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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e strayed off onto some of the incidents and situations which have taught me to respect the
danger in the ghettoes. I had been trying to explain how I honestly evaluated my own
qualifications to be worthy of presenting myself as an independent "leader" among black men.
나는 길을 잃고 몇 가지 사건과 상황에 빠져 게토에서 주의해야할 위험을 배웠다. 나는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떻게 내가 솔직하게 나의 자격을 평가하며 흑인들 사이에서 독립적인 “지도자”로서 내 자신을 드러낼 가치가 있는지를.
In the end, I reasoned that the decision already had been made for me. The ghetto masses
already had entrusted me with an image of leadership among them. I knew the ghetto instinctively
extends that trust only to one who had demonstrated that he would never sell them out to the
white man. I not onlyhad no such intention-to sell out was not even in my nature.
마침내, 나는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고 결론지었다. 게토의 군중들은 이미 그들의 지도자의 이미지로 나를 신뢰해왔었다. 게토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백인에게 팔아먹지 않으리란 걸 증명한 사람에게만 그 신뢰를 확장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의도도 없을뿐더러 팔아먹는 것은 천성적으로 안 맞았다.
I felt a challenge to plan, and build, an organization that could help to cure the black man in North
America of the sickness which has kept him under the white man's heel.
The black man in North America was mentally sick in his cooperative, sheeplike acceptance of
the white man's culture.
나는 백인의 발에 밟혀 있는 북미의 흑인들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조직을 계획하고 건설하는 것에 도전의식을 느꼈다. 북미의 흑인은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어서 백인 문화에 대해 협력적이고, 양 같이 수용했다.
The black man in North America was spiritually sick because for centuries he had accepted the
white man's Christianity-which asked the black so-called Christian to expect no true Brotherhood
of Man, but to endure the cruelties of the white so-called Christians. Christianity had made black
men fuzzy, nebulous, confused in their thinking. It had taught the black man to think if he had no
shoes, and was hungry, "we gonna get shoes and milk and honey and fish fries in Heaven."
북미의 흑인은 영혼이 병들어 있다. 왜냐하면 수세기 동안 백인의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소위 흑인 기독교도가 어떤 진실한 형제애도 기대하지 않고 소위 백인 기독교도들의 잔인함을 견디도록 주문받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흑인들의 생각을 흐릿하고, 막연하고, 혼란스럽게 했다. 기독교는 흑인이 신발이 없고 배고프다면 “우리는 천국에서 신발과 우유와 꿀과 생선 튀김을 얻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도록 가르쳐왔다
The black man in North America was economically sick and that was evident in one simple fact:
as a consumer, he got less than his share, and as a producer gave _least_. The black American
today shows us the perfect parasite image-the black tick under the delusion that he is progressing
because he rides on the udder of the fat, three-stomached cow that is white America. For
instance, annually, the black man spends over $3 billion for automobiles, but America contains
hardly any franchised black automobile dealers. For instance, forty per cent of the expensive
imported Scotch whisky consumed in America goes down the throats of the status-sick black
man; but the only black-owned distilleries are in bathtubs, or in the woods somewhere. Or for
instance-a scandalous shame-in New York City, with over a million Negroes, there aren't twenty
black-owned businesses employing over ten people. It's because black men don't own and
control their own community's retail establishments that they can't stabilize their own community.
