 하겠다. 관음이 자비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면 대세지는 지혜의 문으로써 중생을 제도한다. 즉 세지보살은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비치어 지옥 ․ 아귀 ․ 축생의 삼악도를 여의게 하고 무한한 힘을 주므로 대세지라고 한다는 것이다. 관음보살이 머리의 보관에 아미타불을 나타내는 데 비하여, 대세지보살은 아미타불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머리의 보관에 보병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손에는 연꽃을 들거나 합장을 하기도 한다. 연꽃의 의미는 중생이 본래 갖춘 불성(佛性)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극락전의 오른쪽에 보이는 벽화가 반야용선도이다. 반야용선은 중생들을 태워서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건너게 한다.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것은 지혜의 완성을 향해 가는 길이자, 극락으로 가는 길이다.
반야용선의 선장은 인로왕보살로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으로 가는 길을 인도해 준다고 한다. 벽화에 보이는 나루는 아미타삼존불께서 마중 나오시는 모습과 하늘에서 비천(飛天)이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극락전 천정 아래에는 선녀도가 그려져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에 새겨진 비천상이 신라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 선녀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훼손이 심하다.
3) 48원교(願橋)
48원교
극락전에서 법화경의 영산불국을 상징하는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이 계단은 아미타불이 전생에 수행자 시절 세웠던 48가지 서원(誓願)을 상징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은 과거세인 법장비구 시절에 수행을 하면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그 서원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열심히 수행을 하여 서방정토의 48가지 서원이 충족된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이 되셨다.
계단이 3열로 된 것은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의 구품 세계를, 각 열에는 16계단식 모두 48계단이 되는데 이것이 48대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법당에서 가운데 문은 어간문이라고 해서 큰스님이 출입하고 일반 신도들은 좌우에 있는 문을 통해 출입하는 것이 예의인데, 여기에 있는 48원교도 가운데 통로는 비워두고 좌우에 있는 통로로 다니는 것이 예의이다.
9. 관음전(觀音殿)과 비로전(毘盧殿)영역
1) 관음전(觀音殿)
관음전
관음전은 불국사에서 가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무설전 뒤에 있는 계단으로 오르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을 낙가교(洛加橋)라고 하며 들어가는 문을 해안문(海岸門)이라고 한다. 관음전을 높은 곳에 짓는 것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 보타락가산으로 바위 절벽으로 된 산이었던 것에서 연유한다.
낙가교
이 관음전은 김대성에 의해 중건될 때 6간이었는데, 중수를 거듭해 오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7년(1604년) 해청(海淸)스님에 의해 재건되었고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일제 초기가지 내려오다가 퇴락하여 없어진 것을 1972년에 재건한 것이다.
원래 안치되었던 관음보살상은 신라 54대 경명왕 6년(922년)에 왕비께서 낙지(樂支)에게 명하여 전단향목(栴檀香木)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영험이 있기로는 중생사의 보살상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2) 비로전(毘盧殿)
비로전
이곳에 비로자나불(국보 제26호)을 모신 전각을 따로 건립한 것은 화엄경에 의한 신앙의 흐름이 불국사의 성역 안에 자리 잡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비로전은 751년 김대성이 18칸으로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현종1년(1660)에 중수하였으나, 조선 말기에 무너져서 터만 남은 것을 1973년 복원공사 때 현재의 건물을 지어서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 불상은 원래 대웅전에 있다가 일제시대 극락전에 임시로 안치하였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봉안하게 된 것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으로 대좌와 광배는 없어졌으나 불신의 높이가 177cm로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의 금동아미타불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백률사 금동약사여래 입상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의 하나이다.
특히 수인이 일반적인 지권인과는 반대로 오른손이 아래, 왼손이 위로 올라가 있다.
