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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10. 사순절 넷째 주일
예배 시편 / 시편 37편 1-11절
찬송 / 144장 · 예수 나를 위하여
성서 / 이사야 53장 1-12절, 고린도후서 5장 11-21절
말씀 /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이사야 53장 4절)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5장 21절)
김윤식 목사
Ⅰ
신경과학과 뇌과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폭력 또한 신체와 뇌에 손상을 일으킨다고 합니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성폭력과 같은 물리적 폭력만이 아니라, 폭언이나 따돌림이나 괴롭힘처럼 정서적인 폭력도 뇌신경에 실질적인 손상을 일으킨다는 것이지요. 이를 치료하고 회복하기 위해서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물을 사용하기도 하고, 신경계를 복원하는 시술이나 재활을 우울이나 불안 장애 등의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최근 여러 연구들은 종교적인 경건 활동이 우울증이나 불면증 및 감정 장애의 회복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밝혔습니다. 종교적 경건활동을 수행한 이들의 뇌를 촬영하고 관찰해 보니 뇌 기능이 강화되고 활성화된 것뿐 아니라, 자기 인식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도 향상되더라는 것이지요. 특히,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요즘 명상이 큰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바쁜 현대인의 지나친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삶과 일의 균형을 찾는 좋은 도구로 곳곳에서 명상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종교적 가치가 배제된 명상이 지나치게 유행하는 것에 대해서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그릇된 명상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더 나은 나를 찾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현실을 잊고 외면하는 손쉬운 도구로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또한, 맹목적인 명상은 물리적이거나 정서적인 폭력의 피해자에게도 치료약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고도 경고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현실을 회피하게 하고, 그 마음속에서 어려움과 그 해결까지 찾도록 강요한다는 것이지요. 잘못된 명상이 피해자에게 근본적인 원인과 문제를 외면하게 하고,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씌울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물론, 명상처럼 나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은 어렵지만,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나를 돌아보고 이해하는 것만큼, 다른 이들을 이해하고,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과 이 땅의 현실과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
어쩌면, 여기에 명상과 기도의 중요한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기도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기도를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하지요. 우리는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간구를 드리기도 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그분의 뜻을 묻고, 구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 주변에 있는 다른 이를 위한 소통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릴 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에 공감하고, 동참하지요.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하며 세상의 고난에 귀 기울이고, 그 고난에 연대하고, 참여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서로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기도의 중요한 특권이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인들에게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살후 3:1).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곳곳에서 방해를 하고, 악과 폭력을 행하는 이들이 있었지만(살후 3:2-3), 바울도 교인들도 서로를 향한 기도 덕분에 그 어려움들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 믿음과 사랑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새기는 일이지만,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할 수 있고, 서로를 위해 기도를 할 수 있는 것, 세상을 위해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권이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특징입니다.
Ⅱ
오늘 우리는 구약 말씀으로 이사야서 53장에 있는 고난의 종에 관한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이사야는 고운 모양도, 훌륭한 풍채도, 아름다운 모습도 없는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겪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병을 앓고 있으니, 사람들이 얼굴을 돌리고, 멸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바로 그 사람에게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은,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은 희망을 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이사야 53장 7-9절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종인 이 사람은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았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가 왜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끌려가고,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가 불법을 행하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니, 억울하고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억울하고 부당한 고난이 불의와 거짓과 폭력에 ‘아니오’라고 항거한 결과임을 암시하는 것도 같습니다. 어쨌든, 그는 부당하고 억울하게 굴욕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끌려갔고, 체포되었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억울한 고난이 억울하고 허망하게 끝난 것은 아닙니다. 비록 그는 말없이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사람의 고난과 죽음 이후에 “우리”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변했습니다. 한 사람의 고난이 지나간 후에 “우리”는 우리가 겪어야 할, 겪었어야 할 고난을 그 사람이 대신 겪었다고 고백하지요. 게다가 그 사람 덕분에, 나음과 평화를 얻었다고 깨닫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종이 겪은 고난이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그가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이 새롭게 변한 것이지요. 이사야 53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난 뒤에, 그는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다.” 마침내, 고난받는 종은 의로운 종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는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 뒤에 있을 생명의 빛을 보고 만족합니다. 새롭게 변화할 사람들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변화가 어둠 속에서 동터오는 새로운 생명과 희망입니다. 그가 고난을 겪음으로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의롭게 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의로워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고난의 현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지요. 그가 다른 이들을 위해 고난을 당했던 것처럼, 사람들도 이제 그 고난의 행렬에 연대하고, 동참하도록 이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고난은 허망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폭력의 굴레를 끊어내고, 생명과 평화와 의로움을 새롭게 세우는 희망의 밀알이 되었습니다.
Ⅲ
오늘 우리는 신약의 말씀으로 고린도후서 5장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받아 읽은 말씀에는 바울이 사도로서, 하나님의 종으로서 행한 사역의 기초와 목표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서 “우리가 주님이 두려운 분이심을 알기에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의 믿음과 사역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바울을 위축되게 하거나, 그의 사역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올바르게 서도록 하는 힘이 되었지요. 이 두려움이 바울의 삶과 사역에서 길라잡이이며, 원동력이 된 셈입니다. 또한,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휘어잡았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두려운 마음과 그를 사로잡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득하고자 합니다. 바로, 바울의 삶과 사역의 목표입니다.
바울은 확신하기를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으니, 모든 사람이 죽은 셈이라고 전하지요. 그러면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그 의미를 15절에서 설명합니다. “이제부터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위하여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그분을 위하여 살아가도록 하려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죽으심은 끝이 아니라, 그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가도록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사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설명합니다. 바울은 그분을 위해서, 그분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과 같다고, 옛것이 지나가고 나타난 새것과 같다고 고백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시고, 새로운 직분을 맡기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과 화해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화해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5장을 마무리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반복해서, 밝혀줍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모르시는 분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구절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겪으신 이유와 그 목적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알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의를 믿게 하려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몸과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삶과 사역을 통해 전하는 목표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의가 되는 길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최근의 뇌과학과 신경과학 연구는 종교적 경건 생활이 몸과 마음의 회복에 도움을 주는 것을 밝히고 있다고 했지요. 요즘 유행하는 명상이 그렇듯, 그리스도인에게는 무엇보다 기도생활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새롭게 하는 좋은 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가 명상과 다른 것은 다른 이를 위해 기도하고, 또 누군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런 것처럼, 우리의 생활의 기초와 목표도, 우리의 신앙의 기초와 목표도 당연히, 나만을 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래전 이사야는 고난받는 종을 통해 고난을 외면하던 우리들의 변화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겪은 고난은 허무하게 끝이 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른 이의 고통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연대하고 참여하여, 사람들을 의롭게 하는 변화를 낳았습니다. 바울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기초로 전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해 죽은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것을 권면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란 자기 자신만을 위하지 않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울은 이러한 삶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면서, 이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면서, 또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그 기도의 힘으로 어려움 속에서도 더 단단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활의 기초와 목표도, 우리의 신앙도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할 때, 특별히 다른 이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에 함께 연대하고 참여할 때, 더욱 단단해지지 않을까요? 때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가 함께 기도할 때, 나보다 다른 이를 위할 때,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에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여 주시고, 우리를 단련하여 주시며, 단단하게, 새롭게, 그리고 의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