북미의 흑인은 경제적으로 병들어 있다. 그것은 한 가지 간단한 사실로 명백하다. 소비자로서 흑인은 자신의 몫을 덜 받았다. 그리고 생산자로서 최소한만을 생산했다. 오늘날 미국 흑인은 철저히 기생충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보여진다. 백인 미국이라는 살지고, 세 개의 위가 있는 암소의 젖통에 붙어 있기 때문에 잘나가고 있다는 망상에 빠진 흑인 진드기이다. 실례로, 매년 흑인은 자동차에 30억 달러 이상을 쓴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동차 판매권을 받은 흑인 자동차 딜러는 거의 없다. 미국에서 소비되는 비싼 수입 스카치 위스키의 40%는 허세병에 걸린 흑인의 목구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유일하게 흑인이 소유한 양조장은 어딘가의 욕조나 통에 있다. 또는 다른 예로, 수치스럽지만 백만이 넘는 흑인들이 사는 뉴욕시에서 10인 이상 고용한 흑인 소유 사업장은 20개가 안 된다. 그것은 흑인들이 그들만의 공동체의 소매 사업장을 소유하고 관리하지 않아서 흑인들만의 공동체를 안정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The black man in North America was sickest of all politically. He let the white man divide him into
such foolishness as considering himself a black "Democrat," a black "Republican," a black
"Conservative," or a black "Liberal" . . . when a ten-million black vote bloc could be the deciding
balance of power in American politics, because the white man's vote is almost always evenly
divided. The polls are one place where every black man could fight the black man's cause with
dignity, and with the power and the tools that the white man understands, and respects, and
fears, and cooperates with. Listen, let me tell you something! If a black bloc committee told
Washington's worst "nigger-hater," "We represent ten million votes," why, that "nigger-hater"
would leap up: "Well, how _are_ you? Come on _in_ here!" Why, if the Mississippi black man
voted in a bloc, Eastland would pretend to be more liberal than Jacob Javits-or Eastland would
not survive in his office. Why else is it that racist politicians fight to keep black men from the
polls?
북미의 흑인은 정치적으로는 최악의 병을 앓고 있다. 백인의 투표는 거의 항상 반반으로 나뉘기 때문에 천만의 흑인 투표연합이 미국 정치에서 결정적인 균형추가 될 수 있을 때, 백인이 자신을 나누게 해서 어리석게도 자신을 흑인 “민주당원”, 흑인 “공화당원”, 흑인 “보수주의자”, 또는 흑인 “자유주의자” 등으로 생각했다. 선거는 모든 흑인이 존엄성을 갖고, 백인이 이해하고, 존중하고 두려워하고 협력하는 힘과 수단을 갖고, 흑인의 명분(목적?)을 얻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다. 들어보시오, 말할 것이 있소! 만약 흑인 연합 위원회가 워싱턴의 최악의 “검둥이 혐오자”에게 “우리는 천만의 유권자를 대표한다”고 말한다면, 그러면, 그 “검둥이 혐오자”가 “자, 안녕하신가요? 우리에게 들어오세요!”라며 펄쩍 뛸 것이다. 자, 만약 미시시피 흑인들이 연합해서 투표한다면, 이스트랜드는 제이콥 제비츠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척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스트랜드는 그의 사무실에 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왜 인종주의 정치인들이 흑인들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분투하겠는가?
* Republican US senator from Mississippi
* Republican US senator from New York.
Whenever any group can vote in a bloc, and decide the outcome of elections, and it _fails_ to do
this, then that group is politically sick. Immigrants once made Tammany Hall the most powerful
single force in American politics. In 1880, New York City's first Irish Catholic Mayor was elected
and by 1960 America had its first Irish Catholic President. America's black man, voting as a bloc,
could wield an even more powerful force.
어떤 집단이든 연합해서 투표해서 선거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을 때마다, 실패하면 그 집단은 정치적으로 병이 든다. 예전에 이민자들이 태머니파를 미국 정치에서 가장 강력한 유일 세력으로 만들었다. 1880년 뉴욕 시의 첫 아일랜드계 카톨릭 시장이 선출되었고, 1960년에 미국은 첫 아일랜드계 카톨릭 대통령을 가졌다.(*케네디) 미국의 흑인은 연합해서 투표하면 훨씬 더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1790년대에서 1960년대에 걸쳐 미국에 존재했던 민주당의 파벌
U.S. politics is ruled by special-interest blocs and lobbies. What group has a more urgent special
interest, what group needs a bloc, a lobby, more than the black man? Labor owns one of
Washington's largest non-government buildings-situated where they can literally watch the White
House-and no political move is made that doesn't involve how Labor feels about it. A lobby got
Big Oil its depletion allowance. The farmer, through his lobby, is the most government-subsidized
special-interest group in America today, because a millionfarmers vote, not as Democrats, or
Republicans, liberals, conservatives, but as farmers.