3) 비로전 옆의 부도(浮屠) / 보물 제61호
비로전 앞의 부도
부도는 고승(高僧)의 사리를 모시는 일종의 석탑이다. 일반적으로 부도의 모양은 모두 비슷하게 돌 기단 위에 종모양의 둥근 돌을 올리고 연꽃을 조각한 그 위에 지붕돌을 얹는 형식이다. 그러나 이 부도는 독특한 형태와 정교한 조각으로 다른 데서는 그 예를 볼 수가 없어 보물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부도는 1905년 일본인에 의해 동경 우에노 공원으로 불법 반출되었다가 1933년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이 부도는 겉모양이 석등과 비슷한데 불국사사적기에 광학부도(光學浮屠)라는 것이 있는 데 바로 이 부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의 부도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감실의 불상 양식이나 중대석의 구름무늬 그리고 탑신부의 기둥모양 윤곽선 표현 등이 비추어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구조는 상대석, 중대석, 하대석에 탑신과 옥계석을 얹은 형태이며 육각형의 땅을 덮은 돌 위에 연꽃받침을 하고 구름문양을 양각으로 새긴 기둥을 세웠다. 그리고 그 위에 탑신을 얹고 지붕돌을 덮었다. 탑신 사방에는 감실을 파고 여래좌상 2구와 보살입상 2구를 새겼으며, 위에는 구름인 듯한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10. 기타 석조물(石造物)
1)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절의 입구에 당간을 세우는 기둥을 말한다. 당간이란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 주는 장대라는 뜻으로, 때로는 불교 종파를 나타내는 기치(旗幟)로서 절의 문전에 세워진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당은 없고 드물게 당간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은 이 불국사 당간지주처럼 당간을 받치는 돌로 만든 지주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국사에는 연화 ․ 칠보교의 앞뜰에 당간지주 2기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지금의 위치가 원래의 위치는 아니다. 연화 ․ 칠보교의 왼쪽에 있는 것은 기둥머리가 안쪽을 향해 반원을 그리고 앞뒷면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약간 턱진 테두리가 둘러져 있으며 중앙에는 도드라진 종선(縱線)이 있다. 안쪽 옆면의 아래쪽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네모진 구멍이 마주보게 뚫려 있고 왼쪽 기둥 윗부분에도 또 하나의 구멍이 있다.
오른쪽의 당간지주에서 오른쪽 기둥은 원래의 것이지만 왼쪽 기둥은 후에 보완된 것이다. 위의 당간지주와 거의 같은 형식이나 반원형의 기둥머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1단의 굴곡이 있는 점이 다르다. 당간지주의 양식 변화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지만 지주의 바깥 면에 새겨진 종선의 문양대와 받침과 기단의 형식으로 보아 이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2) 석등(石燈)과 봉로대(峯爐臺)
극락전 앞의 석등과 봉로대
석등은 대웅전과 극락전 앞 두 곳에 있다.
대웅전의 석등은 하대석 ․ 간주석 ․ 상대석 ․ 화사석 ․ 옥개석이 모두 팔각으로 된 신라 전형의 양식으로 각 부위는 각각 한 몸으로 조각되었다. 네모진 지대석과 한 몸으로 조각된 하대석은 8잎의 복판 앙련이 둘러져 있고 뒷면에 각진 괴임을 만들어 팔각의 간주를 받는다. 팔각의 화사석에는 사방에 네모진 화창(火窓)이 뚫려 있는데, 화창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근 못구멍이 뚫려져 있어 원래는 별도의 문비(門扉) 장식을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 놓인 옥개석 내부는 화사석의 내부 공간과 연결되게 둥글게 패여 있다. 옥개석 정상에도 연꽃을 양각하여 상륜을 받게 하였는데, 현재 상륜은 모두 없어지고 후대에 만든 보주가 얹혀있다.
극락전의 석등 역시 대웅전의 것과 동일한 형식이지만 하대석의 복련이 단판이고 경사가 심하며 화사석의 화창 가장자리에 못구멍이 없는 등 전체 조각 수법은 약간 떨어진다. 앙련석은 아래의 복련석을 모방하여 복원한 것이며 상륜 역시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세부 형식의 차이로 보아 대웅전의 석등보다는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석등 앞에 놓인 네모진 대석을 배례석(拜禮石)이라 하는데 『불국사고금역대기』에서는 이를 봉로대라 하였다. 향 공양을 위한 향로를 안치하는 대석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대웅전과 극락전의 석등 앞에 있는 배례석은 모두 같은 형식이지만 극락전의 것은 두 조각으로 절단되어 있고 하단에 3단의 각진 괴임이 둘러져 있다. 흔히 배례석의 윗면 중앙에는 둥근 연꽃이 새겨지지만 여기서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단지 옆면 긴 쪽에 2구씩, 짧은 쪽에 1구씩 이빨 모양의 돌기가 난 안상이 새겨져 있을 뿐이다.
