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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인수 신부 "인천교구 정의평화운동의 주역은 평신도" | ||||||||||||||||||||||||||||||||||||||
인천교구 사회교리학교, 인천교구 정의평화운동사에 대한 대담 나눠 군사독재하 <인천주보>와 민중대학이 민주화 운동 북돋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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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31일 열린 인천교구 사회교리학교 여섯 번째 시간은 ‘인천교구의 사회적 가르침 실현, 인천교구 정의평화운동사’라는 주제로 당시 평신도로서 운동에 참여했던 한상욱, 장정옥, 이명준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호인수 신부(인천교구 고강동 본당 주임)가 대담을 이끌었다.
우선 80년대 인천교구 청년회에서 총무로 활동했던 한상욱씨는 70~80년대 인천교구 정의평화운동이 어떻게 자리매김했는가에 대해 살폈다. 인천교구 정의평화운동은 67년 말부터 68년 초에 발생한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으로부터 시작됐다. 강화성당 노동청년회와 사업주측 사이에 발생한 노동문제는 가톨릭교회 전체 차원의 연대로 해결됐으며, 이후 1974년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 구속에 대한 석방 운동, 75년 4월 인혁당 사건으로 인한 인천교구 부교구장 진 시노트 신부 강제출국, 76년 4월 인천교구 정의평화위원회 발족, 77년 동일방직 사건과 유신독재 반대 유인물 제작 및 배포로 김병상, 황상근 신부 구속 등 유신독재에 대한 저항의 시간으로 전개된다.
또 1980년대는 5.18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한 군부독재의 폭력 규탄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에 저항해 사회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특히 1979년부터 교구 통합으로 제작됐던 <인천주보>는 민주화를 위한 여론 형성과 독재 비판에 큰 역할을 했다. 또 가톨릭 노동청년회와 가톨릭 학생회 활동, 민중대학, 사도학교 운영 등은 당시 민주화에 갈증을 느끼는 이들이 연대하고 활동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어지는 90년대는 80년대 말부터 위축되기 시작한 정의평화운동의 맥락을 이어받았지만, 중요한 지역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대책위원회 등을 통해 연대와 지원 활동을 하면서, 계양산 개발 반대 운동,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운동, 영흥도 화력발전소 저지 운동 등에 참여했다.
호인수 신부는 “지난 시간 교회의 정의평화운동의 흐름을 보면 정의평화운동의 주역이 주교나 신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실제로 일하고 몸으로 저항하며 고생했던 이들은 평신도들이었다. 신부들은 그들이 알려주는대로 따랐을 뿐”이라고 하면서, “1977년 김병상 신부 석방 기도회 성명서를 쓴 일로 연행된 적이 있다. 그때 아무것도 몰라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나를 공부하고 행동하게 했다”고 고백했다. 또 호인수 신부는 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특히 인천교구에서는 주안성당을 중심으로 가톨릭 교회가 민주화항쟁을 주도했지만 그 이후로 가톨릭 사회운동이 전반적으로 주변부로 밀려났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에 대해 한상욱씨는 “교회가 세상과 분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교회가 있고 세상과 함께 해야만 세상의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 정의와 평화라는 가치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행동해야 함에도 단절된 것은 바로 우리들의 몫이다”라고 성찰하면서, “지금 이런 자리에서 단지 과거에 대해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 계승하며 실천해야 할 것들이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전했다. 한편 인천교구 정평위 측은 다음 시간에 송경동 시인이 노동과 인권을 주제로 강의할 예정이었지만, 부득이한 사정으로 천주교 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으로 강사가 교체됐다고 알렸다. 다음 일곱 번 째 강의는 11월 7일 오후 7시 30분에 진행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