미국 정치는 특수 이익 집단과 로비가 지배한다. 어떤 집단이 더 긴급한 특수 이익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집단이 흑인보다 연합, 로비가 더 필요한가? 노동당은 워싱턴에서 가장 큰 비정부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말 그대로 백악관을 감시할 수 있는 장소에 위치해 있고 노동당의 정서와 관련되지 않으면 어떤 정치적 운동도 만들지 않는다. 석유 회사들은 로비를 통해 감모(減耗) 공제를 얻었다. 농부는 현재 로비를 통해 정부보조를 가장 많이 받는 특수 이익 집단이다. 왜냐하면 백만의 농부들은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로서가 아니라 농부로서 투표하기 때문이다.
* 광산·석유 채굴 등을 행하는 기업에 대한 세금 공제.
Doctors have the best lobby in Washington. Their special-interest influence successfully fights the
Medicare program that's wanted, and needed, by millions of other people. Why, there's a Beet
Growers' Lobby! A Wheat Lobby! A Cattle Lobby! A China Lobby! Little countries no one ever
heard of have their Washington lobbies, representing their special interests.
의사들은 워싱턴에서 가장 로비를 잘한다. 그들의 특수 이익 영향력은 수백만의 다른 사람들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건강보험제도와 성공적으로 싸웠다. 왜 비트 재배자의 압력단체가 있는가? 밀 압력단체! 소 압력단체! 중국 압력단체! 들어본 적 없는 작은 나라도 워싱턴에 그들의 특수 이익을 대변하는 압력단체가 있다.
The government has departments to deal with the special-interest groups that make themselves
heard and felt. A Department of Agriculture cares for the fanners' needs. There is a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There is a Department of the Interior-in which the Indians are
included. Is the farmer, the doctor, the Indian, the greatest problem in America today? No-it is the
black man! There ought to be a Pentagon-sized Washington department dealing with every
segment of the black man's problems.
정부에는 자신들의 의견을 듣게 하고 공감하게 하는 특수 이익집단들을 관리하는 부서가 있다. 농무부는 농부들의 요구를 관리한다. 보건교육복지부가 있다. 내무부에서는 인디언 문제를 다룬다. 농부, 의사, 인디언이 현재 미국에서 가장 큰 문제인가? 아니다 문제는 흑인이다. 흑인 문제의 모든 분야를 관리하는 국방부 규모의 백악관 부서가 있어야 한다.
Twenty-two million black men! They have given America four hundred years of toil; they have bled
and died in every battle since the Revolution; they were in America before the Pilgrims, and long
before the mass immigrations-and they are still today at the bottom of everything!
2천2백만의 흑인! 그들은 4백년간의 노고를 미국에 제공해왔다. 그들은 독립전쟁 이후 모든 전쟁에서 피흘리고 죽었다. 그들은 최초 이주자들 이전부터, 그리고 대량 이민 오래 전에부터 미국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모든 면에서 밑바닥에 있다.
Why, twenty-two million black people should tomorrow give a dollar apiece to build a skyscraper
lobby building in Washington, D.C. Every morning, every legislator should receive a
communication about what the black man in America expects and wants and needs. The
demanding voice of the black lobby should be in the ears of every legislator who votes on any
issue.
이런, 2천2백만 흑인 인민은 내일 워싱턴 DC에 고층 압력단체 마천루를 지을 때 마다 1달러를 주어야 한다. 매일 아침, 모든 입법자는 미국의 흑인들이 기대하고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받아야 한다. 흑인 압력단체의 요구하는 목소리는 어떤 사안에 투표하는 모든 입법자들의 귀에 들어가야 한다.
The cornerstones of this country's operation are economic and political strength and power. The
black man doesn't have the economic strength-and it will take time for him to build it. But right
now the American black man has the political strength and power to change his destiny overnight.
이 나라의 운영의 초석들은 경제적, 정치적 능력과 권력이다. 흑인은 경제적으로 능력이 없다. 그리고 그 능력을 쌓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바로 지금 미 흑인은 하룻밤에 자신의 운명을 바꿀 정치적 능력과 권력을 갖고 있다.