3) 석조(石槽) / 보물 제1523호
불국사의 청운 ․ 백운교 앞 동쪽과 당간지주 옆 그리고 향로전 뒤쪽에 각각 3기의 석조가 있다. 이 가운데 석축 동쪽의 것은 신라의 석조 가운데에서도 걸작에 속한다.
보물 제1523호로 지정된 석조
신라의 석조는 대체로 장방형을 기본형으로 하면서 바깥 면에 커다란 안상을 새기거나 석탑의 우주와 탱주 같은 새로 구획선을 새긴 형식이 일반적이지만, 이 석조는 네 귀를 모두 굴곡시켜 꽃모양으로 만들고 몸체의 바깥 면에는 옆으로 띠를 둘러 구획을 짓고 아래 띠 속에 각각 6개와 3개씩의 안상을 새겨 놓았다. 안쪽의 옆면에는 연꽃을 음각하고 바닥에도 커다란 연꽃을 가득히 음각하여 물이 찼을 때 마치 연꽃이 떠 있는 듯한 효과를 냈다.
4) 석조 비로자나삼존불 대좌
비로자나 삼존불 대죄
종각 남동쪽 통로 옆에 있는 이 석조 비로자나삼존불 대좌는 1969년 발굴조사 때 출토된 석조물 중의 일부이다. 이들 대좌는 삼존불의 대좌로 추정되지만 본존이나 협시보살상은 남아 있지 않고 대좌 자체도 깨어진 채 출토되었다. 그러나 네모진 받침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자와 코끼리 대좌는 문수와 보현보살의 대좌로 추정된다. 사자와 코끼리를 탄 문수 ․ 보현보살이 협시하는 비로자나삼존불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현재 성주 법수사와 이곳 불국사의 것이 유일한 사례이다.
본존의 대좌는 9세기 중엽에 유행하던 팔각대좌인데 그 구조나 삼단으로 각진 괴임의 형식, 그리고 연꽃잎 속에 다시 복잡한 꽃무늬를 새긴 조각 솜씨 등은 동화사 비로암 석조 비로자나불과 법수사 삼존불 대좌와 흡사하다.
사자좌와 코끼리좌는 머리가 떨어지고 심하게 훼손되었지만 위가 좁은 직사각형의 하대와 그 위에 웅크리고 있는 사자와 코끼리의 모습 역시 법수사의 그것과 같다.
『불국사고금역대기』에는 751년 중창 당시 문수전에 모신 비로자나불 석상과 좌우의 문수 ․ 보현보살 좌대가 산불로 소실되었다고 하는데 이들 대좌는 그 양식으로 미루어 불국사가 중창되는 진성여왕 원년(887)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5) 석조 변기(便器)?
석조 변기
법화전 터 뒤쪽으로 가면 석조가 있는데 그 주위로 여러 가지 형태의 석재들이 늘려 있다. 그 중에 이상한 형태의 석조물을 볼 수 있다. 돌로 된 변기이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고 그 수가 많다. 흔히 이것을 매화석이라고도 한다. 궁중에서는 왕과 왕비의 대변을 그냥 변이라고 하기 어려워 '매화(梅花)'라고 불렀다. 천 년 전 스님들이 사용하던 석조 변기라고 해서 그 격을 높여 매화석으로 부르는 것 같다.
<참고자료>
불국사 경내에 있는 문화재
국보
1. 국보 제 20호 불국사다보탑
2. 국보 제 21호 불국사삼층석탑
3. 국보 제 22호 불국사연화교칠보교
4. 국보 제 23호 불국사청운교백운교
5. 국보 제 26호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6. 국보 제 27호 불국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
7. 국보 제 126호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현재 국립박물관 소장)
보물
1. 보물 제61호 불국사사리탑
2. 보물 제1523호 불국사석조
사적
제502호 경주불국사
창건설화(創建說話)
『삼국유사』효선편(孝善編) 대성효이세부모조(大城孝二世父母條)는 『鄕傳』에 실린 것을 인용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 연기설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해 성과 같았다. 그래서 대성이라고 이름했다. 집이 궁색하여 생활할 수 없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품팔이를 하고 그 집에서 준 약간의 밭으로 의식(衣食)을 해결했다.