It was a big order-the organization I was creating in my mind, one which would help to challenge
the American black man to gain his human rights, and to cure his mental, spiritual, economic, and
political sicknesses. But if you ever intend to do anything worthwhile, you have to start with a
worthwhile plan.
커다란 주문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창조하고 있었던, 인권을 얻어내고 정신적, 영혼적, 경제적, 정치적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미 흑인이 도전하도록 돕는 조직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뭔가 가치 있는 일을 하려한다면, 가치 있는 계획을 갖고 시작해야만 한다.
Substantially, as I saw it, the organization I hoped to build would differ from the Nation of Islam in
that it would embrace all faiths of black men, and it would carry into practice what the Nation of
Islam had only preached.
실질적으로는, 내가 본 대로, 내가 만들고자 했던 조직은 이슬람 국가와는 다를 것이다. 흑인들의 모든 믿음을 포용하고 이슬람 국가만이 설교했던 것을 실천에 옮기는 데 있어서 말이다.
Rumors were swirling, particularly in East Coast cities-what was I going to do? Well, the first thing
I was going to have to do was to attract far more willing heads and hands than my own. Each day,
more militant, action brothers who had been with me in Mosque Seven announced their break
from the Nation of Islam to come with me. And each day, I learned, in one or another way, of more
support from non-Muslim Negroes, including a surprising lot of the "middle" and "upper class"
black bourgeoisie, who were sick of the status-symbol charade. There was a growing clamor:
"When are you going to call a meeting, to get organized?"
소문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특히 동부 해안 도시들에서 그랬다. 나는 무엇을 하려고 했었는가? 자, 내가 해야만 했던 첫 번째 일은 나보다 훨씬 더 의지가 있는 머리와 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매일, 더 호전적인, 모스크 세븐에서 나와 함께 해왔던 행동 형제들이 나와 함께 하기 위해 이슬람국가 활동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매일, 어떤 식으로든, 비 무슬림 흑인들로부터 더 많은 지원이 들려왔다. 놀랍게도 신분상징 가식의 병에 걸린 많은 “중산층”과 “상류층” 흑인 부르주와들이 포함돼있었다. 아우성이 점점 더 커졌다 “언제 회의를 소집할 거냐? 언제 조직이 되느냐?”
To hold a first meeting, I arranged to rent the Carver Ballroom of the Hotel Theresa, which is at
the corner of 125th Street and Seventh Avenue, which might be called one of Harlem's fuse-box
locations.
첫 회의를 열기 위해, 나는 테레사 호텔의 카버 무도장을 빌리기로 했다. 호텔은 125번로와 7번가의 모퉁이에 있었는데 할렘의 두꺼비집?(거점?)으로 불리기도 했다.
The Amsterdam News_ reported the planned meeting and many readers inferred that we were
establishing our beginning mosque in the Theresa. Telegrams and letters and telephone calls
came to the hotel for me, from across the country. Their general tone was that this was a move
that people had waited for. People I'd never heard of expressed confidence in me in moving ways.
Numerous people said that the Nation of Islam's stringent moral restrictions had repelled them-
and they wanted to join me.
암스테르담 뉴스는 회의 계획을 보도했고 많은 독자들이 우리가 테레사에 최초 모스크를 설립 중이라고 추측했다. 전국에서 전보와 편지와 전화가 내가 있는 호텔로 답지했다. 그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기다려왔던 운동이라는 것이었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운동 방식에 있어서 내게 신뢰를 표했다. 수많은 사람들은 이슬람국가의 엄격한 도덕적 제한이 자신들을 쫓아냈고, 나와 함께 하길 원한다고 했다.
A doctor who owned a small hospital telephoned long-distance to join. Many others sent
contributions-even before our policies had been publicly stated. Muslims wrote from other cities
that they would join me, their remarks being generally along the lines that "Islam is too inactive" . .
."The Nation is moving too slow."
Astonishing numbers of white people called, and wrote, offering contributions, or asking could
_they_join? The answer was, no, they couldn't join; our membership was all black-but if their
consciences dictated, they could financially help our constructive approach to America's race
problems.