어느 날 덕망 있는 스님 점개(漸開)가 육륜회(六輪會)를 흥륜사에서 열고자 하여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했다.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니 점개가 다음과 같이 축원했다.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항상 수호하리라. 하나의 보시로 만 배를 얻으시고 안락하며 장수하소서."
대성이 이를 듣고 뛰어 들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제가 문 밖에서 들으니,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 합니다. 생각건대 우리가 전생에 선한 일을 못했기에 지금 이렇게 가난한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가난할 것이니,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보시하여 훗날 과보를 도모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어머니도 좋다고 하여 그 밭을 점개에게 보시했다.
얼마 뒤 대성이 죽었는데 그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리기를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를 네 집에 맡기겠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사람을 모량리에 보내 알아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외침이 있던 그 날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폈는데 '대성'이라고 새겨진 금간자(金簡子, 금으로 만든 패)가 있어 이름을 대성이라 짓고 그의 예전 어머니를 모셔다가 함께 봉양하였다.
다 자라서는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잤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하여 시비를 했다. "네가 어째서 나를 죽였는가?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먹겠다." 대성이 두려워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줄 수 있겠느냐?" 대성은 그렇게 하겠다고 맹서하고 꿈을 깨니 땀으로 잠자리가 젖었다. 이로부터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하여 곰을 잡았던 그 자리에 장수사를 세웠다.
이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원력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현생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창건하여 신림(神琳) ․ 표훈(表訓) 두 성사(聖師)를 청하여 각각 거주케 하였다.
불상을 성대히 설치해 기르신 은혜를 갚았으니, 한 몸으로 두 세상의 부모에게 효도한 것은 옛적에도 듣기 힘든 것이었다. 이에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아사달(阿斯達)과 아사녀(阿斯女)
석가탑의 정식 명칭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說法塔)으로 백제의 장인 '아사달(阿斯達)'이 만들었고 이 탑에는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와의 슬픈 사랑이 얽힌 설화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석가탑에 얽힌 설화는 빙허(憑虛) 현진건이 지난 193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석가탑 건립과 관련한 전설을 다룬 역사 소설인 '무영탑(無影塔)'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 전설이 마치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로 믿는 사람이 많다. '소설적 허구'가 '역사적 진실'로 둔갑한 것이다. 이 소설이 발표된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는 마치 1천여 년도 넘는 신라시대 때 있었던 이야기로 인식돼 가고 있는 것이다.
소설 무영탑에는 김대성이 얻은 천하의 명공 아사달은 부여 사람이다. 그는 백제에서 가장 이름 높던 석수 명장인 부석의 수제자로 등장한다. 원로 부석의 딸 아사녀와 신혼가정을 이루고 나서 사랑의 단꿈에 깨어나기도 전에 백제의 명예를 짊어지고 아사달은 서라벌에 파견된다. 그 후 아사녀는 남편 아사달을 못잊어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왔으나 결국 남편을 만나보지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것이다.
원래 무영탑 이야기는 일본 동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는 불국사 고금창기의 설화가 바탕이다.
불국사 고금창기의 원 이름은 '경상도강좌대도호부 경주동령토함산 대화엄종불국사고금 역대제현계창기(慶尙道江左大都護府 慶州東嶺吐含山 大華嚴宗佛國寺古今 歷代諸賢繼創記)이며 영조 16년(1740) 5월에 동은(東隱) 화상이 지었다. 불국사의 역사적 배경, 건축물과 유물에 대해 비교적 소상히 적어서 현재로서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사적기로 평가되고 있다.