작은 병원을 소유한 한 의사가 장거리 전화를 걸어 가입했다. 많은 다른 사람들이 기부금을 보내왔다. 심지어 우리의 정책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이었다. 다른 도시의 무슬림들은 편지를 써서 가입했다. 그들의 발언이 따르고 있는 큰 줄기는 “이슬람은 너무 비활동적이다.” “이슬람국가는 너무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였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백인들이 전화와 편지를 했고, 기부금을 내거나 그들이 가입할 수 있는지 물었다. 대답은 아니오 였다, 그들은 가입할 수 없었다. 우리의 회원은 모두 흑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양심이 지배한다면, 미국 인종 문제에 대한 우리의 건설적인 접근을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다.
Speaking-engagement requests came in-twenty-two of them in one particular Monday morning's
mail. It was startling to me that an unusual number of the requests came from groups of white
Christian ministers.
I called a press conference. The microphones stuck up before me. The flashbulbs popped. The
reporters, men and women, white and black, representing media that reached around the world,
sat looking at me with their pencils and open notebooks.
어느 월요일 아침의 우편에 그들 중 22건의 연설 약속 요청이 왔다. 백인 기독교 목사 단체로부터 온 비정상적인 요청 수에 깜짝 놀랐다. 나는 기자회견을 요청했다. 마이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매체를 대표하는 남녀 흑백 기자들이 연필과 수첩을 들고 앉아서 나를 지켜보았다.
I made the announcement: "I am going to organize and head a new mosque in New York City
known as the Muslim Mosque, Inc. This will give us a religious base, and the spiritual force
necessary to rid our people of the vices that destroy the moral fiber of our community.
"Muslim Mosque, Inc. will have its temporary headquarters in the Hotel Theresa in Harlem. It will
be the working base for an action program designed to eliminate the political oppression, the
economic exploitation, and the social degradation suffered daily by twenty-two million Afro-
Americans."
나는 발표했다. “나는 뉴욕시에 무슬림 모스크 사로 알려진 새 모스크를 조직하고 이끌 것입니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공동체의 도덕성을 파괴하는 악인들을 제거하는데 필요한 종교적 기반과 영혼의 힘을 얻을 것입니다. ”무슬림 모스크 사는 할렘의 테레사 호텔에 임시 본부를 둘 것입니다. 본부는 2천2백만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매일같이 고통받는 정치적 압박, 경제적 착취, 사회적 하락을 없애기 위해 설계된 활동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근거지가 될 것입니다."
Then the reporters began firing questions at me.
It was not all as simple as it may sound. I went few places without constant awareness that any
number of my former brothers felt they would make heroes of themselves in the Nation of Islam if
they killed me. I knew how Elijah Muhammad's followers thought; I had taught so many of them to
think. I knew that no one would kill you quicker than a Muslim if he felt that's what Allah wanted
him to do.
그러고나서 기자들이 내게 질문공세를 시작했다.
말로 듣는 것처럼 간단하진 않았다. 나는 계속 경계를 하며 다녔다. 이전의 형제들은 나를 죽인다면 이슬람국가에서 영웅이 된다고 생각했다. 엘리야 무하마드의 추종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 다수에게 생각하라고 가르쳐왔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만약 알라가 원한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도 무슬림보다 더 빠르게 죽이진 못할 것이다.
There was one further major preparation that I knew I needed. I'd had it in my mind for a long
time-as a servant of Allah. But it would require money that I didn't have.
I took a plane to Boston. I was turning again to my sister Ella. Though at times I'd made Ella
angry at me, beneath it all, since I had first come to her as a teen-aged hick from Michigan, Ella
had never once really wavered from my corner.
"Ella," I said, "I want to make the pilgrimage to Mecca."
Ella said, "How much do you need?"
더 중요한 준비할 것이 있었다. 그게 필요하단 걸 알고 있었다. 나는 알라의 종으로서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다. 그러나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이 들었다. 나는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에 갔다. 나는 다시 엘라누나에게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종종 누나를 화나게 만들었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내가 미시간 촌뜨기로 10대 때 그녀에게 처음 간 이래로, 엘라는 한 번도 나의 곤궁함에 주저한 적이 없었다?. “누나, 메카로 순례를 가고 싶어요.” “얼마나 필요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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