고금창기에 의하면 '석가탑은 일명 무영탑이라고 한다. 불국사 건축 때 장공(匠工) 가운데 당(唐)나라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한 누이동생이 있어 아사녀(阿斯女)라고 했다. 아사녀가 그 장공을 찾아왔으나 감독관이 이르기를 대공(大功)이 아직 완료되지 않아 안 되니 이튿날 아침 서방 십리쯤 된 곳에 가면 천연의 못이 있을 터이니 그 못에 가면 탑 그림자가 비칠 것이라 했다. 그녀는 이 말을 따라 거기에 가보니 탑의 그림자가 없었다. 그래서 이 탑의 이름을 무영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영탑 소설에서 고금창기 아사녀 이름에서 '아사달'이라는 가상인물을 등장시켜 아사녀의 남편으로 만든 것이다. 원문에 나온 '매(妹)'자는 '누이'를 뜻하는 것이지 소설에서처럼 '아내'가 아닌 것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믿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표훈(表訓)과 신림(神琳)
김대성의 신앙심이 아무리 독실하고 정치 ․ 경제적 배경이 막강하며 예술가로서의 안목과 재능을 갖추었다 해도, 그 혼자만의 힘으로 불국사를 조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대 명장들의 수많은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대역사였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신라인의 솜씨와 기술은 대단한 수준이었다. 이 무렵 만불산(萬佛山)을 만들 수 있는 뛰어난 장인이 있었고, 30만 근의 분황사 약사여래상을 만든 강고내말과 봉덕사종을 주조한 박한미 등이 있었다. 봉덕사종의 4배가 되는 황룡사종을 만든 것도, 지리산 화엄사가 창건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만불산은 높이 한 발 정도의 인공산에 1만 불상과 1천 여 승상을 조각한 것으로, 이를 선물로 받았던 당나라 대종이 "신라의 기교는 천조(天造)"라고까지 감탄할 정도의 뛰어난 작품이었다. 이처럼 8세기 중반 신라의 기술과 예술적 수준은 높았고, 이것이 곧 불국사가 창건될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성은 신도였다. 이것은 불국사 창건을 위해서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한계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자문에 응하면서 그를 도운 고승이 있었을 것이다. 불국사와 석불사에 처음으로 청해서 모신 승려는 김대성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향전』에는 신림과 표훈 두 성사를 청했다고 했고, 『사중기』에는 유가대덕(瑜伽大德)이었다고 해서 약간의 혼란이 있다. 그러나 표훈과 신림이 불국사 창건과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이들의 부도가 이 절에 있었고 또 다른 기록에도 이들이 불국사와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표훈은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흥륜사 금당에 모셨던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이었다. 그는 경덕왕 때 대표적인 화엄학자였고, 국왕과도 깊은 인연을 맺었던 영향력 있는 고승이었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을 강의했고, 찾아온 김대성에게도 화엄의 3종 삼매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던 사실이 있었다. 이처럼 표훈은 대성과 특별한 인연으로 해서 불국사에 주석했음이 분명한 것 같다.
신림 또한 불국사에서 베풀어진 법회를 주관하고 화엄 교학을 강의한 일이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신림은 의상의 손제자로 부석(浮石)의 적손이었다. 그는 8세기 중엽을 중심으로 그 전후 시기에 활동했다. 그가 부석사에서 법회를 이끌고 있을 때 천 여 명의 대중이 운집했고, 그의 문하에 법융(法融) ․ 순응(順應) 등 많은 학승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신림도 당시의 대표적이 화엄학자였다. 신림이 표훈과 마찬가지로 김대성의 불국사 창건에 어떤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유가대덕도 불국사와 어떤 형태의 인연이 있었을 것이지만 구체적이 자료는 없다. 유가대덕을 유가종의 대덕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렵다.
출처 : 김상현 ․ 김동현 ․ 곽동석, 불국사, 대원각, 2008
경덕왕(景德王)과 표훈대덕(表勳大德)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表勳大德)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上帝)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마는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될 수는 있지마는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표훈이 내려오려 할 때 상제는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문란할 수 없는 것인데 지금 대사가 (하늘과 사람 사이를) 이웃 마을처럼 왕래하여 천기(天機)를 누설했으니 이후로는 다시 다니지 말아야 한다."
표훈이 돌아와서 천제의 말로써 왕을 깨우쳤으나, 왕은 말했다.
"나라는 비록 위태하더라도 아들을 얻어 뒤를 잇게 한다면 만족하겠소."
그 후 만월왕후가 태자를 낳으니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는 8세 때에 왕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미처 막아낼 수 없었다. 표훈이 말이 그대로 맞았다.
왕은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으므로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항상 부녀(婦女)가 하는 짓만 했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함께 희롱했다. 그러므로 나라에 큰 난리가 생겨 마침내 선덕왕이 된 김양상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표훈 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않았다 한다.
출처 : 『삼국유사』기이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 조
불국사 석축(石築)에 내진(耐震) 공법이 적용되었다.
활성단층이 지나가는 불국사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지반이 가장 불안정한 곳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역사문헌에는 통일신라시대인 779년에 ‘땅이 흔들리고 민가가 무너져 죽은 자가 100여명이나 됐다’는 문헌상 최대의 지진 피해도 기록됐다. 그런데도 불국사가 1200여년 동안 지진을 견디며 거의 본래 모습을 지켜온 비결은 뭘까?
불국사의 내진구조를 조사해온 황상일 경북대 교수(지리학)는 2007년 11월 “비탈진 곳에 돌을 쌓아 건물 터로 만든 불국사 남쪽과 서쪽 기단부 석축에 여러 내진공법이 적용됐음을 확인했다”며 8세기 신라인은 돌을 활용한 세계 수준의 내진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석축이 땅과 건물 사이에서 지진에너지를 흡수하는 완충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이번 조사에서 불국사 600m 반경 안에 기존에 알려진 3개의 활성단층 외에 경내 밑을 지날 가능성이 큰 활성단층 하나가 더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그러나 대웅전 남회랑 석축과 석가탑 하부구조 등에 쓰인 그렝이’ 기법(울퉁불퉁한 자연석 위에다 맞닿는 면을 맞춰 다듬은 석재를 얹는 것) 등 내진설계가 불국사를 지켜왔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목조 양식을 석재에 응용한 이런 구조는 지진 때 좌우 흔들림을 잘 견디고 석재들 사이에 틈을 두어 석재들의 미세한 운동과 열, 소리 에너지로 지진에너지를 상당량 소모시킨다”고 말했다. 또 청운교·백운교의 ‘결구(짜맞춤)’나 석축에 박힌 ‘동틀돌’ 등에도 목조 건축양식의 내진 기능이 응용됐다.
황 교수는 “지진 때 석축 안쪽에 쌓은 석재들이 흔들리지 않게 석축에 못처럼 규칙적으로 박아둔 길이 1.8m 동틀돌의 내진공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신라만의 뛰어난 건축술”이라고 말했다.
이 조사연구는 <대한지리학회지>에 발표됐다.
출처 : 한겨레신문 2007-11-12 일자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 관음보살벽화 2점 발견
대웅전 후불벽에 발견된 벽화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사)성보문화재연구원(원장 범하 스님)을 통해 추진 중인 『사찰건축물 벽화 조사사업』중 경주 불국사 대웅전 후불벽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2구의 관음보살벽화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들 벽화는 후대에 덧칠해진 호분(胡粉)에 가려져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올해 초 성보문화재연구원의 예비조사 중 존재가 확인된 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조사·분석(적외선 촬영)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도상(圖像)을 판독하게 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도상을 보면 우측은 백의관음보살도(白衣觀音菩薩圖, 33관음중 하나로 아이의 출산과 생명을 보살피며, 흰 옷을 입고 있음)이며, 좌측은 어람관음보살도(魚籃觀音菩薩圖, 33관음중 하나로 나찰, 독룡, 아귀의 해를 제거해 주는 관음으로 모습은 물고기를 타고 있거나 물고기가 가득찬 어람 즉 소쿠리를 들고 있음)이다. 크기는 2구 각각 세로 4.3m, 가로 1.8m 내외이다. 이들은 18세기의 도상적 특징들을 갖춘 18세기 불화로 편년되는데, 이중 물고기 담은 바구니를 들고 있는 형상의 어람관음보살도는 현존하는 벽화 중 양산 신흥사의 예(17세기)를 제외하면, 18세기의 벽화로는 유일하다.
이들 벽화에 대한 정밀조사는 최근 완료되었으며, 조사결과는 올해 말 발간할 『한국의 사찰벽화(경북 남부편)』보고서에 수록할 예정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조사에서는 그간 일반적으로 진행했던 벽화에 대한 사진촬영·상태기록 외에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과학적 분석조사(적외선 촬영, 안료분석)가 더해져 보다 진일보한 조사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를 계기로 사찰벽화에 대한 과학적 분석조사를 지속적으로 실시해 향후 사찰벽화의 보존을 위한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토록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한국의 사찰벽화 조사사업’은 탈색·박락 등으로 훼손이 가중되고 있는 전국의 사찰벽화 보존을 위한 기초자료 수집 및 중요 벽화의 지정을 목적으로 2006년부터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2010년에는 경북 남부지역을 대상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출전 : 어니스트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